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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려주일] 고난과 환희의 주님 (막 16: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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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과 환희의 주님 (막 16:15-16)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 
              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오늘은 고난주일입니다. 또 오늘을 수난 주일이라고도 하고 종려주일이라고도 부릅니다. 이 한주간이 교회력으로 보면 가장 화려한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이 고난 받으시는 첫 날이고 다음 주일은 부활주일입니다. 그동안 예수님이 3년 동안 갈릴리와 베뢰아 지방을 중심으로 활동하셨습니다. 그러다가 2천 년 전 오늘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오십니다. 그것을 “예수님의 입성“이라고 표현합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그때 사람들이 열광했고 환호했고 요란하게 맞이했습니다. 사람들이 모두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들고 옷을 벗어 땅에 깔고 그 위로 지나가시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오늘을 “종려주일”이라고 부릅니다. 

종려나무 

여기 나오는 종려나무는 이스라엘에서 가장 무성하고 크게 자라는 나무입니다. 일명 야자 대추나무라고 하는데 그 나무에서 야자 대추가 열립니다. 성경을 보면 자주 거론되는 나무가 몇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포도나무입니다. 이 포도나무는 예수님과 제자들과의 관계를 비유할 때 이 나무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과 성도와의 관계를 표현할 때도 이 나무를 비유로 사용하셨습니다. 또 무화과나무가 있습니다. 이 나무는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나무로 성경에서 무화과나무 밑에서 쉬는 것을 최대의 평화와 번영을 상징(미가 4:4, 슥 3:10)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감람나무가 있는데 이 나무는 기름이 일품입니다. 올리브유라고 하는 기름인데 왕이나 제사장이 대관식을 하고 임직식을 할 때 머리에 붓는 기름입니다. 그 기름을 관유라고 합니다.  

또 종려나무는 키가 크게 자라는 나무로서 왕권을 상징하는 나무입니다. 시 92편12절을 보면 “의인은 종려나무 같이 번성하며“라고 했고 아가 7장7절에서는 “신부의 품위”를 종려나무에 비유하였고 사 9장14절을 보면 “이스라엘의 통치자의 상징”으로 종려나무를 일컬었습니다. 그래서 솔로몬의 성전에, 벽돌에, 문에, 손잡이 등에 이 종려나무 가지를 새겨 넣었고 동전에도 이 나무를 새기기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종려나무는 왕권을 상징하는 나무입니다. 그래서 2천 년 전 오늘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환호했던 것입니다. 그 말은 사람들이 예수를 왕으로 상징했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당신은 우리의 메시야입니다, 당신만이 오늘 우리를 로마로부터 해방할 수 있습니다”라는 고백입니다. 그래서 오늘 주일을 “종려주일”이라고 부릅니다.  

대 주간 

또 이번 주간을 “대 주간”이라고도 부릅니다. 4세기부터 부활절 전 한 주간을 대 주간(great week)이라고 했습니다. 이 한 주간을 엄격한 금식으로 보냈습니다. 오락행사를 금지했고 공공기관은 휴무했고 죄수와 노예들은 해방을 받기도 하였고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충분한 구제물을 보급하였습니다. 그리고 동방종교에서는 종려주일인 오늘 오후 1시부터 감람산에 있는 교회에서 축제가 열렸다고 했습니다. 그곳에서 찬양하고 축복을 선포하고 교훈서를 낭독했습니다. 어린이들은 종려나무를 꺾어들고 행진도 했습니다. 그리고 가장 특징 있는 것은 종려주일이 애도의 날만 아니고 철저하게 환희의 날로 지켰다는 것입니다. 그날 낭송된 성경이 빌립보 4장4-9절입니다.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골고다는 고난의 지점입니다. 예수님이 골고다에서 십자가를 지고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제자들에게는 스승을 잃는 아픔이 있었을 것이고 하나님은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하는 고통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 아들이 고난 받으며 죽어갈 때 어디선가 그 모습을 지켜보아야 하는 하나님의 아픔을 우리는 짐작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일본의 지다구라라는 신학자는 이런 십자가의 아픔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십자가를 함부로 입에 담지 말라고까지 말했습니다. 그런 신학을 그는 “아픔의 신학”이라고 불렀습니다. 골고다는 아픔의 현장입니다. 수난의 현장이고 고뇌의 현장입니다. 하늘과 땅과 예수와 하나님이 함께 아픔에 떨었던 현장입니다. 

그런데 인간에게는 예수님의 그 희생이 그토록 감사할 수 없고 행복할 수 없고 축복이 아닐 수 없고 환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 예수님의 고통이 있었기에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들이 된 것입니다. 그 고난이 없었다면 구원도, 천국도, 부활도 상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고난주일은 애통보다는 축제가 되어야 하고 환희가 되어야 하고 축복의 선언이 있고 찬양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고난 행사 

수난주간에 월요일에서 수요일까지 특별예배를 드렸다고 합니다. 화요일은 모두 감란산에 올라가 철야를 했고 거기서 마 24장4절 이하를 읽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하지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아직 끝은 아니니라,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이 모든 것이 재난의 시작이니라.” 

수요일에는 부활교회에서 철야의 예배를 드렸는데 그때 마 26장14-16 절을 묵상했습니다. “그 때에 열 둘 중의 하나인 가룟 유다라 하는 자가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말하되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주리니 얼마를 주려느냐 하니 그들이 은 삼십을 달아주거늘 그가 그때부터 예수를 넘겨줄 기회를 찾더라.” 목요일에는 성만찬을 행하였고 세족식도 있었으며 화해식도 했다고 전해집니다. 모두 그날 회복의 은혜를 나누었던 것입니다. 금요일은 새벽부터 밤까지 애도의 날로 보냈다고 합니다. 그날 가장 엄격한 금식과 철야기도회가 있었습니다. 3세기 중엽에는 성 금요일과 토요일에는 완전히 음식을 입에 대지 않는 금식을 행하였다고 하는데 금식과 함께 철저하게 기도에 몰두하기 위해서 예배도 없었고 교회 문도 열지 않았다고 합니다. 토요일은 “성 토요일” 이라고 해서 초대교회 때에는 성 금요일 보다 훨씬 더 귀한 날로 여겼다고 합니다. 그래서 토요일에는 아침부터 해질 때까지 애도와 엄숙한 분위기에게 금식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고난주간을 아주 의미 있게 뜻있게 보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고난 때문에 우리가 구원받았고 살아났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애도보다는 이 고난을 감사로 감격으로 환희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이 환희를 모르는 사람들을 교회로 인도해야 하고 그리고 예수를 알게 해 주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고난의 의미가 무엇인지, 왜 고난을 받아야 했는지, 그 예수의 고난이 오늘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를 알려 주어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오늘 사람들을 전도하는 것도 예수님의 고난에 크게 보답하는 일입니다. 

오늘 읽은 막 16장15절의 본문은 예수께서 고난 받으시고 죽으시고 무덤에 묻히시고 마침내 부활하셔서 승천하실 때 마지막으로 당부하신 말씀입니다.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이 구절은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지상 사역을 다 마치고 마침내 승천하시면서 주신 최후의 당부이며 명령이며 분부의 말씀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고난주일을 맞이해서 애도하고 금식하고 슬퍼하는 일도 중요한 일입니다. 그런데 그 보다 더 뜻있는 일은 한 사람이라도 더 이 고난의 의미를 알게 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도하는 일이 더 의미 있고 뜻있는 일일 것입니다. 본문은 예수님이 마지막으로 분부하신 말씀인 “전도하라”는 당부의 말씀입니다. “너희는 가서 전파하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가서 제자삼고 세례를 베풀고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18-19)고 했습니다. 누가복음에서는 “너희는 모든 일의 증인이 되라”(눅24:48)고 했습니다.  

전도는 “예수를 알게 해 주는 일” 입니다. 고난 받은 예수를 알게 해 주는 일이고, 구원의 주님을 알게 해 주는 일이고, 참 고마운 주님을 만나게 해 주는 일이 전도입니다. 내 인생 가운데서 가장 큰 은혜는 내가 예수를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점은 아주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것은 나 뿐 아니고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오늘 세상에 예수를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일찍 주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얼마나 은혜를 입었는지 모릅니다. 누군가 나를 이 길로 인도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전도하는 일은 그 어느 일 보다도 숭고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3년 동안 제자들을 전도하는 훈련을 시키셨고 마지막 승천하실 때는 너희는 땅 끝까지 가서 전도하라고 당부하셨습니다.  

또 전도는 “죽은 자를 살리는 일”입니다. 전도는 교회를 성장시키기 위한 수단이 아닙니다. 전도를 교회성장의 수단으로 삼는다면 그것은 전도를 상업주의로 이용하는 것입니다. 그동안 전도를 실제로 오용하고 수단방법으로 활용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엄밀히 말하여 전도를 상업주의로 활용한다면 그것은 고난 받으신 예수님을 모독하는 행위입니다. 전도는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는 일”입니다. 성경은 믿지 않는 사람을 죽은 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마 8장22절을 보면 “죽은 자들이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했습니다. 그 말은 예수를 따르지 않는 사람은 성경은 죽은 자로 규정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전도가 무엇인지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이 엄숙한 일을 때로 상업주의로 이용하기도 했습니다. 

브라질의 후안 카를로스 오르티즈라는 목사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교회에 부임했을 때 교인수가 184명이었습니다, 그때부터 나는 정신없이 일하고 조직을 동원하고 방법을 동원해서 마침내 600명으로 늘렸습니다, 교회는 3배로 성장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루는 깊이 생각했습니다. “나는 지금 너무 수단방법을 구사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그때 잘못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산으로 올라가 기도와 묵상을 하고 있었는데 그때 성령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너는 꼭 코카콜라 회사가 코카콜라 파는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복음을 전하고 있구나, 너는 도대체 네가 전하는 일 가운데 나의 손길을 한번이라도 찾아보았느냐”는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그 말은 “한번이라도 기도해 보았느냐”는 말입니다. “나를 의지해 보았느냐”는 말입니다. 전도는 가난한 자를 먹이고 낙후된 자를 돕고 병든 자의 병원비를 지급하고 없는 자에게 베푸는 자선활동이 아닙니다. 전도는 그 이상의 영적활동입니다. 전도는 죽은 자를 살리는 일입니다.  

그리고 전도는 “하나님 나라에 이르게 하는 일”입니다.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예수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요 14:6) 하셨습니다. 우리는 고난 받고 부활하신 그 예수를 전해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전도입니다. 왜냐하면 예수가 진정한 하나님 나라에 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전도는 그 예수를 전하는 일입니다. 어떤 예수냐 하면 오늘 고난 받으시고 십자가를 지신 그 예수를 전하는 일이 전도입니다. 왜냐하면 그 예수가 천국에 이르는 길이시고 방법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 없는 자선이나 봉사나 구제나 노력으로는 구원이 불가능합니다. 

성경에 보면 최초의 전도는 부활 현장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막 16장6절을 보면 “안식 후 첫날 무덤을 찾은 여인들에게 청년이 이르되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에 계시지 않느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최초의 전도입니다. 최초의 전도는 부활을 전하는 메시지였습니다. 천사는 먼저 여인들에게 부활을 전하였습니다. 여인들은 가서 제자들에게 부활을 전하였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안 믿었습니다.(막 16:11,13 -눅 24:11) 그때 부활하신 예수께서 나타나셔서 “왜 전하여 준 부활소식을 믿지 않느냐,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이 있다”고 책망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다시 분부하셨습니다.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이 복음을 전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전도는 살려내는 일입니다. 죽음에서 살려내서 영생의 길로 인도해 천국에 이르게 하는 작업이 전도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고난을 되새긴다고 우울하고 침울한 마음으로만 있는 것이 고난절의 의미는 아닙니다. 이 주간에 구원의 길을 안내하는 것이 훨씬 더 의미 있는 일입니다. 그것이 고난절의 진정한 의미일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죽음에서 깨어나게 하는 일은 중요한 일입니다. 여러분, 죽음은 세상에서 가장 심각한 일입니다. 더 심각한 것은 그 죽음을 모르고 있는 일입니다. 죽음을 모르고 있는 사람에게는 알도록 빨리 깨우쳐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죽음을 알아야 하고 피할 길도 대처법도 잘 죽는 법도 알게 해 주어야 합니다.  

옛날 한 사냥꾼이 독수리를 잡기 위해서 나무에 앉아있는 독수리를 응시하며 화살을 겨누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독수리는 자신이 죽을 줄도 모르고 어딘가 노려보고 있었습니다. 보니까 뱀을 잡기 위해서 눈독을 드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냥꾼이 뱀을 보니까 그 뱀은 죽을 줄도 모르고 어딘가를 또 노려보고 있었습니다. 뱀은 개구리를 보고 있었습니다. 개구리를 보니까 죽을 줄도 모르고 또 뭔가를 노려보고 있었는데 그것이 무당벌레를 잡아먹으려고 노려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무당벌레는 또 죽을 줄도 모르고 눈만 껌뻑 껌뻑 거리고 있었습니다. 그 순간 사냥꾼이 슬그머니 화살을 내려놓고 자신의 뒤를 돌아다보았습니다. 나도 누군가 뒤에서 노려보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뒤를 돌아보니까 누군가가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그것이 죽음이었습니다. 지금 그것도 모르고 뭔가를 더 먹어보겠다고 정신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렇게 정신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은 대개 죽음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는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이 모른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기에 그들을 깨우쳐 알게 해 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전도입니다. 

오늘은 고난주일입니다. 오늘 침울하게 금식만 할 것이 아니고 오늘을 환희의 날로, 감사의 날로 보내야 합니다. 내가 주의 자녀가 되었음을 감사하고, 내가 부활의 은혜를 누리게 된 것을 감사하고, 그리고 내가 천국의 시민된 것을 감사하는 날입니다. 이 은혜를 나누기 위해서 우리는 또 누군가에게 이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이 모든 은혜는 우리 주님의 고난 때문에 주어진 은혜요 축복이기 때문입니다.  (이정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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