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마 5:6)

  • 잡초 잡초
  • 629
  • 0

첨부 1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마 5:6)

배고픈 사람은 온통 밥 생각뿐입니다. 메마른 사막을 걷고 있는 사람에게는 오직 물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제가 처음 개척교회를 시작하려할 때는 십자가만 눈에 들어왔습니다. 좋은 교회 자리가 어디 있나가 주된 관심사였기 때문입니다. 교회 이름을 정할 때는 교회 이름만 보고 다녔고, 간판을 달려고 할 때는 눈에 간판만 보였습니다. 종탑을 세우려고 할 때는 서울 시내 모든 종탑만 보고 다녔던 것 같습니다. 요즘은 “임대” 라는 글자만 보면 눈이 번쩍 뜨입니다. 새로운 장막터를 구하려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원하는 현실만 본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은 사진 찍듯이 객관적으로 보이는 것만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관심 있고 욕심이 있는 것에만 초점을 맞추어 봅니다. 여러분은 지금 무엇에 목말라하고 있습니까? 무엇이 가장 눈에 잘 들어옵니까? 물질에 목말라 하는 사람은 설교 말씀 중에서 축복의 말씀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부동산과 집 문제에 골몰하고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집을 방문해도 그 집 구조나 평수, 가격에만 관심이 가 있습니다. 자녀가 좋은 대학에 들어가기를 원하는 부모는 교육과 관련된 소식만 나오면 귀가 쏠릴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향하여 무엇보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 되라고 말씀합니다. 이는 우리의 주된 관심사가 하나님의 의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성공과 돈이 아니라 의입니다. 사람을 보아도 그의 옷과 그의 위치가 아니라 그가 의가 있나 없나 궁금해 하는 사람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인생에서 한 번이라도 하나님의 의 때문에 밥맛을 잃어본 적이 있습니까? 내 안에 하나님의 의가 실현되지 않아서, 사람들이 하나님의 의를 찾지 않는 모습 때문에, 이 민족이 하나님의 의를 벗어나서 불의의 길을 가는 것을 보며 가슴을 치며 안타까워해 본 적이 있습니까? 사랑 때문에, 물질 때문에, 일의 성공과 실패 때문에 울고 애달아 한 적은 있지만 하나님의 의 때문에 눈물 흘려 본 적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는 온통 그 관심이 하나님의 의에 가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으로 굶주린 사람

그렇다면 의는 무엇일까요? 의는 곧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의의 근원이십니다.  우리가 의를 소망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의로운 분이시고 우리가 그분의 형상을 따라 의의 사람으로 빚어졌기 때문입니다. 의에 대해 주리고 목마르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해서 주리고 목마르다는 것과 같습니다. 불의한 현실에 대한 탄식은 결국 그런 현실을 방치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탄식이요 갈망입니다. 선지자들이 그러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역사의 주관자임을 굳게 믿었습니다. 의의 하나님이 불의의 역사에 개입하실 때 비로소 정의는 세워진다고 믿었기에 그들은 하나님을 갈망하였습니다. 이는 오늘 산상수훈의 5장 10절 말씀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라는 말씀 다음에 11절에서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라고 말씀합니다. 의는 곧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이처럼 의에 대한 갈망은 곧 하나님에 대한 갈망입니다. 의에 대해서, 곧 하나님에 대해서 주리고 목마른 사람의 모습은 시편 42편에서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시42;1) 이 말씀의 번역은 너무 온건합니다. 원 뜻을 살려 읽으면 이렇습니다. “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아 헐떡임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아 헐떡입니다.” 여러분 주님을 찾아 헐떡여 본 적이 있습니까? 내가 주님을 만나지 못하면 죽는다는 생각으로 그분을 갈망해 본적이 있습니까?

뜨거운 여름, 비 한 방울 내리지 않는 메마른 날에 물을 찾아 헤매는 사슴의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모든 시냇물은 말라버리고, 목마름에 지친 사슴은 숨을 헐떡거리며 이곳저곳을 헤맵니다. 행여 물이 있을까 발로 강바닥을 긁어보기도 하지만 물 한 방울 보이지 않습니다. 이 사슴의 눈에는 온통 물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다 웅덩이에 고인 조그마한 물을 발견하자 사슴은 마구 달려갑니다. 그리고 벌컥벌컥 소리를 내며 미친듯이 물을 들이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에 대해 주리고 목마른 사람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 중 하나님을 이렇게 간절히 찾는 사람이 얼마나 됩니까? 찾기는커녕 내 안에 하나님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잃어버린 지도 모르는 형편은 아닙니까? 어떤 분이 네 살박이 자기 어린 자식을 잠깐 잃어버렸던 적이 있었습니다. 놀이 공원에 갔다가 많은 인파 때문에 아이가 순식간에 어디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이 엄마가 기겁을 해서 달음질치며 아이 이름을 부르며 찾지만 보이지 않습니다. 비록 5분만에 찾았지만 그 짧은 순간 이 엄마는 까마득한 절벽에서 떨어지는 듯이 정신이 아득했습니다. 정말 그 5분은 애간장이 녹아드는 것 같은 5분 이었습니다. 그러고 난 후 이 엄마는 자다가 옆자리를 더듬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무의식적으로 자기 아이가 잘 있나 확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엄마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는 이 정도 절박한 심정으로 하나님을 찾고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 잃어버린 지도 모르고 세상에 취해 살고 있습니까?

은혜를 사모하는 사람은 예배시간이 기다려집니다. 마지못해서 예배드리는 것이 아니라 즐거움으로 달려옵니다. 거리가 먼 것은 상관이 없습니다. 거리가 멀면 멀수록 오히려 은혜는 더욱 큽니다. 1-2시간 넘게 걸려 교회에 와서 한 시간 예배를 드린다면 그는 다른 사람보다 두 배 넘게 예배를 드린 것과 같습니다. 성전을 향하여 달려오는 사람의 그 안에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루 기도를 드리지 않거나 말씀을 읽지 않으면 마치 밥을 안 먹은 것처럼 허전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에 대해 굶주린 사람의 모습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매일 만나를 먹었듯이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매일의 일용할 양식이 되어야 합니다.

기갈 중에 무서운 기갈이 바로 말씀의 기갈입니다. 아모스서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에서 동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달려 왕래하되 얻지 못하리니”(8:11-12) 여기 말씀에 기갈 들렸다는 것은 부정적인 의미의 기갈입니다. 성전에서 말씀을 들을 때는 순종하지 않고 딴 짓하고 자기 욕심에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러다 나라가 망하여 예루살렘 성전이 없어지고 난 후에는 더 이상 예배를 드릴 수 없습니다. 말씀을 듣고자 하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곳이 더 이상 없습니다.(알퐁스 도데의 “마지막 수업”, 알자스 로렌 지방)

말씀을 읽는다는 것이 단지 우리의 능력만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은 성령께서 우리에게 감동을 주셔야 은혜가 됩니다. 어떤 분은 성경을 백 번 넘게 읽은 분도 있습니다. 이것이 그냥 책이면 지루해서 못 읽습니다. 성령께서 감동주시기 때문에 읽을 때마다 은혜가 되고 감동이 됩니다. 그런데 말씀의 기갈이라는 것은 말씀을 읽어도 도무지 들어오지도 않고 감동이 없습니다. 예배를 드려도 딴 생각만 납니다. 기도를 드려도 응답이 없습니다. 이럴 때의 답답함을 아십니까? 우리는 영성 관리를 잘하여야 합니다. 말씀이나 예배도 생활화 되지 않으면 은혜가 되지 않습니다. 내가 마음만 먹으면 기도가 되고 감동이 임할 것 같습니까? 오래 쉬고 나면 세상에 익숙해져 다시 은혜를 회복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여러분 아귀(餓鬼) 아십니까? 기아에 들린 귀신을 말합니다. 이 아귀는 입은 큰 데 목구멍이 바늘구멍입니다. 그래서 완전히 빼빼 마른 귀신입니다. 우리가 은혜의 기갈이 걸릴 때 그렇습니다. 마음껏 하나님을 찾고 싶은데 그것이 마음대도 되지 않습니다. 사람도 자주 보고 자주 전화해야 정이 드는 법입니다. 하나님도 자주 뵙고 수시로 그리워해야 그분의 은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의에 주린 자가 복이 있다고 합니다. 왜? 그가 배불림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간절히 원하면 주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얻게 하고 찾게 하고 열어 주실 것입니다. 

이들은 복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이들은 가장 참되고 영원한 것을 갈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갈망하고 있는 것 중에는 영원하지 못한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것이 우리 영혼에 만족을 주지 못한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현대 사회를 사는 우리들이 가장 갈망하는 것은 아마 물질일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록펠러를 기억하십시오. 일전에 뉴욕타임즈에서 20세기 최고 부자 16명을 선정했는데 그중 록펠러가 1위, 곧 금세기 세계최고의 부자로 선정되었습니다. 그가 석유사업으로 세계 최고의 부자가 되었지만 그 결과 얻었던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치명적인 병과 잠을 못자는 신경쇠약증이었습니다. 사업하시는 분들이 그렇습니다. 수입을 맞추고 사람을 관리하는 일이 보통일이 아닙니다. 대부분 위장병이나 혈압에 이상을 가진 분들이 많습니다. 록펠러는 53세 되는 나이에 알로피셔(Alopecia)라는 탈모증 비슷한 병에 걸렸습니다. 머리카락이 빠지고 눈썹도 빠지고 몸이 초췌하게 말라가는 병이었습니다. 아무리 세계 최고의 부자라도 이 병 때문에 그가 먹을 수 있었던 음식은 우유 한 잔과 크래커 몇 조각 뿐이었습니다. 돈은 엄청나게 많은데 먹을 수 있는 것은 한 주먹도 안 됩니다. 아귀가 따로 없지요. 담당 의사도 “이런 상태로는 1년을 견딜 수 없습니다.”고 말하고 몸은 자꾸 말라갑니다. 

그는 이런 투병 생활 가운데서 자기가 그렇게 갈망하며 번 돈의 의미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어느 날 밤 중에 침대에서 괴로워하다 벌떡 일어나더니 이렇게 외쳤다고 합니다. “돈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리고 조금 있다가 또 이렇게 외쳤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이 되신다.” 하나님의 은혜로 병상에서 일어나게 된 록펠러는 이후 자선 사업에 전념합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은혜 주셔서 90이 넘도록 장수하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굶주려 있습니까? 제대로 된 갈망입니다. 하나님께서 온전한 만족으로 채워주실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나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마음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사55:1-2)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주는 나의 주시오니 주밖에는 나의 복이 없나이다”(시16:2)고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의에 굶주린 사람

오늘 말씀에서 의에 주렸다고 할 때의 ‘의’는 직접적으로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올바른  삶’을 말합니다. 마태복음 5장 20절에서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의’는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바른 생활이나 삶의 태도를 의미합니다. 곧 너희 삶이 바리새인보다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한다고 하면서도 사람들의 인정을 취하는 바리새인의 태도가 아니라 정말 심령까지도 가난해진 마음의 상태를 말합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식으로 복수의 논리와 가치관이 아니라 오른 편 뺨을 맞으면 왼편 뺨도 돌려대며 오히려 원수를 사랑하는 삶의 태도를 말합니다. 바리새인들이 작은 것의 십일조는 드리지만 의와 인과 신, 곧 정의와 자비와 믿음은 버렸던 데 비해서 이 의와 인과 신까지도 실천하려는 삶이 바로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입니다. 

마태복음 6장 33절에서는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의는 같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처럼 의에 대한 굶주림과 목마름은 내 안에 성결의 삶을 이루려는 갈증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서 순종하며 행하려는 갈증을 말합니다. 내가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닮아갈까 하는 생각 이것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의 모습입니다.

제가 처음 예수님을 믿었을 때는 믿음에 대한 욕심이 참 많았습니다. 제 기도중 하나는 예수님 보좌 우편에 앉는 사람이 되게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가장 존경했던 분이 바로 성 프란체스코였습니다. 그런데 언젠가는 이 성 프란체스코 때문에 절망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성 프란체스코가 예수님처럼 40일을 금식한 적이 있습니다. 성 프란체스코는 39일까지 유혹을 이겨가며 금식을 잘 수행했습니다. 그런데 그 마지막 한 날을 남기고 빵을 한 조각 떼어 먹습니다. 왜 그랬는지 아십니까? 배가 고파서? 아닙니다. 자기는 감히 예수님처럼 될 수 없다며 빵을 떼어 먹습니다. 성 프란체스코는 정말 성인이고 대단한 겸손의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그 책을 읽다가 울었던 기억이 있었습니다. 정말 이 사람처럼은 될 수 없겠구나. 그 시간 이후 감히 예수님 보좌 우편에 앉게 해달라는 기도는 그만 두었습니다. 뒤돌아보면 그것이 내 안에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한 갈증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요즘은 생활에 치이고 ‘인생 뭐 있어!’ 하다 보니 그런 기대를 전혀 갖지 않습니다. 우리는 내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 위하여 얼마나 안타까워하고 있습니까?

이 의는 한 개인 안에서 뿐만 아니라 사회를 향한 갈증의 형태로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우리 공동체 가운데 하나님의 의가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갈증입니다. 우리는 우리 민족을 생각하며 눈물 흘려 본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 나라의 의에 대한 기대 때문에 현실의 불의를 도무지 참지 못하는 사람, 그가 바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입니다.

구약에 이처럼 의에 주리고 목말라했던 대표적인 선지자는 바로 하박국입니다. 하박국은 이스라엘 사회가 불법의 길로 가는 것 때문에 탄식하였습니다. 그는 성루의 높은 파수하는 곳에 올라가(합2:1) 기도했습니다. 하박국이 하나님께 이렇게 탄식합니다. “율법이 해이하고 공의가 아주 시행되지 못하오니 이는 악인이 의인을 에워쌌으므로 공의가 굽게 행함이니이다”(합1:4) 그러자 하나님께서 이 불법한 이스라엘을 심판하시겠다는 말씀을 주십니다. 그런데 그 심판을 갈대아 사람, 곧 바벨론에게 맡깁니다. “보라 내가 사납고 성급한 백성 곧 땅의 넓은 곳으로 다니며 자기의 소유 아닌 거할 곳들을 점령하는 갈대아 사람을 일으켰나니”(합1:6) 하박국이 이 말씀을 듣고 나니 더 답답해집니다. 아무리 이스라엘이 불법하다해도 이방의 바벨론보다는 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박국은 더 절망하여 이렇게 탄식합니다. “어찌하여 궤휼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되 잠잠하시나이까”(합1:13)

이것이 바로 의에 굶주리고 목마른 자의 모습입니다. 제자들은 어떤 존재들인가?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의 정의가 실현되지 못하여 가슴을 치며 안타까워하는 자들입니다. 마치 자신이 이 세상의 주인이고 대통령이나 된 마냥 불의를 향해서 나가기만 하는 사회를 향하여 눈물 흘리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의에 굶주린 자는 애통하는 사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탄식하고 하나님의 의를 갈망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의로 배부르게 하십니다. 하박국은 하나님으로부터 이런 약속을 받습니다.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응하리라”(합2:3) 하나님은 불의한 바벨론도 심판하시고 하나님의 선택한 이스라엘을 다시 회복시키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이 약속을 받은 하박국은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합3:17-18) 하고 찬양합니다. 

하박국이 받은 것은 현재적인 배부름은 아니었습니다. 단지 약속이었습니다. 그는 비록 지금은 가난하고 지금은 불의의 현실을 보고 있지만 그 때문에 절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손을 통해서 이루어질 미래를 미리 보았기 때문입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하박국의 주제입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며 산다는 것입니다. 예수의 제자들은 미래에 주어질 배부름 때문에 현재 기뻐하며 만족해하는 사람들입니다.

갈망하는 사람은 그 갈망하는 대상을 닮게 되어 있습니다. 의를 갈망하는 자는 의의 사람이 될 것입니다. 사람의 얼굴에는 그 사람이 갈망하는 것이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권력을 탐하는 자의 얼굴에는 교만함과 비굴함이 나타납니다. 물질을 탐하는 자의 얼굴에는 탐욕과 두려움이 나타납니다. 의를 사모하는 자, 예수를 사모하는 자는 그 얼굴에 평화와 깨끗함이 나타납니다. 여러분의 얼굴은 어떻습니까? 요한 일서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요일3:2)

그래서 지도자들은 백성들이 옳고 더 영원한 것들을 갈망하도록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정의와 도덕을 갈망하는 백성이 많으면 그 사회가 정의롭고 도덕적인 사회가 됩니다. 다음과 같은 맹자의 말씀은 우리가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맹자』 편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양혜왕이라는 사람이 맹자를 찾아서 물었습니다. “나라의 이익이 될 일이 무엇입니까?” 그러자 맹자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왕께서는 하필 이익을 말씀하십니까. 오직 인(仁)과 의(義)가 있을 뿐입니다.” 왕이 나라의 이익만 생각하면 관료들은 자기 집안의 이익만 생각하고, 백성들 또한 자신의 이익만 생각하게 되어 나라 전체가 자기만을 생각하게 되어 나라가 위태롭게 된다는 뜻입니다.

우리 사회는 경제와 이익을 중심하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교회도 부흥과 성장만을 추구하고 수와 물질을 자랑합니다. 이런 사회는 위험합니다. 서로의 이익만 취하려다 서로 경쟁하고 미움이 극대화되는 탐욕의 사회가 됩니다. 부정과 부패와 부도덕에 대해서는 눈을 감으며, 불의한 자가 목에 힘을 주는 불량국가가 됩니다. 교회가 항상 붙잡아야 할 것은 이익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 곧 하나님의 의입니다. 우리는 이 일이 하나님의 뜻인가가 항상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에 안타까워하고 굶주린 공동체가 바로 교회입니다. 주님은 그 교회나 인생이 크건 작건 물질이 많건 적건 그것이 복이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그 마음속에 의에 대한 갈증이 있는 인생이나 교회가 가장 복되다고 말씀합니다.

주님의 판단이 옳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행하는 데는 부족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온전히 행하고 있느냐고 묻고 계신 것이 아닙니다. 다만 의에 대한 갈증이 있느냐고 묻고 계십니다. 우리가 지금은 많이 부족하고 초라합니다. 그러나 우리 중심에 하나님의 의에 대한 갈증이 있습니다. 그러면 복됩니다. 그러면 행복하다고 주님은 말씀합니다. 주님이 그들과 함께 하시며 주님으로부터 온전한 위로가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박국처럼 기뻐하고 찬양할 수 있습니다. 복은 외양간에 송아지가 가득한 데서 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함께 하시고 배부름의 약속이 있는 인생, 그런 인생이 진정 복 있는 사람입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