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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라 (마 16:2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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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라 (마 16:21~28)

운전 중에 위험하게 끼어드는 차를 보고 "너 죽을려고 환장했어?"라고 하면 한판 싸움이 벌어질 것입니다. 술에 취해 고성방가를 하면서 아무 곳에서나 방뇨를 하는 사람을 보고 "미친놈"이라고 하면 달려들어 멱살을 잡을 것입니다. 
경찰서에 잡혀온 죄인에게 경찰관이 "이런 놈은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했으면 자기 부모에게 좋았겠어"라고 말하면 인격을 모독했다고 항의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가룟 유다에 대하여 마태복음 26장 24절에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 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을 향해 마태복음 12장 34절에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향해 마태복음 23장 33절에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라고 했습니다. 세례 요한도 마태복음 3장 7절에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라고 했습니다. 
가나안 여자가 예수님께 나아와 흉악히 귀신들린 자신의 딸을 고쳐달라고 했을 때 그녀를 향해 개(犬)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15장 25-26절에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가리켜 사탄이라고 했습니다. 본문 16장 23절에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자들을 향해 분노했습니다. 마태복음 21장 12절에 『…내어 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시고』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비방하는 자들에게 심지어 자신의 뜻을 감지하지 못하는 제자들에게까지 가차 없이 책망했습니다. 예수님의 이와 같은 표현에 대하여 독선이니, 사랑결핍이니, 인격모독이니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인간이 가질 수 없는 불변성과 영원성과 전지성과 전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는 인간들이 흉내 낼 수 없는 우리를 향한 사랑과 프렌들리(friendly)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그의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롬 5:8).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요한1서 4장 10절에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되 요한복음 13장 1절에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고 했습니다. 
그는 우리를 위해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요한1서 3장 16절에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친구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15장 13-15절에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죽은 나사로를 가리켜 '우리 친구'라고 했습니다(요 11:11). 
예수님은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베드로로부터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라는 참으로 아름다운 고백을 들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실 때 제자들은 당혹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지금까지 목격한 예수님의 왕적 권능을 볼 때 반드시 이 지상에서 메시야 왕국을 건설하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제자를 대표한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말하기를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16:22) 라고 했을 때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며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16:23)라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사람의 일을 생각했기 때문에 예수님으로부터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사탄이라'고 책망을 받았습니다. 

Ⅰ.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자에게 하는 말입니다. 

1) 인간 이성에 근거한 세속적 안목입니다. 
본문 16장 21-22절에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라고 했습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달려야 한다고 말씀하실 때 베드로는 주여 그리 마옵소서라고 대답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몸에 어떠한 위해가 가해져서는 결코 안된다는 말입니다. 이 말을 쉽게 보면 제자로서 스승인 예수님을 위한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그것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심히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메시야 왕국을 건설하기 위하여 오신 분이 아니십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정치적인 메시야로 보았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참된 목적을 몰랐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상의 죽음이 메시야 사역에 있어서 필연적인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베드로는 자신의 철저한 이성에 근거하여 세속적인 안목으로 예수님을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2) 인간적인 이기심입니다. 
본문 16장 22절에 『…주여 그리마옵소서…』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베드로 자신이 생각해 볼 때 현재의 상태를 계속 유지하고 싶다는 의도에서 나온 말입니다. 이것은 결코 주님을 위한 말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먼저 생각하는 말입니다. 주님을 위하는 척하지만 결국 자기 자신과의 이해 관계에서 나온 말입니다. 

3) 영적인 무지입니다. 
본문 16장 22절에 『…주여 그리 마옵소서…』라고 한 말은 십자가에 고난 받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주님의 뜻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데서 나온 말입니다. 사람이 영적으로 무지하면 결코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이와 같이 간청하는 말에 대하여 우리가 예측 가능한 보통의 상식을 뛰어넘어 그렇게 단호하게 사탄이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감안할 때 사람의 생각 곧 육신적인 생각은 곧 사탄의 일입니다. 

4) 고난 받기를 싫어하는 속성입니다. 
본문 16장 22절에 『…주여 그리 마옵소서…』라고 한 말은 고난 받기를 싫어하는 인간의 본능을 넉넉히 대변하고 있습니다. 


Ⅱ. 하나님의 일을 최우선 추구하라는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6장 33절에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했습니다. 

1)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본문 16장 24절에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만을 바라보고 예수님만을 목적으로 삼고 그 만을 따라가야 합니다. 
히브리서 12장 2절에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주님만을 위하여 산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14장 8절에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고 했습니다. 

당시 예수님은 수난을 앞에 놓고 자신과 같이 제자들도 이러한 수난을 당할 것을 미리 아시고 하신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다메섹에서 주님을 만난 후로 주님을 위해 사는 것을 자기 생의 최고 목적으로 두었습니다. 
빌립보서 1장 20절에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라고 했습니다. 
갈라디아서 6장 17절에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내가 그리스도를 본 받는 자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전 11:1)고 했습니다. 

(1)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본문 16장 24절에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예수를 따르는 자들에게 필연적으로 요구되는 것입니다. 철저히 옛 사람을 십자가 앞에 굴복시키고 자신의 생각과 이기적인 인간의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있는 '자기'라고 하는 것을 가지고는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담 이후로 모든 육체는 죄인입니다. 타락한 본성을 가진 죄인된 인간의 이성이나 감정이나 의지나 정서마저도 완전히 부패되었습니다. 우리는 죄로 말미암아 마땅히 형벌을 받아 영원토록 괴로움과 고통을 받아야 할 존재입니다(엡 2:3). 이러한 본성을 가지고는 예수의 제자로서의 삶을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반복되는 말이지만 자기를 부인한다는 말은 옛사람의 자신을 인정하는 부분이 조금도 없이 철저히 무시해 버린다는 말입니다.

끈질기게 살아나는 옛 사람을 완전히 정복해 버린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옛 것을 버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기 부인의 삶을 살지 못했던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를 보십시오. 베드로는 자기를 부인하지 못하고 도리어 예수님을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2)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본문 16장 24절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이 말씀은 단순히 상징적인 의미를 넘어서 제자로서의 결단을 촉구하는 엄숙하고 결의에 찬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온 인류의 구속을 위한 단회적인 사건이지만 앞으로 제자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증거하는 현장에서 당하는 고난은 한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처럼 십자가에서 당하는 동일한 형벌도 아닙니다. 지속적이고도 다양한 고난을 당할 때 그것을 피하거나 그 고난 앞에서 비겁하게 되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감사와 기쁨으로 감수해야 할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나를 좇을 것이니라』아콜루데이토( )는 현재 명령형으로 '지속적으로 거침없이 따르라'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대는 단번에 순교하는 시대는 아닙니다. 한 방울씩의 피를 요구하는 점진적인 순교 시대입니다. 

2) 자신이 받은 사명을 완수하는 것입니다. 

(1) 예수 그리스도가 해야 하는 하나님의 일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사명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양식에다 비유했습니다. 살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 양식입니다. 사명은 자신의 양식과도 같은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죽고 사는 문제입니다. 곧 자신의 존재에 관한 문제입니다. 

요한복음 4장 34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고 했습니다.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고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의 본질을 말하는 것입니다. 온전히 이룬다는 말에서 예수님의 십자가상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시는 말씀을 미리 암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 있어서 인류의 죄를 지고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시는 일은 바로 자신의 양식과 같은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요 그의 존재 의의인 동시에 그의 지고한 사명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것이 그가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2) 예수의 제자(성도)들이 해야 하는 일입니다. 
요한복음 6장 28-29절에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납니다(롬 1:17).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해야 합니다. 

로마서 10장 13-14절에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를 전하는 이것이 바로 오늘 교회가 받은 교회적 사명의 본질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운다고 했습니다(골 1:24). 이 말은 그리스도의 고난이 충분하지 못했다는 말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는 교회가 당연히 받아야만 하는 고난입니다. 그 고난은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교회적 사명을 수행할 때 오는 여러 시대 여러 종류의 고난을 말하는 것입니다. 


Ⅲ. 하나님의 일은 상급이 있습니다. 

본문 16장 27절에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인자가 온다는 말은 주님의 재림 때를 의미합니다. 예수께서 심판의 주로 오셔서 의의 심판을 통해 영생과 영벌로 나누어진다는 말입니다. 이 때에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하여 이 땅에서 모든 것을 잃은 자만이 참 생명과 상급이 있다는 말입니다. 성도는 영원한 생명을 위하여 일시적인 생명을 버릴 수도 있는 용단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다시 오실 때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오신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실 때도 신성의 모든 충만이 다만 육체를 입으시고 거하신 하나님의 본체이셨습니다.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계신 것도 성부 하나님과 동일 본질의 동격으로 아버지의 영광 안에 계시는 것입니다. 이 땅에 다시 오실 때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오시는데 그것은 아버지께 받은 심판의 권을 친히 행사하시기 위함입니다. 

요한복음 5장 22절에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와 병행해서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시는 것도 잊지 않으실 것이 분명합니다. 
구원은 믿음으로 받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엡 2:8). 그러나 이 세상에 살면서 우리가 행한 대로 평가를 받는다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고린도후서 5장 9-10절에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행한 대로 받는 상급인데 조건적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상급의 차등은 불가피한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3장 8절에 『심는 이와 물주는 이가 일반이나 각각 자기의 일하는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요한계시록 22장 12절에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고 했습니다. 상급은 금생과 내생에 있는 상급입니다. 

디모데전서 4장 8절에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마가복음 10장 29-30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연초가 되면 교수 신문에 올해의 사자성어(四字成語)를 발표한다고 합니다. 지난해는 자기기인(自欺欺人)이었답니다. 이 말은 자기와 남을 함께 속인다는 말입니다. 금년에는 교수회의에서 광풍제월(光風霽月)로 결정했다고 합니다. 이 말은 중국의 황정견(黃庭堅)이 주돈이(周敦 )의 인품을 평한 말로 마음이 넓어 자질구레한 데 거리끼지 않고 쾌활하며 쇄락( 落)한 인품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입니다. 
이 말의 의미는 비 갠 뒤의 맑은 바람과 밝은 달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교회의 목표인 두리두리 운동 실천을 위해 광풍제월의 자새가 제격입니다.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의 교회를 넘어지게 합니다. 하나님의 일은 최우선 추구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크신 하나님입니다. 크신 하나님의 일은 큰일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자들은 큰 인물(大人)입니다. 왜냐하면 크신 하나님의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얽매이기 쉬운 자질구레한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넓은 마음을 가져야 하나님의 일을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영원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금생과 내생에 상급이 있습니다. 

사람의 일을 우선하면 교회를 넘어지게 합니다. 
옛말에 기만즉일(器滿則溢) 인만즉상(人滿則喪) 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그릇이 가득 차면 넘치고 사람이 가득 차면 잃게 된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이 다 이루고 찼다고 생각하십니까? 성경은 엄히 경고합니다. 고린도전서 10장 12절에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했습니다. 넘어지기로 작정된 자는 순종치 아니합니다. 
베드로전서 2장 8절에 『또한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었다 하니라 저희가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저희를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육의 생각을 버리고 영의 생각을 해야 합니다. 사람의 일을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의 일을 우선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일을 할 수가 있고 그 일에 상급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여, 내가 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10절에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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