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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려주일] 나를 대신한 십자가 (사 5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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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대신한 십자가(사53:1~9)

오늘은 종려주일(棕櫚主日, Palm Sunday)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고난을 위해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신 날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나귀 타고 입성하실 때 많은 백성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환호하던 것을 기념하여 ‘종려’ 주일이라 부르는 겁니다. 종려주일은 부활절 직전 주일인 동시에 사순절의 마지막 주일로 고난주간이 시작되는 날이어서 ‘수난주일’(受難主日)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오늘은 이사야 53장 중심으로 ‘나를 대신한 십자가’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해드리고자 합니다. 십자가는 두말할 필요 없이 우리 신앙의 기초이며 중심입니다. 다시 한번 십자가의 의미를 살펴봄으로 구원을 재확인하시고, 새 힘을 얻는 복된 시간 되기를 바랍니다. 

이사야는 예수님의 성탄 이전 7백여년 전에 활동하던 선지자입니다. 그가 기록한 이사야서는 총 66장인데,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1부터 39까지(39장), 그리고 40장부터 66장(27장)까지 두 부분입니다. 흥미롭게도 성경 전체가 66권으로 구약이 39권이고 신약이 27권입니다. 그런데 묘하게도 이사야서 뒷부분인 40장부터 66장까지 27장이 예수님에 관해 집중적으로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부분을 가리켜 흔히 ‘구약 속의 신약’이라 부릅니다. 

그 중에서도 오늘 본문인 53장은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아주 생생하게 예언하고 있습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고난당하실 7백년 후의 일을 마치 옆에서 스케치하는 것처럼 기록하고 있습니다. 신기한 일이죠? 이래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겁니다. 


[1] 비천한 인간이 되신 메시야

본문을 보면 메시야로 오실 예수님이 어떻게 묘사되어 있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인간의 모습으로, 그것도 비천한 인간의 모습으로 묘사됩니다. 

본문을 죽 읽어보면 ‘그’(He)라는 대명사가 계속 반복되어 나옵니다. 직접적으로는 ‘여호와의 종’인데, 메시야(구세주)를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결국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먼저 2절을 보시죠.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여기 보면 ‘연한 순’ ‘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등의 표현이 나옵니다. 연약한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 모습은 전혀 아름답지 않고 초라하고 비천하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정말 그런 모습으로 오셨죠. 베들레헴 말구유에 천한 목수의 아들로, 갓난아기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저 시골구석인 나사렛에서 성장하셨습니다. 인간으로서 더 이상 천해지기 어려울 정도의 모습입니다. 

또 3절을 보시죠.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 하였도다” 무슨 말입니까? 비천한 모습으로 오셔서 많은 사람들에게 멸시를 당하고, 고난을 당한다는 뜻입니다. 정말 그랬죠. 복음서를 읽어 보면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사람들이 몰려든 것처럼 보이지만, 뒤로 갈수록 사람들에게 조롱과 멸시, 고난과 핍박을 당하게 됩니다. 


[2] 대속의 제물이 되신 메시야

여러분, 예수님은 분명 하나님의 아들이신데 왜 그토록 비천한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을까요? 그 이유는 한 마디로 대속의 제물이 되기 위해서입니다. 그분은 의로운 분으로 눈곱만큼도 고난당할 이유가 없었지만, 죄인들을 위해 대신 고난을 당한 것입니다. 

이사야는 본문에서 구구절절 그 사실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4절을 보십시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이 말씀대로 예수님은 인간의 죄로 인한 모든 질고와 슬픔을 대신 당하셨습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장본인인 인간들은 그것을 전혀 모르고 예수님이 자신의 죄로 고난을 당하는 것으로 오해했습니다. 

또 5절 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 ” 이 말씀대로 예수님은 가시 면류관에 찔리고, 창에 찔리고, 못에 찔리고 십자가에 달려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당시의 채찍은 단순한 가죽 채찍이 아닙니다. 쇠붙이가 달려 있어 채찍질을 하면 온 몸에 휘감기며 살점이 묻어나는 아주 잔인한 고문 도구입니다. 또 십자가에 못 박힌 채 매달려 있으면 온 몸의 체중이 못 박힌 손목과 발목에 실리게 되어서 살이 찢기고 뼈가 부서지고 ... 그 고통은 형언할 수 없는 겁니다. 그뿐이 아니죠. 십자가는 당시 가장 사악한 죄수를 처형하는 사형도구 아닙니까? 그러니 얼마나 수치스럽습니까? 육신의 고통도 컸지만, 마음의 고통도 그 이상이었을 겁니다. 

이 모든 고통이 무엇 때문이라고 말합니까? 예수님은 무죄한 하나님이 아들이지만,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그렇게 된 겁니다. 6절에서 그 사실을 다시 지적합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인간은 마치 양과 같다는 겁니다. 양은 온순해 보이지만 아주 고집스럽고 미련한 동물입니다. 게다가 눈이 나빠서 먼 데를 잘 보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목자가 챙겨주지 않고 그냥 내버려두면 자기 멋대로 갑니다. 인간이 양과 비슷합니다. 그래서 죄인입니다. 그 모든 죄악을 대신 짊어지고 예수님이 고난을 당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침내 십자가에 달려 운명하셨고, 무덤에 장사되셨습니다. 9절. “그는 강포를 행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입에 거짓이 없었으나 그의 무덤이 악인들과 함께 있었으며 그가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있었도다” 이 구절을 보면 아주 신기합니다. 사형을 집행한 자들은 예수님의 시신을 강도들과 섞어서 장사지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아리마대 요셉이 등장해서 자기를 위해 준비해 두었던 새 무덤을 헌납합니다.(마27:57~61) 이렇게 해서 예수님이 부자의 무덤에 묻히게 된 겁니다. 예언의 말씀이 절묘하게 성취된 겁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전적으로 모든 인간의 죄악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습니다. 이를 가리켜 대속(代贖, Redemption/Atonement)이라 부릅니다. 죄값을 대신 치렀다는 뜻입니다. 

구약 성경을 보면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의 예표로 여러 가지가 등장합니다. 지난주일 말씀드린 유월절 어린양, 놋뱀, 도피성 등 ... 그 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죠. 그런데 그 모든 것의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피의 제사’라는 사실입니다. 죄를 속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짐승을 죽여 피를 흘려야 된다는 겁니다. 이러한 피의 제사가 성경에서 제일 먼저 등장한 것은 창3:15입니다. 아담과 여자가 하나님과 맺은 선악과 언약을 파기한 직후 하나님이 주신 예언의 말씀, 약속의 말씀입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여기서 뱀은 사단을 가리키고, 여자의 후손은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통해 사단을 격멸하고, 인간을 죄와 사망에서 구원한다는 말씀입니다. 죄로 영원한 멸망할 인간에게 주신 소망과 기쁨의 소식이었습니다. 그게 바로 복음이죠. 그래서 창3:15을 가리켜 신학자들이 흔히 최초로 예언된 복음이란 뜻으로 ‘원시복음’(原始福音, Proto-Evangelium)이라 부릅니다. 

아담은 이 말씀을 받고 믿음으로 기쁨이 넘쳤을 겁니다. 영원히 죽을 인생에게 영원한 생명의 길이 열렸기 때문입니다. 그때 아담의 반응이 무엇이었습니까?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고 지어줍니다. 하와라는 이름은 ‘생명’이란 뜻입니다. 그러니까 하와를 통해 그 후손으로 구세주가 오실 것임을 믿었던 겁니다. 창3:20 “아담이 그의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 불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머니가 됨이더라”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다음에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만들어서 입혀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창3: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여기서 대속의 원리, 피의 제사가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창세기 3장 앞부분을 보면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후 죄의 수치를 느끼게 됩니다. 죄는 반드시 수치심을 유발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죠? 무화과 나뭇잎으로 치마를 해 입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1회용으로 신통치 않습니다. 죄를 온전히 가릴 수 없었습니다. 반면 가죽옷은 죄를 충분히 가려줍니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무엇입니까? 가죽옷을 만들기 위해서는 양 같은 짐승이 무고하게 죽어야 한다는 겁니다. 대신 피흘려 죽는 것이죠. 이게 대속입니다. 피의 제사입니다. 히9:22 말씀 그대로입니다. “ ...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지만 동시에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죄를 어물쩍 지나가지 않으십니다. 반드시 죄값을 묻습니다. 다만 사랑으로 하나님 자신이 대속물을 준비해 주십니다. 여기서부터 시작된 피의 제사가 유월절 어린 양, 이스라엘의 제사제도 등으로 이어지다가 마침내 예수님의 십자가로 완전 성취된 것입니다. 

이러한 대속의 원리를 설명해 주는 예화들이 있습니다. TV 사극 <대조영>을 보고 은혜(?) 받은 적이 있습니다. 대조영의 측근 장수들이 나오는데, 그 중에 대조영의 아우 걸사비우와 여장수 금란의 이야기입니다. 둘은 서로 사랑하지만 거듭되는 전쟁 중에 고백할 기회조차 갖지 못합니다. 그러다가 한번은 당나라 군사들과 싸우다가 패퇴하고 군사들이 이리저리 흩어지는데 두 사람이 따로 떨어지게 됩니다. 그러다가 그만 당나라 군사들에게 발견되어 쫓기게 됩니다. 마침 금란이 다리가 부러져 거둥이 불편합니다. 잘못하면 두 사람 다 죽을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그때 사태를 파악한 금란이 걸사비우에게 자기를 업어달라고 말합니다. 사실은 걸사비우를 보호하려고 목숨을 바친 겁니다. 빗발치는 화살을 자기 몸으로 다 막아냅니다. 결국 자기는 죽고 걸사비우를 살려냅니다. 이런 게 대속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우리의 죄악으로 인해 닥쳐오는 저주와 사망의 화살들을 막아주십니다.

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중세 유럽에 페스트가 돌았습니다. 한번 감염되면 반드시 죽는 치명적인 병이었습니다. 프랑스 마르세이유에도 페스트가 번져 삽시간에 죽음의 도시가 되어 버렸습니다. 의사들도 속수무책입니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 없어 의사들이 모여 의논을 합니다. 묘안이 없었는데, 그 중 한 사람이 의견을 냅니다. 페스트로 죽은 사람의 시체를 해부하면 치료약을 개발할 수 있는 길이 있을 것이라고. 모두 동의합니다. 그런데 정작 그 일을 하려고 나서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때 기용(Guyon)이란 의사가 나섭니다. 그는 밤새 기도하고 결단을 내립니다. 시체를 해부하고 여러 가지 조사를 하고 자료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12시간만 죽고 맙니다. 그가 희생당함으로 많은 사람들이 페스트에서 구원받고 새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런 게 대속입니다. 


[3] 구원을 베푸시는 메시야 

예수님은 대속의 제물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인류 구원의 길을 활짝 여셨습니다. 이사야는 이런 사실을 뭐라고 예언했습니까? 5절(하). “ ...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여기 보면 대조되는 두 가지 단어 반복되어 나타납니다. “그가(He) ... 우리는(We) ... 그가(He) ... 우리는(We) ... ” 예수님의 고난으로 우리에게 구원의 길이 열렸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정말 구원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우리’(We)가 ‘나’(I)로 바뀌어야 합니다. 원칙적으로 예수님이 인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지만, 내가 개인적으로 회개하고 믿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오직 믿는 자들만 구원받는다는 '제한속죄'(Limited Atonement) 교리가 맞습니다. 

여러분, 네덜란드의 화가 렘브란트(Rembrandt Harmensz van Rijn 1606∼1669)를 아시죠. 그는 신실한 크리스천으로 그림을 통해 신앙을 고백했던 사람입니다. 그의 작품 가운데 ‘십자가를 세우다’(1633)라는 그림이 있는데, 잘 보면 예수님을 처형하는 사람이 베레모를 쓰고 있습니다. 누구이겠습니까? 렘브란트 자신입니다. 자기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고, 자기가 예수님을 죽였다는 겁니다. 이런 신앙 고백이 있는 자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십자가 구원의 신비에 관해 이렇게 외칩니다. 고전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믿지 않는 자들에게 십자가는 한갓 웃음거리입니다. 기껏해야 액세서리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믿는 자에게는 놀라운 구원의 역사나 나타납니다. 

이사야는 십자가를 믿음으로 얻는 구원의 축복을 뭐라고 설명하고 있습니까? 두 가지입니다. ‘평화’와 ‘나음’인데, 다른 말로 하면 ‘화목’과 ‘치유’입니다. 

① 화목 : 

5절(하) 보면, 이사야는 “ ...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 ”라고 증거합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게 되었다는 겁니다. 죄는 하나님과 인간을 단절시킵니다. 원수처럼 분리시킵니다. 이게 곧 영적 사망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죽음은 ‘분리’입니다. 하나님과 분리됨으로 생명이 없고 은혜가 없고 기쁨이, 평안이, 축복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인간을 화목하게 함으로 다시 이어주는 역할을 하는 중보자 즉 대제사장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이 바로 유일한 대제사장입니다. 대제사장이란 단어가 라틴어로 ‘Pontifex’인데, ‘다리를 놓아주는 자’(Bridge-Builder)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죄로 인해 끊어졌던 관계의 다리를 다시 이어주는 분입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과 인간, 하나님과 내가 화목(和睦, Reconciliation)을 이루게 되는 겁니다. 이를 가리켜 바울은 롬5:10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이 진리만이 우리를 죄에서, 사망에서, 지옥의 형벌에서 구원합니다. 세상의 다른 조건은 하나도 소용이 없습니다. 구원을 위해서는 억만금도 화려한 권세와 명예도 헛것입니다. 화학자로, 미생물학자로, 광견병 백신을 만든 것으로 유명한 파스퇴르(Louis Pasteur 1822∼1895)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부귀영화를 모두 얻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임종이 가까워지자 그 모든 게 아무 것도 아님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는 마지막 숨을 헐떡거리며 한 손으로 아내를 붙잡고, 다른 한 손으로 십자가를 꼭 붙잡았습니다. 드디어 숨을 거둡니다. 고통스러워하던 그의 얼굴이 이내 평안한 모습으로 바뀌었습니다. 그 영혼이 천국에 들어간 것입니다. 그는 단 한 가지 십자가를 믿음으로 천국에 들어갔습니다. 

저와 여러분에게도 이 십자가가 있습니까? 여러분, 세상 것은 결국은 다 날아갑니다! 요즘 정치권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보면서 인생을 배웁니다! 5년 전, 10년 전 권세를 부리던 사람들이 다 날아갑니다. 지금 권세를 쥐고 있는 자들이 앞으로 5년, 10년이 지나가면 그런 모습이 될 겁니다. 이게 세상 권력입니다. 세상 것은 다 이렇습니다. 우리 인생의 마지막 순간 붙잡아야 할 단 한 가지, 그것은 오직 십자가뿐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하나님과의 화목뿐 아니라, 인간관계 속에서도 화목이 필요합니다. 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분리시킬 뿐 아니라, 인간과 인간 사이를 분리시키기도 합니다. 복잡한 인간관계 역시 십자가를 통해 화목해질 수 있습니다. 엡2: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바울 당시 이방인과 유대인은 원수지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로 하나 될 수 있다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우리 가정에서, 사회에서 수많은 갈등과 불화의 문제들을 그 무엇으로도 해결할 수 없지만, 십자가 안에서 용서하고 사랑함으로 화목해질 수 있습니다. 

② 치유 :

5절(하)를 다시 보시죠. 5절(하). “ ...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십자가 구원의 중요한 부분이 ‘치유’의 축복입니다. 십자가는 모든 것을 치유해 줍니다. 우리 인생 가운데 영적인 상처와 육적인 질병과 온갖 문제와 고통들이 우리를 억압합니다. 우리는 그것들로부터 해방되고 치유되어야 합니다. 

출애굽기 15장을 보면, 마라의 쓴 물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스라엘이 광야 통과하는데 물이 없어 고생합니다. 천신만고 끝에 물을 발견했는데 마실 수 없는 쓴 물입니다. 애를 태우며 모세가 기도하자 하나님께서 비방을 가르쳐줍니다. ‘한 나무’(출15:25)를 지시해 주면서 물에 던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대로 순종했더니 정말 쓴 물이 변하여 단 물이 됩니다. 그 나무는 장차 오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예표합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는 치유의 능력입니다! 육신의 질병을 치유하고, 마음의 상처를 치유 하고, 각종 인생고와 문제를 해결해 줍니다. 누군가 이런 말을 해요. 세상을 바라보면 답이 두 개라고 ... 답답! 답답하다는 겁니다. 그런데 십자가를 바라보면 답이 한 개입니다. 답! 십자가만이 진짜 해답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앞에, 하나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히4:15~16 “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16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여기 ‘동정한다’(同情 sympathize)는 단어가 한글개역성경에서는 ‘체휼’(體恤)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체휼한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인간의 모습으로 오셔서 모든 인생고를 몸소 경험하셨기에 우리를 알아주시고 우리도 예수님께 뜨거운 마음으로 다가갈 수 있음을 나타냅니다. 여러분, 동병상련(同病相憐)이란 말이 있죠. 만일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모습만 갖고 계시다면 멀고도 멀게 느껴질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이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기에 우리가 공감대를 가지고 담대히 다가갈 수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 이 말씀을 통해 다시 한번 십자가의 의미를 마음속에 새겨 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화목, 사람들과의 화목을 이루심으로 진정한 평화의 축복, 천국의 축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아울러 시시때때로 닥쳐오는 인생고에 직면할 때마다 좌절하거나 낙심하지 말고 십자가 앞에 담대히 나아가 기도함으로 꼭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홍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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