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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려주일] 상처입은 치유자 (사 5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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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입은 치유자 (사 50:4~9)

인간이면 누구나 삶의 고통에 대한 질문이 있습니다. 

독일의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한 젊은 시인에게 쓴 편지 내용입니다. “마음속에 풀리지 않는 문제에 대해 인내하라. 아주 낯선 방언으로 씌어져서 이해할 수 없는 책들을 대하듯 의문 그 자체를 사랑하려고 애쓰라. 당장 답변을 얻으려고 하지 말라. 답변되지 않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지금 답변을 듣지 못하는 이유는 혹 알려주더라도 그것을 받아들이기 힘들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의문을 던지며 사는 것이다. 지금은 의문과 더불어 살라. 그러면 서서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 해답 속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인생을 살면서 많은 질문을 갖고 있습니다. 특히 고통 받는 사람들, 육체적인 질병을 앓는 사람들, 사랑하는 사람을 먼저 떠나보낸 사람들, 직장과 삶의 터전을 상실한 사람들, 삶의 무의미성 때문에 외로움을 타는 사람들 등 인간이면 누구나 다 풀리지 않는 문제들에 대해서 의문을 갖고 고통스러워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도 삶이란 많은 문제와 고난이 있어야만 하는 것인지 질문하게 됩니다. ‘정말 행복과 기쁨이란 저 멀리에 있는 것인가? 우리 삶과는 관련이 없는 것인가? 어두운 터널 속에 갇혀 방황하는 것이 인간의 본래 삶인가? 인간은 더 이상 빛의 세계로 나갈 탈출구가 없는 것인가?’때로 우리 주위에는 부정적으로 삶을 비관하는 사람도 아주 많습니다. 

고난 속에는 행복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삶이 참으로 힘들다고 생각하는 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왜 자기에게는 고난과 슬픔만 가득한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깊은 산속에 행복을 가르쳐주는 신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찾아 나섰습니다. 이리저리 수소문해서 노인처럼 생긴 신을 산꼭대기에 발견하고 만났습니다. 그런데 노인은 동그랗게 생긴 작은 물체를 때로는 큰 물체를 산 아래로 자꾸 던지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본 청년이 물었습니다. 
“저는 행복을 가져다주는 신을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밑으로 던지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것 말인가? 바로 행복이라는 것이네.” 
청년은 그 뭉치가 무엇인지 자세히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뭉치에는 ‘행복’이라는 말은 전혀 없고 오히려 뭉치위에 ‘고난’‘시련’‘외로움’이라는 글이 적혀있었습니다. 
“이건 행복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게 물었더니 노인은 ‘고난’이라고 적혀있는 뭉치 하나를 손에 집어 들었습니다. 그러더니 뭉치의 껍데기를 몇 껍질 벗겼습니다. 그랬더니 그 안에 ‘행복’이라는 글자가 명백하게 쓰여 있었습니다. 
“어떤가? 겉표지에는 ‘고난’이라는 말이 적혀있지만 실제로 이것의 이름은 본래 ‘행복’일세. 사람들은 도대체 이것을 벗겨보지도 않는다네. 고난, 시련 같은 건 그냥 내 버려버린다네. 그리고는 불평한다네. 신이 왜 내게 행복은 주지 않고, 고난, 시련, 외로움만 주느냐고 원망해대는 것일세. 그게 사람들의 모습이네. 참 한심한 일이 아닌가?” 
우리가 깨닫기 못하는 인생의 비밀이 있습니다. 

고난의 자리 가장 가까이에 위로가 있습니다. 
슬픔의 자리 가장 가까이에 기쁨이 있습니다. 
불평의 자리 가장 가까이에 감사가 있습니다. 
원망의 자리 가장 가까이에 찬양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고통을 직접 겪으셨습니다. 

우리는 많은 사람들은 만납니다. 그러나 정말 기뻐하는 사람, 정말 감사하는 사람, 정말 위로를 받는 사람은 눈물을 흘리며 고통을 겪어본 본 사람들입니다. 그런 분들에게 감사의 눈물이 쏟아지는 것을 목격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눈에는 힘들고 어려운 것만 보입니다. 왜 그렇게 자주 불청객처럼 고통과 고난이 삶에 찾아오는지, 아니 내 안에서 나가지도 않고 나와 더불어 살겠다고 고집을 피우는지 때로 다 이해하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고통으로 가득한 현실이 답답할 때도 있습니다. 

주위를 돌아보면 몸이 아픈 사람, 마음이 편하지 않고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모든 것을 갖고 있는 사람처럼 보이지만 고독하며 외롭다고 부르짖는 사람이 많습니다. 착한 사람들인데 왜 저런 시련과 아픔을 겪어야 하는지 하나님 앞에 질문하게 됩니다. 우리 주위에 많은 사람들, 아니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에게 생긴 문제에 대한 삶의 물음들이 생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겪는 고통과 아픔을 삶에서 가장 강렬하게 겪으신 분이 있습니다. 그분은 몸으로 고통을 겪으셨습니다.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의 몸과 마음과 영혼 전체가 고통을 겪으신 분은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분이 십자가게 달려 돌아가시면서 외치셨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태복음 27:46) 

이 부르짖음은 인류역사상 가장 참혹한 부르짖음입니다. 예수님은 외롭게 홀로 부르짖으셨습니다. 가장 비참한 십자가라는 형틀 위에 달리셔서 부르짖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예수님의 고통스런 삶의 모습을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서 미리 말씀해 주셨습니다.

여호와의 종도 외로움의 상처를 받으셨습니다. 

본문은 여호와의 종의 노래로 앞으로 다가올 메시야가 바로 이런 분이라고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분은 상처투성이의 모습입니다. 고난과 조롱을 받는 사람입니다. 어느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는 버려진 존재입니다. 당시 아무도 그에게 관심이 없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한분이 관심을 갖고 계셨습니다.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사람들은 관심 없이 떠나가지만 하나님은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여호와의 종이 당하는 고통은 외로움의 상처였습니다. 홀로 있는 상처였습니다. 주의적대자들에게 여호와의 종이 모욕을 당하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모욕과 침 뱉음을 당하여도 내 얼굴을 가리지 아니하였느라” (이사야 50:6) 

예수님은 언어의 조롱과 비난 그리고 육체를 때리는 고문과 인격적인 모욕을 당하셨습니다. 남자에게 있어서 수염은 자존심과 인격입니다. 그런데 적대자들이 수염을 다 뽑았습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종에게 침을 뱉고 모욕했습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여호와의 종은 침묵하며 당하고만 있었습니다. 위로받고 도움 받을 곳이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모든 것이 무너졌습니다. 
모든 것이 떠나갔습니다. 
모든 것이 위기였습니다. 
모든 것이 절망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파괴를 당했습니다. 

사람들은 외로움 때문에 고통스러워합니다. 

인간으로서 받는 여러 가지 상처가 있지만 가장 아픈 고통은 외로움입니다. 인생의 많은 어려움이 있지만 사람은 근본적으로 외로움이 가장 견디기 힘듭니다. 내가 삶의 중심에 서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부터인가 삶의 중심에서부터 주변으로 밀려나고 있습니다. 인생을 살면서 이런 외로움을 얼마나 많이 느끼게 됩니까? 

내가 인생의 무대 한 가운데 서 있다고 생각했는데 주인공이 아닌 조연이나 엑스트라로 물러가고, 아예 무대 위에 참여할 자격조차도 없다고 떠나가야 할 때 마음은 고통스럽습니다. 나이 때문에 아픔이 찾아옵니다. 무섭게 자라나는 젊은이들을 보면서 가슴이 아픕니다. 그것이 자연스러운 질서이고 복인 줄 알면서도 아픕니다. 때로는 직업 때문에, 진급하지 못해서, 명예 때문에, 건강을 잃어서, 인간관계가 힘들어서 아픕니다. 내 인생이 이제는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게 되어 아픕니다. 내 인생에 동반자가 아무도 없고, 함께 책임질 사람이 없어서 외롭습니다. 이런 외로움이 우리 인생의 아픔을 증폭시킵니다. 

왜 사람들이 자살을 할까요? 돈이 많은 것 같은데, 어울리는 친구가 많이 있는 것 같은데 어느 날 갑자기 차디찬 시체로 사람들에게 발견되기도 합니다. 인간 뼈 속 깊이 아파오는 근본적인 외로움, 실존적인 외로움, 인간이 인간다움을 잃어버린 아픔 때문에 사람들은 고통 속에 빠져듭니다. 외로움을 참지 못해서 조금만 외롭다고 느끼면 어떻게 해서라도 외로움을 다른 것으로 대체시켜 보려고 합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외로움이 있는 것을 깨닫기도 전에 도망가 버립니다. 

여기서 어떻게 빠르게 빠져 나갈 수 있을까, 재빠른 만족감을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재빠른 위안을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를 고민합니다. 그래서 때로는 돈을 향한 욕망으로 외로움을 이겨 나갈 수 있다고 착각합니다. 때로는 남 앞에서 뽐내는 화려한 사치로 몸을 치장하면 사람들이 좋아할 것이라고 오해합니다. 육체의 쾌락 속에서 만족감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고상한 취미활동으로 위장합니다. 또는 육체를 단련시키는 스포츠를 즐겨보기도 합니다. 때로는 고급스러운 음악과 예술작품을 감상하면서 고상한 인격임을 과시해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서 돌아와 혼자 조용히 침대에 누우면 외로움에 견딜 수가 없습니다. 

여호와의 종도 외로움의 순간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았습니다. 

여호와의 종에게도 이런 외로움이 있었습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습니다. 적대자들로만 가득 차 있고 친구는 사라지고 없습니다. 사람들이 여호와의 종을 비난할 때 외로움과 고통 받는 상처를 넘어서는 여호와의 종의 모습이 나타났습니다. 자신이 외로운 존재이며 홀로 있을 수밖에 없음을 가슴으로부터 깨닫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인생의 진정한 동반자일 수는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외로움이 새로운 삶을 열어나가는 값진 보물이 될 수 있다고 가슴으로부터 확인한 것입니다.

여호와의 종은 외롭습니다. 여호와의 종은 상처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순간 하나님을 발견합니다. 고통의 상처를 입은 자리에서 하나님께서 자기를 지켜보고 계심을 깨닫습니다. 하나님이 처음부터 나와 함께 계시고 나의 아픔에 함께하셨음을 깨닫습니다. 나를 도우시는 하나님을 발견합니다. 본문에서는 이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를 의롭다 하시는 의가 가까이 계시니 나와 다툴 자가 누구냐 나와 함께 설지어다” (이사야 50:8) 

나를 의롭다 하시는 이가 하나님이십니다. 나를 도우시는 이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외로운 고난의 상처를 빨리 치유해줄 것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오히려 상처 입은 우리를 바라보시며 외로워하십니다. 적대자들에 의해서 조롱과 비난을 받는 순간 함께 계십니다. 고통 받을 때 빨리 고통을 제거 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 고통에 함께하시며 울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말씀을 통해서 우리를 고통과 외로움에서부터 자유하게 해주십니다.  

십자가에 수난당하시고 고통 받으신 예수님은 고난당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찾아오십니다. 고난의 고독한 길을 가신 예수님께서 고난당하는 우리를 가슴으로 안아주십니다. 우리가 아파하고 외로워하며 지쳤을 때 예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셔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의 친구란다. 나도 네 고난에 동참하고 있단다. 내가 네 곁에서 지켜보고 있단다. 너를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딸로 세우기를 원한다.” 
이 순간 우리의 죄악이 용서를 받습니다. 이 때 고난의 문제가 주님과 더불어 해결 받습니다. 내가 외로운 존재이지만 주님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험하면서 외로움을 이겨나가는 용기와 능력을 얻습니다. 내 인생이 하나님의 축복의 역사라는 사실을 새롭게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은 고통 받는 자를 위로하기 위해 상처를 받으셨습니다. 

여호와의 종은 왜 고난 받았을까요? 그는 고통 받는 사람들을 위로해주기 위해서 직접 고난 받으셨습니다. 

“주 여호와께서 학자들에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고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 줄 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이사야 50:4 전반절) 

하나님께서 아침마다 영혼을 깨우시고 말씀으로 가르쳐 주시며 위로해주십니다. 곤고한 사람들, 지친 사람들, 외로운 사람들의 상처를 싸매주도록 나를 도와주신 것처럼 하나님께서 내가 다른 사람들을 도와주도록 세워주셨다는 감사의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고통을 이해할 때 남의 아픔을 위로할 수 있습니다. 외로움을 아는 사람이 남의 외로움도 알 수 있습니다. 어둠에 있어 본 사람이 길을 잃은 사람을 빛의 세계로 이끌 수가 있습니다. 

우리의 약점은 하나님과 함께 있을 때 강점이 됩니다. 
우리의 약점은 하나님과 함께 있을 때 치유가 일어납니다. 
우리의 약점은 하나님과 함께 있을 때 회복이 나타납니다.

이처럼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있을 때 곤고한 자, 고통당하는 자가 일어서는 축복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인생의 아름다움과 고상함을 앎과 동시에 비참함과 누추함을 알 때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외로움도 알고 하나님이 함께 계심을 알 때 그런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양자를 모두 즉시 할 줄 아는 사람만이 영혼이 살아있는 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사랑받는 사람만이 이웃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해줄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사랑하는 시늉만 내는 사람은 자기 자랑과 교만에 불과한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고통 받은 자를 치유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십시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우리의 연약함, 우리의 죄악, 우리의 외로움을 감당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용서받은 존재, 사랑받은 존재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축복의 통로가 되어 세상을 향해 나아갑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외로움이 크면 클수록 다른 사람의 외로움을 따뜻하게 도와줄 수 있습니다. 감당할 수 없는 죄책감의 고통을 받으면 받을수록 예수님과 함께 다른 사람의 연약함을 은혜로 회복시켜 하나님의 사람 된 기쁨을 줄 수가 있습니다. 여호와의 종이 이렇게 말합니다.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들 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 (이사야 50:4 후반절)

여기서 학자들이란 제자들을 말합니다. 배우는 사람같이 깨닫고 알아듣게 하셨다고 말씀합니다. 아침마다 잠에서 깨어나서 새벽기도에 함께 참여하고 예수님의 고난을 경험할 때 우리가 남의 연약함을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내가 고통 받은 것이 다른 사람의 고통을 하나님 앞에서 치유하는 도구가 되는 축복의 역사가 열려질 것입니다. 고난과 어려움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도망가지 마시고, 그것 때문에 더 하나님 앞에 머리 숙여 말씀을 받으면서 새로운 역사를 이루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삶이 때로는 피곤했고 어려웠습니다. 마음에 상처를 받고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러나 이 순간 예수님을 알게 하셔서 우리를 위로하시고 받은 위로로 이웃을 위로할 수 있도록 축복하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필요하면 금식하게 하시고, 필요하면 새벽기도에 나오게 하시고, 필요하면 말씀을 통해서 치유하옵소서. 예수님처럼 상처 입으셨지만 위로하고 회복시켜 주신 치유자로 우리를 이 땅에서 세워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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