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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복된 죽음 (행 7:54-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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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된 죽음 (행 7:54-8:3)
      
  우리나라 지방 어느 곳에 ‘죽음’이라는 이름의 마을이 있었습니다. 대나무 竹자에 그늘 陰자인 것 같은데 동네 사람들이 이름이 재수가 없다고, 이름 때문에 교통사고가 많이 난다고 불평하고 이름을 바꿔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래서 아마 바꾼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죽음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불편하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누가 세상을 떠날 때 돌아가셨다, 소천 하셨다, 또 하늘나라 가셨다, 이런 식으로 우회적인 표현을 쓰지, 죽었다는 말은 적어도 우리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는 쓰려고 하지 않습니다. 외국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미국의 어느 목사님의 장례식을 보니까 passing이라는 말을 쓰고 celebration이라는 말을 쓰던데 die라는 말을 입에 올리지 않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음이라는 말을 담대하게 사용하셨습니다. ‘내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 달려 죽을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이라는 단어를 기꺼이 사용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사로가 죽었을 때에도 ‘나사로가 죽었느니라’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고 계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정말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어 떨어질 정도로 하나님께 간구하며 괴로워하며 기도하실 정도로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것을 가볍게 생각하지 않았고 예수님에게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고 예수님이 부활할 것을 알고 계셨다고 해서 그것이 죽음의 고통을 약화시킨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힘들게 돌아가셨습니다. 십자가상에서 괴로워하시고 목마르다 하시고 얼마나 맞았는지 당신의 십자가를 메고 갈 여력도 없어서 구레네 시몬이라는 사람이 대신 그 십자가를 메고 가게 할 정도로 예수님은 힘들고 고통스럽게 사람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아주 부끄러운 방법으로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은 두려워하고 묻기도 두려워하는 상황에서 거기에 대한 분명한 믿음, 그리고 승리에 대한 확신, 영생, 믿음, 천국 이런 것을 말씀하실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결코 조작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이유는 사람은 죽으면 끝난다고 생각하지 죽음을 경험한 다음에 그 다음에 무엇을 할 만한 그런 용기나 지혜나 그 대안이 없습니다. 죽으면 끝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은 다음에 본론에 들어가기를 원하셨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예수님의 죽음 다음에 본론에 들어가서 거기에서 부활과 영생과 승리와 십자가의 영광과 복음의 능력과 교회의 증거가 비롯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죽음을 가볍게 여길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예수님이 재림하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다 죽을 것입니다. 언젠가는 세상을 떠나게 될 것입니다. 창세 이후에 죽음을 경험하지 않았던 사람 두 명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데 하나는 에녹이고 또 하나는 엘리야입니다.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 하늘에 들려 올라갔습니다. 그러나 그 이외의 사람들은 다 죽었습니다. 아브라함이든 모세든 예수님도 죽으셨다가 부활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도신경에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가’라고 고백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죽음을 미화시킬 수도 없습니다. 죽음은 두려운 것입니다.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한 번도 죽어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가본 적이 없는 길, 그리고 그 다음에 무엇이 있는지 잘 모르는, 그렇기 때문에 두려운 것입니다. 

  그리고 죽음은 슬픈 것입니다. 사람들이 장례식에 갈 때 검정색 옷을 입는데 검정이 뜻하는 것은 슬픔, 애도, 상실입니다. 사람의 마음이 어둡다는 말은 기쁘지 못하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어두운 옷을 입고 다닐 때 그의 마음의 슬픔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제 인생에 가장 슬펐던 순간을 꼽으라면 집사람이 첫째 아이를 유산했을 때, 그때 굉장히 슬펐고 그리고 아버님이 돌아가셨을 때 정말로 슬펐습니다. 많이 울었습니다. 저의 아버님이 천국에 가셨다고 믿지만 그래도 슬픈 것은 슬픈 것입니다. 천국 가신 것은 아버님이고 아버님을 잃은 것은 저이고, 안 그렇습니까. 기쁘다면 아버님이 기쁠 수는 있지만 저는 기쁘지 않아요. 왜냐하면 떠나셨기 때문에 다시는 뵐 수 없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어요. 물론 천국에서 뵐 것을 믿지만 그러나 지금은 볼 수 없다는 사실, 아버님이 안계시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고 받아들이기가 참으로 힘들었습니다. 슬퍼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불효자식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저보다 오래 사셔서 저의 장례식에 오게 되신다면 많이 울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아마 제가 천국에서 내려다 볼 것입니다. 누가 가장 많이 우나, 그래서 가장 많이 우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복을 달라고 기도할 것이니까 우는 시늉이라도 하시기 바랍니다. 

  LA에서 제가 가르치던 어느 청년이 목사가 돼서 제 앞에 나타난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같이 점심을 먹으면서 어머님의 안부를 물었더니 몇 년 전에 돌아가셨다고 대답했습니다. ‘
  ‘저런, 아, 미안하구만.’ 
  ‘예수님 믿고 천국에 가셨으니 괜찮습니다.’ 
  그 대답을 듣고 제가 마음속으로 
  ‘불효자식 같으니. 아니 어머님이 천국가시면 안 슬픈가? 천국 가는 것은 기본이지, 어머님과 정도 없었냐, 너는?’
  그런 말을 하고 싶지만 꾹 참았는데 저는 믿음이 좋다고 하면서 인간의 보편타당성을 부인하는 사람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슬퍼할 때는 슬퍼하고 기뻐할 땐 기뻐하고 어려운 건 어렵고 쉬운 건 쉬운 것이지 예수를 믿는다고 그 사람이 슈퍼맨이 되는 것도 아니고 천사가 되는 것도 아니고 인간의 보편타당적인 것에서 예외가 있는 것도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도 하나님의 아들로 오셨지만 예수님도 배고프시고 목마르시고 피곤하시고 주무시고 때로는 상처를 입으시고 노하기도 하셨습니다. 예수님이라고 해서 인간의 보편타당성의 원리에서 예외가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셨습니다마는 다만 죄가 없으시고 믿음으로 사시고 율법을 이루시고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셨다는 것이 우리와 차이가 있는 것이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어떤 특권을 누린 것은 아닙니다. 적어도 그것이 예수님에게 시험이 될 정도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돌을 떡으로 바꾸라든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든가 이런 것은 예수님에게 시험이었지요. 예수님은 그것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최초의 순교자 스데반의 죽음을 다루고 있습니다. 영광스럽게 순교했습니다. 그럼에도 그가 죽은 다음에 그를 위해 크게 울었다고 했습니다. 8장 2절을 보면 ‘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위하여 크게 울더라’ 누구를 위해 울었습니까? 스데반을 위해서 울었습니다. 자기를 위해 운 것이 아닙니다. 스데반이 불쌍하고 억울하고 슬프고 그래서 스데반을 위해서 슬피 울었다고 했습니다. 이들이 믿음이 없기 때문에 운 게 아닙니다. 이들은 경건한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보다 더 믿음이 좋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슬프기 때문에 운 것입니다. 죽음이란 그런 것입니다. 초대교인들도 그랬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는 성도의 죽음에 슬픔, 결별, 그 이상의 무엇이 있습니다. 이것을 주목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스데반이 순교를 앞두고 성령이 충만했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성령 충만하게 사는 것뿐만이 아니고 죽을 때도 성령 충만하기를 소원해야 됩니다. 성령 충만하게 세상을 떠나게 해 달라, 그래서 내가 세상 떠나는 것이 사람들에게 은혜가 될 수 있고 하나님에게 영광이 되고 그것이 나의 신앙의 고백이 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될 것입니다. 스데반이 순교를 앞두고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55절에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사도신경에는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시다가’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평소에는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계시는데 스데반이 순교하는 순간에는 하나님 보좌 우편에 서 계셨다, 이것은 순교하는 사람을 받으시기 위한 것입니다. 누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순교할 때 예수님이 서서 그 순교를 받으십니다. 그것을 스데반이 보았습니다. 56절에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이것이 믿는 사람의 종말론적인 신앙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죽는 사람 자신이 가져야 의미가 있습니다. 스데반 본인이 하늘이 열리고 예수님이 서 계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가 용기를 낼 수 있었고 순교를 할 수 있었던 것이지 만약 스데반 자신에게 이런 믿음이 없었다면 다른 사람이 그것을 강요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본인이 이 믿음을 가져야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어느 큰 교회 목사님이 일부러 작은 자동차를 타고 다니셨다고 합니다. 누가 대화하다가 목사님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목사님이 작은 차를 타고 다니시니까 보기가 좋습니다.’ 그 말을 듣고 목사님이 정색하시면서 한 마디 말씀을 하시더랍니다. ‘내가 스스로 작은 차를 선택할 수는 있지만 자네가 그것을 나에게 요구할 수는 없네. 자네가 그것을 판단할 수는 없네.’ 무슨 말인지 감이 잡히십니까? 스스로 겸손한 삶, 검소한 삶을 선택해야 의미가 있는 것이지 그것을 남이 요구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검소함을 자기가 스스로 선택해야지요. 누가 검소하라고 요구한다면 그것은 재미도 없고 따분하고 은혜도 없고 속상한 일이 될 것입니다.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이런 것은 자기가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고 자기가 선택하고 내가 더 큰 차를 탈 수도 있지만 작은 차를 선택하는 것이 의미가 있는 것이지 그게 아니고 누가 ‘앞으로 목사님들은 이런 급의 자동차만 타시오.’ 그건 믿음도 아니고 주님에게 영광이 되는 것도 아니고 서로에게 율법의 멍에를 씌워주는 것 외에는 다른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천국에 대한 소망도 마찬가지에요. 본인이 그것을 가져야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만약 목사가 병원에 환자를 심방하러 가서 ‘집사님, 아무리 기도해 봐도 이제 천국가실 준비를 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십중팔구 시험에 들 것입니다. ‘아, 목사님 나보고 죽으라는 얘기입니까? 아니, 살게 해달라고 기도를 해야지요. 저는 준비 안됐습니다. 저는 살고 싶습니다!’ 그러면 그걸 뭐라고 말하겠습니까. 환자 자신이 마음의 준비가 되고 환자 자신이 ‘하나님이 저를 부르십니다. 이제 저는 갈 때가 됐습니다. 저는 선한 싸움을 싸웠고 또 믿음을 지켰고 이제 나를 위해서 면류관이 준비돼 있습니다. 저를 위해서 슬퍼하지 마세요.’ 

  한 대학 총장님 한 분이 이렇게 유언을 남기지 않았습니까. ‘내가 죽으면 장례식을 천국환송예배로 드리고 슬픈 노래를 부르지 말고 기쁜 노래를 불러라.’ 그래서 그분 장례식 때 대학 합창단이 헨델의 할렐루야 코러스를 불렀습니다. 장례식 때 ‘할렐루야, 할렐루야’ 이렇게 부르는 사람은 예수 믿는 사람들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본인이 그렇게 주문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본인의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만약 그게 아니고 마지막 순간까지 ‘제발 살게 해달라고 기도해 주세요.’라고 하다가 죽었다면 서로 괴로운 것입니다. 어느 순간에는 갈 때가 됐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그것도 순종할 수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우리가 영원히 산다는 것은 이 땅에서 영원히 사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도 서른 세 살의 젊은 나이에 죽으셨습니다. 예수님도 죽음을 통과하셨습니다. 그것이 쉬운 죽음은 아니었지만 그러나 죽음을 통과한 다음에 부활이 있고 영광이 있고 기쁜 날이 있고 인간의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지 않았습니까. 할렐루야! 이게 중요한 것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 다음에 그 무엇이 기다리고 있어요. 그것을 성경이 말해주고 있는데 그러므로 복 있는 죽음은 죽는 사람이 남아있는 사람을 격려할 수 있는 것입니다. 모세가 죽기 전에 이스라엘 백성을 축복했지요. 또 야곱이 죽기 전에 열 두 아들을 축복했습니다. 예수님도 돌아가시기 전에 제자들을 축복했습니다. 이것이 복 있는 죽음입니다. 세상을 떠나는 사람이 남아있는 사람을 격려하고 위로하고 축복할 수 있는 것, 그 반대가 아니고 떠나는 사람이 남아있는 사람들을 축복할 수 있는 것, 그것이 정말로 복된 죽음입니다. 

  오늘 본문의 스데반의 죽음을 보면 스데반의 죽음은 억울한 죽음입니다. 의로운 사람이 불의한 자들의 손에 죽임을 당한 것이니까 억울한 죽음입니다. 우리 고유의 정서상으로 보면 한이 맺힐 수 있는 상황입니다. 전설의 고향의 이야기 대부분이 그런 것 아닙니까. 억울하게 죽었기 때문에 저승에 가지 못하고 그 영혼이 세상을 맴돌면서 사람들에게 그 사연을 알리려고 한다, 사랑과 영혼이라는 영화도 내용이 그것 아닙니까. 주인공이 억울하게 죽어서 영혼이 세상을 떠나지 못하고 여자 친구에게 자꾸만 뭔가 커뮤니케이션을 하려고 하는 줄거리인데 스데반도 한이 많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의로운 사람이 불의한 사람들에게 돌을 맞아 죽었습니다. 젊은 사람이고 재능도 많은 사람인데 그것을 다 펴지 못하고 억울하게 죽었습니다. 

그러나 스데반은 죽기 전에 이미 한을 풀었습니다. 사람들을 다 용서하고 죽었습니다. 그가 숨을 거두기 전에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그러니까 스데반은 억울한 마음을 가지고 ‘두고 보자’ 이러고 죽은 것이 아니고 죽기 전에 한을 풀었어요. ‘저들의 죄를 하나님 돌리지 마옵소서’ 예수님을 닮은 것입니다. 예수님도 운명하시기 전에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저들이 행하는 것을 알지 못하니이다’ 그렇게 다 풀어버리고 운명하시지 않았습니까. 이것이 의인의 죽음, 이게 성도의 죽음입니다. 억울할 것을 생각하면 얼마나 억울합니까. 예수님 믿는다는 이유로 돌을 맞아 죽었으니까, 젊은 나이에. 그러나 그는 그것을 하늘나라까지 들고 가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다 놓아버리고 다 풀어버리고 그리고 예수님 계신 곳으로 가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세상에 살 때도 복되게 살아야 되지만 세상을 떠날 때도 복되게 떠나기를 바라는데 그러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되느냐? 
  첫째는 빚을 다 탕감해 주어야 됩니다. 누가 나에게 섭섭하게 한 것, 나를 배신한 것, 나를 상처 입힌 것, 다 용서하고 빚을 탕감해 주고 둘째, 내 빚도 탕감을 받고 가야 됩니다. 내가 지은 죄 다 회개하고 하나님께 용서받고 내가 누군가에게 잘못했다면 그 사람에게 사과하고 그 사람에게 용서를 받고 그래서 더 이상 빚이 남아있지 않는 상황에서. 자유로운 인간이지요. 그리고 주님을 바라보고 가야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스데반이 56절에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하늘이 열려야 됩니다. ‘열린 천국 문 내가 들어가 세상 짐을 내려놓고’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 우편에 인자가 서신 것을 보면서 죽었습니다. 복된 죽음입니다. 우리가 세상 떠날 때는 세상일에 더 이상 연연해하지 말고, 미련 갖지 말고 이 세상의 일은 끝났다 이제 나를 맞아주시는 분이 계시다,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 말씀에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는 너희 거할 곳이 많도다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고 다시 와서 너희를 영접하여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우리가 이 세상에서 예수님을 우리의 구주로 영접하면 우리가 세상 떠날 때 예수님이 우리를 당신이 계신 곳으로 영접해 주실 것입니다. ‘영접해 주시겠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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