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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려주일]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 (마 27: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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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 (마 27:11-26)

미국의 위대한 경제 대통령하면[프랭클린 루즈벨트]를 주저 없이 꼽습니다. 그의 이름을 들으면<경제 대공황을 극복한 대통령>으로 기억하지 그가 소아마비를 앓은 장애인으로 기억하는 사람은 적습니다. 악성[베토벤]은 청각장애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베토벤을 청각장애인으로 기억하지 않습니다. 위대한 작곡가 중의 작곡가로 기억할 뿐입니다. [링컨]전 미국대통령도 그를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무학자로 기억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만 노예를 해방한 위대한 대통령으로 기억할 뿐입니다. [존 번연]하면 <천로역정>을 쓴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감옥에서 평생을 보낸 사람으로 기억하지는 않습니다. 이외에도[아인슈타인]을 지진아로[에디슨]을 무학자로 기억하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다만 최고의 과학자와 발명가로 기억할 뿐입니다. 이 모든 사람들은 남다른 위기를 겪으면서 그 역경을 이겨낸 인간승리의 모범을 보여준 사람들입니다. 이 처럼 인생에는 위기가 오고 그것을 새로운 기회로 만드는 turning point즉<전환점>으로 삼아 극복한 사람들은 훌륭한 삶의 자취를 남기지만 그 위기에 굴복하고 만 사람들은 비참하게 인생을 마감하기도 합니다. 

[래리 엘 맥스웨인]이라고 하는 사람은 인간이 살아가는 동안 겪는 위기에는 대략 다섯 가지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 첫째는<신체적 위기>입니다. 살아가면서 내가 병에 걸린다든가 혹은 죽음에 직면했다든가 하는 육체적인 위기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자아의 위기>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존재 의식의 상실입니다. 어느 순간엔가 우리는 스스로를 생각하면서 왜사나 싶을 정도로 자신의 존재가치에 대한 괴멸감에 빠질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정신적으로 허탈해지면서 매사에 자꾸만 절망으로 치닫는 삶의 위기를 자아의 위기라 합니다. 

그리고 세 번째의 위기는<인간관계의 위기>가 있습니다. 대인 관계가 단절되면서 오는 고독입니다. 내가 잘못해서이든지 아니면 상대방의 잘못이 크든지 어떠한 이유로든지 인간관계에 금이 가서 회복하기가 쉽지 않을 경우가 있는데 이를 곧 인간관계의 위기라 합니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이 세 번째의 위기를 겪고 살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은<환경적 위기>입니다. 이것은 무엇입니까? 요새 우리가 아는 대로 공해라든가 자연 파괴라든가 하는 것으로 오는 환경적 위기입니다. 오존층이 파괴 되었다고 합니다. 황사가 불어온다고 합니다. 이 모든 것들이 환경의 위기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보다 결정적으로 가장 무서운 위기는<영적인 위기>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무서운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이지러질 때, 이것은 마지막입니다. 신앙의 관계, 믿음의 관계에 틈이 벌어지기 시작하면 그 때는 바로 총체적 위기입니다. 

이 신앙의 위기에서 무엇을 선택하느냐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영적 위기 속에서 올바른 선택으로 신령한 것을 얻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잘못 선택하여 악한 것들로 마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에게 신체적 위기가 있고 자아의 위기도 오고, 인간관계의 위기도 반드시 있고, 환경적 위기 속에 산다고 하지만 그때마다 현명하게 잘 선택하여서 이것들로 인하여 영적인 위기까지 이어지게 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실패입니다. 결국 무너지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가룟 유다]가 그랬습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까지 선택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지만 가룟 유다는 자신의 욕망을 위한 길을 택하므로 악한 길로 갔던 사람입니다. 또한[베드로]가 그랬습니다. 예수님께서 붙잡히셨습니다. 바로 방금 전까지만 해도 예수님 곁에는 수많은 제자들이 따랐었는데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어려움을 당할 때 누군가가 곁에 있어주기만 해도 힘이 되련만 제자들은 모두가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그 중에 베드로는 구경꾼들 틈에 끼여서 붙들려가는 예수님을 멀찍이서 따라가고 있었습니다. 적어도 3년 동안 예수님을 좇으면서 예수님의 행동도 지켜보았습니다. 가르침도 다 들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에 그는 예수님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안전을 위한선택으로 주님을 버리고 말았습니다.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베드로라고 하는 사람은 실패한 인생입니다. 

영적 위기 앞에 잘못된 선택으로 말미암아 무너지는 한 인간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이 일로 인해 베드로는<예수님을 부인한 제자>라는 낙인을 후세에까지 떨쳐 버리지 못하게 되고 말았습니다. 물론 나중에 회개는 했지만 처음부터 잘못된 선택이 없었더라면 얼마나 자랑스러운 제자의 삶을 처음부터 끝까지 살았겠습니까? 

위기 앞에서 그의 선택이 무엇이냐에 따라 그 결과는 실로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 인생은 끊임없이 선택하면서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위기의 상황이든, 고난의 순간이든, 어느 한쪽을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삶을 살아갑니다. 또한 그럼으로써 애석하게도 다른 어느 한쪽을 잃어버리지 않으면 안 되는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인생의 위기가 곧 선택의 순간이 되는 것입니다. 

숯과 다이아몬드는 그 원소가 똑같은 탄소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탄소라는 그 똑같은 원소가 하나는 아름다움의 상징인 다이아몬드가 되고 다른 하나는 보기에 보잘 것 없는 검은 숯 덩어리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습니까? 어느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지는 하루 24시간이라는 원소가 있습니다. 그 원소는 누구에게나 주어지지만 그것을 다이아몬드로 만드느냐 숯으로 만드느냐는 각각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인생은 다이아몬드라는 아름다움을 통째로 선물하지는 않습니다. 단지 가꾸는 사람에 따라 다이아몬드가 될 수도 있고 숯이 될 수도 있는 그 씨앗을 선물할 뿐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때로는 우리의 선택이 나 자신에게는 지울 수 없는 아픔을 가져다 줄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내 생명을 버리는 큰 희생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요, 더 많은 사람을 살리고, 나를 희생한 것이라면 더 가치가 있는 인생의 선택이 될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그런 아름다운 선택이 얼마든지 있지 않겠습니까? 성경에도 보면 선택에 대한 역사가 무수히 많습니다. 

가나안에서[아브라함]과 조카[롯]사이에도 선택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이삭의 쌍둥이 아들[야곱]과[에서]의 경우도 잘못된 선택으로 인하여 이들의 장래가 갈라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마르다]와[마리아]자매가 선택의 문제를 겪었습니다.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여 바울을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훌쩍 떠나버렸던[데마]가 그랬고, 갈라디아로 떠난[그레스게]가 그랬고, 달마디아로 떠난[디도]가 그랬습니다.(딤후4:10) 선택에는"어떤 것이 좋으냐?"하는 가치 판단이 따르게 마련입니다. 그에 앞서 더 중요한 것은 그 가치를 무엇에다 두느냐 일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 속에서 영적 위기 앞에 잘못된 선택으로 말미암은 불신앙의 모습들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로마군대에 잡히셔서 빌라도 앞에 심문을 당하시는 장면입니다. 때는 유월절 명절이었고 법이라기보다는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한 로마정부의 정책으로 전례에 따라 명절특사로 죄수 하나를 석방해 주는 날이었습니다. 빌라도는 백성들에게[예수님]과 죄수[바라바]중 누구를 석방시키기를 원하느냐고 선택권을 주었습니다. 이때 백성들은 하나 같이[바라바]를 석방해야 된다고 잘못된 선택의 결과를 한 목소리로 외쳐대는 인류역사상 가장 큰 오판을 저지르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 이 오판 앞에 가부간(可否間)에 결정해야 할 순간이 얼마든지 많은 우리들을 생각해야합니다. 특별히 신앙적인 선택, 즉 영적인 선택의 문제입니다.<십자가냐? 세상이야?>,<복음이냐? 현실이냐?>의 문제 앞에 늘 갈등하며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주님 십자가를 지신 종려주일과 고난주간을 맞이하면서 우리는 십자가를 지신 연약한 예수 그리스도냐? 아니면 큰소리치며 오만과 독선으로 가득한 세상과 나 자신을 위한 일을 택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실수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자칫하면 예수님을 또 십자가에 못 박는 일을 저지르고 말 것입니다. 오늘 영적위기 앞에서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를 본문에서 그 비결을 배울 수 있습니다. 본문의 사람들이 어떻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는지를 분명히 알고 우리는 그 일에 동참하지 말아야겠습니다. 

먼저는 감정에 의존한 선택으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빌라도 앞에까지 오게 된 과정이 무엇입니까? 12절을 보게 되면"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고소를 당하되..."그랬습니다. 이들이 왜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하라고 고발했습니까? 시기심 때문입니다. 정치적인 대립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개인적인 다툼이 일어났던 것도 아닙니다. 종교적인 문제 그 이전에 인간적인 시기와 질투가 이런 고발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곳이면 언제나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그 진리 앞에 삶이 변화되는 모습이 보이거든요. 지금까지 자기들이 그렇게 외치고 가르쳐도 보지 못했던 변화입니다. 사실이지 이미 그들은 그럴만한 인격도 잃었고 존경을 잃었지 않습니까? 그러니 어느 백성이 그들을 따르겠습니까? 이렇게 자기들의 위치가 형편없이 추락한위기 앞에서 한다는 짓이 예수님이 백성들을 선동한다고 중상모략하고 예수님의 죽음에 결정적인 동조를 하는 패거리를 만들고 말았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이 자기의 말을 듣지 않을 때에 자기의 인격적 결함이나 존경받지 못하는 이유를 먼저 생각하지 못하고 남들을 욕하는 어리석음을 범합니다. 우리가 기억해야할 것은 기도하지 아니한 감정과, 기도하지 아니한 상황의 선택은 오류를 범하기 쉽다는 사실입니다. 먼저 기도할 일입니다. 그래야 내 인격도 올바로 되고, 그래야 존경도 받는 것이고 그래야 영적 위기 앞에 신앙적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생존경쟁에 살다보면 나보다 앞서는 사람도 있고, 나보다 열심을 내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기도하지 않아서 완악한 마음과 인격으로 무조건 비난하고 모함하는 저질적인 속성을 가지고는 사실선택에 있어서 분별력이 약하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감정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감정에 의존한 순간의 선택은 곧 후회를 가져올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어리석은 일이 되기도 합니다. 

또 하나의 사실은 무지에 의한 선택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나는 유대백성들이 그들입니다. 이들이 종교지도자들에게 얼마나 세뇌를 당했는지 보세요. 21절에"둘 중에 누구를 놓아주기를 원하느냐?"는 빌라도의 질문에 한결같이"바라바로소이다!"라고 대답합니다. 이어"그러면 예수는 내가 어떻게 하랴?"라는 빌라도의 질문에 한 목소리로"십자가에 못 박아야 하리라"고 마치 짜 놓은 각본을 합창하듯이 거침없이 대답합니다. 23절에는 더욱 소리 질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건 <구호>입니다. 입을 맞추어 함께 소리 내는 것을 구호라고하지 않습니까? 철저히 선동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적어도 이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아는 예수님을 생각하는 이성을 가지고 있어야 했습니다. 그래도 직전까지 예수님 곁을 따랐던 수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무지해질 수가 있단 말입니까? 이것이야말로 <무지의 선택>입니다. 

우리 또한 그렇습니다. 신앙생활하면서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예수를 모르고 신앙생활 합니다."예수를 안다면 저런 말을 하지 않을텐데...","예수를 안다면 저런 행동은 감히 할 수 없을텐데...","정말 저 사람의 생각과 행동 속에 예수가 있는 것일까?"싶을 정도로 무지하면서도 그걸 몰라요. 진리를 보지 못하고, 예수를 보지 못하고, 뜬 구름만 잡으면서 망해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말입니다. 진리가 없고, 예수가 없는데 무슨 신앙생활을 한다고 큰소리칩니까? 이건 망조입니다. 오늘 이 유대백성들은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다시 한 번 깨달아 알아야했습니다. 자기들을 위하여 무거운 십자가를 지시고 갈보리 언덕위에서"저들을 불쌍히 여기소서!"하며 기도하신 예수가 자기들의 가슴속에 있음을 한번만이라도 확인했어야 했습니다. 잘못된 종교 지도자들의 선동에 놀아 날 것이 아니라 숱한 채찍과 조롱과 멸시 속에 피를 쏟으시며"내가 너희를 사랑하노라"애타게 부르짖는 그 예수님의 음성을 미리 들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무지했습니다. 신앙에 무지하면 선동당합니다. 그럴싸한 언변이나 감정을 자극하는 한 마디에 홀딱 속아 넘어가서 똑 같아지고 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이렇게 찬양은 합니다."왜 주님 갈보리 가야했나? 왜 날 사랑하나?"그러나 정말 왜 주님이 갈보리로 가야하셨는지, 왜 십자가를 지셔야 했는지 아십니까? 신앙에 무지하고 내 자신에게만 민감했던 나 때문에 갈보리로 가셨습니다. 믿음이 없이 세월만 보내면서 조금의 변화도 없이 여전히 감정적으로만 살아가는 나 때문에 십자가를 지신 것을 여러분은 다 아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이제는 또 다시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무지의 선택, 감정의 선택으로 순간순간을 위기로 몰지 말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주님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는 고난주간입니다. 그 옛날 제자들은 영적위기 앞에 하나같이 주님을 버리고 자신의 안위와 세상을 선택하여 주님 곁을 떠나버렸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십자가와 현실 앞에 무엇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신앙과 나 자신 앞에 어떤 선택을 하며 나아가겠습니까? 바라건대 가치 없는 인간의 감정에 의존하지 말고 주님 십자가지심의 의미를 바로 깨달아 가치 있는 것에 여러분의 영적선택권을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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