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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려주일]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눅 19:2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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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눅 19:28-40)

오늘은 우리교회가 지키는 춘계 성례주일이며, 교회력으로는 고난주일이며, 종려주일입니다. 고난주일이라고 하는 것은 이번 주간에 주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기 때문에 고난주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또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오늘은 우리 주님이 베다니에서 나귀를 타시고 감람산을 넘어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셨습니다. 이 날 많은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환영하는 가운데 입성하셨기 때문에 종려주일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기억하면서 경축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 기독교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의 사건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초대교회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중심으로,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터전으로 하여,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생명의 진리로, 우리를 구원하시는 영원한 진리라고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모인 공동체입니다. 우리는 모일 때마다 예배드리며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주님을 기억하고 회상하면서 부활하신 주님이 우리 중에 임재하시는 것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우리 한국교회는 40일이란 긴 시간의 사순절을 보내고, 고난주간, 성금요일을 경건하게 보내고 있습니다. 모두다 주님의 고난에 그 초점을 맞추다 보니, 부활주일의 기쁨이 크지 못하다는 지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오직 하루만의 부활절, 기쁨이 사라진 부활절, 하루의 기쁨으로 그치는 부활절이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오순절 즉 성령강림절이 될 때까지 50일 동안을 ‘기쁨의 50일’로, 부활의 감격으로 남은 한 해를 보내는 그런 큰 기쁨을 누려야겠습니다. 이번 부활절에는 승리에 초점을 둔 찬양과 경배의 예배와 성도의 교제로 보내려고 합니다. 초대교회는 부활주일이 단 하루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부활 주일 아침부터 시작하여 오순절 성령강림절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이 부활 절기는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는데, 유월절(파스카)의 절기, 기쁨의 50일, 위대한 50일이라고 불렀습니다. 니케아종교회의에서는 이 부활절기는 기쁨과 축제로 보내라고, 무릎을 꿇는 것도 공식적으로 금하였습니다. 

교회력의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주님은 공생애의 마지막 한 주간을 예루살렘에서 보내셨으며, 우리 주님은 예루살렘에서 죽으셨으며 삼일 후에 부활하셨고, 예루살렘에서 승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귀한 진리의 말씀을 선포하시면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데, 제자들 보다 앞서서 가시고 있었습니다. 우리 주님은 여리고에서 삭개오를 만나시고 그 집에 유하셨으며, 베다니를 거쳐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고 있습니다. 베다니라는 동리는 감람산 기슭에 위치한 조그만 동리입니다. 

감람산이란 이 산은 해발 800m의 높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보다 90m 정도 높아서 감람산 정상에 서면 예루살렘 시내가 한 눈에 내려다보입니다. 보통 갈릴리에 사는 유대인들은 베뢰아 지방을 돌아서 여리고에 와서 쉬고, 다시 여리고를 출발하여 베다니에서 머물고 감람산을 넘어 예루살렘에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감람산을 아주 중요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스가랴14:4에는 감람산에 대하여 예언의 말씀이 있습니다. “그 날에 그의 발이 예루살렘 앞 곧 동쪽 감람산에 서실 것이요 감람산은 그 한 가운데가 동서로 갈라져 매우 큰 골짜기가 되어서 산 절반은 북으로, 절반은 남으로 옮기고”(슥14:4)라고 하셨습니다. 그 날, 메시아의 날, 하나님의 심판의 날에 하나님의 사자, 전능하신 하나님의 발이 예루살렘 앞 곧 동쪽 감람산에 서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감람산으로 내려오시는 메시아가 예루살렘에 들어오실 때에 가장 먼저 부활하겠다고 겟세마네 동산과 기드론 골짜기의 양 옆은 온통 묘지가 되었습니다. 우리 주님은 감람산 꼭대기에서 승천하셨고, 하늘로 올라가신 모습 그대로 다시 오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도 감람산은 우리 주님이 다시 오시는 장소로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벳바게와 베다니에 가까이 가셨을 때에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너라. 만일 누가 너희에게 어찌하여 푸느냐 묻거든 말하기를 ‘주께서 쓰시겠다’고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고 하셨습니다.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 동리로 들어가서 예수님이 말씀하신대로 어린 나귀가 문 앞 거리에 매여 있는 것을 보고는 풀어 끌어오려고 하였습니다. 마침 그 나귀의 주인이 그곳에 있었습니다. 낯선 청년들이 동리로 들어오더니 나귀 새끼를 끌어가려고 합니다. 주인이 말합니다. 누가복음에는 임자들이 나와서 말하였는데, 주인어른과 집안의 자녀들이 함께 나와 말한 것으로 보여 집니다. “어찌하여 나귀 새끼를 푸느냐”“나귀 새끼를 풀어 무엇하려느냐”고 했습니다. 두 제자는 선생님이 말씀하신대로 “주께서 쓰시겠다고 하십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주인이 순순히 허락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유대나라의 인심이 정말 후한 것을 봅니다. 우리나라가 같으면 주인이 싸우자고 달려들었을 것입니다. “아니 너의 주인하고 이 나귀새끼하고 무슨 상관이야, 어림없는 소리 하지마,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그만 가봐. 너의 주인 데려고 와봐” 아마 그랬을 것입니다. 

두 제자의 하는 일이 정말 진지한 모습이었고, 정직한 사람들이었고, 주의 명령을 받들어 왔다고 하는데, 거역할 수 없는 분위기였을 것입니다. 두 청년은 나귀 새끼를 끌어다 팔아먹을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 사건을 놓고 마태복음에서는 구약 스가랴의 예언의 말씀을 인용하여 바로 그 예언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나귀를 타시고 입성하신 것은 선지자 스가랴의 예언의 말씀을 이루려고 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 새끼 위에 걸쳐놓고, 예수님을 나귀에 태우고 갈 때에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 폈습니다. 이런 일은 예수님을 높이고, 예수님을 존경하는 마음에서 나온 행동이었습니다. 구약에도 겉옷을 깔거나 옷을 길에 펴는 일은 매우 존경한다는 표시였습니다. 왕으로 환영하는 모습입니다.

이 때 예루살렘은 유월절을 맞아 큰 무리가 예수님을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오신다는 말을 듣고는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왔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예수님을 맞이하는데,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라고 외쳤습니다. 복음서마다 찬송하는 내용이 조금씩 다른데, 호산나를 외쳤으며, 다윗의 자손이여,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누가복음을 본문으로 하고 있기에 본문에 충실하려고 합니다. 감람산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려면 산을 내려와야 합니다. 예루살렘에 먼저 도착하거나 들어가던 무리들은 예수님이 자기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면서 기뻐하였습니다.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라”라고 외쳤습니다. 

우리 주님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십니다. 여기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이 보내신 왕이라는 말입니다. 사실 이러한 모든 말은 예수님을 정치적인 메시아로 인정하는 말이요, 자기들의 희망이라는 뜻으로 외친 말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겸손하셔서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주님을 알아야 합니다. 겸손하게 짐승에게 당신의 몸을 맡기시고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고 있는 주님을 우리 안에 모셔야 합니다. 주님이 온유하시고 겸손하셨으면, 주님이 낮아지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면 우리도 온유하고 겸손하여야 하며, 주님은 당신을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면 우리도 그래야 주님을 영접할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의 출신으로 목사님이 되신 분들이 몇 분이 있는데, 공진수목사님이 그 중의 한 분입니다. 공현식 장로님의 신앙을 이어받아 목사가 되시고, 온누리 교회를 섬기던 중에 지금은 부천온누리교회를 담임하고 있습니다. 공진수목사님이 ‘예배드림’이란 책을 썼습니다. 장신대에서 목회상담학을 전공하여 박사학위를 받았는데, 목회상담의 결론은 사람의 변화인데, 예배야 말로 사람을 변화시키는 가장 중요한 사건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예배드림이란 책을 3부로 나누고 있습니다. 1부는 ‘하나님을 만나다.’ 2부는 ‘하나님을 닮는다.’ 3부가 결론인데, ‘하나님으로 채워지다!’라고 했습니다. 3부에서 “예배는 비움 그리고 채움의 원리”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비워야 채울 수 있습니다. 비움이 먼저요, 비워야 채울 수 있습니다. 채움에는 선택이 필요합니다. 공목사님의 글이 너무나 좋아서 그대로 인용해봅니다. 

“당신이 세상으로 채워져 있으면 거룩은 담을 수 없다. 당신이 나로 채워져 있으면 하나님은 담을 수 없다. 당신이 욕망으로 채워져 있으면 사랑은 담을 수 없다. 당신이 의심으로 채워져 있으면 믿음은 담을 수 없다. 당신이 절망으로 채워져 있으면 희망은 담을 수 없다. 당신이 죽음으로 채워져 있으면 생명은 담을 수 없다. 예배란 나를 버리고 죄를 버리고 욕망을 버리고 과거를 버리는 비움의 과정이다. 예배란 분노를 버리고 고통을 버리고 상처를 버리는 비움의 과정이다. 예배란 그 비워진 곳에 하나님을 채우고, 거룩을 채우고, 사랑을 채우고, 믿음을 채우고, 희망을 채우고, 생명을 채우는 과정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예배를 다시 한번 돌아보게 하였습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우리 왕이십니다. 만왕의 왕이십니다. 그래서 왕중 왕이라고 부릅니다. 주님은 왕권을 가지고 오셨습니다. 

오늘 우리 주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는 것은 구경삼아 가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십자가에 죽으시기 위하여 들어가시고 있습니다. 당신이 이미 세 번이나 예언하였습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것도 한번이 아니라 세 번이나 거듭 말씀하셨습니다. 

어린 나귀를 타시고 입성하시는 주님을 상상해보아야 합니다. 그 모습은 결코 화려하지 않습니다. 멋져 보이지도 않습니다. 예수님이 흰말을 타시거나 검정말을 타시고, 아니면 수례를 타시고 입성하시면 당당하고 멋질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스가랴9:9의 말씀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고 하셨습니다. 스가랴의 예언이나 유대인들의 외침을 보면 우리 주님은 우리의 영원한 왕이 되십니다. 

절대군주 시대에 왕이라고 하면 모든 국민의 생사의 권한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왕이 평안한 것은 곧 국민이 평안한 것이요, 왕이 불편하면 온 국민이 불편한 것이었습니다. 왕의 명령이라고 하면 죽어야 하고, 또 살아야 합니다. 그래도 좋습니다. 세상 나라의 백성이 왕의 명령을 따라 산다고 하는 것은 영광 중에 영광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한 마리의 나귀와 같아야 합니다. 주님이 쓰시겠다고 하면 나귀만 아니라 나의 모든 것까지도 다 내어드릴 수 있어야겠습니다. 주님이 쓰신다고 하면 다 내어 드리고 기뻐할 수 있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나 같은 사람은 정말 거들떠보지도 않을 나귀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나의 등에 우리 주님이 타고 계시므로 우리는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왕이십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여러분에게서 예수님이 내려오시면 정말 보잘것없는 나귀에 불과합니다. 예수님을 내 등에 모시고 갈 때가 영광이지, 예수님이 불편하여 내려와야 한다고 하면 그 사람은 아무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모시고 갈 때에 영광입니다. 예수님은 나의 영광입니다. 우리는 나를 비우고 예수님으로 채워져야 합니다. 예수님으로 만족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겉옷을 벗으면 그 순간 종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래도 좋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모시고 가는 종들입니다. 그러나 만왕의 왕이신 주님의 종들입니다. 영광입니다. 자랑입니다. 감사만 있을 뿐입니다. 

오늘 세례와 성찬식이 있는데, 이것을 성례전이라고 부릅니다. 성례전이란 말은 라틴어로 Sacramentum 이라고 하는데, 영어로 Sacraments라고 번역하여 사용하고 있습니다. 처음 이 말을 공식적으로 사용한 사람은 3세기의 교부 터튤리안(Tertullian)이라고 합니다. 성도들이 오직 그리스도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기로 약속하면서 세례를 받고, 성만찬에 참여하는 그 예전을 싸크라멘툼이라고 불렀습니다. 본래 이 말은 로마의 군인들이 입대하면서 황제 앞에서 목숨을 바쳐 황제를 위하여 싸우기로 맹세하는 입대식을 싸크라멘툼이라고 불렀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로마의 황제는 만왕의 왕이었습니다. 당신은 우리의 주가 되십니다. 로마 황제 앞에서 “황제는 우리의 주이십니다.”라고 충성을 외칠 때에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의 주가 되십니다.”라고 외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로마 황제 앞에서 곧 죽음이었습니다. 그래도 좋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종들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인생을 주님께 맡기시겠습니까? 그것은 주님이 여러분의 결정권자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주님께 100%의 순종과 헌신을 약속할 때에 악한 사탄이 우리 곁에서 속삭일 것입니다. “너 다 내려놓으면 안 돼, 네 몫을 챙겨놓고 나머지만 드리라”고 유혹할 것입니다. “하나님께 충성하겠지만 이것, 이것은 안 됩니다.”라고 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을 왕으로 고백하고 헌신하려고 하면 내가 죽어야 합니다. 

바울은 자기 안에 그리스도가 사신다고 고백하였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라고 하셨습니다. (갈 2:20)

예수님으로 만족합니다. 감사하고 감사할 뿐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영광입니다. 만왕의 왕이신 주님 앞에서 충성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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