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종려주일] 하나님의 일 사람의 일 (마 16:21-28)

  • 잡초 잡초
  • 475
  • 0

첨부 1


하나님의 일 사람의 일 (마 16:21-28)

“이것은 내 살이요 내 피라” 성찬예배로 드려지는 이날은 고난주일이요 종려주일이라고도 합니다. 이 날을 고난주일이라 함은 예수님의 생애와 사역의 마지막 수난의 한주간입니다. 십자가를 향한 출발의 의미가 있습니다. 또한 이날을 종려주일이라 함은 예수님의 생애와 사역의 마지막 한 주간을 예루살렘성에 입성함으로 시작하실 때 군중들이 종려가지를 흔들며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외치며 환영함에 그 의미가 있지만 이날 종려주일의 더 큰 의미는 십자가를 넘어 부활을 향한 승리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보여지는 예수님의 고난 가운데 조용히, 은밀하게 부활의 승리가 준비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고난 받으셨다는 것이 이해가 되십니까? 일반사회 통념에 있어 고난은 가난한자의 것이요, 약한 자의 것이요, 힘없는 자의 것이요, 병든자의 것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말씀한마디로 물을 포도주로 만들 수 있는 예수님이 고난을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천지의 주인이요, 바다를 잔잔케 하신 그 예수님이 고난을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고난을 당할 때 ‘내가 돈이 없어서, 내가 몸이 약하여, 내가 힘이 없어서’라고 생각하는데 하늘에 열 두 영이 더 되는 천군천사를 호령할 수 있는 예수님이 지금 이 산더러 들리어 저 바다에 던지우라 말씀하셔도 그대로 되게 하시는 그 예수님이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을 받으신 것입니다. 이 고난 앞에 은혜를 입지 못한 사람들은, 눈이 열리지 못한 사람들은 그가 메시야가 아니었다라고 말합니다. 

이 의문에 대하여 이사야서 53장 5절 6절은 분명하게 답을 줍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 시키셨도다”. 

무엇입니까? 왜 예수님의 고난이 의미가 있습니까? 왜 예수님의 고난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가치가 있습니까? 그 예수님의 고난에는 철저하게 우리가 계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예수님의 고난 안에 나 유재명이가 담겨있는 것입니다. 우리를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고난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 모두에게 있어 구원의 근거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사람들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특별한 고난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고난은 어느 날 갑자기 받게 된 고난이 아니라 철저하게 준비되어진 예정된 고난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어느 날 갑자기가 아닙니다. 처음 사람 아담의 선악과 사건, 이때부터 예표 되어졌습니다. 선악과를 먹은 아담의 부끄러움을 가려주는 가죽옷 속에서 피 흘림과 고난이 예표된 것입니다. 

레위기를 중심으로 보여지는 그 풍부한 제사에 대한 기록이 우리에게 무엇을 알려줍니까. 구약의 백성들은 소나 양이나 비둘기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와야 했습니다. 죄인들이 그 짐승들을 희생 제물로 하나님 앞에 드리면서 속죄의 은혜를 입은 것입니다. 나 대신에 죄인대신에 나의 죄를 전가 받은 짐승이 죄 값을 지고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혹시 옛날 시골에서 짐승을 죽이는 것을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그것도 현대적인 살상기구를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원시적인 방법으로 그 큰 짐승들을 사람이 죽이는 것을 말입니다. 

저는 초등학교 5학년 때까지 시골에 있었습니다. 그 어릴 적 시골에서 가장 원시적인 방법으로 어른들이 돼지를 잡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가장 원시적인 방법으로 개를 잡는 모습도 보았습니다. 그것들을 지금 생각해도 끔찍한 모습들이었습니다. 돼지가 큰 것은 정말 송아지만큼 큽니다. 그 돼지를 어떻게 잡는지 아십니까? 기억을 더듬어 보면 사람들이 끌고 나옵니다. 그런데 느낌이 이상한지 돼지가 나오지 않으려고 몸부림을 칩니다. 우물가에서 돼지 안쪽 다리를 잡고 당기면 쓰러집니다. 일명 안다리 후리기입니다. 그렇게 넘어진 돼지를 어긋 맞겨 다리를 묶고 곡갱이로 몽둥이로 그 머리를 사정없이 후려칩니다. 개도 목을 매든지 같은 방법으로 합니다. 아마도 서양 사람들이 이 이야기를 들으면 기절을 할 것입니다. 그 비명소리, 흘러내리는 피들, 아주 어릴 적 기억인데 생생합니다. 

그렇다면 날마다 제사가 드려지는 성막은 결코 조용하고 깨끗하고 정숙하며 우리들이 상상하는 것만큼 아름다운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짐승들의 죽어가는 모습이 구약의 제사 드려지는 현장에서는 늘 재현되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재물들은 죽임을 당할 때 본능적으로라도 죽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쳤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제물됨의 예수님은 어떠하였습니까. 

이사야서 53장 7절은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하였습니다. 말없이 고난당하시는 예수님을 예표하며 예언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제일 먼저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요단강에서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 제일 먼저 보여지는 표적이 무엇이었습니까.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그 위에 임하셨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왜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하늘에서 비둘기 같은 성령이 임하셔야 했습니까? 그 하나는 이제 예수님의 사역은 예수님임에도 불구하고 성령으로 말미암은 사역이어야 함을 깨닫게 하고, 또 하나 비둘기 같은 성령은 성령에 있어서 임하시는 하나의 종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구약의 비둘기는 가장 가난한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자신을 대신하여 보편적으로 드렸던 제물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하심은 예수님의 사역의 결국, 제물됨을 예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이처럼 준비된, 예정된 고난이었습니다. 예수님 자신 스스로도 ‘나는 고난 받으러 왔다, 죽으러 왔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의 고난은 “알고도”의 고난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마태복음 16장 21절 말씀을 한번 읽겠습니다. “이때로부터 예수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 이때로부터 비로소 가르치시니, 무엇을 알려줍니까? 예수님이 오랫동안 가슴속에 품고 있었던 것이 있었습니다. 제자들에게 많은 것들을 말씀하셨지만 정말 해야 할 말씀이 있었습니다. 

때가 되었습니다. 언제입니까? 제자들 입에서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는 고백을 받아낸 후에 마음을 엽니다. 이제 나는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에게 고난을 당하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날 것이다. 고난과 죽음과 부활을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다 이해할 수 없는 제자들이 말립니다. “그리마옵소서” 이때 예수님은 “너희는 왜 하나님의 일은 생각지 아니하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느냐” 하십니다. 예수님은 이미 처음부터 자기 자신이 어떤 길을 걸어야 하는지를 아셨습니다. 이제 때가 되매 예루살렘에 올라가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할 것을 아셨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지는 고난은 갑자기 있어지는 고난입니다. 그 고난의 내일을 알면 사람들은 아마도 산다는 것이 그렇게 쉬운것은 아닐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내일 일을 알고 사는 것이 좋을까요? 모르고 사는 것이 좋을까요? 다수결로 정해볼까요? 많은 사람들이 점쟁이를 찾아가기도 합니다. 내일이 궁금해서 말입니다. 여러분, 아십니까. 내일 일을 다 알고서라면, 인간은 자기 삶을 지킬 능력이 없습니다. 내가 어떤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 삶이 고난의 길 인줄 알면서도 그 삶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다시 묻겠습니다. 내일 일을 알고 사는 것이 좋겠습니까? 모르고 사는 것이 좋겠습니까? 

여러분, 모르고 사는 것이 훨씬 좋습니다. 사람이 내가 살아가는 날 동안 얼마나 힘든 일이 많이 있을 것인가를 알면 살맛이 나지 않습니다. 또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알면 살맛이 나지 않습니다. 내일 죽을지라도 천 년 만년 살 것처럼 생각해야 오늘이 살맛나는 것입니다. 시집가는 아가씨에게 평생에 설거지해야 하는 그릇을 쌓아놓고 보여준다면 아무도 시집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환상에 젖어있는 아가씨에게 평생에 해야 하는 빨래를 보여준다면 아무도 시집가지 않을 것입니다. 모르고 가는 것입니다. 인간은 그 내일을 알고 그 내일을 감당할 능력이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고난 받기 위하여 오셨고 고난 속에 사셨으며 고난 속에 제물이 되셔야 했음을 다 아셨습니다. 

사랑하는 제자 베드로가 “주여 그리마옵소서”하고 말려도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며 고난을 감수하신 것입니다. 고난의 절정을 앞두고 겟세마네 동산의 예수님의 기도를 보십시오. “아바 아버지여 할 수 있거든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가기를 원하나이다”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다 아시면서 그 고난의 길을 가셔야만 했습니다. 왜입니까? 그것이 하나님의 일이었고 그 안에 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스스로의 고난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누가 시켜서 고난 받으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억지로가 아니라 스스로 자원하는 자원함으로의 고난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0장 14절 18절에 예수님은 무엇을 말씀하십니까?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이는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느니라” 합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피하려고 하면 피할 수도 있는 고난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거부하려면 거부할 수 있는 고난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 사람의 일을 생각하였다면 말입니다.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셨기에 예수님의 기도의 결국은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였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스스로의 고난이었고, 그리고 그 고난은 하나님의 일이었고, 그리고 그 고난 안에 우리가 있었기에 값진 고난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은혜를 입어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는 성도의 특징은 날마다 나 자신을 죽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라가기 위해 날마다 나 자신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욕심에서, 내 안에 숨겨져 있는 죄악의 쓴 뿌리 앞에서, 이기주의 앞에서, 사람의 일을 생각하고 계산하는데, 날마다 나 자신을 스스로 죽이고 스스로 부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대속의 고난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의 죄 때문에 고난 받으시고 죽으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순전히 우리의 문제요, 유재명의 문제 때문이었습니다. 

이사야서 53장 5절은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입니다. 전부다 ‘우리’, ‘우리’입니다. 예수님 오시기전에 500년 전의 사람 이사야가 너희가 아니라 우리, 500년 후에 오실 메시야의 고난 속에 자기 자신을 본 것입니다. 우리는 이천 년 전에 메시야의 구속의 완성 속에 나 자신을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우리입니다. 

그럼에도 이사야서 53장 4절은 무엇을 알려줍니까?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입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의 말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는 나와 상관이 없다’ 입니다. ‘그것은 예수님 스스로의 문제 아닌가’ 이렇게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나는 예수님과 상관이 없습니다’ 입니다. 그럼에도 우리 예수님은 그 오해를 감수하시면서 고난을 감당하셨습니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말입니다. 곁에 있는 사람이 다 배반해도 가야 할 길을 가는 것입니다. 그것도 억지로가 아니라 최고의 사랑으로 말입니다. 왜입니까? 그것이 하나님의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은혜를 진정 가슴에 안고 있다면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조용히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 공동체 안에서 아직도 누가 알아주는가, 나를 알아주지 않는가가 중요하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 사람의 일이 되어 버리는 경우입니다. 오늘날 안타깝게도 하나님의 일을 사람의 일처럼 매이게 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대속의 고난이었음에도 사랑으로였습니다. 한 부모가 열 자식은 키워도 열 자식은 한 부모를 섬기지 못합니다. 한 부모가 열 자식을 키워 돌볼 수 있음은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사랑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열 자식이 한 부모를 섬기기 힘든 이유는 가진 것으로 계산으로 섬기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하늘에서 불이 내려오게 하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없는 것을 있게 하고 있는 것을 없게 하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실 때 그 가진 능력으로 위하신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최고의 고난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당하신 고난은 결코 작은 고난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시어 당하는 고난이었으며 스스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최대의 고난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을 예언하고 있는 이사야 53장에는 질고, 간고, 징벌, 고난, 찔림, 상함, 징계라는 단어들이 수없이 등장하고 있는데 이런 단어들은 모두가 극심한 고난을 의미하는 단어들입니다. 예수님이 죄인들을 위하여 당하신 고난은 고난 중에 최대의 고난이셨습니다. 

유대인은 어떤 악한 죄인이라도 유대인 법에 의하며 40대 이상은 매질을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40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다는 말은 무엇입니까. 그 유대인들이 바울을 그렇게 죽이고자 해도 39대 이상은 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십니까? 역사상 그 예외가 있었습니다. 어떤 악한 죄인에게라도 40대 이상은 매질을 하지 않음에도 오직 예수님에게만은 채찍으로 칠 때에 그 수도 세지 않고 그 수도 정하지 않고 가혹하게 고난이 고난이 되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를 보셨습니까. 그리고 저들은 예수님의 마지막을 처절하게 보이게 하기 위하여 강도들과 함께 십자가에 달았습니다. 여러분은 누구와 함께였으면 좋겠습니까. 사람이라면 좀 더 좋아 보이는 사람, 좀 더 깨끗해 보이는 사람, 좀 더 나아보이는 사람하고 함께 있기를 원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예수님은 강도가 아닌데도 강도와 함께여야 했습니다. 최고의 의인이 최고의 악인 취급을 받으면서 그 고난을 받은 것입니다. “바라바를 놓아주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하는 외침 속에 예수님은 가장 거룩하신 예수님은 가장 흉악한 죄인 바라바와 비교되며 그 길을 가셨습니다. 누구라도 주 앞에 올 수 있도록, 마지막 십자가에서 강도와 함께 한 주님은 오늘도 여전히 그가 사마리아 여인이든, 그가 간음한 여인이든, 세상이 모두가 너를 외면해도 나는 너와 함께 할 수 있다, 나는 너와 함께 할 것이다, 그리고 내 안에 네가 있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그리 해야 했습니까. 그것이 하나님의 일이었고 그 안에 저와 여러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능력의 고난이셨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의 고난은 실패가 아니셨다는 것입니다. 고난의 절정인 십자가는 최고의 승리였음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예수님의 고난이 예수님의 십자가가 가슴은 아프지만 그럼에도 결코 초라해 보이지 않음이 무엇입니까. 

고린도전서 1장 18절은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했습니다. 고난의 절정인 십자가에서 죽어 가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사실 마땅히 할 일을 마치지 못하고 실패함으로 죽어가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혹자는 ‘예수의 죽음은 실패다’ 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십자가에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을 아십니까. “다 이루었다”. 실패가 아니라 승리입니다. “다 이루었도다” 라고 하는 이 음성은 벳세다의 광야에서 들려온 것이 아닙니다. “다 이루었도다” 이음성은 산상수훈처럼 아름다운 말씀을 전하던 곳에서 들려오던 것도 아닙니다. “다 이루었도다” 이 음성은 나사로의 무덤이나 갈릴리 바다에서 들려온 것이 아닙니다. 놀랍게도 “다 이루었도다” 이 음성은 십자가 위에서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핵심입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한 모든 일은 십자가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우리를 구속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모든 구원계획은 십자가에서 완성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이 모든 일들이 이루어졌고 완성되어 졌음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우리가 그 구속의 사역에 더 해야 할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구원받기 위해서라면 더 착해질 필요는 없습니다. 구원받기 위해서라면 더 선한 일을 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구원받기 위해서라면 헌금을 많이 하고 봉사를 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 제가 말씀드린 그 어떤 것, 여러분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여러분의 구원은 이미 주님 안에서 완성되었음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다만 우리는 그 구원함을 감사함으로 아멘 할 뿐입니다. “다 이루었도다”. 이 모든 것을 완성하신 예수님의 삶은 고난의 삶이었습니다. 사람들은 평안을 좋아하는데, 예수님은 고난을 자초하셨습니다. 몰라서였습니까. 아닙니다. 사람들은 밝게 살기를 원하는데 예수님은 어둠속에서 사셨습니다. 방법을 몰라서였을까요? 사람들은 받으려고만 하는데 예수님은 다 주면서 사셨습니다. 사람들은 더 살려고 몸부림치는데 예수님은 그만 사시고 죽으셨습니다. 사람들은 위에 있기를 원하는데 예수님은 친히 낮아지셨습니다. 사람들은 앞서가기를 원하는데 예수님은 친히 섬기며 사셨습니다. 사람들은 한없이 쌓아놓으려고만 하는데 예수님은 친히 없애버렸습니다. 이 모든것은 오직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같이 고난의 삶을 선택하여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고난을 완수하시면서 우리에게 그 고난을 남겨주셨다고 이야기합니다. 오늘 마태복음 16장 24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내가져야 할 십자가, 우리가 져야할 십자가가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골로새서 1장 24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고난을 남겨주셨다고 말입니다. 우리를 향한 그리스도의 남기신 고난이 무엇이겠습니까? 아마도 각자가 다를 것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이제 저와 여러분이 져야할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따라가는 원리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를 잘 믿는 사람은 아무 일 없어서 잘 믿는 것이 아니라 다 놓아두고 잘 믿는 것입니다. 절대 원리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남기신 것이 무엇입니까? 오늘 성찬을 통해 주님의 마음이 저와 여러분 안에서 느껴지기를 축복합니다. 아십니까? 이천 년 전에 피 묻은 가슴속에 저와 여러분이 그 예수님 안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그 예수님이 더 깨끗하고 더 잘난 사람이 아니라 가장 부족한 유재명안에서 좀 더 선명해지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주님이 유재명을 욕심내매 부담이 되기도 하지만 우리는 지금까지도 그 은혜로 살았고 앞으로도 그 은혜로 사는 자여야 함에 그가 남기신 고난이 무엇이든 그것을 감당함의 절대원리는 바울이 날마다 죽노라 했는데 오늘도 죽는 것 아니겠는가? 그래서 오늘 말씀 25절은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입니다. 주님은 영광스럽게 여러분을 지금 초대합니다. - 아 멘 - 
(유재명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