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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부활의 현재적 의미 (고전 15: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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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현재적 의미 (고전 15:1-11)

     60년 대 재미교포 김은국이란 사람이 영문판으로 소설을 써서
     미국과 한국에 많은 관심을 불러 일으킨 작품이 있습니다. 
순교자란 작품입니다.
거기에 보면 
6.25 때 이대위라는 사람이 정보장교로 평양에 입성해 보니
신목사란 분이 교회를 지키며 성도들을 보살피고 있었습니다.
이 대위가 신목사에게 묻습니다.
“ 목사님 신은 우리들에게 무엇을 해 주었습니까?
  당신의 신은 우리들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는 우리의 비극과 학살 굶주림 전쟁 
       그리고 이 모든 공포를 제거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당신 정말 신을 믿는거요? ” 하니
“ 난 일생동안 신을 찾았소 하지만 내가 발견한 것은 
     고통과 죽음 밖에 없는 인간 뿐이었소 ”
“ 그럼 목사님도 신을 믿지 않소? ” “ 그렇소 ”
“ 영원한 천국도 믿지 않소? ” “ 그렇소 ”
“ 부활도? ” “ 그렇소 ” “ 물론 심판도 ” “ 그렇소 ”
“ 그럼 왜 이런 고생을 합니까? ”
“ 저들에게 빛을 주고 찬란한 미래가 기다리고 있다고 
           희망을 심어줘야 되지 않겠소
           그렇기 때문에 저들에게 예수님이 필요한거요 ”
“ 그럼 목사님의 절망은 어떻합니까? ”
“ 그게 내가 져야할 십자가요 ”그럽니다.
그러니 단순히 전쟁과 고통 속에 시달림 받는 백성들을 위로하고           
 희망을 심어주기 위해서 천국과 부활과 심판을 설교하는 신 목사
저들의 대화 속에 나타난 예수는 바로 허구 속의 예수입니다.
즉 예수는 사람들을 달래기 위해 꾸며낸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말씀 고전15장은 
예수의 부활은 바로 당시 사람들이 말하는 허구 속의 예수, 
       꾸며낸 부활 이야기가 아니라는 사실을 변증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부활의 사건은 누가 꾸며낸 이야기 아니라
역사적 사건이요 다큐멘터리요 뿐만이 아니라 
       신앙의 체험적 사건이라 합니다. 
2000년 전의 예수 부활의 사건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를 깨닫는 
       부활절이 되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이 예수 부활이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첫 번째 무엇을 들어 변증합니까?


1. 사도 바울은 예수 부활이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첫번째 무엇으로 변증을 합니까?(1-2절)

1절 [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에게 알게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너희가 그 가운데 선 것이라 ] 
이 말은 지금 우리의 신앙의 삶이
   복음 위에 즉 예수님의 부활 사건 위에 서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2절에
[ 너희가 만일 내가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으리라 ] 

지금 내가 예수 부활을 믿고 부활의 주님을 나의 구주로 믿는다면  
즉 복음을 헛되이 믿지 아니한다면 
   이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구원이 예수 부활의 가장 확실한 증거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19절에 반어법을 써서
       예수 부활이 없다면 우리가 가장 불쌍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내가 구원의 확신이 있다는 것 
     예수 부활의 사건을 믿는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헛되이 믿지 아니하면? 입니다.
헛되이 믿는 자들도 있다는 것입니다. 
마7:21-에 입술로만 주여, 주여 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예수를 믿어도 주로 믿지 못하고 삶의 악세서리로 믿는 자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활절이 공휴일 보다 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믿는 자는                     
구원의 사건이 일어날 줄 믿습니다.

1840년 런던 옷가게 일하던 <조지 윌리엄> 청년이 
        어느 날 성경을 읽다가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고전15:2절  [ 너희가 만일 나의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이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으리라. ] 
헛되이 믿지아니하면 ~!
예수 헛되이 믿지 아니하면 나도 쓰임을 받을 수 있구나
그래서 이 청년은 이때부터 동료 몇 명을 데리고 
주말마다 모임을 갖기 시작 했는데 이것이 YMCA의 모태가 되었습니다.

그럼 사도 바울이 예수 부활을 변증하는 가장 확실한 증거가 무엇입니까?


2. 사도 바울이 예수 부활을 변증하는 가장 확실한 증거가 무엇입니까?(3-4절)

3-4절 
[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
[ 장사 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  
어느 누가 말해서가 아니라
       사도 바울은 성경대로 즉 하나님의 예언의 실현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 하셨기 때문에 
                예수 부활은 확실한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특히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났다는 말 
여기에 사흘이라는 시간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 봅시다. 
왜 사흘 만에 살아 나셨나? 
   사흘이라는 시간이 우연이겠느냐? 의미가 있겠느냐?
성경에 보면 중요한 사건을 두고 사흘이라는 시간이 언급됩니다.
예를들어
창22: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에 이삭을 바칠 때에 
        제 삼일에 지시한 곳에 도착하여 이삭을 드렸습니다. 
출15:22-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흘 길을 행하였을 때 
           물이 없어 원망할 때 지시하신 한 나무가지를 물에 던지니
           마라의 쓴 물이 단물로 변했읍니다. 
마12:40-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시험하시기 위해 표적을 보여달라 할 때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 보여줄 표적이 없다고 하시며
         [ 요나가 밤낯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낯 사흘을 땅 속에 있으리라 ] 
위의 사건이 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결코 무관한 사건이 아닌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흘이라는 시간적 의미는 
          여기에 하나님의 의도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공생애 사역 중에 복음서 여러 군데서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 만에 살아나리라고 했습니다. 

왜 삼일인냐?
1. 팔레스틴 지방에서 시체가 삼일이 되면 벌써 부패한다고 합니다.      
그러니 예수의 부활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되어진 사건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삼일은 

2.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인내의 시간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보통 작심삼일이라고 합니다. 
       삼일일 만에 잘 변한다는 거지요. 
사람은 삼일이 견디기 힘든 시간입니다.
이것을 생리학적으로 보아도 
       우리가 금식을 해보면 삼일 째가 견디기 힘든 시간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생체리듬이 변하는 시간입니다.
음식이 중단되면 
우리 안에 체질이 바뀌어지기 때문에 열이 나고 통증이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삼일 만에 금식 체질로 돌입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흘 만에 살아나심은 하나님의 인내의 시간인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이 삼일을 기다리지 못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각기 흩어졌던 것입니다.

눅24:13절 이하에 보면 
예수님 십자가에 동아 가신 후 제자들은 뿔뿔히 흩어 졌습니다.
엠마오라 하는 고향으로 낙향하던 두 제자에게 사흘 만에 부활하신 주님이 
         찾아 오셨습니다.
「너희가 길가면서 서로 주고 받는 이야기가 무엇인냐?」물으니
얼굴에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면서 하는 말이
[ 나사렛 예수의 일인데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라 바랐노라 
  그러나 대제사장과 관원들이 사형판결에 넘겨주어 십자가에 못박았는데
  이뿐 아니라 이 일이 된지가 사흘째요 ] 합니다.
저들이 사흘을 기다렸다면 예루살렘에서 주님의 부활을 맞이했을 건데 
사흘을 기다리지 못하고 고향으로 내려갔던 것입니다.
        저들은 사흘 후에 있을 예수의 부활을 바라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부활의 신앙을 갖고 우리의 삶의 문제를 풀어 나갈 때
이점을 유의해야 합니다. 
우리가 믿습니다 한다고 즉시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사흘을 기다리는 지혜와 인내도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예수 부활 , 물론 세계사의 전환점이요 
               내 인생의 역전 드라마의 홈런 사건이기는 하지만 
때로는 나의 삶에 부활의 생명이 싹이 나기까지 
       삼일을 기다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예수 부활의 증인들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3. 5-8절 까지 예수 부활의 증인들을 열거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5-8절까지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 두 제자와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그리고 야고보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8절 [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 
뭘 말합니까?
예수 부활은 증인이 있는 역사적 사건이요
     내가 직접 마난 체험적 사건임을 말합니다.
역사가 토인비는 
「역사적 확실한 사건 가운데 증거가 있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사건이다」
즉 역사를 연구하다 보니 예수의 부활을 부정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내가 만나 부활의 주님입니다.

한국 최고의 지성으로 꼽히는 이어령 박사(문학평론가, 전 문화부장관). 
딸 이야기를 하면서 기적 이야기를 해 달라고 하니. 
“ 기적이 뭐 특별한 것입니까? 
  눈을 못 보던 사람이 눈을 뜬 것이 기적이 아니라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것, 눈을 뜨고 있는 것이 기적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그 보다 가장 중요한 기적 중의 기적은 부활입니다.”

그런데 예수 부활이 2000년 전에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지금도 예수 부활의 생명은 우리 가운데 역사를 합니다.
저는 이것을 예수 부활의 현재적 의미라고 하면서
      지금 예수 부활과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4. 예수 부활 사건의 현재적 의미를 어디서 찾아야 할까요?(9-10절)

부활의 주님을 만나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9절에서 - 내가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요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침함을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자지만
10절 [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 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 
바울에게 부활의 현재적 의미는
    박해자에서 사도로 변화되는 능력과  
    주를 위해 더욱 수고하는 삶으로 나타납니다.

톨스토이의 부활이란 글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봄이 왔습니다. 대지에 봄이 왔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밟고가도   파릇파릇한 새싹들은 여전히 돋아납니다.」
그렇습니다.
부활신앙의 확신만 있다면 그 누가 그 어떤 것이 짓밟고 가도 
봄이 오면 새 생명의 싹들은 여전히 돋아날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복음의 능력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승리는 바로 예수 부활에 근거하는 것입니다.

나이가 들면 손발이나 몸이 떨립니다.
그것은 몸의 기능이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흔들리고 봉사가 흔들리는 것은 우리의 신앙생활의 기초인 
      부활신앙이 허약해졌기 때문입니다.
부활신앙만 확실하면 흔들릴  이유가 없습니다.                           
그 어떤 외적 억압이나 내적 갈등에서 믿음이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집이 흔들리면 무너집니다.                                             
나무가 흔들리면 뿌리가 뽑힙니다.
신앙이 흔들리면 영혼이 침몰합니다.
부활의 신앙이 흔들리면 믿음이 파선한다는 말입니다. 
부활의 신앙을 견고히 붙드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서를 쓰게된 배경에는 이런 이유가 있습니다.
당시 헬라 철학의 영향을 받고 있던 고린도 교회는 
     많은 문제를 안고 있었습니다. 
철학이라는 것이 그렇잖아요. 따지는 것 좋아 하잖아요.
고린도 교회 교인들 남다른 은혜를 받았지마는 분쟁이 많았습니다.
게바 파니 아볼로 파니 바울 파니 해서 당파분쟁이 있었고
성도끼리 소송 사건도 있었고
혼인문제 우상재물문제 그리고 윤리적 문제가 있었으며 
심지어 부인들 머리에 수건을 쓰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를 놓고 편이 갈렸습니다.
뿐만 아니라 은혜 받았다고 하는 교인들도 
     내가 받은 은사가 최고라며 교회의 질서를 어지럽혔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왜 이렇게 되었냐? 
이러한 교인들을 진단하고 처방한 것이 바로 고전15:입니다.
부활의 신앙이 흔들리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다시 예수 부활을 변증하면서 
내가 부활의 신앙을 갖고 보니 
      남들보다 더 많이 수고하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너희 수고도 주안에서 결코 헛되지 아니하다는 것입니다.
부활의 신앙을 가진 성도는 
       결코 봉사에도 흔들리지 않는 줄 믿습니다.
 
그런데 복음서의 기록과 오늘 본문말씀 중에 보면 
   한가지 의문을 가질 수 있는데


5.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과 다른 성도들에게 나타나 보여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11절)

왜 부활의 주님게서 제자들에게 먼저 나타나셨나?는 것입니다.      
그 부활하신 장한 모습을 
자기를 십자가에 못밖은 총독 빌라도나 대제사장들이나 로마군병 
      아니면 자기를 희롱하던 군중들에게 나타내 보이지 아니하시고
비굴하게 도망가 두려워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먼저 나타나셨나?       
그건 예수의 부활은                                                   
     원수를 향해 복수하기 위함도 아니요 
     하나님의 권위를 나타내는 전시효과도 아니요 
제자들로 하여금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가 바로 주시라는 사실을 확신시켜 주며
    저들의 삶에 엄청난 축복을 안겨다 부며  
    그리고 나의 증인이 되어 달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죄수의 몸으로 
로마로 호송되어간 도로를 <아피아> 도로라고 합니다. 
로마 아피아 도로 변에 베드로 기념교회에 가본 적이 있습니다. 
도로 변에 낡은 자그마한 교회인데 교회 간판도 없고
앞 벽에 조그만하게 「쿼바디스 도미네」라고 씌어져 있습니다.
그 지점이 삼거리인데 한 쪽은 바울이 호송된 도로이고
                     한 쪽은 카타쿰으로 가는 도로입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베드로가 로마에서 성도들을 위하여 목양하다가  
네로의 핍박이 심해져 성도들이 베드로에게 일시 피신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아피아 국도를 따라 로마를 벗어나는데               
맞은편에서 부활의 주님이 나타났습니다.
「쿼바디스 도미네」<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하니
「나는 네가 버리고 간 어린 양떼들을 지키러 가노라」
그때 베드로가 발걸음을 돌이켜 로마로 돌아가
     그 길로 순교를 당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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