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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려주일] 예수님은 누구신가?(2) : 나귀 타신 왕 (마 2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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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누구신가?(2) : 나귀 타신 왕 (마 21:1~11)

감격적인 역사

우리나라 TV에서는 해마다 '대하드라마'라는 것을 방송합니다. '대하'란 '큰 강'이라는 뜻입니다. 마치 큰 강이 흘러가듯 역사를 웅장하게 묘사한 드라마라고 해서 '대하드라마'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작년 한 해 우리나라 TV에서 방송한 대하드라마는 모두가 고구려 일색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기억나십니까? 주몽, 연개소문, 대조영 등등 모두가 고구려를 건국하거나 고구려의 역사를 찬란하게 이끌어간 영웅들의 이야기이고, 대조영 또한 고구려 멸망 후 고구려의 후예를 자처한 발해를 건국한 인물입니다. 그런데 좀 이상하게 생각되지 않으셨습니까? 어째서 모든 드라마가 약속이라도 한 듯 고구려 일색이었을까요? 여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2002년, 중국은 '동북공정'(東北工程)이라는 이상한 이름을 가진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동북공정이란 쉽게 말하면 현재 중국의 동북지역, 특히 고구려나 발해 같은 나라들이 모두 한국의 역사가 아닌 중국 역사의 일부라는 것입니다. 고구려나 발해가 모두 중국에 속한 나라였는데 한국 역사가들이 이것을 왜곡해서 자기네 역사로 만들었다는 것이지요. 우리가 들으면 정말 속이 뒤집어지는 말입니다. 고구려와 발해는 엄연히 우리의 자랑스러운 역사인데 중국에 속한 변방의 작은 나라에 불과하다고 떼를 쓰니 얼마나 열불 나는 말입니까? 그래서 매스컴은 중국의 동북공정이 역사왜곡이라고 소리를 높였고 그 와중에 고구려와 발해가 우리의 자랑스러운 역사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너도나도 고구려 발해를 다룬 대하드라마를 방영하게 된 것이지요. 괜히 주몽, 연개소문, 대조영이 나온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 역사에 고구려가 왜 이렇게 중요합니까? 단순히 만주까지 뻗어간 드넓은 영토를 가진 나라였다는 사실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사실 우리나라 역사를 보면 주변 강대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진정한 독립을 이룬 시절이 거의 없었습니다. 고려시대는 원나라의 속국처럼 살았고, 조선시대는 대대로 중국을 섬기는 사대주의에 사로잡혀 지냈고, 조선 말기에는 청나라와 러시아, 일본이 우리나라를 두고 서로 세력을 다투다 급기야 일본의 식민지가 되기까지 했습니다. 이처럼 한시도 전쟁이 끊이지 않고, 주변의 큰 나라 등살에 편할 날이 없던 우리 역사 중에 그나마 진정한 독립을 유지하고 우리 민족의 기개를 떨친 유일한 시대가 바로 고구려 시대였던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고구려만 생각하면 가슴이 뭉클해지고 왠지 자부심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의 역사를 보면 묘하게도 우리 민족의 역사와 너무나 비슷합니다. 수천 년의 오랜 역사를 지닌 점도 비슷하고 민족의 순수성을 강조하는 것도 비슷합니다. 게다가 지리적으로 강대국들 틈바구니에 끼어 위에서 눌리고 아래에서 치받히며 역사 상 한시도 전쟁이 끊이지 않은 점이 너무 비슷합니다. 특히 앞서 이야기했듯이 우리 민족이 진정한 독립을 유지한 때가 불과 고구려와 발해 시대였던 것처럼, 이스라엘도 다윗 솔로몬 시대를 제외하곤 거의 그런 시절이 없었다는 점도 참으로 비슷합니다. 그런데 이런 역사를 가진 이스라엘 민족에게 정말 생각만 하면 가슴이 뿌듯하고 자부심이 생기는 역사적 사건이 있었습니다. 바로 '마카비 시대'라고 일컫는 때입니다.

세계를 정복한 알렉산더 대왕이 대제국을 건설한 후 33살의 나이로 갑자기 죽자 그 영토는 부하장군들에 의해 세 개로 나누어졌고 이스라엘 지역은 그 중 하나인 시리아의 셀류크스 왕조의 지배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왕조에 안티오쿠스 4세라는 왕이 등장해 유대교를 핍박하고 말살하려는 정책을 펴게 됩니다.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라는 이름을 가진 이 이방 왕은 유대교를 말살하기 위해 율법을 금하고, 제사와 모든 절기를 지키는 것을 금지합니다. 이를 어기는 자들은 가차 없이 처형했으며 심지어 유대인들이 그토록 소중히 여기는 성전 제단에 제우스의 신전을 세우고, 성전 제단에 유대인들이 경멸하는 돼지를 제물로 드리게 했습니다. 애굽과의 전쟁에 지자 성전의 보물을 약탈하기도 합니다. 이 때문에 수많은 유대인들이 끝까지 유대교 신앙을 지키다가 죽음을 당했던 것입니다. 

마침내 여기 항거해 저항운동이 일어나는데 이 저항운동을 일으킨 지도자는 '하스몬'이라는 제사장 가문의 '마타디아'였습니다. 마타디아가 전쟁에서 전사하자 그 아들인 유다 마카비가 아버지의 뒤를 잇고, 유다 마카비가 전사하자 그 아들인 요나단 마카비가, 또 그가 죽자 동생 시몬 마카비가 이어서 독립전쟁을 했는데 이러한 오랜 세월의 독립투쟁을 마카비 혁명이라고 부릅니다. 주전 165년 경 오랜 전쟁이 완전히 끝나고 시몬 마카비의 영도 아래 예루살렘을 탈환하고 이방인들에게 더렵혀진 성전을 정화하게 되는데 바로 시몬 마카비가 말을 타고 위풍당당하게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예루살렘 거민들이 길에 나와 나뭇가지를 길에 펴고 환영을 했다고 합니다. 많은 유대인들은 시몬 마카비가 유대인들을 압제에서 구한 구세주요 메시야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 기대처럼 시몬 마카비는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하스몬 왕조를 세우고 약 100년 동안이나 이스라엘을 평화롭게 통치합니다.

그러니 생각해 보십시오. 마치 우리나라 사람들이 '고구려' 하면 가슴이 벅차오르고 우리 역사에 대한 자부심을 한없이 느끼는 것처럼, 아니 그 이상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은 '마카비 혁명' 하면 엄청난 감격에 젖게 되고, 그 때 예루살렘을 탈환하고 성전을 정화한 일만 생각하면 한없는 자부심을 느끼는 것입니다. 게다가 시몬 마카비가 예루살렘을 탈환한 후 예루살렘 성에 입성할 때 자기네 조상들이 길가에서 나뭇가지를 펴고 흔들며 환영한 것을 생각만 하면 가슴이 벅차오른 것이지요.

나아가 그들은 이 가슴 벅찬 감격 속에서 이런 소망을 가졌습니다. "언젠가 다시 그런 분이 오실 것이다. 지금 우리가 비록 로마의 식민지가 되어 압제 속에 허덕이며 살지만 언젠가 반드시 시몬 마카비 같은 메시야가 나타나 우리를 구원할 것이다. 그 분은 저 로마제국을 쳐부수고 말을 타고 당당히 예루살렘에 입성할 것이고 그 때가 되면 우리 모두는 길가에 나가 나뭇가지를 길에 펴고 흔들며 그분을 감격적으로 맞이할 것이다."라며 그날만을 손꼽아 기다리며 살았던 것입니다.

  
나귀 타고 입성하신 예수님

그런데 드디어 그 날이 온 것입니다. 꿈꾸던 그 날이 현실로 다가온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사는 유대인들은 이런 소문을 들었습니다. 저 갈릴리 나사렛이라는 동네에서 온 예수라는 사람이 바로 그 시몬 마카비 같이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메시야 구세주라는 소문 말입니다. 그분은 놀랍게도 병자들을 벌떡벌떡 일으키고 심지어 죽은 자도 살리는 분이라고 합니다. 물위를 걷는가 하면 거센 풍랑도 말 한 마디로 잠재우는 분이랍니다. 겨우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고도 열두 광주리를 남겼다고 합니다. 게다가 그분이 하는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얼마나 권세가 있고 놀라운지 듣는 사람마다 넋이 나갈 정도라고 합니다. 그런 분이라면 얼마든지 저 로마의 군대를 쳐부수고 우리를 해방시킬 능력이 있는 분일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분이, 그 예수라는 분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예루살렘으로 온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어찌 가만히 앉아있을 수 있겠습니까? 나가야지요. 어서 길거리로 나가 그분을 맞이하고 시몬 마카비가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처럼 나뭇가지를 길가에 펴서 그분이 지나가게 하고, '호산나'즉 "우리를 구원하소서" 하는 구호를 외치며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메시야 그 분을 맞이해야지요. 그래서 실제로 수많은 군중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습니다. 메시야로, 구세주로 오신 예수님을 맞이하려고 말입니다. 우리의 해방자로, 왕으로 오셔서 로마를 쳐부수고 우리를 구원하여 다스릴 그 분이 오셨으니 얼마나 큰 감격으로 그를 맞이하러 나갔겠습니까? 오늘 본문에는 무리들이 베어 길에 편 나뭇가지가 어떤 나뭇가지인지 안 나왔지만 같은 내용을 다룬 요한복음 12:13에는 종려나무 가지라고 나와 있어서 사람들은 바로 이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기념하는 날을 '종려주일'이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오늘이 바로 이 종려주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환영하러 간 사람들은 이상한 광경을 목격하게 됩니다. 자기네들이 알고 기대하는 대로라면 분명 우리를 해방하러 오신 왕은 말 위에 높이 앉아 위풍당당하게 예루살렘에 입성해야 하는데 이상하게도 그분은 초라한 나귀 등에 올라 입성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갑옷을 입고 칼을 차고 입성한 것도 아니고 초라한 겉옷 하나 걸치고 하찮은 나귀 등에 타고 온 것입니다. "참 이상하다. 왜 말도 아니고 병거도 아닌 저 초라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걸까? 게다가 저 분 생긴 걸 보면 도무지 싸움 잘하는 용사와는 너무 거리가 멀잖아? 너무 약해 보여."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한 번 그 사람을 믿어보기로 했습니다. 물론 내 기대와는 달리 예루살렘 입성이 너무 초라하긴 했지만 그러면 어떻습니까? 죽은 사람도 살리고, 풍랑도 잠잠케 하는 능력이 있다는데. 그 능력이면 얼마든지 로마 군을 처부술수 있을 겁니다.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였다면 얼마든지 수탈에 굶주린 우리를 먹여 살릴 수 있을 겁니다. "그럼 됐지 뭐" 하며 예루살렘 주민들은 그 때 그 시절처럼 왕을 맞이했습니다. 겉옷을 벗어 길에 깔고 종려나무 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하며 열렬히 그를 환영한 것입니다.
  

나귀 타신 왕

하지만 이런 희망도 오래 가지 못합니다. 나귀 타고 입성하신 것 자체는 좀 이상했지만, 기대 이하였지만 그래도 저분이 우리를 구원하실 것이라고, 해방해 주실 것이라고 기대했는데 그 기대가 여지없이 깨지는 날이 너무 빨리 닥쳐온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한 즉시 로마군을 찾아가 한 바탕 할 것을 기대했을 텐데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나를 따르라고, 나와 함께 봉기해서 독립을 되찾자고 말할 줄 알았는데 예수님은 그런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나는 죽으러 왔다고, 내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는 둥(마 20:28) 이해 못할 말만 늘어놓습니다.

바로 여기에서부터 유대인들의 기대가 어긋나기 시작합니다. 유대인들이 기대한 정치적 메시야, 강력한 메시야와 정 반대로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으로 우리를 구원할 메시야였던 것입니다. 가장 약한 모습으로, 가장 천한 모습으로, 가장 낮아지고 섬기는 모습으로 우리를 구원할 메시야 말입니다. 분명 예수님은 이 땅에 왕으로 오시고 예루살렘에 왕으로 입성하셨지만 그 왕은 세상의 왕처럼 남의 위에 서서 군림하는 왕이 아니라 섬기는 왕, 낮아지는 왕, 내가 죽어서 남을 살리는 왕이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 때문에 예수님이 말이나 병거를 타고 당당하게 개선행진을 하지 않고 비천하고 초라하기 그지없는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귀를 타신 것은 스가랴 9:9에 나온 메시야 예언을 성취하기 위한 행동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5절에 이렇게 나온 것입니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스가랴 선지자는 예수님이 왕으로 오시지만 군림하고 대접 받는 왕이 아니라 겸손한 왕으로 오실 것이라고 예언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한 것은 이 예언을 성취하고 철저하게 겸손한 왕, 섬기는 왕의 모습을 보여주려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종려주일의 진정한 핵심은 종려나무가 아니라 나귀입니다. 종려나무는 오히려 유대인들의 오해의 결과요, 나귀가 예수님의 겸손과 섬김을 가장 잘 보여주는 상징이라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은 만왕의 왕이십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사람으로 오신 것은 우리를 다스릴 왕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러나 군림하고 대접 받으며 다스리는 왕이 아니라 겸손으로, 섬김으로, 죽음으로 다스리러 오신 왕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이런 왕이 아니셨다면 그는 애당초 처음부터 낮고 천한 목수 요셉의 아들이 아닌, 처녀가 애를 밴 마리아가 아닌 왕이나 귀족의 집안에 태어나셨을 것입니다. 베들레헴 말구유가 아닌 화려한 궁전에 나셨을 것입니다. 만약 그가 이런 왕이 아니셨다면 그는 절대로 십자가 따위는 지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신임 대통령이 당선소감으로 국민을 겸손히 섬기겠다고 말한 것을 보았습니다. 그분은 장로님이라 예수님의 방법이 무엇인지 아는 것 같습니다. 부디 그 마음 변치 말고 임기 동안 백성들 위에 서는 것이 아니라 백성들 밑에 서서 잘 섬기는 종이 되면 좋겠습니다. 왜냐하면 이 섬김과 낮아짐이야말로 가장 강력한 통치의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남들 위에 군림하고 권력을 휘두르며 위세 부리는 것이 아니라 남을 섬기고 그 밑에 서서 낮아지는 것이 가장 좋은 다스림의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살고, 내가 드러나고, 내가 영웅이 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낮아지고, 내가 죽어 남을 살리는 것이 가장 강한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그것을 아셨습니다. 그리고 친히 우리에게 그 방법을 알려주셨습니다. 이런 분을 우리의 왕으로 섬기는 우리도 이 방법을 따라야 합니다. 이것이 가장 위대한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세상에서 어떤 방법을 따릅니까? 교회에서조차 어떤 방법이 통합니까? 교회에서 무시당하지 않으려면 내가 잘나야 한다고, 돈을 가지든, 학력을 가지든, 지워와 권력을 가지든 뭐를 가지든 가진 자라야 한다는 논리가 통하지 않습니까? 아닙니다. 주님은 그 방법을 따르지 않았고 그 방법을 가르치지도 않았습니다. 대신 가장 초라해 보이고 가장 약해 보이는 방법을 택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십자가에서 가장 약하게, 무기력하게 죽어 가셨지만 부활을 통해 진정으로 승리하신 것입니다. 힘으로, 내 능력으로 상대방을 누르면 이기는 것 같아 보여도 결국은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섬기는 것이 정말 이기는 것입니다. 가장 무기력 한 것이 가장 강한 것입니다. 제일 잘 참는 것이 제일 힘 있는 방법입니다.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지고 가장 낮은 데서 가장 강해짐(고후 12:9)을 알고 실천할 때에만 우리는 진정한 그분의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독일의 신학자 본훼퍼는 '값싼 은혜'라는 말을 했습니다. 이때가 2차 대전 무렵입니다. 당시 독일 교회가 무기력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독일은 기독교 국가이기 때문에 수많은 교회와 목회자들이 있었지만 히틀러가 정권을 잡고 전쟁을 일으키고 유대인들을 학살하는 데 한 마디 말도 못 하고 오히려 히틀러를 지지하는 교회였습니다. 사회에 국가에 대한 어떤 선한 영향력도 갖지 못한 교회였습니다. 본훼퍼는 독일교회가 이렇게 타락하고 무기력해진 이유가 "교회가 '값싼 은혜에 집착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가 말한 '값싼 은혜'란 이런 것입니다. 회개 없는 용서, 삶을 바꾸지 않고 용서만 가르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한 마디로 십자가 없는 부활, 고난 없는 영광입니다. 

오늘날에도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고난은 싫다, 영광과 축복만 달라"고 합니다. 십자가도 없이 부활을 맞으려는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십자가 지고 골고다 오르는 일도 하지 않고 부활의 영광만 얻겠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십자가를 지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타고 날아가려고' 한다는 말도 있습니다. 신앙이 나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신앙을 지배하고 이용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님의 정신과 뜻을 올바로 이해하고 따르기 원한다면 세상의 힘과 권세를 타고, 십자가를 타고 날아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처럼 나귀를 타고 가장 낮게, 겸손히 주 앞에 나아가는 법부터 배워야 할 것입니다. 겸손을 모르고, 섬김을 모르고, 낮아짐을 싫어하고, 영광만 받으려 하고 섬김만 받으려 하는 신앙은 값싼 은혜입니다. 십자가 안 지고 부활만 누리려는 것이 값싼 은혜요, 신앙을 통해 남을 섬기고 돕기보다 신앙의 덕을 보고 신앙을 이용하려는 것이 값싼 은혜입니다. 이런 값싼 은혜는 예수님의 진정한 정신을 흐리게 하고 결국은 우리 신앙을 망칩니다.

우리가 지난주에는 세례식을 베풀고 오늘은 성찬식을 거행합니다만 본훼퍼는 고백 없는 세례, 참된 신앙의 고백이 없이 의식에만 참여하는 것도 값싼 은혜요, 성찬식도 하나님과 나 사이의 진정한 고백이 없고 모양과 형식만 있는 성찬식이 되면 값싼 은혜에 불과하다고 했습니다. 세례는 내가 죽어 주님이 사시는 것입니다. 성찬식은 가장 무기력한 방법, 가장 약한 방법인 십자가로 구원하신 주님을 기념하고, 우리가 받을 떡과 포도주도 남을 위해 가장 약하게 찢긴 그 분의 살과 흘리신 피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이 겸손과 낮아짐의 정신이 빠지고, 참된 고백이 빠진 채 형식과 모양만 남아있는 세례와 성찬식은 값싼 은혜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본훼퍼의 지적처럼 오늘날 수많은 교회와 성도와 목회자가 있지만 한국교회가 그 영향력이 약해지고 무기력해 진 까닭이 값싼 은혜, 즉 예수님의 겸손과 섬김의 정신이 빠지고 남에게 대접 받고, 섬김을 받으려 하고, 교회가 우습게 보이면 안 된다며 세상을 섬기기보다 세상 위에 군림하려는 우리의 자세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오늘 이 종려주일을 맞으며 우리는 나귀 타고 오신 왕인 예수님을 통해 참된 강함과 능력이 어디서 오는지 깊이 깨닫고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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