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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려주일] 누구를 위한 고난인가? (사 5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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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를 위한 고난인가? (사 53:1-7)

오늘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기 위해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신 주일입니다.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많은 사람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 다윗의 자손으로 오시는 이여' 하면서 환영했습니다. 그래서 '종려주일(Palm Sunday)'이라 부릅니다. 또한 예수님의 고난이 시작되는 주일이라고 해서 '고난 주일(Passion Sunday)'이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으로의 입성은 부귀와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요 고난과 죽음을 위한 입성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목적을 온전히 이루시기 위한 마지막 결단이요 거룩한 선택의  길이었습니다. 에수님의 거룩한 결단으로 인해 오늘 우리는 구원받을 수 있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축복을 얻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의 십자가가 없었다면 그 어떤 구원의 은총도 하나님 자녀가 되는 축복도 없었을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늘 주님을 묵상해야 합니다. 사실 언제인들 우리가 예수님을 생각하지 않겠습니까마는, 특별히 주님의 고난을 기념하는 이 날 한 주간 동안 예수님의 마음을 생각해 보고 그 주님의 마음을 우리도 품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될 수 있는 대로 이 한 주간은 오락을 삼가고 주님의 고난당하심을 묵상하며 경건하게 지내시기를 바랍니다. 고난주간을 시작하면서 우리 위해 고난 당하시고 죽으신 주님의 은혜를 더 깊이 깨닫고 감사하는, 뜻깊은 고난 주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고난주간 동안 특별새벽기도회를 모입니다. 주님의 행적을 따라 새벽예배를 드리며 주님의 고난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온 교회가 함께 참여하여 은혜를 나누는 고난주간의 특별한 새벽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제가 철이 들어서 부모님들의 은혜를 다시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어릴 때는 몰랐습니다. 부모님들의 수고와 고생을 알지도 못했고 알 수도 없었습니다. 택시 운전을 하셨던 아버지는 새벽 일찍 일을 나가셨습니다. 그리고 깊은 밤 통금이 울리고 나면 파김치처럼 되어 피곤에 지친 모습으로 집으로 돌아오셨습니다. 

어머니는 무거운 화장품 가방을 들고 언덕을 오르내리면서 팔이 빠지는 고통도 참으셨습니다. 밤이면 어깨의 통증으로 아파 신음하시는 어머니의 신음하시는 의미를  잘 몰랐습니다. 저는 그저 늘 투정이나 부리고 조금 부족한 것 때문에 불평을 늘어 놓으면서 부모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드렸습니다. 

그분들의 수고와 고생은 모두 날 위한 것이었지만 나는 그것을 가슴 깊이 담아내지 못하고 살아왔습니다. 그런 아버지를 사랑하고 어머니를 사랑합니다. 그러나 입술의 사랑만을 말할 뿐 진정 사랑해드리지 못하고 사는 것이 제 모습입니다. 

오늘 본문 이사야 53장은 메시야이신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겪으실 고난에 대한 예언이 아주 선명하게 기록되어 있는 말씀입니다. 이 예언의 말씀대로 예수님은 세상에 오셔서 온갖 멸시와 천대, 굴욕과 고통을 다 겪으셨고 결국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오늘 말씀은 고통이나 고난에 대한 말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질고를 지셨다" "슬픔을 당하였다" "징벌을 받았다" "맞으며 고난을 당했다" 
"찔렸다" "상했다" "징계를 받았다" "채찍에 맞았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우리가 그 말들 속에 담겨진 고통과 고난을 다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무거운 징벌, 슬픔, 찔림, 징계.... 이 단어들에 대하여 여러분들은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사실 그 고난과 아픔과 징계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큰 고난이며 아픔이라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그러면 본문에 예언적으로 말씀된 예수님이 왜 이렇게 극심한 고난을 당하게 된 것입니까? 무엇 때문에! 그렇게 혹독한 고통을 당하게 된 것입니까? 
이것이 오늘 우리가 관심 가져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말씀의 중심주제는 누구를 위한 고난이냐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예수님은 그토록 무서운 고난을 받으셔야 했느냐는 것입니다. 

1. 주님의 고난은 나 때문에 당하신 고난입니다. 

본문 4절 이하의 말씀을 보면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우리의 허물, 우리의 죄악, 우리의 슬픔이라 말씀하십니다. 

5절에서는 좀 더 구체적으로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셨거늘...” 

우리의 허물, 우리의 죄악을 인하여 가시면류관을 쓰셨고, 그 몸이 못에 찔리셨고, 그 몸이 상하셨습니다. 채찍에 맞으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고난 받으심은 바로 내 죄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은 무슨 죄가 있어서, 허물이나 무슨 잘못을 크게 저질러서 당하신 고난이 아닙니다. 바로 "우리(나)" 때문이었다고 성경은 계속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계속 나오는 "우리"가 누구이니까? 곧 "나"입니다. 즉 나 위해 고난을 받으신 것입니다. 나의 허물, 죄악, 교만, 혈기 때문입니다. 내가 받아야 할 형벌을, 내가 져야 할 십자가를 주님이 대신 지신 것입니다. 

“예수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질 때 세상 죄를 지시고 고초당하셨네 
예수여 예수여 나의 죄 위하여 보배 피를 흘리니 죄인 받으소서.” 

우리 모두는 "나 때문입니다" 이렇게 고백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고난, 굴욕, 멸시, 천대, 십자가, 죽음도 모두 나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다 '나 때문입니다'고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 때문에, 내 죄를 위해 주님이 고난 받으셨음을 믿고 나의 죄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고백할 때 주님과 나와의 관계가 성립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 4절을 보면 어떤 사람들은 뻔뻔스럽고 뒷짐을 지고 함부로 말합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은 모든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친히 지신 것인데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에 대해 곡해를 했습니다.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께 매를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고 엉뚱한 생각들을 했습니다. 고난을 받으며 참을 수 없는 인간의 한계의 그 고통 중에 신음하는 고난의 종을 바라보면서 함부로 정죄하고 판단했습니다.  

창에 찔리고, 매를 맞고, 심문을 당하고, 끌려갔습니다. 온갖 수모와 멸시와 천대와 조롱을 다 겪으셨습니다. 머리에는 가시관을 쓰시고 두 손과 두 발에는 못을 박히시고 허리는 예리한 창에 찔림을 받아 물과 피를 다 쏟으셨습니다. 

그러나 조롱하는 사람들은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뛰어내려라"고 조롱합니다. 십자가에 매달고 발가벗긴 채 수치심을 건드리고 자존심을 자극했습니다.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갈보리 언덕길을 올라가실 때 군병들은 채찍으로 때렸고, 군중들은 침을 뱉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7절을 보면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도 입을 열지 아니하였고",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털깍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처럼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다"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보여주신 주님의 태도는 무엇입니까? 주님의 침묵입니다. 
원수들이 예수님의 얼굴에 침을 뱉고 주먹으로 치고 손바닥으로 때렸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항변하지 않으셨습니다. 공격하지도 않으셨습니다. 

마27:12에 보면 무리들이 예수님을 고소했습니다. 예수님께 무슨 죄가 있다는 말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죄가 없으니 얼마든지 입을 열어 항변할 수 있었으나 입을 열지 아니했습니다.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과 같았습니다. 

예수님은 괴로워도 억울해도 입을 열지 아니 했는데 왜 그랬습니까? 

이유는 주님의 뜨거운 사랑 때문입니다. 가슴에서 치밀어 오르는 사랑이 입을 다물게 한 것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자기를 못 박는 무리를 보고 탓하지 아니했습니다. 시비를 걸지 아니했습니다. 오히려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사하여주옵소서" 하면서 고난을 감수하고 피땀을 흘리시면서 기도했을 뿐입니다. 괴롭고, 아프고, 억울하고, 자존심이 상하고, 체통이 무너져도 침묵하셨습니다. 그러므로

2. 주님의 고난은 사랑입니다. 

왜 주님 고난을 받으셨습니까? 그 멸시와 천대와 조롱을 침묵으로 견디셨습니까? 
그것은 모두 사랑 때문입니다. 
사랑하시기에 고난도 참으시고 조롱과 멸시도 견디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고난 앞에서 우리를 향한 나를 향한 주님의 사랑을 발견해야 합니다. 누구를 위한 고난인가?는 바로 나를 위한 고난이며 나를 사랑하신 그 사랑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6)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요1서4:9)

주님의 고난은 곧 사랑입니다. 십자가는 사랑입니다. 고난의 이유도 사랑이요 고난의 목적도 사랑입니다. 내가 너를 사랑하노라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은 오늘도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의 고난을 기억하고 그 발자취를 따르기를 원하는 우리들이 지금 고백해야 할 것은 주님 저도 주님을 사랑합니다.라는 고백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은 십자가의 고난까지 받으시면서 몸소 사랑을 보여 주셨습니다. 주님의 고난 앞에서 주님 절 위해 그건 고난을 받으셨군요. 그 고난을 참으실 만큼 저를 사랑하셨군요. 고백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더욱 중요한 말씀이 있습니다. 

5절 다시 보겠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우리가 이 말씀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주님의 고난은 곧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3. 주님의 고난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고난 당하심으로 우리에게 어떤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났습니까? 

1) 우리 허물을 용서받았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니" 
여기서 찔리고 상했다는 말씀은 단순한 상처를 말하지 않습니다. 격렬하고 고통스러운 죽음을 의미합니다. 
허물이란, 모르고 지은 죄를 의미합니다. 일부러 지음 죄가 아니라 모르고 지은 죄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찔리시고 고난으로 우리의 허물이 용서를 받게 되었습니다. 

2) 우리 죄악이 용서를 받았습니다.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니" 
죄악이란, 일부러 지은 죄나 알고도 마음이 연약하여 이기지 못하고 지은 죄를 말합니다. 아담은 선악과를 따먹으면 안되는 줄 알고도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피흘림의 가죽옷을 입혀 주시면서까지 용서하여 주셨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찔리시고 상하셨기 때문이고 그래서 주님 안에는 참 자유가 있는 것입니다. 

3)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막힌 담이 헐어졌습니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죄로 말미암아 놓여진 담이 주님이 징계를 받으심으로 인하여 우리는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 평화는 세상적인 단순한 평화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화목케 됨을 말합니다. 

4) 병이 나음을 입었습니다.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십자가는 우리의 죄와 허물 그리고 하나님의 징계를 몰아낼 뿐 아니라 모든 질병에서도 구원해 주셨습니다. 치료해 주셨습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4. 고난당하신 주님을 생각하며 우리가 취할 태도가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고난 당하신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 보면서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아야 하겠습니까? 어떻게 기도를 드려야만 하겠습니까! 어떤 찬양을 드려야 합니까? 

첫째로, 날마다 주님의 고난을 생각하고 나 때문입니다 고백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왜 죽으셨는가, 왜 고통을 받으셨는가를 늘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크신 사랑을 감사해야 합니다. 
둘째로, 주님의 사랑을 증거해야 합니다. 
나는 주님 때문에 죄 사함 받고 구원받았노라고, 주님은 나를 살리시기 위해 죽으셨노라고, 입을 열어 다른 사람에게 널리 증거해야 합니다. 바로 이점이 이제 고난주간을 시작하는 이 종려주일에 우리가 깊이 묵상해야할 주제이며 말씀인 것인데... 다 나 때문이며 우리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셋째로, 나도 그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주후 4세기에 마카리우스라는 사람이 이집트에 살았습니다. 그는 사막의 성자라고 불리우는 사람입니다. 한 번은 그가 꿈을 꾸었습니다. 꿈에 예수님이 무거운 십자가를 지시고서 힘들게 걸어가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마카리우스는 예수님에게 다가갔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 주여! 그 십자가를 제게 주십시오. 제가 그 십자가를 지겠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아무 말씀도 하지 아니하시고 그저 묵묵히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힘들게 앞을 향해서 계속해서 걸어가고 계셨습니다. 마카리우스는 계속해서 예수님께 졸랐습니다.
"오, 주여! 그 십자가를 제게 주십시오. 제가 지겠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마카리우스를 향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들아, 네가 저야 할 십자가는 저기 있느니라. 가서 너의 십자가부터 먼저 지고 내게로 오너라. 그러면 내 십자가를 주겠노라."

거기에 가니까 그가 져야 할 십자가가 놓여 있었습니다. 마카리우스는 자기가 져야 할 십자가를 지고서 땀을 뻘뻘 흘리면서 예수님께 왔습니다. 그런데 와 보니까 예수님의 어깨에 지어져 있던 십자가가 사라졌습니다. 마카리우스는 깜짝 놀라서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오, 주여! 주님의 십자가를 누가 대신 졌습니까?"

그때 예수님은 미소를 띠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내 아들아! 네가 나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네가 져야 할 십자가를 기쁨으로 지는 것이 곧 나를 위한 길이란다. 나의 십자가를 네가 대신 져 주는 것이다."

사랑을 받은 사람은 그 사랑의 빚을 갚을 의무가 있습니다. 내가 받은 그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주님을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 사랑에 감격하고, 그 사랑을 감사하고, 그 사랑을 실천하는 모든 주의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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