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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나사로의 부활과 예수님의 부활 (요 11:2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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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사로의 부활과 예수님의 부활 (요 11:25~27)

세상 사람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입니다. 그런데 왜 그리스도인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일까요? 죽음을 보는 시각이 세상 사람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죽음이 인생의 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은 죽음은 잠자는 것과 같고 영원으로 들어가는 통로에 불과하다고 믿습니다. 

운전을 하다가 터널을 들어갈 때 아무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요? 터널을 조금 지나면 다시 밝은 세상이 전개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죽음은 하늘나라 들어가는 통로입니다. 마치 번데기가 탈을 벗고 나비가 되듯이 전혀 다른 모양으로 다른 세상을 사는 것입니다.  


아프리카 우간다라고 하는 나라에 여러분도 들어보신 <이디 아민>이라고 하는 대통령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엄청난 독재자였습니다. 그래서 온 국민이 꽤 오랫동안 고생을 했습니다. 당시는 아민 대통령을 반대하는 무리면 무조건 죽어버리던 때였습니다. 그런데 이 나라에서 가장 큰 교회를 담임하고 계시던 <키파샘 판디>라고 하는 목사님이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암살단이 부활절 아침에 교회에 막 쳐들어 왔습니다. 목사님을 죽이려고 그 분에게 총을 들이댔습니다. 

그러자 목사님이 싱글싱글 웃으시면서 “그러시죠 뭐. 하지만 내가 이제 잠깐 기도하겠습니다. 그 다음에 죽이세요.” 마지막이니 그러라고 했답니다. 목사님은 조용히 기도를 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하시던 기도 그대로 했습니다. “여기 이 사람들은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불쌍히 여기시고 이들의 죄를 용서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아버지여 내영혼을 받아 주옵소서” 이렇게 간절히 기도하고 "아멘"했더니 암살하려던 사람들도 아멘 하고는 “기도해 줘서 고맙습니다.”하고는 그냥 가더랍니다. 

나중에 사람들이 물었답니다. 두렵지 않았습니까? 그때 그 목사님이 하신 말씀은 “주님이 부활하셨는데 왜 두려워 하냐? 예수님의 부활을 확신한다면 죽음은 아무런 문제가 안된다.” 라고 했답니다. 

그러나 모든 그리스도인이 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의 확신이 있는 사람들조차도 죽음은 무서운 존재입니다. 그러나 그 두려움을 부활신앙으로 이겨낼 때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은 우리 주님 부활하신 것을 기념하는 부활절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당할 수밖에 없었던 사망, 사단이 가장 강력하게 사용하던 사망권세 아래서 신음하던 우리 인간을 해방시키기 위해 십자가를 지신 주님은 장사된지 3일 만에 새몸을 입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할렐루야!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세상은 그 부활 사건을 믿지 않지만 그러나 우리 주님은 실제로 부활하셨습니다. 

부활이란 단어가 무엇입니까? 한문으로는 復活이라 씁니다. 다시 復 살 活 다시 산다는 뜻입니다. 영어로는 The Resurrection 이라 씁니다. 다시 일어난다는 뜻입니다. 

죽어서 아무것도 못하던 분이 다시 살아난다는 것은 현대 과학으로는 불가능입니다. 그러나 천지를 창조하신 예수님,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아주 간단한 사건입니다.  

그러기에 부활절을 맞이할 때 마다 우리는 우리 신앙을 점검해야 합니다. 따라서 하세요. 

“/생명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고/ 죽음은 /인생의 끝이 아니다./” 할렐루야 

영생이 분명하게 실존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도 예수님처럼 새몸으로 부활합니다. 
이 믿음을 재정립하고 확신하는 성도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우리가 봉독한 말씀을 다시 보세요. 
2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여러분 정말 믿습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주님 오실 때 경험하게 될 부활은 어떤 부활일까요? 
오늘 본문의 말씀은 예수님이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그 누이 마르다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했던 나사로가 병들었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예수님이 일부러 나사로에게 속히 가지 않았습니다. 결국 나사로는 죽었습니다. 그리고는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후에 예수님이 “내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다, 깨우러 가자” 하고는 죽은 지 나흘 만에 도착했습니다. 아마도 마르다, 마리아 두 자매가 매우 서운했던 가봅니다. 

21절을 보세요.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빨리 오셨다면 안죽었을텐데 왜 이렇게 늦게 오셨냐는 원망이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 마르다에게 네 오라비 다시 산다고 하십니다. 
23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그러자 마르다는 대답하기를 24절에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줄을 내가 아나이다.”라고 답합니다. 

이 말은 마르다에게도 부활 신앙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속에는 “그러나 지금은 안됩니다.”라는 뜻도 담긴 것입니다.  

그때 주님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라고 하십니다. 

결국 주님은 죽은지가 나흘이 되어 썩어 냄새가 나는 나사로를 살리셨습니다. 할렐루야! 

왜 살리셨을까요? 제자들이 예수님을 생명의 주인인 메시아로 믿게 하려고 살리셨다고 봐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을 믿는 자에게 죽음은 인생에게 큰 문제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다시 산다는 것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믿습니까? 

그렇다면 나사로의 부활과 예수님의 부활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예수님의 부활과 나사로의 부활은 차원이 다릅니다.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1. 예수님의 부활은 완전한 부활이나 나사로의 부활은 불완전한 부활입니다. 

나사로는 우리 주님이 다시 살리셨으나 그 몸은 그가 죽기 전에 갖고 있던 그 육체로의 부활입니다. 그러기에 이 부활은 생명을 일시적으로 연장하는 부활입니다. 일종의 불완전한 부활입니다. 

아마도 나사로가 결혼을 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30대 이전의 나이라고 보여 집니다. 그는 다시 살았지만 이 땅에서 4~50년 더 살다가 다시 죽었습니다. 그러기에 엄밀히 말하면 그의 부활은 참 부활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의 부활은 다릅니다. 우리 예수님은 다시 죽을 필요가 없는 영생의 부활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죽을 필요가 없는 영원히 사시는 완전한 부활입니다. 

성도여러분!  
나사로가 무덤에서 나와서 예수님께 한 첫마디는 무엇일까요? 

“감사합니다?”,  “왜 이제 오셨나요?” 글쎄요. 그런데 제가 보기에는 아마도 별로 기뻐하거나 좋아하지 않고 원망어린 자세였을 것 같습니다. 

“아니 왜 나를 불러 내셨나요? 나 지금 하나님과 함께 재미있게 지내는데 어떻게 이 세상을 또 살라고 불러내셨나요?” 했을 것 같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육체는 불완전합니다. 그리고 우리 육체는 한계가 많습니다. 
작은 바이러스 하나를 제대로 이기지 못합니다. 그리고 조금만 부닥치면 깨지고 넘어지면 깨지고 부러지고 합니다. 그러면서도 악하기는 어찌 그리 악한지... 세상 만물중에 가장 무서운 것이 인간이지 않습니까? 그런 몸으로 이 험한 세상사는 것이 힘이 듭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그것이 전부라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새몸으로 부활하셔서 영생함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2. 예수님의 부활은 강하고 신비한 몸의 부활입니다. 

나사로는 혈과 육의 몸을 입고 부활했기에 노화되어 다시 죽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의 몸은 신비스러운 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성경은 그 몸을 새 몸으로 부활 하셨다고 하셨습니다. 

그 새 몸은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 입고 있던 그 몸이 아닙니다. 그 몸은 공간과 시간을 초월 할 수 있는 신비로운 몸입니다. 

예수님이 입으신 몸은 어떤 몸일까요? 

1)순간적으로 공간 이동이 가능한 몸입니다. 

제자들이 주님이 죽으신 후 모여 있을 때 두려워 문을 꼭꼭 걸어 잠그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들 가운데 갑자기 나타나셨습니다. 순간 이동입니다. 

요한복음20:19을 보세요. 
19 이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2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또 엠마오로 내려가던 제자들에게도 나타나셔서 대화를 나누시다가 성경을 가르쳐서 그들의 눈이 열리게 하시고는 순간적으로 사라지셨습니다. 

누가복음 24장30절을 보세요. 
30 저희와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매 
31 저희 눈이 밝아져 그인줄 알아 보더니 예수는 저희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순간적으로 사라지신 것입니다. 주님은 새몸을 입으셨기에 신비스러운 몸으로 순간적인 공간이동이 가능한 분이셨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2)음식을 먹을 수 있는 몸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제자들과 몇 번의 식사를 하셨습니다. 

눅24장 41~43을 보시면 
41 저희가 너무 기쁘므로 오히려 믿지 못하고 기이히 여길 때에 이르시되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하시니 42 이에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리매 43 받으사 그 앞에서 잡수시더라. 
또 요한복음 21장에서도 고기 잡던 베드로에게 나타나셔서 함께 조반을 드셨습니다. 부활체인데 먹을 수 있습니다. 계시록에도 보면 하늘나라에서도 생명수가 있고 과일이 있습니다. 먹는 것이 낙이신 분 걱정을 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3)사람들이 만질 수 있는 몸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몸은 영이 아닙니다. 사람이 만질 수 있는 몸입니다. 제자들이 직접 만져 보았습니다, 도마는 예수님의 손에 자기의 손가락을 넣어 보았습니다. 

눅24장 37절 이하를 보세요. 
37 저희가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 
38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39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줄 알라 또 나를 만져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몸은 물질을 구성된 몸이란 말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손으로 만질 수 있는 특별한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이해할 수 없기에 성경은 그냥 “새 몸”이라 하고 바울은 그 몸을 “신령한 몸”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고린도 전서를 보면 사도바울이 예수님의 부활체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고전15장 39절 이하를 보세요. 
39 육체는 다 같은 육체가 아니니 하나는 사람의 육체요 하나는 짐승의 육체요 하나는 새의 육체요 하나는 물고기의 육체라 
40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으나 하늘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으니 
41 해의 영광도 다르며 달의 영광도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 
42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43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44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여기 “썩지 않을 것” “영광스러운 것” “강한 것” “신령한 몸”, 이것은 전부 우리가 입을 새 몸임을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 


4)하늘로 올라가실 수 있는 몸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보는 가운데서 하늘로 승천하셨습니다. 

사도행전 1장 8절9절을 보세요

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9 이 말씀을 마치시고 저희 보는데서 올리워 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 

왜 하늘일까요? 저 하늘 꼭대기로 올라가면 그것이 어딜까요? 그것은 대기권 밖입니다. 거기 하늘나라가 있기에 올라가신 것일까요? 그것은 우리에게 하늘나라가 별도의 공간에 장소적으로 존재함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주님은 새 몸을 입고 그곳으로 가셨습니다. 우리의 썩을 몸, 이 육체로는 갈 수 없는 곳입니다. 그러기에 주님 오시기 전에는 영혼으로 가있다가 주님 다시 오실 때 새 몸을 입고 가서 사는 곳임을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연세 많으신 성도님, 그리고 육체가 연약하여 늘 편찮으신 성도님들, 우리의 소망이 여기 있음을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 


3.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 믿는 자들의 첫 열매입니다. 

나사로의 부활은 예수님이 생명의 주인임을 보여 주는 사건입니다. 예수님이 단순한 사람이 아닌 인간을 창조하신 창조주임을 보여 주는 사건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은 진정한 부활의 첫 열매라고 했습니다. 
나사로의 부활에 첫 열매가 아닙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의 부활도 첫 열매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 부활은 단순한 생명 연장의 부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 모두의 부활의 모델이요 쎔풀입니다. 
그래서 첫 열매라고 하신 것입니다. 

고린도 전서 15장 19절 이하를 봅시다. 
19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 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그렇습니다.  
첫 열매라는 말은 그 다음에 이와 같은 부활이 일어날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부활이 둘째 부활입니다. 

고전15:23절 이하를 보세요. 
23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요 
24 그 후에는 나중이니 저가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성도 여러분! 
주님의 부활을 통해 장차 우리가 입을 부활을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주님의 부활을 통해 새로운 결단을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고전 15장 마지막절을 보세요. 
58 그러므로 내 사랑 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그렇습니다.  
우리는 어떤 역경 속에서도 신앙이 견고해야 하고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부활은 그리스도인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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