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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새 인간성, 새창조, 새 생명 (고전 15: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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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인간성, 새창조, 새 생명 (고전 15:20~26) 

죽음의 어두운 장막이 걷히고 영광스럽고 감격에 찬 생명의 새아침을 맞이하였습니다. 

예수의 부활을 되새기는 감격의 2008년 부활절 새아침! 부활 생명의 은총이 성도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생명을 위협하는 무서운 힘은 죽음이라는 엄청난 세력입니다. 

죽음 앞에 인간 존재는 속수무책일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죽음을 사망권세라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죽음을 정복하고 삼킬 수 있는 더 큰 위력은 부활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사건은 사망권세를 이기고 승리하심을 증명한 사건입니다.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한 시인이 다음과 같은 시 한편을 남겼습니다. "예수께서 죽으셨다! 그 때 사람들이 소중히 여기던 것이 그와 더불어 망하고 말았다 희망은 무덤에서 그의 옆에 누웠고 사랑은 해골처럼 싸늘하게 식었다. 아름다운 것들 모두가 그의 죽음과 함께 죽었다. 예수께서 부활하셨다! 그 때 희망의 빛이 그와 더불어 살아났다. 사람들은 말하였다. '그리스도가 아니라 바로 죽음이 어젯밤에 죽었다'라고 이리하여 기쁨과 진리와 온갖 덕들이 그의 부활과 더불어 다시 살아났다" 문학적 기교와 수사의 관점에서는 별로 화려해 보이지는 않지만 이 시는 예수님의 부활의 의미와 세상에 준 파장을 매우 축약적으로 잘 묘사해 주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인생을 이렇게 표현한 사람이 있습니다. “인생은 결국 절망으로 끝나는 ‘희망과 절망의 숨바꼭질’이다.” 우렁찬 울음소리와 함께 희망을 안고 태어난 인생이지만 살아가는 가운데 불쑥 불쑥 어려움과 절망을 만나게 됩니다. 그럴 때마다 “이 어려운 고비를 넘기고 나면 괜찮아지겠지...” 하는 희망으로 견뎌내곤 합니다. 그러나 세월이 갈수록 희망은 사라지고, 갈수록 커지는 절망이 인생의 한 가운데를 가로막고 우뚝 섭니다. 노쇠함, 무서운 질병, 예기지 않은 치명적인 사고, 그리고 마지막에는 ‘죽음’이란 이름의 ‘절대 절망’ 앞에 무릎을 꿇고 맙니다. 생로병사! 이것이 바로 모든 사람의 인생 싸이클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인생이 이것으로 끝나버린다면 얼마나 비참하고 허망합니까? 결코 우리의 인생이 이런 식으로 끝나서는 안됩니다. 다행히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죽음이란 ‘절대 절망’에서 ‘절대 희망’의 출구로 나아가는 새로운 인생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신앙하며 살아가는 인생길입니다. 이 시간 다시 한 번 말씀을 통해서 그 귀한 길을 재발견함으로 영원한 절대 희망의 인생길을 걸어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어느 여인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저에게 무슨 어려운 문제가 생길 때 저는 3일 후에 일어났던 일을 생각하곤 해요. 부활절 즉, 주님이 다시 살아나신 날을 말이에요. 어떤 일이 잘못되어 갈 때 저는 3일 동안 기다리는 법을 배웠어요. 3일 후 상황은 훨씬 좋아지거든요” 그녀의 말은 예수의 부활을 믿는 우리 그리스인들에게 어려운 문제가 생길 때마다 커다란 위로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으로 하여금 내 문제를 해결하실 시간을 드립시다. 3일을 기다림으로...

옛 삶의 구조는 사라지다

오늘 본문 말씀을 중심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이 우리에게 과연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 것인지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요한복음 20장의 말씀에는 예수께서 무덤에 계신지 사흘째 되던 날 이른 아침에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의 무덤을 찾아 갔다가 부활의 예수님을 만나는 장면이 보도되고 있습니다. 처음에 마리아는 돌문이 옮겨지고 무덤이 비어있는 것을 보고 예수님의 시신이 실종된 줄로 알았습니다. '내가 부활할 것이다'라는 예수님의 약속을 기억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 현장에서 마리아는 크게 낙심하여 슬퍼 울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슬픔과 절망의 오열은 첫날 새벽의 무덤 분위기를 침울하게 만들었습니다. 마리아는 빈 무덤과 천사들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누군가가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갔을 것이라는 불안이 그 마음속에 가득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조용하고 부드러운 음성으로 "마리아야" 하고 그녀를 부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한마디의 부르심을 통해서 부활하신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시고, 마리아의 가려지고 닫혀있던 눈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러자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생전에 자신을 부르시던 그 음성과 억양을 기억해 내고 "라부니"하고 외마디로 부르짖으며 예수님께로 달려갔습니다. 그 순간 마리아의 마음속에 있던 슬픔과 절망은 봄눈 녹듯 사라지고 대신에 이루 형용할 수 없는 기쁨과 감격이 그녀의 마음속을 채웠습니다. 눈이 뜨인 그녀에게 새로운 세계가 펼쳐진 것입니다. 마리아의 영적 세계는 예수님께서 그 이름을 불러주시기 전까지는 닫혀진 채로 있었습니다. 이제 그녀에게는 옛 삶의 구조는 사라지고 부활의 새날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마리아는 우선 제자들에게 자기가 다신 사신 예수님을 만났다는 사실과 멀지 않아 곧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게 될 것이라고 증거하였습니다. 이 증언은 예수님의 부활을 확정적으로 선포한 인간의 첫 음성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새로운 생명세계에 이르는 관문

또한 오늘 본문 말씀인 고린도전서 15장에서는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이해를 사도 바울의 신학적 추론을 통해 전개, 입증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의미를 풀이하면서 예수님은 죽은 자의 부활의 첫 열매가 되었다고 설명하였습니다. 인류의 처음인 아담은 그 자신의 죄와 타락으로 이 세상에 사망을 가져왔지만 그리스도는 당신의 죽음으로 그 죄 값을 치루어 인간에게 부활의 새 생명을 안겨주었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다시 사신 것은 부활의 첫 열매로서 몸을 입은 인간은 비록 죽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살게 되었음을 보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그리스도인에게 부활의 시초요, 보증이며 새로운 생명세계에 이르는 관문과도 같은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심판 때에 "마지막으로 멸망 받을 원수는 죽음"이라고 선언하였습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마지막 날에 "모든 통치와 권위와 권력" 즉,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탄의 권세와 불신의 세속적 권력을 멸망시키고 나서 궁극적으로 죽음 자체를 멸하시게 될 것입니다. 사망은 인간의 죄로 말미암은 것이고 그것은 곧 죄의 권능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죽음이 멸망당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어떤 인격체가 생명을 잃는 것이라기보다는 그 영향력과 효능을 잃게 됨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들은 예수님의 부활의 역사적 사실들을 드러내는 한편 부활의 효능과 결과로서 그리스도인들이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확보하게 되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메시야로 알려진 한 인간인 예수가 2000 년 전에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제 3자적인 사건으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오늘을 사는 인간의 구원과 생명에 직접적으로 관여하는 우리 자신의 사건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소식은 하나님의 존재와 그리스도의 신성을 증거할 뿐 아니라 인간의 운명을 가름하는 것입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부활의 소식은 인간의 죄에 대한 심판이요 불신자들에게는 영원한 저주의 선언이 되는 것이지만 그리스도인에게는 부활은 사죄와 구원,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보증해 주는 기쁜 소식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기독교 신앙의 근거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 사건은 기독교가 증거하는 모든 것들을 지켜주는 튼튼한 방벽입니다. 부활은 하나의 역사적 토대요 방벽으로서 기독교의 모든 교리와 교훈은 예수님의 부활사건에 의해서 지탱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께서 인간의 죄를 사하고 구원해 주시기 위해서 당신의 생명으로 죄의 값을 치루셨지만 그 분 자신이 파산하고 사멸해 버리지 않으셨다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오직 한분이신 예수님께서 부활을 통하여 사탄과 죽음과 악의 세력을 정복하셨다는 것과 그분이 새 인류의 머리가 되시며 우리는 그의 몸이요 지체로서, 그리스도의 미래에 참여하게 될 것을 믿고 소망합니다. 

우리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구속받은 인류의 운명을 예시할 수 있기에 부활신앙은 기독교적 낙관론의 움직일 수 없는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한 번 더 강조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분에게 끝나버린 일과성 기적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 부활의 사건이 오늘의 우리들의 심령과 삶 속에 재현될 것을 믿습니다. 우리들은 예수님과 함께, 또한 그를 통하여 여러 가지 의미와 차원에서 부활을 소망합니다. 이 부활의 소망은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 가운데 만물이 새롭게 창조될 것을 미리 아는 것입니다. 이러한 소망은 인간의 역사를 속량하는 추진력이 됩니다. 

부활신앙의 파급은 인간성의 미래를 밝게 열어 놓는다. 

부활의 소망이 어떻게 역사를 움직일 수 있습니까? 그것은 부활을 믿고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고 그 명령에 순종하여 구원의 복음을 충실히 전하는 선교에 전념할 때 가능해질 것입니다. 사랑과 순종, 고난과 인내 가운데 실현되는 부활신앙의 파급은 인간과 인간성의 미래를 밝게 열어 놓을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껏 본 일이 없는 새로운 존재, 새로운 세계가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에 그 제자 베드로를 만났을 때 "네가 이제는 내 부활을 믿느냐"는 말을 전혀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가 이 모든 것보다도 정말로 더 날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우리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대한다는 것은 결국 그 사랑을 깨닫고 진심으로 그분을 모든 것보다 사랑하는 데에 부활의 참뜻이 있는 것입니다. 죽음이 세상에 들어온 것은 하나님 때문이 아니라 사람 때문이었습니다. 사랑의 관계가 깨어지고 욕심이 인간을 지배하게 된 때에 사랑이 떠나간 자리에 죽음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들어온 것입니다. 구약의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는 바로 그 이야기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런 죽음과 죄가 지배하는 세상 속에 예수님이 들어오셨습니다. 그분이 참사랑인 아버지의 아들인 것은 그가 십자가의 죽음으로 입증을 하셨습니다. 그 말씀이 요한일서 3장 16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참 사랑 앞에 죽음이 무릎을 꿇는다. 

예수님은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해낼 수 없는 참 사랑을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마지막의 피 한 방울 까지 쏟으심으로써 나타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참된 사랑은 결코 죽음 앞에 무릎을 꿇지 않습니다. 결국은 참 사랑 앞에 죽음이 무릎을 꿇고 마는 것입니다. 죽음보다 더 강한 힘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 안에 나타난 참사랑을 죽음을 정복하고 부활로 나타낸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인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분 안에 나타났던 그 사랑은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 안에 현재 들어와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부활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여기에서 '나는 이런 저런 이유로 부활을 믿는다고 하거나 이러이러하니까 아직도 의심스럽다'라고 하는 것은 다 쓸 데 없는 이야기입니다. 

오직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향해 "네가 이 모든 것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실 때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라고 대답했던 베드로의 고백이 이 자리에서 예배드리는 우리가 해야 될 신앙고백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부활이 하나님과 인간의 막힌 죄의 담을 허물어 주신 것처럼 우리 사이의 모든 장벽에 화해가 이루어지고 더 나아가서 남북통일의 그 날까지 꽃 피워지기를 소원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고난의 터널과 능선을 지나서 부활의 꽃으로 이어졌듯이 이 나라의 정치에도 국민들에게 희망이 넘치고 사회 전반에도 밝은 서광이 빛나기를 기대합니다. 교회도 사회를 이끄는 새 힘이 솟구쳐 나오는 그 날이 오기를 염원합니다. 그리하여 교회도, 국가도 남을 배려하는데 존재의 보람을 느껴 돕고 선교하는 부활의 모습이기를 바랍니다.

내가 살아야 교회가 산다 

어떤 목회자의 칼럼에서 본 자료입니다. 각종 세미나에서 "##가 살아야 교회가 산다"라는 말을 흔히 듣는데 "목회자가 살아야 교회가 산다", "장로가 살아야 교회가 산다", "사모가 살아야 교회가 산다", "청년이 살아야 교회가 산다", "교회학교가 살아야 교회가 산다", "찬송이 살아야 교회가 산다" 등입니다. 이런 모든 살아야 할 것들을 종합하면 "모두가 살아야 교회가 산다"라는 말이 됩니다. 교회는 어느 한 지체가 죽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왜 화두가 "교회가 산다"일까요? 그런데 이 어휘가 안고 있는 더 중요한 과제는 누구가 살아야 하는가 라는 것입니다. 자칫 인간의 과오는 다른 사람이 살아야 교회가 산다고 하면서 자신은 정작 죽어 있는 오류를 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이 생기를 불어넣어 생령이 되게 하신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살아있는 영이며, 죽은 영이 아닙니다. 사람은 살아있는 육도 아니며 더구나 죽어 있는 육은 아닙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람이란 살아있을 때만 사람이란 뜻입니다. 죽으면 이미 사람이 아닙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살아있어야 교회입니다. 죽은 교회는 이미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는 생명의 말씀이 그 기초이기에 살아있어야 합니다. 미래에도 교회는 살아야 합니다. 미래에도 교회는 살 것입니다. 생명의 말씀을 가진 교회는 그 생명이 있으므로 죽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미래를 알고 교회의 미래에 대한 진정한 책임적 그리스도인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교회는 살아 있다. 내가 살아 있는 동안 교회는 결코 죽지 않는다. 그리고 내가 살아야 교회가 산다". 부활절을 맞이하여 주님의 부활과 함께 교회의 생명성을 재확인하는 계기가 될 수 있기를 바라며 새 창조의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서 새로운 인간성을 회복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참된 생명과 승리와 향기와 기쁨

옛날 중세 시대에 어떤 수도사가 성지 순례를 갔습니다. 갈보리 산 근처를 돌아다니던 중 뜻밖에 이 수도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에 쓰셨던 가시 면류관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그 가시 면류관은 보기에도 험상스러운 가시로 되었고 피가 묻어 있었습니다. 볼품은 없지만은 주님께서 쓰셨던 가시 면류관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에 지극한 보배로 여겨져 그 면류관을 고이 자기 나라까지 가져갔다고 합니다. 그리고 나서 자기가 있는 수도원 예배당의 강대상 위에다 놓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얼마 후 부활절 아침을 맞아 수도사들이 일찍 예배드리기 위해서 그 예배당 문을 열었더니 온 예배당이 아름다운 향기로 가득 차 있더랍니다. 이게 웬 일이냐고 사방을 둘러보니 그 험상스러운 면류관의 가시에 아름다운 장미꽃이 많이 피었더랍니다. 물론 얘기에 불과하지만 여기에는 뜻이 있습니다. 부활주일은 생명을 의미합니다. 승리를 의미합니다. 향기를 의미합니다. 기쁨을 의미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믿고 그를 영접하는 이에게는 새로운 생명이 생깁니다. 새로운 능력이 생깁니다. 향기가 나는 생활로 변합니다. 기쁨이 충만하여지는 것입니다. 이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 이 부활의 주님을 영접함으로 참된 생명과 승리와 향기와 기쁨을 얻어야겠습니다. 

새로운 인간성, 새 창조, 새 생명

그러나 우리가 이런 고백을 할 때 그럼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네가 나를 사랑한다는 마음이 진실이라면 이 양들을 먹여라. 그것이 날 사랑한다는 증거다. 그렇지 않다면 날 사랑한다는 것은 거짓말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복음을 위탁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선포하는 말씀과 몸으로 실행하는 섬김은 이 땅에서 새로운 인간성, 새 창조, 새 생명이 움터 나오도록 할 것입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사신 그리스도의 부활"이라 부르는 모든 것의 대전환을 믿고 그에 응답함으로써 우리는 바로 지금부터 소망의 새로운 삶을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부활절 기도/최효섭 목사님의 부활절 기도를 들려 드리겠습니다. 

그리스도여 당신은 오늘 나의 마음속에서 다시 사셨습니다.하나님의 아들이시여 당신은 오늘 나의 관을 깨뜨리고 나에게 다시 생명을 주셨습니다.무덤 속에 가득 찬 광명과 향기, 그것은 오늘 나의 영혼에 차는 소망의 기쁨입니다.주여, 이 새봄에 나의 마음 밭에 오소서.당신이 오시면 사람이 살고 당신이 오시면 어제의 슬픔이 가고 당신이 오시면 저 밝은 하늘 열리고 당신이 오시면 미움도 사라지고 당신이 오시면 마음과 마음 다시 만나고 당신이 오셔야 사람다운 사람, 남편 다운 남편, 아내다운 아내, 자식다운 자식이 되겠습니다.

다시 사신 그리스도여 넘어져도 얼른 일어나게 하시고 먼지가 묻어도 빨리 털어내게 하시고 미움을 품고 잠자리에 들지 않게 하소서. 번데기가 나비가 되듯 나도 부활하게 하소서.굼벵이가 매미가 되듯 나도 부활하게 하소서.말랐던 뿌리에서 백합의 미소가 피듯 나도 부활하게 하소서.어두운 태에서 생명의 울음이 터지듯 나도 부활하게 하소서.사나운 소리가 들려도 너무 겁내지 말게 하시며 꾸지람을 들어도 너무 낙심하지 않게 하시며 바람이 분다고 아무데로나 끌려 다니지 않게 하시며 햇볕이 뜨겁다고 그늘만 찾지 않게 하소서.갈 길이 멀다고 걱정만 하지 말게 하시며 지나온 길 되돌아보지 않게 하시고 어둠이 와도 외로워하지 않게 하소서.몽치가 다가올 때도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시던 주님, 배반하는 제자에게도 위로의 시선을 던지시던 주님, 침 뱉는 자들도 용서하시던 주님, 십자가위에서도 어머니를 생각하시던 주님, 오 주님! 나도 부활하게 하소서.내 가슴이 푸른 하늘이 되게 하시고 내 생각이 넓은 하늘 되게 하시며 내 영혼을 봄 동산으로 만들어 주소서.

다시 사신 그리스도시여, 나의 무덤을 헤치고 새롭게 태어날 힘을 주소서.하루하루를 기쁨으로 맞이하게 하시고 미래를 설레는 흥분으로 기다리게 하시며 보이지 않아도 믿음으로 꿈꾸게 하시며 알지 못해도 소망으로 전진하게 하소서. 다시 사신 그리스도시여, 이 봄, 이 부활절에 나도 새 출발하게 하소서.‘두려워 말라󰡑(마태복음 14:27) 󰡐염려하지 말라󰡑(마태복음 6:34)하신 주님을 온전히 믿고 오늘 새 출발하게 하소서.주님은 나의 선장이시오 진정한 후원자, 주님은 나의 모든 문제의 해답자시오니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 품을 떠나지 않게 하소서. 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최후까지 나를 사랑해 주시는 주님, 나도 오늘 부활하게 하소서.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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