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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본주의적인 세속주의자 (왕상 18:2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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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본주의적인 세속주의자 (왕상 18:25-29)
    
  우리는 ‘세속’을 부정적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거룩한 것과 세속은 서로 대비되는 것이고 그리스도인으로서 거룩한 것을 선택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세속이라는 것이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세속주의는 현대인의 특권입니다. 세속주의는 자유의 분량과 비례합니다. 인류가 세속주의 사회에 살기 시작한 것은 불과 한 백, 이백년 안에 이루어진 일입니다. 그 이전에는 종교가 다스리는 사회에서 살았습니다. 여기서 종교라 함은 기독교뿐만이 아니고 다른 종교를 다 포함하는 것입니다. 아직도 그런 사회에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이슬람 국가들입니다. 이슬람 국가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비판의 자유가 없습니다. 그 국가에 태어난 이상은 이슬람을 믿어야 됩니다. 그리고 그들의 종교가 문화, 정치, 교육, 예술 등 모든 부분을 다스립니다. 이슬람 국가이지만 거의 유일하게 세속주의를 표방한 나라가 있는데 바로 터키입니다. 여기서 세속주의라 함은 정교의 분리를 말합니다. 정치와 종교는 별개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터키가 이슬람 국가로써는 거의 유일하게 민주주의가 발전할 수 있었고 유럽 통합의 멤버로 거론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이백 수십 년 전에 미합중국이 건국할 때 헌법 조항에 정교분리의 원리를 포함한 이유는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이 믿음이 없어서가 아니라 과거 유럽에서의 부정적인 경험을 기억하기 때문입니다. 과거 유럽은 교회가 신앙뿐만 아니라 정치와 사회 분야에 모두 관여했습니다. 유럽인들에게는 종교의 자유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가톨릭 국가에서는 가톨릭을 믿고 개신교 국가에서는 개신교를 믿어야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믿고 싶어서 믿는 것이 아니고 믿어야 되기 때문에 믿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그들을 더 경건하게 해 주는 것도 아니고 기독교를 부흥하게 하는 것도 아니고 사람의 차원에서는 위선을 낳고, 교회차원에서는 타락을 낳고, 국가의 차원에서는 독선을 낳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으로 건너온 사람들이 신앙을 각자의 양심에 맡긴다는 정신으로 정교분리의 원칙을 세운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역설적으로 들릴지는 모르지만 세속주의와 신앙이 동시에 발달할 수 있었습니다. 학문과 신앙이 발달하고 과학과 신앙이 함께 발달하고 예술과 신앙이 함께 발달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중동 이슬람국가에 바라는 것도 바로 이것입니다. 그들도 세속주의 국가가 되어주기를 바랍니다. 사우디아라비아든 이라크든 아프가니스탄이든 그들이 세속주의 국가가 되어 주어야 민주주의가 들어갈 수 있고 여성의 인권을 보호할 수 있고 그리고 기독교 복음이 들어갈 수 있는 문이 열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버드 대학신학교의 하비 콕스 교수가 몇 년 전에 ‘세속도시’라는 유명한 책을 펴냈습니다. 이 책에서 그는 세속주의의 원리가 성경에 담겨져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귀가 번쩍 뜨이지 않습니까?  첫째는 하나님이 우주만물을 창조하셨다는 창세기의 기록입니다. 하나님이 우주만물을 창조하셨기 때문에 자연은 피조물이라는 것입니다. 자연은 신적인 존재가 아니고 피조물에 불과합니다. 자연은 신이 아닙니다. 자연은 숭배의 대상이 아닙니다. 이 원리가 인류를 많은 미신으로부터 자유하게 만들었습니다. 인류는 예로부터 해, 달, 별, 나무, 산, 바다, 바위, 짐승 등 자연을 두려워하고 숭배했습니다. 그 많은 것이 다 신이기 때문에 그것을 잘 섬겨야지 그렇지 않으면 재앙을 받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 모든 것은 신이 아니고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이고, 하나님은 그 위에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만 잘 섬기고 그 이외의 것은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아담에게 동산에 있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셨고 인간에게 하나님이 주신 자연을 관리하고 다스릴 책임이 있다는 것을 말해준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류는 이제 많은 두려움, 미신으로부터 자유함을 얻고 이것이 학문을 발전하게 하고 과학을 발전하게 하고 또 인간정신의 발전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이것이 세속주의의 혜택이고 이것이 올바른 신앙을 가능하게 한 것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의 바로로부터 해방시켰다는 사실입니다. 임금은 인간에 불과하지 신이 아니라는 원리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정치의 신격화로부터 사람을 해방한 것입니다. 이차대전 당시 일본이 패망하기 전까지 그들은 천왕을 신성화했습니다. 로마제국도 황제를 신성화 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임금으로부터 당신의 백성을 해방시키셨습니다. 바로는 신이 아니고 인간에 불과하고 하나님이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불의한 임금에게는 저항이 가하다고 하나님이 그것을 부추기기까지 하셨습니다. 이러한 깨달음이 주는 혜택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이것은 정치적인 해방인 것뿐만 아니라 영적인 해방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리고 셋째는 손으로 우상을 만들지 말고 거기에 절하지 말하는 십계명의 조항입니다. 이것은 사람이 만든 것이든 어떤 것이든 절대적이지 않고 다 상대적이라는 것을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절대적이지 사람이 만든 것은 물건이든 제도든 어떤 것이든 상대적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절대적입니다. 이것은 인간을 겸손하게 만들고 독선 그리고 오만으로부터 사람을 보호해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엘리야의 괴상한 모습이 나옵니다. 엘리야는 원래 괴상한 사람이었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엽기적인 인물이에요. 까마귀가 먹을 것을 가져다주지 않나, 죽은 아이를 살리지를 않나. 그럼에도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라고 했기 때문에 믿는 것이지 엘리야가 사는 방식을 보면 그는 가족도 없고 결혼하지도 않고 또 자기 자신의 신상에 대해서는 염려하지도 않고 어디서 왔는지도 알 수 없는 아주 신비한 사람, 하나님의 능력을 소유한 사람, 정말로 믿음의 사람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엘리야는 상당히 현대적인 인물입니다. 아주 현대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엘리야의 두 가지 면모를 볼 수 있는데 첫째는 그가 상당히 자유하다는 사실입니다. 그에게는 별로 두려운 것이 없습니다. 바알이 두렵지 않고 바알 선지자가 두렵지 않고 그들이 만든 제도가 두렵지 않습니다. 엘리야는 이런 면에 있어서 지극히 자유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알의 선지자들이 하루 종일 재단 앞에서 뛰놀아도 아무런 응답이 없는 것을 보고 그들을 조롱합니다. 27절을 보면 ‘엘리야가 저희를 조롱하여 가로되’ 그는 신앙적인 사람이지만 거짓 신앙에 대해서는 조롱할 줄 알았습니다. ‘엘리야가 저희를 조롱하여 가로되 큰 소리로 부르라 저는 신인즉 묵상하고 있는지 ~ ’ 수많은 종교가 주로 묵상 위주로 나가지 않습니까. 참선이니 묵상위주로 나가는 그러나 성경적인 신앙은 기도를 하지 묵상을 하지는 않습니다. 명상 위주의 신앙이 아닙니다. 그걸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가 말하기를 ‘저는 신인즉 묵상하고 있는지 혹 잠간 나갔는지 혹 길을 행하는지 혹 잠이 들어서 깨워야 할 것인지.....하매’ 대단한 담대함이 없으면 이런 식으로 남의 종교를 조롱할 수 없습니다. 바알을 무서워하지 않고 바알의 선지자를 무서워하지 않기 때문에 이 같은 말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극히 자유한 사람이에요. 요즘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종교를 조롱할 수 있겠습니까. 못합니다. 부정을 탈까? 부정을 타면 어떻게 할까? 벌을 받으면 어떻게 할까? 내가 믿지는 않기만 좋은 게 좋은 거지. 

  여러분은 세상 사람들이 갖고 있는 미신으로부터 자유하십니까? 수많은 미신이 있습니다. 아파트 단지에서 이사를 하는 날이 정해져 있습니다. 같은 날 여러 집이 이사를 합니다. 물어보면 그날 이 좋은 날이래요. 왜 좋은지는 설명하지 못합니다. 여러분도 그런 것에 좌우를 받으십니까? ‘내가 믿지는 않지만 좋은 게 좋은 게 아닙니까, 목사님?’ 그것은 자유하지 못한 것입니다. 믿지 않는 것에 대해 자유하지 못한 것입니다. 엘리야가 바알을 조롱할 수 있었던 그런 담대함이 없는 것입니다. 거기에 대해서 여전히 심리적으로 매여 있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별의 별 미신을 다 갖고 있지요. 아침에 거울이 깨지면 재수가 없다느니, 검은 고양이가 앞을 지나가면 재수가 없다느니, 사다리 밑을 지나가면 재수가 없다느니, 전부 다 재수 없는 얘기에요. 세상에는 재수 없는 일들이 많고 재수 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돼지꿈 정도라면 모르지만. 다시 말하면 두려운 것은 많은데 사람에게 위로와 평강을 주는 것은 없다는 얘기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믿는 수많은 잡신, 미신이 사람에게 평강을 준다든가 믿음을 준다든가 소망을 주는 것은 하나도 없고 전부다 두려워하게 만들고 불길한 것이라든가 재수가 없는 것이라든가 액운이라든가 질병이라든가 저주라든가 이런 것을 두려워하게 만들고 두려움을 무기로 사용해서 사람의 정신세계를 지배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거짓 종교의 특징이요 거짓 선지자의 특징입니다. 하나님은 두려움을 무기로 사용하지 않고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방법은 사랑과 성령과 감동과 믿음과 말씀과 약속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갖는 사람은 담대해지고 힘을 얻고 용기를 얻고 마음에 기쁨이 있고 소원이 샘솟고 성령이 강물과 같이 넘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방법입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습니다. 그러나 그 이외의 것들은 율법을 통하든 강요하든 두려움이든 징벌이든 저주든 죽음이든 이런 것에 두려움을 통해서 사람을 움직이려고 하지만 거기에는 위로도 없고 응답하는 자도 없고 돌아보는 자도 없습니다. 

  오늘 본문의 바알 선지자들이 그렇게 목청이 터져라 외치고 뛰놀고 나중에는 칼과 창으로 자기 몸의 피를 흘리기까지 하지만 아무도 응답하는 자도 없고 돌아보는 자도 없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아주 정직한 평가입니다. ‘응답하는 자도 없고 돌아보는 자도 없더라’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없다면 이것만 가지고는 신이 없다고 생각하게 할 정도로 주님께서는 이것을 명백하게 구별 짓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돌아보지 않으면 그 이외에는 응답하는 자도 없고 돌아보는 자도 없다는 얘기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신앙이 아니라면 그 이외의 방법으로는 응답하는 자도 없고 돌아보는 자도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떠나서는 인간은 지극히 고독합니다. 이것이 적당히 섞여 있는 것이 아니고 명백하게 구별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엘리야는 미신으로부터 자유하고 두려움으로부터 자유합니다. 

  그리고 지극히 담대합니다. 이 담대함은 믿음으로부터 말미암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믿음, 또 하나님이 자신의 기도를 들으신다는 믿음, 내가 하나님 편에 서있다는 믿음, 이러한 믿음으로부터 말미암은 담대함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은 담대한 사람, 긍정적인 사람, 인내할 수 있는 사람, 그리고 작은 것을 가지고도 충성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들이 정해져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고 모든 사람이 회개에 이르기를 원하시지만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사람에 있어서만큼은 당신의 취향대로 쓰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쓰시는가를 알려면 그 사람에게서 하나님이 무엇을 보시는가를 발견할 수 있어야 되는데 그 사람이 흠이 많고 허점이 많을지라도 몇 가지 중요한 것을 가지고 있고 하나님은 그것을 보시기 때문에 그 사람을 쓰시는 것입니다. 흠이 있지만 정말로 중요한 몇 가지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것을 보시고 그 사람을 쓰시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야곱 같은 인물입니다. 야곱은 허물이 많지요. 사람을 속이고 머리가 약사 빠르고 자기 이익을 챙기는 것에 있어서는 남에게 뒤지지 않습니다. 그런 면으로 보면 좀 얄미울 수 있는 깍쟁이와 같은 인물인데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야곱에게는 정말로 중요한 그 무엇이 있었고 하나님이 그것을 보셨습니다. 그의 형 에서에게는 그것이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에서를 미워하고 야곱을 사랑했다고 말씀하시고 야곱에게 장자권을 주시고 축복을 받게 하시고 그 아버지의 믿음의 유업이 에서가 아니라 야곱을 통해서 전수되게 하신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것을 좀 봐야 될 필요가 있는데 그것을 볼 수 있는 능력 자체가 복입니다. 할렐루야! 복이 없는 사람은 그것을 깨닫지도 못하고 그것을 받아들이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은 본인의 성향과 생각 자체부터 복을 받은 상태에서 시작한다고 보면 됩니다. 그 인생관, 인생을 대하는 그의 자세, 그 자체부터 복 받은 사람의 모습을 증거합니다. 복이라는 것은 그 결과로만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그 결과를 얻는 방법과 과정에 이미 담겨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소원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결과이고 소원을 이루는 것은 결과지만 여러분이 지금 그 소원을 이루기 위하여 노력하고 애쓰고 기도하고 믿는 그 과정 속에 이미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 시작되고 있다는 사실을 믿어야 됩니다. 거기에서부터 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복 있는 사람이 형통하지만 그건 결과이지요. 그러나 결과를 얻기 이전에 이미 복 있는 사람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악인의 꾀를 좇지 않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않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고 그것을 주야로 묵상하는 그 자체에 이미 복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오만한 자리에 앉고 죄인의 길에 서는데 왜 어떤 사람은 그런 것을 원치 않고 거기에 끌리지 않고 거기에 매력을 느끼지 못하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그것을 즐거워하느냐, 거기에 벌써 복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점이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안에 그러한 소원이 있는 것 그 자체로, 아직 소원이 다 이루어지지 않았을지라도 그러한 마음이 있는 것 자체로 여러분은 이미 복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것은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제가 누누이 말씀 드리지만 누가 인간을 속박하느냐? 하나님이 인간을 속박하는 게 아니고 인간이 인간을 속박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자유하게 하십니다. 미신, 두려움, 무지함, 또 인간의 강퍅함, 이런 모든 것으로부터 하나님은 우리를 자유하게 하십니다. 마귀의 거짓으로부터 자유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참된 복음이 들어가는 나라치고 경제가 발전하지 않는 나라가 없고 정치가 발전하지 않는 나라가 없고 또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병든 사람, 여자, 환자, 가난한 사람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 나라가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복음이 들어가기 때문에 그 결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중국 사람들이 오랜 세월동안 여자들의 발을 묶어 놨지요. 도망가지 못하게. 그것을 전족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중국 여성들은 도망가지 못할 뿐만 아니라 제대로 걷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여성들의 발을 풀어놓으니까 중국 여자 선수들이 올림픽 육상에 나가서 금메달을 따는 것입니다. 사람을 사람이 묶어놓은 것에서 풀면 사람은 자신의 능력과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오! 나의 영혼이 벗어났도다. 사냥꾼의 올무에서 새같이’ 우리를 풀어놓는 것은 오직 주님의 복음뿐이에요.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하게 하리라’ 주님의 복음이 자유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서까지 자유해지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야 됩니다. 할렐루야! 하나님 중심으로. 하나님이 없기 때문에 담대하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기 때문에 자유하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자유하게 하시고 담대하게 하시고 세상의 거짓을 물리치게 하시고 진리와 진리의 능력이 이 땅에 강물처럼 흐르게 하실 것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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