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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우리에게 찾아오신 예수 그리스도 (요 20: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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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찾아오신 예수 그리스도 (요 20:19-23)
 
오늘 부활주일을 맞은 우리 교회 모든 성도님들의 가정과 일터와 교회 위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은총이 충만하기를 축복합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셨다.  이것은 과학으로 증명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이성으로는 더더구나 이해하지 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이것은 세상에 있는 그 무엇으로도, 어떤 비유로도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설명할 수 있거나 없거나 예수님의 부활은 역사적 사실입니다.  과학적으로 부활을 설명 할 수 없다고 해서 믿을 수 없다고 말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믿거나 말거나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이성으로 이해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과학으로 증명해 보라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부활을 믿으라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성경은 예수의 부활을 합리적으로 설명하거나 증명하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부활은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확실하고도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의 부활에 관하여 사백 번 이상 반복적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어디에서도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 논쟁의 주제로 삼은 적이 없습니다.  학문적인 토론의 대상으로 설명한 적이 없습니다.  설명의 대상으로 삼은 적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할 것이라고 말씀하셨고, 그 말씀대로 예수님은 삼일만에 부활하셨습니다.

프랑스의 유명한 사상가 어네스트 골트가 어느 날 토마스 칼라힐을 찾아와서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멀지 않은 장래에 기독교를 대신하는 신선하고 새로운 종교를 만들 것이다"
이때 칼라힐이 이렇게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대단히 흥미 있는 일이다.  그렇게 하려고 하면 네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우리 모두에게 증명해 주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네가 우리 모두의 죄를 대신하여 죽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반드시 너는 다시 살아나야 한다.  그럴 수 없다면 당신의 계획은 헛된 계획이 되고 말 것이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어떤 사람도, 어떤 종교도 흉내낼 수 없는 사실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사실 역사 속에서 기독교를 흉내내보려는 시도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언양에는 우리 나라의 대표적인 불교 사찰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이제는 산에서 내려와 도심에 절간을 세우고 기독교 신앙을 모방하려고 하는 움직임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찬송가를 부르니까 저들은 염불 대신 찬불가를 만들어서 노래합니다.  아이들을 모아놓고 우리가 성경학교를 하니까 저들도 아이들을 모아놓고 불교학교를 합니다.  주일마다 우리가 모여서 예배합니다.  저들도 주일마다 정기 예불집회를 가지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저들도 구역 조직을 갖추어 놓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불교가 모든 것을 다 흉내를 낸다고 할지라도 결코 흉내낼 수 없는 분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부활입니다.  석가모니는 천지를 창조하지 아니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는 태초에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석가모니는 무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부활하지 아니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무덤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간혹 성지순례를 하는 사람들을 보면 예수님의 무덤에 가서 거기에 입맞춤을 하고 감격해합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우리 기독교는 빈 무덤을 바라보는 죽음의 종교가 아닙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생명의 종교입니다.  빈 무덤에 감격해 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부활하셔서 우리에게도 부활의 소망을 주신 그 은혜에 감격해 하는 종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우리가 드리는 이 부활절이야말로 우리 기독교만이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축제입니다.  기독교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입니다.

성탄절이 되면 우리 나라 여러 불교의 사찰에서는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합니다'라는 현수막이 걸려있습니다.  그러나 부활절을 맞이하면서 그 어느 사찰에서도 '예수님의 부활을 축하합니다'라는 현수막은 걸려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부활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없었다면 우리의 구원은 부도 수표입니다.  부활이 없는 종교가 구원을 말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만약에 우리 주님의 부활이 거짓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하고 어리석은 사람들일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이 됩니다.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저녁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그날 이른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와 세 명의 여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여인들에게 빨리 가서 이 소식을 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여인들은 이 골목 저 골목, 이 마을 저 마을을 뛰어다니며 외쳤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부활하셨다."

그런데 여러분, 이 연약한 여인들이 골목 골목을 누비면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소식을 전하고 있는 그 순간에 소위 주님의 제자들은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계속되는 본문의 말씀은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그들은 다락방 깊숙한 곳에 모여 앉아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그들이 무엇을 했습니까?  아무 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성경은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두려워했다.  무서워서 벌벌 떨고 있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못박아 죽인 유대인들 때문이었습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마태복음 28장에 보면, 무덤에 갔던 여인들이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제자들에게 달려갔다고 했습니다.  누가복음 24장에 보면,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여인들의 말을 듣고 베드로가 무덤에 달려가서 예수께서 부활하심을 확인했다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이 시작되기 전인 요한복음 20장에는 베드로와 다른 제자가 무덤에 가서 확인을 하고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을 믿었다고 했습니다.
 
자, 보십시오.  주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음을 확인했고 또 믿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한 나절이 지났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지금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두려워서, 무서워서 골방에 숨어 떨고 있었다."

사랑하는 여러분, 유대인들과 로마의 정부는 안식 후 첫 날에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이 엄연한 사실을 감추고자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영원히 무덤 속에 묻어버릴 방법으로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을 잡아들이려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못박아 죽인 유대인들과 로마 정부가 예수님의 제자들을 잡아들인다고 하더라.'
 
이 소문은 이미 예루살렘 온 도성에 쫙 퍼져 있었습니다.  '유대인들과 로마 정부가 우리들을 잡아들인다더라.'  이 소문에 제자들은 문을 닫았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단순히 그들이 모든 곳의 문을 닫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만 그러나 실상은 이중삼중으로 겹겹이 걸어 잠궜다는 뜻일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시시각각으로 조여오는 유대인들과 로마 정부의 위협에 두려움과 떨림으로 그렇게 문을 꼭꼭 걸어 잠궜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의 제자들이 걸어 잠근 것은 비단 다락방문만은 아니었습니다.  실상은 제자들, 자신들 마음의 문을 그렇게 꼭꼭 걸어 잠그고 있었던 것입니다.  제자들은 그들의 마음에 쇠빗장을 걸어 잠그고 앉아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꽁꽁 얼어붙은 것은 그들의 마음만이 아니었습니다.  온 영혼이 꽁꽁 얼어붙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그들은 그렇게 앉아 있었습니다.

바로 이 때 예수님께서 그들을 찾아오셨습니다.  문을 두드린 것도 아니었습니다.  제자들 가운데 누가 문을 열어준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문을 부수고 들어온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 가운데 우뚝 서 계신 예수 그리스도.  이것이 부활하신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두려움과 떨림과 염려로 마음과 영혼이 꽁꽁 얼어붙어서 쇠빗장을 걸어 잠그고 앉아있는 그들에게 부활하신 주님께서 찾아오셨다는 사실.  기억하십시오.  이것이 복음입니다.  낭패와 실망 속에서 자신의 마음의 문을 꼭꼭 걸어 잠그고 달팽이처럼 꽈리를 틀고 앉아있는 나에게 부활하신 주님께서 찾아오셨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찾아오신 제자들이 어떤 제자들입니까?  3년 동안이나 함께 먹으며, 가르치며, 전심을 다해 양육했던 제자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나를 버리고 떠나갈지라도 저들 열 두 제자들에게만은 세계 비전을 향한 기대를 걸으셨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한 제자는 예수님을 팔았습니다.  또 다른 한 제자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저주하면서 부인했습니다.
 
주님께서 체포되던 그 시간에 제자들은 겁이 나서 뿔뿔이 도망갔습니다.  십자가에서 신음하며 돌아가시는 갈보리 언덕 그 자리에서 마음껏 목놓아 울지도 못했습니다.  가냘픈 여인들과 이름 없는 제자들,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가 장례를 치루는 그 현장에 제자들은 얼굴도 나타내지 못했습니다.  그야말로 오합지졸과 같은 제자들, 별 볼일 없는 제자들, 두려워서 문을 꼭 걸어 잠그고 골방에 틀어박혀 있는 제자들….  이런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예수님께서 이들을 찾아오신 것은 당신의 기대를 저버린 배반자들을 책망하시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비겁하고 나약한 모습을 꾸중하시기 위해서 찾아오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 주님은 끝없는 용서와 사랑을 가지고 찾아오셨습니다.  저들을 통하여 세계 비전을 이루고자 하시는 거룩한 기대감을 가지고 찾아오셨습니다.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 불안에 신음하는 제자들, 공포에 시달리는 제자들, 이들을 향하여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사랑하는 여러분, 두려움과 불안에 떨고 있던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 순간 그들의 마음에는 두 마음이 요동을 치고 있었습니다.  한쪽에서는 기쁨이 충만합니다.  왜 아니겠습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는데요.  나는 버렸지만, 비겁하게 도망갔지만 부활하신 주님은 사랑과 용서를 안고 찾아오셨는데요.  그들은 부활하신 주님의 손과 옆구리를 보면서 모두가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쪽에서는 여전히 두려움과 불안이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왜 아니겠습니까?  지금 밖에는 유대인들과 로마 병정들이 자신들을 잡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데요.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이런 두 마음은 주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전적으로 믿지 못하기 때문에 마음에는 여전히 두려움과 불안이 떠나가지를 않는 것입니다.

다시 찾아오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이러한 마음을 아셨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주님께서는 두려워 떨고 있는 제자들을 향해 호통을 치셨을 것입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더냐?  너희들이 부활한 나를 보고서도 아직도 믿지 못하느냐?  이것들아!  언제 철이 좀 들래?"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누구보다도 더 그들의 연약함을 아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제자들의 연약함을 아셨던 주님께서는 동일하게 오늘 저와 여러분의 연약함을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사랑하는 여러분, 이 말씀에 위로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주님께서 나보다 더 나의 연약함을 알고 계신다.  주님께서는 못나고 부족하고 연약한 나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찾아오신다.  찾아오셔서 힘과 능력을 주시면서 나에게 기대를 가지고 계신다.  나는 내 기대를 저버렸지만, 내 부모는 나를 향한 기대를 포기했지만 그러나 주님은 결코 나를 향한 기대를 버리지 아니하셨다.  오늘 이 말씀이 여러분에게 위로가 되고 힘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다는 사실에 기뻐하면서도 여전히 두려움과 번민에 사로잡혀 있는 제자들.  그들을 향하여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주님의 말씀에 제자들의 모든 과거는 용서되어졌습니다.  그들의 마음에 자리잡고 있던 모든 공포가 사라졌습니다.  두려움은 눈 녹듯이 녹아졌습니다.  의심의 먹구름은 깨끗이 사라졌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혹여 우리들 가운데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정작 믿음을 잃어버리고 환난과 시련 가운데서 불안에 떨고 계시는 분이 계십니까?  말씀을 듣고 살아가노라 하면서도 말씀의 능력을 상실한 체 무기력하게 살아가는 성도들이 있습니까?  우리 주님께서 부활하신 이 시간에도 희망을 갖지 못하고 절망 가운데 사로잡혀 있는 분이 계십니까?  주님께서 찾아오셔서 우리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으십시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주님께서 주시는 평강은 세상이 주는 그런 평강이 아닙니다.  물질이 주고, 명예가 가져다주는 그런 평강이 아닙니다.  그런 세상적인 평강은 아침의 안개와 같이 곧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우리 주님께서 주시는 평강은 영원합니다.  이 평강은 곤고한 내 삶에 새로운 힘을 줍니다.  이 평강은 모든 환경으로부터 자유할 수 있게 하는 능력을 공급해 줍니다.  이 평강은 절망 중에서도 희망을 갖게 하고, 주님이 주시는 비전을 품고 달려가게 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주시는 이 평강이 오늘 여러분의 심령에 샘솟듯이 솟아나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하면 이 평강을 누릴 수 있습니까?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시면 됩니다.  기억하십시오.  많이 맡기면 많은 평강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적게 맡기면 적은 평안을 얻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시간 우리의 모든 것을 주께 맡기십시오.  모두 맡기면 우리의 모든 삶 속에서 평강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목욕탕에 가면 사물함에 이런 글씨가 쓰여져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귀중품은 주인에게 맡기십시오.  맡기지 않은 물품에 대해서는 분실시 책임지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내 인생의 주인이 되시는 예수님께 당신의 문제를 맡기십시오.  문제를 맡기면 삶이 평안해 집니다.  생명을 맡기면 생명의 평강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물질을 맡기면 물질로부터 자유하면서 참된 평안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우리의 삶의 모든 것을 주님 앞에 맡기면 우리의 삶의 전체가 평강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두려움과 염려와 떨림으로 잔뜩 웅크린 채 앉아있는 제자들을 찾아오셨습니다.  왜 찾아오셨습니까?  무엇 때문에 찾아오셨습니까?  평강을 주시기 위하여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복음을 들고 세계 비전을 향해 나아가는 거룩한 사명을 맡기시기 위해서 찾아오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사랑하는 여러분, 이 말씀은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주시는 말씀임을 기억하십시오.  주님께서는 제자된 저와 여러분에게 복음의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복음을 들고 세계 비전을 향해 달려가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복음 속에 나와 너와 우리 모두가 사는 길이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 속에 가정이 살고 교회가 사는 비밀이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 속에 나라가 살고 역사가 사는 비밀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기억하십시오.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알고 주님의 부활을 목격한 증인들은 이제 그 십자가의 능력을 전해야 합니다.  부활을 전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 속으로 달려가 부활의 소식을 전하십시오.  우리에게도, 당신에게도 부활이 있음을 전하십시오.  복음의 능력, 부활의 능력은 전하는 자에게 더 주십니다.  그러나 전하지 않는 자에게는 있는 것마저도 거두어 가십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있는 그것마저도 거두어가기 전에 복음의 증거자가 되십시오.  전하면 주님께서는 성령님을 통하여 복음의 능력을 끊임없이 공급해 주십니다.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배신자들을 다시 불러 쓰시겠다는 겁니다.  허물 투성이요, 문제 투성이, 여전히 부족한 제자들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신뢰하시면서 제자로 세우시겠다는 겁니다.  벌을 받아 마땅한 사람들이지만, 매를 맞아도 할 말이 없는 사람들이지만 다시 불러서 저들을 통하여 세계 비전을 이루시겠다는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그러나 주님께서 제자들을 보내실 때 한가지 분명한 원칙이 있었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아버지의 뜻을 온전히 이루신 것처럼 주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제자들도 주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어야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제자들이 이 땅에 살아가는 삶의 비밀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가라"
 
이제 제자들의 사명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일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을 증거하는 삶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마늘 한쪽을 먹어도 냄새가 진동을 합니다.  그 신비가 부활의 능력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데 어떻게 예수의 냄새가 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입을 벌리고 살아가는데 예수가 증거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그 엄청난 부활의 능력을 간직하고 살아가는데 우리 삶 속에 부활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나는 부족하니까 주님이 버리실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이전에 한번 두번 실패했다고 주님이 다시는 쓰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실수하고 죄를 지었다고 버림받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주님께서 찾아오시고 또 찾아오셔서 여러분을 쓰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구약 성경의 요나를 보십시오.  요나는 하나님의 사명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헛된 곳으로 가기 위하여 배를 타고 여행길에 나섰습니다.  그리고 그는 풍랑을 만났습니다.  요나, 그가 이 풍랑 속에서 자신의 인생이 끝났다고 할지라도 그는 할 말이 없는 존재가 아니었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요나를 다시 불러 쓰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등지고 도망가던 자리에서 내 인생이 끝장났다고 할지라도 나는 하나님 앞에서 할 말이 없는 존재였습니다.  주님께서 한없이 나를 불러주시고 또 불러주셨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없는 삶을 살았던 헛된 인생살이에서 주님께서 내 인생을 끝장나게 했다고 할지라도 나는 할 말이 없는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다시 불러주셨습니다.  다시 여러분을 쓰시겠다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깨닫게 하시고자 오늘도 찾아오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께서 왜 찾아오셨을까요?  오늘 본문에서 이어지는 22절의 말씀에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두려움과 떨림 속에서 주저앉아 있는 제자들에게 성령을 주시기 위해서 찾아오셨다고 오늘 본문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평강과 성령을 연결하고 있습니다.  복음 전도와 성령을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성령의 도움이 없이는 진정한 평강이 있을 수 없고, 성령의 도움이 없이 능력 있는 복음 전도자가 될 수 없겠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성령은 연약한 자를 강하게 합니다.  슬픈 자를 기쁘게 만들어 줍니다.  냉혈적인 사람을 뜨겁게 만들어 줍니다.  무식한 사람들에게 지혜를 주십니다.  교만한 사람을 겸손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두려움에 떨던 제자들에게 평강을 주십니다.  비겁하게 도망가던 나약한 자들을 다시 불러 영광스러운 천국의 사도로 삼아주시고 순교자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이 숨은 태초에 흙으로 사람을 빚어 만드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시던 바로 그 생기입니다.  주님께서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시니까 생령이 된지라.  살아있는 영적인 존재가 되었다.  창세기에는 그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범죄하고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생기의 요소를 잃어버렸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호흡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창세기에서는 인간을 향하여 이렇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육체가 됨이라"
 
우리 인간에게서 하나님의 호흡을 빼버리고 나면 우리는 흙덩이만 남게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인간들을 우리 주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우리의 온갖 죄악의 짐을 감당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인간들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의 이 말씀을 들으면서 생각나는 한 사건이 있습니다.  바로 에스겔 골짜기에 말라빠진 뼈들을 향한 여호와의 말씀입니다.
"생기야, 숨아 사방에서 불어와 이 사망을 당한 자들에게 불어 살게 하라."
 
그렇습니다, 여러분.  부활하신 주님의 호흡이 불어닥치면 죽음의 자리에게 일어
나게 될 것입니다.  절망의 자리에서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질병의 자리에서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이 시간 부활하신 예수님으로부터 우리 영혼에 깊은 생명의 숨을 들여 마시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성령의 호흡을 우리에게 불어주실 때 성령을 들여 마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성령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성령의 바람을 일으키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성령의 바람을 받지 못하면 이 땅에서 아무리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된다고 할지라도, 아무리 권세 있는 사람이 된다고 할지라도 그는 헛 바람이나 일으키는 사람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령의 권능을 받으십시오.  그래서 헛 바람을 일으키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성령의 바람을 일으키는 하늘의 사람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찾아오신 주님께서는 동일하게 오늘 저와 여러분, 우리들에게도 찾아오셨습니다.  아니 이미 우리들 가운데 계십니다.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왜요?  우리로 하여금 그분이 내 쉬는 성령을 받아 주님의 진정한 제자가 되게 하시려고 말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세계 비전을 품고 이 땅에 그리스도의 계절이 오게 하시려고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독교는 십자가로 끝나는 종교가 아닙니다.  십자가 이후, 죽음 이후에 더욱 풍성한 축복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믿으십시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부활하셔서 하나님 나라 안방에 앉아 계셔서 바둑이나 들고 계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살아 계셔서 오늘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십니다.  여러분의 삶 속에 동행하여 주십니다.  살아 계셔서 역사를 운행하고 계십니다.  부활을 체험한 여러분 모두의 삶을 세상 끝 날까지 함께 하시고 동행하시고 지켜 주실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이 부활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예수님이 내 쉬는 호흡을 내 영혼 깊이 들이마시면서 오늘 주의 성찬에 참여하시기를 바랍니다.  (오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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