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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부활과 생명이신 그리스도 (요 11: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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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과 생명이신 그리스도 (요 11:17-27)
  
        <이스터 섬을 아시나요?> 

        여러분, 혹시 ‘Easter Island’, 즉 ‘부활절 섬’에 대해서 들어보신 적이 있나요? 흔히 이스터 섬이라고 부르지요. 화란의 탐험가 제이콥 로헤벤(Jacob Roggeveen)이 이 섬을 발견했을 때가 부활절이라서 이스터 섬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답니다. 남태평양 폴리네시아 동쪽 끝에 위치한 조그만 화산섬입니다. 그런데 이스터 섬을 유명하게 만든 것은 신비하기 짝이 없는 석상들입니다. 모아이(Moai)라고 불리는 거대한 석상들이 887개나 서 있습니다. 대개 키가 3.5-4.5 미터 정도에 달하고 무게가 20톤 이상되는 것들이 많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것은 키가 10미터 무게가 90톤이나 된다고 합니다. 이 석상들은 다리는 없고 몸통만 있는데 턱은 힘차게 앞으로 뻗어 있는, 참 괴상한 모양입니다. 도대체 이 거대한 석상들을 누가 언제 어떻게 만들었는가 하는 문제는 여태껏 논란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외계인이 만들었다는 설에서부터 원주민들이 만들었다는 설에 이르기까지 숱한 학설이 제기되었지만 그 어느 것도 확실치 않습니다. 이스터 섬은 그야말로 신비요 하나의 기적으로 남아있을 뿐입니다! 

        부활절이 혹시 이스터 섬과 같지 않을까요? 하나의 신비요 기적이지만 우리와는 멀리 떨어져 있는 이스터 섬과 엇비슷하지 않습니까? 수많은 관광객들이 호기심으로 찾는 이스터 섬, 그러나 뭐가 뭔지 분명히 밝혀진 것은 아무것도 없는 미스터리, 그 기적의 섬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흡사하지 않습니까?  

        오늘 이 시간 우리는 기독교의 절기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절기인 부활절 예배를 드리기 위해 모였습니다. 여러분에게 부활절은 어떤 의미를 갖습니까? 그냥 연례적으로 갖는 습관적인 절기, 자신의 체험과 아무 상관없는 저기 있는 그 분 그리스도의 부활은 아닙니까? 이 시간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체험이 바로 나 자신의 부활체험이 되어서 새 생명을 얻는 시간이 되어야만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기독교의 생명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로 기독교가 시작되었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뒤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기독교는 생겨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신 뒤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문을 걸어 잠그고 깊은 불안과 두려움에 빠져들었습니다. 혹시라도 예수님과 한 무리였다는 사실이 발각될까봐 겁을 냈습니다. 마음이 허전했습니다. 고향으로 돌아가 생계유지할 대책을 세우기에 급급했습니다. 

        이처럼 실의와 불안과 공포 속에 빠진 제자들 앞에 홀연히 부활하신 주님이 나타나셨습니다. 대개 처음에 제자들은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낯선 분으로 여겼습니다. 눈이 가려져 있었기 때문이지요. 주님이 안부를 묻고 말씀을 건네고 함께 식사하는 동안 그들의 눈이 떠지기 시작했습니다. 자기들 앞에 서 계신 분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이신 것을 본 것입니다! 제자들은 화들짝 놀랐습니다. 흥분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전에 가르쳐주셨던 말씀들이 주마등처럼 떠올랐습니다. 죽은 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시리라는 예언의 말씀이 성취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바로 그 때부터 제자들이 달라졌습니다. 더 이상 소심하게 숨어사는 겁쟁이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해서 목숨까지도 바칠 수 있는 담력이 생겼습니다. 더 이상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나 잡는 무식쟁이들이 아니었습니다. 얼마나 설교를 잘했던지 감동과 능력이 넘치는 설교를 듣고 하루에 수천 명씩 주님 앞에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여러분, 이 모든 일들이 어떻게 가능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목격했기 때문입니다. 그 분의 부활을 몸소 체험했기 때문이지요! 

        사도 바울의 체험은 더욱더 극적입니다. 그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예수님을 반대하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던 기독교의 원수였습니다. 그러던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고꾸라졌습니다. 그의 인생이 변했습니다. 자기가 핍박하던 예수님을 위하여 스스로 핍박받는 사도로 바뀐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제자들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놓았습니다. 주저앉아 있던 사람들이 일어났습니다. 낙심했던 이들이 희망을 얻었습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혀 후퇴하던 제자들이 어떤 위기도 두려워하지 않고 전진해나갔습니다. 순교도 두렵지 않았습니다. 공동체로부터 쫓겨나는 것을 겁내지 않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담대히 외쳤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예전의 제자들이 아니었습니다. 그야말로 180도 변화되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변화이지요! 

        오늘 여러분도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인생이 바뀌길 바랍니다. 낙심했습니다. 두려웠습니다. 세상이 겁나고 사람이 싫어졌습니다. 문을 걸어 잠그고 깊은 상처와 좌절 속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부활과 생명이신 예수님이 여러분 앞에 계십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여러분과 함께 하십니다. 힘을 내십시오! 용기를 내십시오! 희망을 가지세요! 

        사업에 실패했습니까? 결혼 생활에 실패했습니까? 인간관계에 큰 상처를 받았습니까?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너무나 거대한 장애물을 앞에 두고 잔뜩 기가 죽어 움츠려 있었습니까? 뒤로 물러나 숨을 곳만 찾는 소극적이고 도피적인 인생을 사셨습니까? 예수님이 부활하셨습니다. 여러분과 함께 하십니다. 그 옛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이 변했던 것처럼 여러분도 변화될 줄로 믿습니다! 

        <마르다의 위대한 신앙고백> 

        오늘 본문 말씀은 한 여인이 부활과 생명이신 예수님을 만나 삶이 변화된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베다니라는 작은 동네에 삼남매가 살았습니다. 나사로와 두 여동생, 마르다와 마리아였습니다. 머리 둘 곳이 없을 만큼 외로웠던 예수님에게 나사로의 가족은 친형제 자매와 다를 바 없었습니다. 끔찍이 사랑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오누이의 가정에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나사로가 병들어 죽게 된 것입니다. 다급해진 자매들이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어 이 사실을 알렸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예수님은 요 11: 4절에서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나사로의 중병과 죽음이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는 기회가 될 뿐 아니라 이 일을 통하여 주님께서 영광을 받으신다는 말씀이지요. 죽은 나사로를 주님이 다시 살리실 것을 예언한 말씀입니다. 병들어 죽어야지만 주님께서 다시 살릴 수 있기 때문에 나사로의 중병은 오히려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고 예수님은 영광 받으실 절호의 챈스가 된다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의 문제는 하나님께 영광 돌릴 기회가 된다는 사실을 믿으십시오. 병들었습니까? 사업에 실패했습니까? 가정에 실패했습니까? 인관 관계에 넘어졌습니까? 낙심하지 마십시오.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주저 않지 마십시오. 뒤로 물러나 숨지 마십시오. 부활과 생명의 주님께서 여러분의 질병을 건강으로 바꾸어주실 것입니다. 실패를 성공으로 바꾸어주실 것입니다.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어주실 것입니다. 나사로는 다시 살기 위해 병에 걸리고 죽습니다! 오늘 우리의 질병과 실패와 수치와 절망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위대한 기회가 됨을 믿으십시오! 

        놀라운 일은 계속됩니다. 목숨보다 더 끔찍이 아끼셨던 나사로 죽어간다는 소식을 들으셨으면 급히 베다니로 가야 하지 않습니까? 6절에 보니까 주님은 계시던 곳에 이틀이나 더 머무셨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요 11: 17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당도하셨을 때 나사로가 무덤 속에 들어간 지가 벌써 나흘이나 되었다고 했습니다. 주님께서 지체하신 이틀을 여기에서 나오는 나흘의 일부라고 본다고 하면, 주님께서 나사로의 중병 소식을 들으셨을 때 나사로는 이미 죽었다는 사실을 아셨기 때문이 아닐까요? 

        이것은 11절에서 하신 주님의 말씀을 통해서 확인됩니다.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이르시되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나사로의 죽음을 잠자는 것으로 비유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진짜 잠자는 것으로 알아들었습니다(12절). 성경은 죽음을 잠자는 것으로써 묘사합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죽었을 때에도 “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마 9: 24)고 하셨습니다. 최초의 순교자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을 때에도 “잤다”(행 7: 60)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안에서 죽은 사람들을 ‘자는 자들’이라고 말씀했습니다(살전 4: 13; 고전 5: 16). 

        그렇습니다. 주님 안에서 죽은 사람들은 결코 죽은 사람이 아닙니다. 부활할 때가지 잠시 잠든 것뿐입니다. 주님이 재림하실 때 다시 깨어날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이들의 모습은 잠을 자듯이 평온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죽음은 없습니다! 기독교는 영면(永眠), 영원히 잠든다는 말을 쓰지 않습니다. 영결식(永訣式), 영원히 결별한다는 표현도 쓰지 않습니다. 죽음은 잠은 잠이로되 일시적인 잠일 뿐입니다. 언젠가 깨어납니다! 

        드디어 예수님께서 잠든 나사로를 깨우기 위하여 베다니로 갑니다. 이 때 언니인 마르다가 예수님을 영접하기 위해 무덤 근처의 동네 입구까지 나갔습니다. 동생 마리아는 집에 남아 조문객들을 맞고 있었습니다. 눅 10: 38-42절의 마르다와 마리아가 예수님을 영접한 이야기와 비슷하게 언제나 마르다는 행동적이고 적극적입니다. 그래서 명상적이고 내향적인 마리아는 집에 남아 있고 행동적이고 외향적인 마르다가 밖에 나가 주님을 영접하지 않습니까? 본문은 바로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마르다와 예수님이 나눈 유명한 대화이지요. 

        여러분, 이 대화는 너무도 중요합니다. 신약성서 학자들은 요한복음에 나오는 가장 두드러진 주인공들 중에 한 사람을 마르다로 봅니다. 심지어 12사도 못지않게 중요한 여제자였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마르다의 기독론적 신앙 고백에서 그러합니다. 마르다의 신앙고백은 가이사랴 빌립보 지역에서 행한 베드로의 신앙고백(마 16: 13-20)에 견줄만합니다! 

        그렇다면, 마르다와 주님이 함께 나누신 대화의 본질은 무엇일까요? 이 대화에서 우리는 마르다의 믿음이 점진적으로 성장해나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첫째, 마르다는 주님의 능력을 믿었기 때문에 과거를 원망합니다. 21절을 보세요.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주님이 왜 이제야 늦게 오셨느냐는 투정입니다. 왜 오라버니가 아프다는 소식을 전했을 때 즉시 안 오시고 지금에서야 오셨느냐는 원망입니다. 이 투정과 원망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 없이 나올 수 없는 말씀이지요. “주님이 여기 우리와 함께 계셨더라면 우리 오라버니가 죽지 않았을 텐데요!” 이것은 주님이 못 고칠 질병이 없다는 사실을 믿기 전에는 할 수 없는 고백이지요! 

        둘째, 마르다는 이미 오라버니가 죽었지만 지금 당장이라도 주님이 뭔가를 하실 수 있다고 믿습니다. 22절을 보세요.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그러나 지금도 늦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주님이 여기에 조금 더 일찍 오셔서 아직 살아있는 우리 오라버니를 도우셨더라면 나사로는 죽지 않았겠지만 아직도 늦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제 마르다의 믿음은 과거에서 현재로 초점을 바꿉니다. “왜 과거에 주님이 늦게 오셔서 우리 오라버니가 죽게 놔두셨습니까?” 하는 탄식과 원망에서 지금 당장이라도 주님은 무엇을 하실 수 있다는 현재적 믿음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과거에 집착하여 후회하고 원망하는 믿음에서 현재적 믿음으로 돌아온 것이지요! 방향을 잘 잡았습니다. 

        셋째, 마르다는 마지막 부활의 때에 오라버니가 다시 살 것을 믿습니다. 23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마르다가 과거를 탓하는 믿음에서 현재적 가능성을 바라는 믿음으로 진일보하신 것을 아시고 아주 간단히 “네 오라버니가 다시 살아날 것이다.”하고 선언하십니다. 

        그런데 이런 주님의 선언에 마르다의 전진적인 믿음은 잠시 주춤합니다. 24절을 보세요. “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지금 당장 부활하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 날 일반적인 부활이 있을 때 나사로도 다시 살아날 것을 안다는 것이지요. 마르다의 믿음은 과거에서 현재로 방향을 잘 잡은 것처럼 보였으나 다시 막연한 미래로 방향을 틉니다. 정통 유대인들의 막연한 믿음을 따라 장차 일반적인 부활이 있을 때에 우리 오라버니도 살 것이라는 믿음이었습니다. 아직 부활과 생명이 되신 주님에 대한 특수한 믿음,   현재적인 믿음이 아닙니다. 

        이런 마르다의 고백에 대해서 주님은 아주 유명한 말씀을 하십니다. 25-26절을 보세요.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주님은 부활과 생명 그 자체가 되신다는 것이지요. 그리하여 부활과 생명이 되신 주님을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 것이며,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자신이 부활과 생명이 되신 까닭에 죽은 사람이나 산 사람이나 다 주님을 믿기만 하면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바로 이겁니다! 

        <종교적 믿음인가? 관계적 믿음인가?> 

        오늘 여러분은 부활과 생명이신 예수님을 믿습니까? 그리하면 죽어도 걱정이 없습니다. 다시 삽니다. 살아서 믿은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습니다. 이것을 믿으십니까? 무엇보다도 오늘 여러분의 믿음이 하나의 습관적인 종교적 믿음인지 아니면 살아 있는 관계성의 믿음인지 생각해보세요. 

       종교적 믿음은 그냥 하나님의 축복과 도움을 얻기 위해서 갖는 형식적인 믿음입니다. 관계성의 믿음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뻐하시고 함께 하시고 사랑하시기 때문에 갖는 믿음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있고 싶어서 그냥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하여 그냥 성경을 읽습니다. 오늘 우리의 믿음은 종교적 믿음이 아니라 관계적 믿음이 되어야만 할 것입니다. 부활절은 그냥 형식적으로 지켜야만 하는 종교적 관습이 아닙니다. 부활과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살아 있는 관계를 맺어 우리의 삶이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부활절은 우리가 호기심 때문에 관광이나 가는 이스터 섬이 아닙니다. 바로 지금 여기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모시고 우리의 삶이 능력과 희망으로 가득차는 현재적인 사건입니다! 

        마르다가 그랬습니다. 부활과 생명이신 예수님을 지금 여기에서 믿었습니다. 27절을 보세요. “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에 맞먹는 위대한 고백이지요! 마르다는 예수님이 부활이요 생명이신 까닭에 산 자나 죽은 자나 막론하고 주님을 영접하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음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나사로가 다시 소생하는 감격을 체험했습니다(요 11: 43-44). 오늘 여러분도 예수께서 부활이요 생명이신 것을 믿습니까? 그리할 때 모든 죽은 것들과 죽어 가는 것들이 다시 살아나는 역사가 일어날 줄로 믿습니다. 

        역사가 필립 샤프(Philip Schaff)는 말합니다. “이 나사렛 예수는 돈 한 푼 없이 무기 하나 없이 저 알렉산더나 시저, 모하메드, 그리고 나폴레옹보다도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을 정복했다. 학문이나 지식 없이 그 어떤 철인이나 학자들을 총동원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빛을 땅과 하늘에 비추었다. 그 어떤 학파로부터 배운 바 유창한 언변 없이도 전무후무한 생명의 언어를 말씀하셨으며, 그 어떤 웅변가나 시인도 감히 끼칠 수 없는 지대한 영향력을 남기셨다. 단 한 줄의 글도 쓰시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글들이 쏟아져 나오게 하셨고, 고대와 현대를 통틀어 그 어떤 위인들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설교와 연설과 토론과 학술 연구와 예술 작품과 찬양 음악을 위한 다양한 주제들을 제공하셨다.”

        옳습니다. 이 위대하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부활과 생명이 되신 주님을 영접하는 사람마다 인생이 바뀔 것입니다. 두려움이 물러갑니다. 수치와 패배감, 열등감이 물러갑니다. 좌절과 절망이 물러갑니다. 오늘 부활과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다 영접하시고 그 분과 새로운 관계를 맺어 여러분의 삶이 변하시기를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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