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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려주일] 십자가 보혈의 능력 (히 9: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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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보혈의 능력 (히 9:15-22) 

  한 아들이 아주 중한 병에 걸려서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어려운 수술을 해야 되는데 수술 중에 많은 피가 소요되기 때문에 의사는 충분한 혈액을 준비해놓고 수술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막상 수술을 진행해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상태는 더 심각한 것이었습니다. 오랜 시간이 소요되었습니다. 준비되었던 피가 다 바닥나버렸습니다. 이제 의사는 중대한 결단을 해야만 했습니다. ‘수술을 계속할 것인가 여기서 중단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그 때 그 아이의 아버지가 그것을 지켜보다가 말합니다. “제 피를 제 아들에게 나누어주십시오.” 아버지는 팔을 걷고 아들의 침대 옆에 누웠습니다. 그리고 이제 아버지의 몸에서 붉은 피가 혈관을 타고 아들의 몸으로 흘러들어가기 시작합니다. 수술은 계속 되었습니다. 수술은 성공적으로 마쳐졌습니다. 아들은 서서히 생기를 회복해가지만 아버지는 서서히 기력을 잃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아들은 살았지만 결국 피가 부족한 아버지는 죽고 말았다고 합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생각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는 이 아버지와 아들처럼 피를 나눈 관계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붉은 피가 혈관을 타고 우리의 몸속에 전달될 때 우리는 죄와 죽음과 저주에서 살아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서서히 죽어가고 계셨던 것입니다. 바로 우리의 몸속에 그 분의 피가, 그리고 우리의 몸속에 그분의 생명이 흐르고 있는 것입니다. 

  18세기 독일 작센 지방에 ‘진젠도르프’라고 하는 유명한 귀족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사회적인 지위가 백작입니다. 많은 재산을 소유하고 있고, 많은 영지를 가진 사람입니다. 어느 날 그가 미술관에 그림을 구경하러 갔습니다. 이 그림 저 그림을 구경하다가 한 그림에 한참 그의 눈이 멈춰졌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서 죽으신 그런 그림이었습니다. 그의 머리에는 가시면류관이 쓰여 있습니다. 그의 양손에는 큰 대못이 박혀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허리는 창에 찔린 채 피가 흘러내리는 그런 그림이었습니다. 그 때 ‘진젠도르프’가 그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신 모습을 본 순간에 그 예수님의 허리에서 피가 막 흘러내리는 것 같은 광경을 목도하게 됩니다. 피가 실제로 흘러내리고 있는 것을 그는 보게 됩니다. 이 ‘진젠도르프’는 충격을 받습니다. 그리고 그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그리고 그는 회개의 기도를 드립니다. “예수님은 나에게 죄 때문에 피를 흘리고 죽으셨는데, 나는 예수님을 위해 아무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 저의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 충격적인 이 사건이 ‘진젠도르프’의 삶을 180도 바꾸어 놓았습니다. 지금까지 자기만을 위해 살던 이 ‘진젠도르프’는 이제는 주님을 위해 살고 이웃을 사는 사람으로 변화되어 졌습니다. 그런 많은 자기 영지를 띠어서 필요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마침 그 때 모라비안 교도들이 신앙의 박해를 피해서 이 ‘진젠도르프’ 영지 가까이로 도망을 왔을 때 그들에게 많은 땅을 내어주었습니다. 그래서 모라비안 교도들이 ‘헤른포트’라는 신앙공동체를 만들고 거기서 경건의 운동을 펼치게 됩니다. 그 모라비안 교도들이 몰려있는 ‘헤른포트’라는 신앙공동체에 가서 은혜를 받은 사람이 바로 감리교의 창시자 ‘존 웨슬레’입니다. 그들의 경건한 모습을 보고 ‘존 웨슬레’가 마음에 충격을 받고 돌아와서 기도하는 가운데 그는 거듭남을 경험하게 되고 감리교를 세우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진젠도르프’의 그 눈에 보이는 예수님의 그 그림. 붉은 선혈이 흐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이 시대에 그리스도인들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십자가를 봐도 감각이 없습니다. 아니 예수님의 흐르는 붉은 피를 봐도 관심이 없습니다. ‘나와 무슨 상관이 있으려나?’ 무관심과 냉담함 가운데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을 생각하게 됩니다. 마치 십자가 밑에서 예수님의 호지 아니한 옷을 제비뽑아 나누는 로마병사들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연상하게 됩니다.

가끔 장례식을 집례하면서 하나 가슴 아픈 일들이 있습니다. 살만큼 사시다가 세상을 떠난 분들은 뭐 그렇게 슬프지는 않습니다. 또 노환으로 오래 누워계시다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가신 분들은 오히려 ‘고생하느니 참 잘 가셨다’ 그런 생각이 솔직히 들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안타까운 것은 젊은 분들입니다. 

  젊은 신혼부부인데 남편이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을 때 참 안타깝습니다. 정말 고통스러운 장례식입니다. 특별히 그 가정에 세 살짜리, 다섯 살짜리 아이가 있는데 이 아이가 엄마 손을 붙들고 장례식에 참여했는데 아버지가 죽은 것도 모르고 칭얼대면서 ‘과자 사달라고 그러고, 다리 아프다고’ 그러는 것입니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이 아이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참 그것처럼 안타까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고난당하시고 채찍에 맞으시고 고난당하신 예수그리스도의 그 고난주간을 맞이하면서도 아무런 감사의 감격 없이 이 예배에 참여했다면 참 얼마나 주님 보시기에 안타까울까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요즘 개성관광이 문이 열려서 새벽 일찍 갔다가 저녁이면 돌아오는 1일 관광이 많이 연구되고 있다고 합니다. 그 개성에 가면 선죽교를 꼭 봅니다. 선죽교에 가면 고려의 충신 정몽주가 흘렸던 피의 흔적이 남아 있다고 합니다. 여러분! 선죽교에는 정몽주의 피가 아직도 흐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예수 믿는 성도들의 가슴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흘러야 될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의 그 보혈은 이 천 년 전에 한번 흘림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오늘도 우리 마음속에 그 보혈이 흘러내림으로써 우린 주님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감격과 감사 가운데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그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양손으로 잡고 비틀어 짜본다면 거기서 무엇이 나올까? 아마 붉은 피가 뚝뚝 떨어질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깨를 깨틀에 넣고 짜면 기름이 쏟아질 것입니다. 포도를 포도주 틀에 넣고 짜면 포도즙이 나올 것입니다. 거기에 성경을 짜면 피가 흐른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제가 궁금해서 컴퓨터에 입력을 하고 신구약 성경에 피라는 단어가 몇 번이나 나올까? 조사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356번이 나왔습니다. 일 년 365일에 몇 개가 부족합니다. 성경에는 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창세기는 피의 이야기로 시작되게 됩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가 범죄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짐승을 잡아서 그 가죽옷으로 그들의 부끄러운 모습을 감추게 하십니다. 아벨의 피로부터 시작된 이야기는 예수그리스도의 피의 이야기로 완성되어지는 것입니다. 성경의 이야기는 보혈의 역사이고 피의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신앙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율법이라는 제도를 주셔서 그 율법을 통해서 인간이 의롭게 되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러나 율법으로는 의로운 자가 없었습니다. 율법 99가지는 다 지켜도 그 중에 하나를 어기면 그는 율법 전체를 어기는 것이 되기 때문에 아무도 하나님 앞에 나아갈 자가 없었습니다. 인간의 죄를 율법으로는 해결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성막제도를 주셨습니다. 인간의 죄를 가지고 대제사장이 일 년에 한번 지성소에 들어가서 황소와 양을 잡아서 그 피를 제단에 뿌림으로서 인간에 죄가 용서받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우린 그것을 죄의 전가라고 말합니다. 대제사장은 자기의 죄를 위해서는 황소를 잡아서 황소의 머리에 손을 얹고 자기의 죄를 고한 후에 그 황소를 잡아서 그 피를 제단에 뿌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백성을 위해서는 그 양들에 머리에 손을 얹고 백성의 죄를 고한 후에 그 양을 잡아서 그 피를 뿌리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인간의 죄가 용서받는 길이 생겼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불완전한 방법이었습니다. 그것은 매번 반복되어야만 했고, 그것은 영원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인간에게 영원한 속죄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피 흘리심으로 이제 인간이 영원히 구원받는 길이, 영원히 용서받는 길이 열린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성경 히브리서 9장 12절 말씀을 다시 한 번 거슬러서 읽어보시겠습니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이제는 염소와 송아지의 피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친히 십자가의 제단에 재물이 되심으로, 그분이 피 흘리심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습니다. 우리 계속해서 9장 26절 말씀을 또 읽어보십니다.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리어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여러분 예수님의 보혈은 능력이 있습니다. 레위기 17장 11절에 보니까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고, 모든 부정한 것은 피로써 정결케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 21절~22절 말씀 다시 한 번 읽습니다.
  “또한 이와 같이 피를 장막과 섬기는 일에 쓰는 모든 그릇에 뿌렸느니라 율법을 쫒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성전에 쓰는 모든 기구들은 피로써 정결케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인간의 더럽고 추악한 죄는 예수그리스도의 보혈로만이 깨끗함을 입을 수 있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피는 참 놀라운 신비를 담고 있습니다. 여러분 사람이 죽는 것은 왜 죽습니까? 피를 흘려내면, 필요한 양의 피가 부족하게 되면 사람은 숨을 거두게 됩니다. 그래서 이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다고 말합니다. 구약에서는 짐승도 피체 먹지 못하게 금하고 있는 것은 피에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피를 붉은 색입니다. 거기에 신비가 있습니다.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 있습니다. 우리는 늘 흰 쌀밥을 먹어도 왜 피는 붉은 색일까요? 우린 파란 상추쌈을 먹어도 피는 늘 붉은색입니다. 그 피는 하나님만이 만드실 수 있는 것입니다. 의학이나 과학이 아무리 발전해도 피를 만들어 내지 못합니다. 피는 헌혈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피를 만들 재주가 없습니다. 피는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예수그리스도의 피, 예수그리스도의 보혈이 우리의 죄를 씻는 능력이 있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피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화목케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로마서 3장 25절에 보니까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그랬습니다. 예수님의 피는 화목제물의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가 원수 된 관계였지만 예수님이 십자가의 제단에 피 흘리심으로 하나님과 인간이 화해되게 되었습니다.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피는 화해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피 흘리심으로 원수 되었던 유대인과 이방인의 관계가 가까워졌다고 그랬습니다. 피는 바로 화해의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의 피는 죄를 사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에베소 1장 17절에 보니까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과 죄 사함을 받았으니” 그랬습니다. 예수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가 곧 구속, 죄 사함을 받았다고 말씀합니다. 예수의 피로 인해서 우리는 죄가 용서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시편 32편에 보니까 “허물에 사함을 받고 그 죄의 가림을 받은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해서만이 우리의 죄가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다고 22절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한1서 1장 7절에 보니까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그랬습니다. 

  마틴 루터의 관한 아주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마틴 루터가 늘 자신을 바라볼 때 실망스러웠습니다. 늘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연약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때로는 거짓말도 하고 살아갑니다. 그게 늘 마음에 불편함을 주었습니다. 그 죄 때문에 고민을 하다가 잠이 들었는데 꿈에 하나님이 이 흑판 하나를 보여주셨습니다. 그 흑판 위에 이름이 마틴 루터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마틴 루터가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지은 죄의 목록이 쫘~악 기록되어 있는데 수를 셀 수도 없었습니다. 그것을 보고 마틴 루터는 더욱 절망에 빠졌습니다. 나는 구제불능이다. 나는 구원받을 수 없는 존재야 하고 그는 고민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디선가 팔 하나가 나타나더니 그 죄의 목록 위에 글 하나를 쓰는데 그 아들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라고 기록하는 것입니다. 자세히 보았더니 그 기록하는 사람의 손에 대못자국이 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손에서는 붉은 선혈이 떨어지고 있는데 그 흘린 선혈로 인해서 그 칠판에 쓰였던 모든 죄의 목록이 깨끗이 씻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서야 마틴 루터는 깨닫습니다. 내 죄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지만 예수의 보혈이 그 모든 죄악을 다 사할 수 있구나. 여러분! 예수의 보혈은 우리의 죄를 사하고도 남음이 있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더럽고 추악한 죄의 목록들이 예수의 보혈로 인해서 깨끗하게 씻음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는 의롭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로마서 5장 6절에 보니까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그랬습니다. 인간이 의롭지 않으면 누구도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없습니다. 인간은 죄로 인해 불의할 수밖에 없는 존재인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피로 인하여 우린 의롭다 인정을 받았습니다. 우리 죄를 다 덮어주셨습니다. 우리의 더러운 죄를 예수의 보혈로 다 덮어주셨습니다. 깨끗하게 씻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향해서 의롭다고 선언해 주셨습니다. 베드로전서 1장 18절 이하에 보니까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하고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 그것이 바로 우리를 의롭게 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네 번째로 예수님의 피는 보호의 능력이 있습니다. 출애굽기를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400년 동안 애굽에 거주하다가 모세의 인도로 그곳을 나오게 될 때에 이제 열 번째 재앙을 하나님이 내리시는데, 그것은 바로 장자의 죽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어린양을 잡아서 그 피를 너희 집 기둥과 문설주에 바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보호받을 수 있을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시키는 대로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나 애굽인들은 그렇게 하질 못했습니다. 죽음에 사자가 그 밤에 장자를 칠 때에 애굽에 장자만은 다 죽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장자들은 보호받았습니다. 그 붉은 피를 보고 그 죽음의 사자들이 그 집을 뛰어 넘어갔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날을 유월절이라고 합니다. 예수의 피는 우리를 저주와 죄에서 보호하는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피는 바로 보호의 능력이 있습니다. 주의 보혈 능력 있도다 그의 피 믿으오. 하고 우리는 찬송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예수의 피는 저주를 물리치고 귀신을 추방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독일의 유명한 본퀘라는 목사님이 계시는데 한번은 아프리카에 가서 집회를 하시게 되었습니다. 어느 마을에서 복음을 증거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회개하고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걸 제일 싫어하는 사람이 그 동네에 있는 무당들이었습니다. 무당들이 목사님을 너무너무 싫어했습니다. 그리고 목사님의 집회를 방해하고 저주까지 했습니다. 어느 날 목사님이 또 많은 사람들을 모아놓고 집회를 열고 있는 가운데, 그 무당들이 떼로 몰려왔습니다. 사람들은 두려워했습니다. “목사님! 저 무당들은 능력이 있어요. 저 무당들이 저주하면요 사람이 죽기도 하는 능력이 있어요. 목사님! 오늘은 위험하니까 집회를 중단하시고 다음에 하도록 하시지요.” 만류를 했습니다. 그러나 이 본퀘 목사님은 성령 충만함을 입고 집회를 인도했습니다. 말씀을 증거합니다. 예수님의 보혈을 증거할 때에 놀라운 일들이 일어납니다. 보혈의 말씀을 증거할 때에 그 무당들이 하나씩 힘을 잃고 쓰러지기 시작합니다. 집회는 대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이 악한 능력이 거기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나님의 능력이 그들을 가로막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떤 저주도 예수의 보혈 앞에서는 힘을 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보혈 앞에 귀신의 세력도 떠나가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사탄의 공격 앞에서 보혈 찬송을 많이 부르는 것입니다. 보혈 찬송에는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의 피는 우리를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0장 19절에 보니까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랬습니다. 누구든지 내 공로가 아니라 예수의 피의 공로를 의지해서 하나님 앞에 예배하게 되었습니다. 구약에서는 대제사장만이 성소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하나님과 직접 교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흘리신 그 피의 공로 때문인 것입니다. 십자가 보혈의 능력이 여러분과 함께 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십자가의 보혈 여러분의 마음에 심령에 바르시기를 바랍니다. 그 사람만이 능력 있는 삶을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고난주간을 보냅니다. 정말 주님이 우리를 위해 흐리신 그 피를 묵상하십시오.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그분이 우리를 위해 행하신 그 고난의 흔적들을 더듬으시면서 우리도 주님 앞에 우리의 사랑과 우리의 마음을 드릴 수 있는 이 한주간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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