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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려주일] 나귀새끼를 타신 왕 (마 2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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끼를 타신 왕 (마 21:1-11)

오늘은 사순절의 마지막 주일 곧 고난주일입니다. 그리고 이 고난주일을 종려주일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고난주일하면 좀 끔찍하니까 왕으로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을 강조하는 것이지요. 종려란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는 퍼레이드를 벌일 때,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꺽어 길에 깔고 그것을 흔들어 대선 것에서 연유된 것입니다. 종려나무란 이스라엘에서 제일 흔한 올리브 나무를 말합니다. 

예수께서는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성에 들어 가셨습니다. 어찌 보면 우스꽝스럽게 보일 수도 있는 처사였습니다. 당시 개선장군은 의례 말을 타고 입성하는게 관례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볼 품 없는 나귀, 그것도 아직 채 자라지 않은 어린 나귀위에 앉으셨습니다. 

오늘의 본문에서는 2절에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너라.’ 또 7절에 보면 ‘나귀와 나귀새끼를 끌고와서... 예수께서 그 위에 타시니’로 되어 있어 어미 나귀인지 새끼 나귀인지를 분명히 알 수 없지만, 마가복음 11장, 누가복음 19장, 요한복음 12장에 보면 새끼 나귀를 타신 것이 확실함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사건에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겸손’입니다. 그는 겸손한 왕이었습니다. 그는 이미 왕이었습니다. 여기에 그리스도의 고난의 신비가 있습니다. 겸손, 온유하여 왕이 된 것이 아니라 왕으로서 겸손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초대 교회 사람들의 고백을 듣게 됩니다. 그는 하늘 보좌를 내 놓으시고 땅에 오신 분이시다. 그는 말씀이시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심이다. 하는 고백을 하게 됩니다. 희생하고 봉사하고 십자가에 죽어서 메시야가 된 것이 아니고 말씀이요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로 오셔서 봉사하고 십자가를 지신 거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에 그리스도 고난의 신비가 있는 것입니다. 

많은 신학자들이 다음과 같이 한 번 추리해 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와서 진리를 가르치고, 병을 고쳐주시고, 좋은 일 많이 하셨지요. 그러나 그것 가지고는 십자가에 달리실 이유가 안 됩니다. 당시 상황을 자세히 살펴보면 예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성으로 올라가신 일, 또 올라가셔서 예루살렘 성전을 막 휘저어 깨끗케 하신일 - 이 두 가지 사건만 없었더라면 어쩌면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돌아가시지 않았을는지도 모른다 - 그럴 것 같습니다. 어찌 생각하면 예수님께서는 지금 정면충돌을 하시는 것입니다. 대제사장의 무리가 있는 곳에 가셔서 성전을 휘저으셨습니다. 정치적 메시야를 그렇게도 갈구하고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 그 위험한 백성들 앞에 어떻게 정치적인 퍼레이드를 벌이신단 말입니까. 그래서 심지어 예수님의 십자가가 타살이냐, 자살이냐 하는 의문까지도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갈릴리에 가 계시기만 했어도 안 돌아가시는 건데 예루살렘에 오셔서 나귀를 타고 입성하는, 호산나 만세를 부르는 퍼레이드를 벌여놨으니 죽으실 수밖에요. 그러면 왜 이래야 했습니까. 이것은 계시적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왕 되심, 예수님의 메시야 되심과 만왕의 왕 되심을 반드시 나타내주어야 했습니다. 성경대로 되는 일이기 때문이요. 하나님의 구속사역이기 때문입니다. 백성들을 끝까지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알지 못했습니다. 제자들도 알지 못했습니다. 제자들이 알건 모르건 예수님은 밀어 붙였습니다. 지금은 내가 이렇게 하는 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너희가 모를 것이다. 그러나 언젠가는 알게 될 것이다. 나중 일이긴 합니다만 마치 이 사건과도 같습니다. 요한복음 13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팔을 걷고 세숫대야에 물을 떠다가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기십니다. 제자들이 황송해서 안 씻겠다고 하는데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하십니다. 심각한 말씀을 하십니다. 내게 발 씻김을 받지 않는다면 너는 나와 상관이 없다. 하시면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데 거기서 귀중한 교훈을 주셨습니다. ‘지금은 모르지만 이후에는 알리라’

여러분, 자녀들을 위해서 수고하십니까? 설명한다고 아는 것입니까? 아이들이 다 알아 줄 것 같습니까? 지금은 모르지만 언젠가는 알 것입니다. 그래서 부모들이 때때로 이런 말 하지요. 너도 애비가 되어 봐라. 너도 언젠가 엄마가 되어 봐라. 그러면 알거다. - 자, 몰라준다고 손 놓고 말수 없어 언젠가 알게 될 것을 전제로, 믿고 오늘 해야 될 일을 하는 것이지요.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그 많은 오해, 그 많은 문제가 있음에도 개의치 않고 밀어 붙이셨습니다. 나귀를 타고 올라가십니다. 정말 귀중한 일입니다. 

여러분, 앞뒤를 다 가리고 나면 아무 일도 못합니다. 할 만한 일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리 생각하면 이게 잘못되고, 저렇게 생각하면 저게 걸립니다. 결과는 하나님께 맡겨야 됩니다. 오늘 내가 해야 될 일을 하고, 하나님 앞에서 성실히 하고, 그 후속 결과에 대해서는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농부의 마음으로 씨를 뿌리고 가꾸어야 합니다. 가을을 주시고 추수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일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해야 할 일에는 용기있게 우리의 도리를 다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나귀를 타고 올라가시다니 이게 될 수 있는 일입니까. 당신을 잡아 죽이려고 바야흐로 잔뜩 벼르고들 있는데, 뻔히 아시면서 어쩌자고 이런 퍼레이드를 벌이시는 것입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걸 중단하시지 않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의 그 깊은 뜻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고난주간은 바로 이 겸손을 배우는 절기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그분의 모습에서 겸손을 배우고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겸손을 비굴과 혼동하지 말아야 합니다. 비굴은 속내와 상관없는 억지 무릎 꿇음이지만 겸손은 스스로 낮춤입니다. 따라서 겸손에는 욕기가 필요합니다.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주님의 겸손을 이렇게 찬양하며 교훈합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5-8)’ 성도 여러분, 우리도 예수님처럼 겸손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그리스도인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오늘의 사건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 하나는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는 예수를 향한 사람들의 반응입니다. 9절에 보면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질러 가로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하였습니다. 여기의 ‘호산나’란 우리의 ‘만세’와 같은 뉘앙스로 사용되고 있었으며 더 정확한 뜻은 ‘지금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를 목청껏 외쳤습니다. 그들의 외침 속에는 간절한 바람이 담겨 있었습니다. 자신들의 역사 가운데 번영의 전성기를 누렸던 다윗과 솔로몬 시대로 돌아가고픈 바람이 ‘다윗나라’라는 구호로 표현되었습니다. 다윗의 나라, 요즘식으로 하면 정치경제적 번영을 구가하던 시절입니다. 당시 로마의 식민지배로 고통 당하던 이스라엘 사라들에게 가장 절실한 요청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다윗의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 하나님나라는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는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그 나라를 선포하신 예수님의 삶 속에서 결정적으로 증거되었습니다. 예수의 삶을 통해 이미 시작한 그 나라는 결코 물질적 풍요나 정치적 영향력으로 대치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작은 생명하나에도 온 정성으로 다가서는 온유함입니다.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의 소중함을 놓치지 않습니다. 결코 산술적 가치가 기준 노릇하지 않았습니다. 

최근 우리 사회는 정권교체라는 변화의 소용돌이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변화가 예사롭지 않은 까닭은 10년 만에 이뤄지는 정권교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변화가 눈에 드러납니다. 그렇다고 특별한 장면은 아닙니다. 우리보다 민주주의 역사가 앞선 나라의 경우를 보더라도 진보정당과 보수정당이 서로 정권을 주고받으면서 자신들의 이념을 실현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새로 들어선 정권이 경제 성장을 제일 가치로 내걸고 그에 걸 맞는 경쟁력과 효율성만을 최우선 하는 모습을 보면서 우려됨이 없지 않습니다. 우리가 일궈야 할 미래 사회의 청사진에는 경제 효율성만이 아니라 보다 다양한 가치 기준이 균형 있게 자리 잡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2천년전 이스라엘 백성들의 착각을 다시 되풀이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고난 주간에 담는 우리의 기도는 ‘다윗의 나라’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들의 진솔한 죄의 고백 위에 우리 주님의 죄의 용서하심과 구원의 은총을 기다리며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다가오는 고난주간에 예수그리스도를 향해 옳고 바른 기도를 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유명한 안소니 멜로 박사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청년 시절에는 세계를 변화시켜 주십사고 기도 그렸다. 중년이 되어서는 내 이웃을 변화시켜 주십사고 기도 드렸다. 60이 된 오늘은 오직 하나 ’하나님이여, 나를 변화시켜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고 있다.’ 우리는 정치 문제에 너무 관심이 많습니다. 경제 문제에 너무 민감합니다. 그것들은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내가 할 일이 무엇입니까? 바로 이 현실에서 내가 조용히 하나님 앞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십자가가 있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나귀를 타고 가시는 예수를 바로 알고 따르는 것입니다. 

무리들은 그저 정치적인 메시야가 지금 대관하는 것으로, 즉위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뜻도 모르고 호산나를 불렀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보면 대단히 유감스럽습니다. 고관들이 나와서 이게 누구냐하고 물으니까 갈릴리에서 온 선지자라고 대답할 뿐입니다.(11절) ‘그리스도, 만왕의 왕’ 퍼레이드를 좀 하는 것이니 신경 쓸 것 없다는 식입니다. 아무 뜻도 모르고 잠시 그들과 함께 소동을 벌였을 뿐입니다. 

그러나 저들이 오순절에 성령 강림 할 때에 십자가의 뜻을 알고, 부활의 뜻을 알고, 이제 비로소 메시야가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우주적 메시야의 뜻을 알게 됩니다. 그 때에는 오늘처럼 호산나 만세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과 함께 십자가를 집니다. 순교하게 됩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가 길거리에 나가서 호산나 만세를 부르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왕 되신 주님, 그에게 우리 생명을 맡기고, 정말 뜻을 알고 호산나를 불러야 할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께서 왕으로 입성하시고 십자가를 지셨다면 그의 제자들도 당연히 십자가를 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통해서 메시야의 역할을, 그 귀한 사명을 감당하셨다면 우리 또한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고 비로소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얻게 될 것을 믿고 행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때는 알지 못했지만 지금 우리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이것을 알고, 믿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지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다른 편에 전혀 다른 모습의 사람이 있었음을 잊지 맙시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그 때에 그 메시야, 왕이신 예수를 알고 이름 없이 순종하고 헌신한 사람이 있었고, 그래서 예수님의 입성은 의도대로 빛이 났습니다. 예수께서 두 제자에게 맞은편 마을로 가서 매인 나귀를 보면 그것을 내게로 끌고 오라 하십니다.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자신의 이름도 얼굴도 나타내지 않는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의 놀라운 이 일을 이해하고 자신의 나귀와 나귀새끼를 순순히 보냈으니 성경의 말씀대로, 예수님의 의도대로 예루살렘의 입성은 진행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주께서 쓰시겠다면 쓰십시오. 어느 때에라도 무엇이라도 주님께서 쓰시겠다 하시면 드리겠습니다. 이렇게 대답할 수 있습니까. 이렇게 순종하며 헌신하는 사람과 함께 겸손히 섬기려 하시는 주님의 일은 오늘도 진행되는 것입니다. 지금도 주님은 호산나 외치는 어리석은 군중들 보다 이름 없이 주님의 일에 동참하는 개인을 부르시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 이 교회에는 필요합니다. 이런 사람이 지금 이 사회에 필요합니다. 겸손히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은 이런 사람이 필요하십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과 함께 주님의 일을 이루어 내십니다. 조금도 희생하지 않으며, 하나도 손해 보지 않고 이름은 내고 싶고 생색은 내고 싶은 우리로써는 쉽 지않은 일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도 이 고난주간에 기도합시다. 이제는 나귀새끼를 타신, 왕이신 예수를 알게 하시고 우리와 함께하시니 가능할 것입니다. 이런 변화가 믿음의 놀라운 일이 2008년 고난주간에 일어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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