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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려주일] 예수를 태우니 (눅 19:29:2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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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를 태우니 (눅 19:29:29-40)

어느 시대나 새로운 지도자가 등장하면 사람들은 대단한 기대와 부푼 꿈을 가지고 바라보게 됩니다. 특히 사회가 어렵고 경제 상황이 좋지 못할수록 사람들의 기대는 더욱 커지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대통령을 뽑아야 하는 선거철이 다가오면 대통령이 되겠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우리의 관심이 집중됩니다. 우리가 그들에게 관심을 갖는 것은 '저분이 대통령이 되면 우리나라가 안고 있는 문제들을 해결해 주지 않을까?' 라는 나름대로의 기대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역사가 우리에게 주는 냉정한 교훈이 하나 있습니다. 인간의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하고 우리의 기대를 충족시킬 수 있는 지도자는 지금까지 한 사람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어떤 면에서 지도자에 대한 기대의 역사는 곧 실망의 역사였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읽은 말씀에 등장하는,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다릅니다. 하나님은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는 이 예수님을 가리키면서 "저분만이 인류가 기다리는 진정한 왕"이라고 선언하고 계십니다. 당시의 세계 최대 강국은 로마였습니다. 예루살렘에는 로마가 파송한 총독 빌라도를 비롯하여 많은 지도자들이 와 있었습니다.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총독이었던 빌라도는 부하로부터 "예수라는 사람이 지금 어린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오는데 모든 백성들이 그를 향하여 호산나 이스라엘의 왕이여" 하고 외치고 있습니다."라고 보고를 받았을 것입니다. 이 보고를 받은 빌라도는 너무도 터무니없는 이야기에 웃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어린 나귀 새끼를 타고 오는 주제에 왕이라고?" 얼마나 우스운 이야기입니까?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누가 어린 나귀 새끼를 타고 들어가는 분을 인류가 기다리는 왕이요. 구원자라고 생각하겠습니까? 성장한 나귀도 아니고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오십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주님은 이 구원을 완성하기 위해 십자가를 지시로 예루살렘에 들어가십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예루살렘은 예배의 중심지요, 평화를 상징하는 도시였고, 또 사람들이 모이다 보니 상업과 정치의 핵심적이 당시, 유대의 대표적인 도시가 아닙니까? 다시 말하면, 정치, 경제, 종교를 움직이는 힘을 가진 곳입니다. 지금의 서울과 같은 곳이 아닙니까? 그러나, 우리의 고민이 어디에 있습니까? 이렇게 화려한 도시 한 복판에 살면서도 참 평안이 없어요. 눈을 뜨고 아침에 일어나면 온갖 문제의 파도가 끝도, 끝도 없이 밀려오잖아요? 처음엔, 이 때문에 충격도 있지만, 하도 많은 문제가 있다보니까, 사람들이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어도 무덤덤합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가정의 문제는 이미 위험 수위를 넘어섰습니다. OECD회원국 가운데 이혼율이 2위입니다. 또 건강문제는 날로 환경 오염이나, 공해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잇고, 또 경제문제도 백수가 300만이 넘어서고, 이로 인해 자살하는 사람이 선진국보다 많아요. 그리고 모두가 정신적인 고통 때문에 신경 안정제가 가장 많이 팔린다고 합니다. 어느 누구도 이런 일에 자유로운 사람이 없습니다. 행복의 파랑새를 찾아다녀 보지만, 찰나적인 쾌락은 있어도, 참된 행복은 없습니다.

이 아침! 여러분은 어떠세요. 행복하십니까? 나는 정말 행복하다는 그 확신 속에서 오늘도 기쁨을 가지고 살아가십니까? 왜 힘있게 고백을 못하십니까?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둘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임에도 불구하고, 자녀에게 주어진 하나님이 주신 특권을 깨닫지도, 알지도 못한 사람들이거나 , 또 하나는 아직 종교적인 모습으로 교회 나오는 거듭나지 않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그 은혜가 많은데 우리가 그것을 모른 채 마귀에게 끌려 다니는 사람이 많습니다. 얼마나 비참한지 모릅니다. 거듭나지 않은 채, 교회 생활하거나 거듭났으면서도, 복음의 능력을 모르고 사는 인생이 교회 안에 얼마나 많은 지 모릅니다. 바로 그런 무지한 인생들을 위하여 저, 하늘의 영광의 보좌를 포기하시고 낮은 자의 모습으로 주님이 이 땅에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자, 드디어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을 향해서 다가오십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흥분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나뭇가지를, 종려나무가지를 가지고 나와서 그것을 길에다가 놓기 시작했고 어떤 사람들은 자기의 겉옷을 벗어서 놓기 시작했습니다. 이 겉옷을 벗는 행위는 왕에 대한 예절이였습니다. 그를 왕으로 기대했다는 예루살렘 군중들의 기대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드디어 찬송소리가 터지기 시작합니다. 자, 본문의 9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아마도 이 찬송은 다른 복음서와 비교해 보면 어린아이들의 입술에서 먼저 순수한 아이들에 입에서 이 찬송이 터졌을 것입니다. 호산나! 호산나. 히브리말로는 '구하옵나니 기도하옵나니 지금 우리를 구원하소서'

여러분! 예루살렘 입성에 백성들의 환영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입니다. 마21:10절에는 '온 성이 소동'을 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셨을 때, 온 도시가 들떴습니다. ‘소동하다’는 단지 ‘웅성거리다’, ‘부산하게 움직이며 말하다’ 정도가 아닙니다. 이 단어가 ‘세이오'인데, 마태복음 27장에도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신 후에 하늘이 빛을 잃고, 성전의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찢어지고, 땅이 진동하면서 바위가 터지는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여기에서 땅이 ’진동하다‘가 ’소동하다‘와 동일한 단어입니다. 지진이 일어나면 온 지축이 뒤흔들리듯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오시는 모습을 보고 사람들의 마음이 뒤흔들리는 현상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 예수를 이처럼 온 성의 사람들이 열열히 환영을 한 것입니까? 본문에는 안 나와 있지만, 눅 19:37절을 보면 '이미 감람산에서 내려가는 편까지 가까이 오시매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의 본 바 모든 능한 일을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 여기 ‘자기의 본 바 모든 능한 일 때문’입니다. 도대체 어떤 표적을 들었기에 이처럼 열광을 할 수가 있었습니까? 최근의 예수님의 행적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리고에서 한 시각장애인의 눈을 뜨게 해 주시고, 평생을 돈의 노예로 살았던 삭개오을 찾아가셔서 그의 인생을 변화시켜주셨습니다. 주님께서 자기 집을 찾아와 준 것이 그토록 감격이 되었던 삭개오는 자신의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강제로 빼앗은 것은 4배로 갚겠다고 고백했습니다. 그 후에 죽은 지 4일이나 되는 나사로를 살려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리시는 현장에는 제자들은 물론 많은 유대인들이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본 유대인들이 자기들의 본 것을 알리기 시작했고, 그것은 이스라엘 전역으로 퍼져나갔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보고 열광했던 것입니다. 이런 일련의 사건들이 제자들에게서 사람들에게로, 또 다른 사람들에게로 퍼져나갔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가셨음에도 사람들이 있는 힘을 다해서 환호성을 질렀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토록 열렬하게 환영했던 것은 자신들의 죄를 사함 받는 구원의 열망이 아니라 단지 그들 눈앞에 비쳐진 주님의 능력이었습니다. 시각장애인의 눈을 뜨게 하고, 포악한 인간의 대명사였던 세리를 바꾸어 놓고, 죽은 지 나흘이 되어서 이미 장례까지 치른 시체를 살려내는 분이라면 자기들이 생각하는 소원을 들어주시기에 충분하다고 여겼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기대가 한 순간에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자신들의 왕이라고 여겼던 예수가 로마에게 저항 한번 제대로 하지 못한 채,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 감방에 갇히게 되었고, 사람들은 실망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환호하던 많은 군중들은… 빌라도 법정에서 유월절 특사 선택에서 엄청난 죄인 "바라바"를 택하였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예수님이 가장 아끼고 사랑했던 제자들은 십자가의 주변에 나타나지도 않았습니다. 있어야 할 사람들이 예수님의 고난의 자리에 없었습니다. 정말 같이 있어주고, 아파해 주고, 눈물 흘려야 할 그 자리에 예수님은 홀로 그 고통과 수모를 당하셔야했습니다.

지금 조금 후면 자기에게 등을 돌릴 저들을 보면서 나귀 새끼를 타고 들어가십니다. 다른 성경 본문에 보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기 전에 예수님은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하시면서 우셨습니다.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예루살렘의 멸망을 보면서,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은 그 참혹한 멸망을 보면서 불쌍한 예루살렘을 향해 우셨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대접하는가. 그런 얼굴은 예수님의 얼굴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불쌍히 여기는 안타까운 마음과 뜨겁고도 간절한 사랑을 가지고 오셨습니다. 사람은 정말 사랑하면 자존심을 버리게 됩니다. 정말 사랑하면 자기 위치를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영적인 사람은 자기가 어떤 대접을 받느냐에 따라 행동하지 않습니다. 내가 주님 안에서 어떻게 사랑하고 섬기느냐에 따라 행동합니다. 지금 주님은 어린 나귀새끼를 타시고 입성하십니다. 어느 누구도 태워 본 일이 없는 나귀라는 말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한번도 타 보지 않은 순수하고 순결한 평화와 순결을 상징하는 어린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십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기 나귀를 타고 오신 예수님께 나귀를 제공한 이 모습을 보십시오. 여기 3절에 보시면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렇게 하느냐 묻거든" 그러니까 나귀 끌고 오너라 하니깐, 왜 남의 나귀를 끌고 가느냐 하면 어떻게 해요? 그 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주가 쓰시겠다고 하라" 바로 그분 자신이 나귀의 주인 그와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한가롭게 놀고 있었던 나귀 한 마리의 주인이 바로 당신이라고 선포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는 나귀의 주인일 뿐만 아니라 그는 인생의 주인, 여기 앉아 있는 여러분과 저를 창조하신 창조의 주인 그리고 심판의 주인이십니다. '주가 쓰시겠다고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4절에 보시면 "제자들이 가서 본 즉 나귀 새끼가 문 앞거리에 매여있는지라 그것을 푸니 거기서 있는 사람 중 어떤 이들이 가로되 나귀 새끼를 풀어서 무엇을 하려느냐 제자들이 예수의 이르신 말대로 하매" 뭐라 그랬을까요? '주가 쓰시겠다'고 하십니다. 주님이라니 누구십니까? 바로 예수 그분이 메시아요 약속된 메시아요 그 주인이 이 나귀를 쓰시겠다고 하십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나귀 한 마리를 쓰실 계획을 갖고 계신 주님이라면 그분이 만물의 영장인 여러분과 저를 향한 계획이 없겠어요? 우리의 삶이 하늘의 뜻대로 하나님의 뜻대로 쓰여지는 보람찬 인생을 살려면 내 인생 속에는 하나님의 계획이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믿으셔야 합니다. 우리는 이 땅에 우연히 던져진 그러한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어쩌다가 인생의 길을 가게 된 사람들이 아닌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인생은 나그네 길,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구름이 흘러가듯 떠돌아다니다가 오늘 이런 인생의 길에서 서있는 그런 인생이 아닙니다. 하늘의 하나님은 놀라운 계획을 갖고 오늘 이 땅에 나를 보내셨고 나는 여기서 살고 있어요. 인생의 성패는 단순히 세속적인 어떤 성공, 다른 사람보다 더 잘 되는 그 정도의 인생이 아니라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나를 향해서 가지고 있었던 계획, 그 계획 속에서 오늘 하루 하루의 삶이 그 분의 뜻을 이루는 삶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이것을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왕 되신 하나님, 내 인생에 왕이라고 선포하신 하나님, 그 분의 의도대로 내 인생이 쓰여지고 그리고 내 삶이 다하는 날 후회 없이 인생을 살았다는 고백을 할 수 있는 인생이 여기 모인 우리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가 쓰시겠다"는 말씀 한 마디에 묶여 있던 나귀가 풀렸습니다. 여러분도 여러분의 삶을 주가 쓰실 수 있도록 내어 드리면 여러분이 어떠한 일로 인하여 묶여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풀어 자유케 해주실 줄로 믿습니다. 병에 묶여 있는 분이 계십니까? '이 질병에서 풀어 주시면 하나님께서 주신 건강을 주님을 위하여 바로 잘 쓰겠습니다.' 하고 하나님께 기도해 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업과 물질에 묶여 있는 분이 계십니까? '이 어려움에서 풀어 주시면 사업과 물질을 주를 위하여 바로 잘 쓰겠습니다.' 하고 하나님께 기도해 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풀어 주시리라고 확신합니다. 여러분과 여러분의 자녀를 주께 드려 헌신해 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께 쓰임 받는 사람이 되어 주께서 쓰시는 그릇 같은 삶을 살겠다고 하나님께 서원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여러분의 자녀를 모든 얽매임에서 풀어 주실 줄로 믿습니다. 형통하고 복되게 하여 주실 줄로 믿습니다.

반대로 주께서 쓰실 수 있도록 자신의 삶을 헌신하지 않으면 풀렸던 것도 묶이게 됩니다. 건강을 주를 위하여 쓰지 아니하고 자신의 정욕을 위하여 잘못 쓰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건강을 묶으십니다. 물질을 주를 위하여 바로 잘 쓰지 아니하고 어리석은 부자와 같이 '내 영혼아 마음껏 먹고 마시자' 하며 자신만을 위하여 쓰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물질과 사업을 묶으십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기회와 자리 그리고 명예를 주를 위하여 바로 잘 쓰지 아니하고 자신의 정욕을 위하여 잘못 쓰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그에게서 그 기회와 자리 그리고 명예를 빼앗으십니다. 그리고 묶으십니다.

여러분, 나를 위해 피 한 방울, 땀 한 방울 남김없이 쏟으신 주님의 사랑을 깨달았다면, 우리 역시 나를 사랑하신 주님이 "쓰시겠다" 하실 때 마땅히 그 분께 내 삶을 아낌없이 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이 예루살렘 입성에 아낌없이 '주가 쓰시겠다'는 말 한마디에 자신의 것을 드린 장소가 바로 베다니가 아닙니까? 베다니는 마르다와 마리아가 사는 마을입니다. 늘 예수님을 위해 식사를 준비하던 마르다가 있고 발 밑에 앉아 말씀을 즐겨 듣던 마리아가 있는 곳입니다. 여기서 나사로가 죽었을 때 예수님은 사랑하는 자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눈물을 흘리시며 그를 살려주시기도 했습니다. 베다니는 슬픔의 집, 가난한 사람의 집이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아픔과 슬픔, 질병과 고통을 삼키며 살아가던 베다니 사람들의 친구였고 희망이었습니다. 주님은 이 마을 나병 환자를 고치셨습니다. 죄 많은 여인의 아픔을 어루만지셨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시어 소망과 생명의 주님이 되심을 보여주셨습니다. 나중에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부활하셨을 때 누가복음 24장 50절-53절에 보시면 또 베다니가 나옵니다. 베다니 마을 앞까지 나가셔서 저희들을 축복하신 후 하늘로 올라가십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축복입니까? 주님은 당신이 머문 이 땅에서 마지막까지 축복을 주고 싶은 사람- 바로 베다니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때 그곳에 모인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들어가 기도하고 찬송하다가 성령의 충만을 체험했습니다. 결국 그들이 세상을 변화시켰습니다.

지금으로부터 180년 전에 미국 교회가 처음으로 파송했던 선교사가 아도니람 저드슨 선교사입니다. 지금도 미국뿐만 아니라 선교사들은 누구든 이 분의 삶을 닮기를 원할 정도로 시대를 초월하여 모든 사람의 가슴에 깊은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그는 탁월한 수재였기에 젊은 25세의 나이에 모교인 대학으로부터 교수 초빙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같은 해에 보스톤에 있는 어떤 큰 교회로부터 담임목사 청빙을 받았습니다. 두 가지가 다 탐나는 초빙이어서 어느 것을 선택해야 할지 몰라 즐거운 비명을 지를 정도였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두 곳을 다 정중하게 사절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선교사가 되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혼한 지 보름만에 아내와 함께 인도로 가는 배를 탔습니다. 인도에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선교사라는 이유 때문에 쫓겨났습니다. 그들은 다시 배를 타고 미얀마(버마)로 떠났습니다. 긴 항해 도중에 아내는 유산을 했고 너무 허약해진 나머지 랑군에 도착했을 때 들것에 실려 배에서 내려야 했습니다.

그곳에서 저드슨 부부는 복음을 위해 열심히 수고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이어 두 번째 아이를 낳았는데 그 아이도 몇 달되지 않아 열병으로 죽였습니다. 그러나 저드슨은 낙심하지 않고 복음 사역에 최선을 다했는데 그만 감옥에 끌려 들어갔습니다. 그는 창문이 하나도 없는 캄캄하고 더러운 감방에서 일년 반 동안이나 고생을 했습니다. 그가 감옥에 있는 동안 그의 아내는 밖에서 얼마나 어려움을 많이 당했는지 모릅니다. 그 길로 아내는 건강을 해쳐 남편을 출감한 직후에 37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저드슨은 낙심하지 않고 복음을 위해서 일했는데 결국에는 자신도 병이 들어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는 요양을 하려고 고국으로 가는 배를 탔는데 그의 건강이 너무 악화되어 고국 땅을 밟아보기 전에 선상에서 숨지고 말았습니다. 당시는 냉동기술이 전무한 시대라 그의 시체를 바다에 장사 지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땅에서 저드슨의 삶은 이렇게 끝이 났습니다.

여러분, 저드슨의 생을 한번 보세요. 그가 세상적으로 받은 복이 무엇입니까? 이국만리에서 아내와 자녀를 잃고 자신도 차디찬 바다에 수장되는 운명을 보면서 무엇을 느끼십니까? 차라리 대학교수로 갔더라면, 차라리 큰 교회 목회자가 되었다면 얼마나 행복한 생을 살았을까요? 그러나 그 부부는 진짜 축복을 놓치고 싶지 않아 세상 복을 포기해 버렸던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저드슨의 가정은 예수 때문에 망한 가정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진짜 복을 받은 가정이었습니다. 저드슨은 불교가 국교인 그 나라에서 최초로 성경을 만들어 수많은 영혼을 구원하는 데에 쓰임 받았습니다. 1850년 그는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죽어갔으나 100년 후 그 땅에는 20만 명이 넘는 많은 알곡의 결실을 보았습니다. 또 그의 부인은 오늘날 선교사 부인 중에서 가장 귀감이 되는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저드슨 부부가 하나님 나라에 가서 누릴 영광을 생각해 보세요. 그것은 세상의 어떤 고난과도 비교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롬8:18에 보면,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우리는 저드슨처럼 위대한 믿음의 영웅이 아닙니다. 평범한 다수에 속하는 신앙인 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 사랑 받고 선택받고 쓰임 받는 이 참된 축복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또한 우리는 세상 적인 축복도 있어야 이 험한 세파를 헤쳐나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상에서 누리는 축복에 연연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분수대로 만족하며 살아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 사랑 받으면 됐지 그 이상 더 바랄 것이 무엇이나?" 하는 심정으로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얼마나 가졌느냐? 얼마냐 건강하냐? 얼마나 오래 사느냐? 하고 복을 따지는 것은 세상 사람들의 관점이라는 것을 우리가 명심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이 쓰시기 위하여 준비된 그릇들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존재 이유요, 존재의 목적인 것입니다. 아무리 금그릇과 같은 사람이라고 하여도 깨끗하지 못하고 비어있지 않아 하나님이 쓰시지 않으시면 그 그릇은 귀한 그릇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존재의 이유와 목적대로 존재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질그릇과 같은 사람이라도 자신을 언제나 비우고 깨끗하게 하여 하나님이 쓰시기에 합당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됩니다. 우리의 삶은 하나님이 쓰실 때에만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이제 주님이 주신 은혜의 힘으로 이번 한 주간도 우리 모두 십자가 앞으로 가까이 나오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나 하나를 위해 모든 것을 쏟으신 십자가의 사랑에 젖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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