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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순절] 부활이요 생명이니... (요 11:2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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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이요 생명이니... (요 11:21-27)

사순절 다섯 번째주

살면서 우리는 종종 충격스런 일들을 당하게 된다. 특별히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 그 충격은 오래간다. 나는 초등학교 6학년, 13세 때 부친을 잃었다. 부친의 갑작스런 죽음은 3년 간의 중학교 시절을 말 없는 소년으로 보내게 했다. 그 충격은 너무 커서 삶의 의욕을 상실케 했다. 이윽고 가출까지 해서 온 집안식구들의 근심이 되기도 했었다. 그때부터 죽음에 대하여 많이 생각하게 되었다. 

오늘 본문의 내용도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한 가정에 대한 이야기다. 예루살렘에서 2km 정도 떨어진 베다니라는 마을에 삼남매가 우애 좋게 살고 있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가실 때 종종 그 가정을 방문해서 말씀도 주시고 식사 대접도 받은 가정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오라비인 나사로가 갑작스럽게 병이 들고 말았다.

병이 호전되지 않고 도리어 악화되자 두 자매는 예수님에게로 급히 사람을 보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요단강 근처에 계셨다. 하루면 올 수 있는 거리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전혀 서두르지 않았다. 도리어 그곳에서 이틀을 더 지체하시다가 베다니로 올라오셨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나사로가 죽어 장사된지 나흘이 지난 후였다. 

많은 사람들이 와서 위로했으나 죽은 오라비가 살아날리는 없었다. 오라비를 부모 삼아 의지하며 살던 그 가정이 나사로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일순간에 불행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남은 두 자매는 슬픔과 절망감 속에서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예수께서 마을에 도착하셨다는 전갈을 받은 두 자매 중 언니인 마르다가 영접하기 위해 달려 나갔다. 그리고 만나자 마자 이렇게 말했다.
(요 11:21)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예수님을 향하여 한꺼번에 원망이 터져 나왔다. 오라비가 죽은 것은 예수님이 늦게 오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때 예수께서 위로의 말씀을 주셨다.

(요 11:23)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그러나 마르다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마지막 심판날에 다시 부활할 것으로 이해했던 것이다. 그러자 예수께서 마르다를 향하여 강하게 말씀하셨다.

(요 11:25)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요 11: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마르다는 즉시 ‘믿습니다’라고 대답했지만 그 믿음은 진실한 것이 아니었다.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예수께서 나사로의 무덤 앞에 가셨을 때 마르다가 예수님께 이렇게 말했다. 
(요 11:39) 주여 죽은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더 이상 수고하실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직접적으로 말하자면 “당신인들 죽은 사람을 어떻게 할 수 있겠느냐?라는 것이다. 이 말은 마르다의 믿음의 한계를 드러내는 말이었다. 그리고 그 말을 들으셨을 때 속으로 상당히 불쾌하셨으리라 생각된다. 

그리고 난 후에 예수께서 동생 마리아를 찾으셨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자매지간이었으나 서로 성격이 달랐다. 마르다는 대접하고 사람만나는 것을 좋아하는 외향적인 여성이었고, 마리아는 조용하고 차분한 믿음의 사람이었다. 그러나 마리아는 오라비의 죽음으로 인한 충격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예수님께서 부르신다는 소리를 듣고 겨우 정신을 차리고 예수님 앞에 나왔다. 마리아도 역시 언니 마르다처럼 예수님을 향하여 원망의 마음을 털어 놓았다. 

(요 11:32)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그 자리는 또다시 울음 바다로 변하고 말았다. 마리아의 우는 모습을 보자 조문온 사람들이 함께 울었다. 예수님의 입장이 난처해 지셨는데..., 그때의 상황을 사도 요한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요 11:33) 예수께서 그의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의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사... (요 11:35)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신 것은 대단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어떤 주석가들은 두 자매의 슬픔에 동참하는 연민의 눈물이었다고 설명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의 눈물은 두 자매의 슬픔에 함께 동조하는 연민의 눈물이 아니었다고 본다. 이 부분에 대하여는 뒤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다. 

통곡하는 무리들 앞에서 예수님이 전하는 위로의 말을 별 의미가 없었다. 예수께서 바로 나사로의 무덤 앞으로 가셨다. 사람들이 호기심을 가지고 예수님의 뒤를 좇았을 것이다. 그리고 무덤 앞에 돌을 치우라 명하신 후 하늘을 우러러 기도하셨다. 그리고 무덤을 향하여 소리를 지르셨다. “나사로야 나오라!”

어떻게 되었겠는가? 44절을 함께 읽겠다.

(요 11:44)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그 자리에서 붕대가 감긴채 걸어나오는 나사로를 목격한 사람들의 반응이 어떠했는가는 여러분 상상에 맡긴다. 말로 못 믿는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직접 눈으로 보게 하셨다. 이 사건을 통해 예수님이 생명의 주관자가 되심을 확실하게 보여 주셨다. 예수 안에 소망이 있다. 예수 안에 회복이 있다. 예수 안에 기쁨이 있다. 예수님은 생명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 본문 가운데서 의문으로 남아 있는 부분들이 있다. 첫째는 왜 예수님께서 고의로 지체하셨는가? 둘째는 예수님께 왜 눈물을 흘리셨는가? 라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의문에 대한 대답을 얻을 때 우리는 본문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왜 지체하셨는가?
본문 4절을 보면, 나사로가 위급하다는 전갈을 받으신 후에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해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 

그리고 15절 말씀에 보면,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함이라”

지체하신 이유가 세 가지로 요약되는데, 첫째는 나사로의 죽음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고, 둘째는 예수님 자신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고, 셋째로는 제자들의 믿음을 위함이라는 것이었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 5절 말씀에 보면, 예수께서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면 사랑의 증거는 무엇이겠는가? 즉시 달려오셔서 죽어가는 나사로를 살려주시는 것, 그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이런 생각은 우리의 생각일 뿐이라는 것이다. 주님의 생각은 우리와 다르다. 때로는 사랑하시는 사람들을 고통 가운데 방치하실 때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이해가 될 때 믿는다. 그러나 그런 믿음은 어린 아이의 믿음일 뿐이다. 그런 믿음 가지고는 세상의 시험을 이길 수 없다. 그래서 때때로 하나님의 필요에 의해서 사랑하시는 자녀들에게 고난과 역경을 주신다. 그 고난과 역경을 통해 그들의 믿음을 끌어 올리신다. 
예)어린 아들과 아버지 이야기. 

예수님이 지체하시므로 두 자매는 절망과 슬픔 속에 빠지게 되었다. 결과론적으로 보면 예수님께서 빠뜨리신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을 향하여 원망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고통을 오래 동안 묶어 두지 않으셨다.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셨고,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의 주인이 되신다는 사실을 증거해 보이셨다. 그리고 두 자매와 제자들의 믿음을 강화시켜 주셨다. 그리고 그곳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의견을 묻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방법대로,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실 뿐이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아우성치고, 불평하고 원망도 해보지만 그렇다고 사정을 봐주시는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께서 그런 필요를 느끼실 때 물 가운데로, 불 가운데로 이끌어 가기도 하신다. 

그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때 잠잠히 순종하는 믿음이 필요하다. 
“나의 모든 것은 당신 손에 달려 있습니다. 당신의 뜻대로, 당신의 원하시는 방법대로, 당신이 원하시는 것을, 당신이 원하시는 때에 나에게 행하소서!”

혹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리고 깊은 슬픔에 빠진 분이 있는가? 인간적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역경 가운데 있는가? 조급하게 원망 불평하지 말라. 그 일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 인생에 주관자가 되심을 나타내시며, 우리의 믿음을 강화시키시려는 놀라운 계획이 있음을 기억하며 인내하기 바란다. 

두 번째로, 예수님의 눈물의 의미는 무엇인가?
앞서서 언급한대로 예수님의 눈물은 연민의 눈물은 아니었다. 탄식의 눈물이었다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마리아는 예수님이 도착하셨다는 소식을 듣고도 나가지 않았다. 예수님께 대한 실망이 컷던 것이다. 언니 마르다와의 대화가 끝난 후 예수님께서 부르실 때까지 집안에 머물러 있었다. 그리고 예수님을 보자 마자 터져 나온 말은 원망이었다.

(요 11:32)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언니가 했던 말을 똑같이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똑같은 말을 마리아에게서 들으셨을 때 예수님의 반응은 어떠하셨는가? 

(요 11:33) 예수께서 그의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의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사... (요 11:35)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그럼 마리아는 어떤 여인이었는가? 눅10장에, 예수께서 그 가정을 방문하셨을 때 마르다는 음식 준비에 분주했고, 마리아는 예수님 앞에 앉아 말씀을 들었다. 언니의 눈총에는 아랑곳 않고 말씀을 사모하며 들었다. 그와 같은 태도를 예수님께서 칭찬하셨다. 마르다도 훌륭한 믿음의 여인이었지만 마리아는 언니보다는 더 믿음이 있었다. 

또한 오늘 본문 2절 말씀에 보면, “이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씻기던 자요”라고 소개하고 있다. 그렇다면 마리아 만큼은 좀 다르리라는 기대를 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다르지 않았다. 똑같이 울고, 원망하는 모습이 섭섭하셨던 것이다. 

마리아 정도라면 이렇게 고백하는 것이 마리아다웠을 것이다.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 1:21)

누구의 말인가? 욥이다. 그는 아무 잘못도 없이 졸지에 자녀 10명과 재산을 다 잃고 말았다. 그러나 입술로 하나님 앞에 범죄하지 않았다. 

마리아는 욥처럼 고백할 수는 없었다 할지라도 원망하지는 말았어야할 사람이었다. 그러나 마리아는 마르다보다 더 깊은 슬픔에 잠겨 있었고 함께 한 많은 조문객과 울며 통곡하고 있었다. 하나같이 똑같은 불신앙과 무지를 보실 때 참을 수 없는 분노의 눈물이 흘렀던 것이다. 

종종 교회 안에서 이런 현상들을 보게 된다. 예수 믿은지도 오래됐고, 제자훈련, 성경공부, 새벽기도, 봉사등등 열심 있는 분들이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믿음으로 기도하고 참고 기다리는 모습보다는 앞장 서서 불평하고 원망하고 혈기부리는 경우를 보게 된다. 그런 모습을 보면 예수님이 느끼셨던 통분함과 민망함을 느끼게 된다. 

여러분! 어린아이가 속 썩이면 부모는 응석으로 받아 들인다. 그러나 나이든 자식들이 속 썩이면 정말 속이 썩는 법이다. 예수를 믿는다고 다 똑같은 믿음이 아니다. 사람에 따라 그 믿음의 크기가 다르다. 평상시에는 잘 모른다. 그러나 핍박 또는 고난이란 압력을 가해보면 금방 알 수 있다. 마르다와 마리아의 믿음은 오라비가 살아 있을 때, 그들의 생활이 평온할 때 그들의 믿음은 참 고상하고 아름다웠다. 그러나 오라비가 죽었을 때 믿음의 바닥이 다 드러나고 말았다. 믿음의 바닥이 드러난 그 자리에 불신앙이 버티고 있었던 것이다. 

예수님이 소경의 눈을 보게 하시고, 문둥병자를 고치시며, 귀신을 내어 쫓는 능력을 가지신 분으로는 믿었다. 그러나 죽음에 대하여는 무능하신 분으로 믿고 있었던 것이다.
마르다와 마리아의 불신앙은 예수님께로 사람을 보낼 때부터 나타났다. 자기 오라비 나사로가 죽기 전에 오셔야만 살 수 있다고 믿고 있었던 것이다. 예수님께 두 자매에게 기대하셨던 믿음은 이런 것이었을 것이다. 사람을 보내면서... 

“주님, 주께서 사랑하시는 나사로가 지금 생명이 위독합니다. 말씀하셔서 낫게 하옵소서!”

가버나움의 백부장이 자기 하인이 중풍병으로 고생할 때 예수님 앞에 나가 간청을 드렸다. 그때 예수께서 백부장의 집으로 가려 하자 백부장이 말리면서 이렇게 말했다. 

(마 8:8)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예수님께서 백부장의 말을 듣고 그곳에 있는 무리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마 8:10)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여러분! 예수님은 직접 가지 않으시고 말씀만으로도 병을 낫게 하시는 분이시다. 직접 가지 않고 말씀 한 마디로 죽은 자를 살리실 수 있는 분이시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시다.

마르다와 마리아가 비교적 훌륭한 믿음의 사람들임에 틀림 없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에 불신앙이 드러나고 말았다. 이런 모습이 주님의 마음을 슬프게 하는 것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으로 인해 위로를 받고 문제를 해결 받는다. 그러나 정말 어려운 일을 당하게 되면 감사는 사라지고 원망하고 분노하게 된다. 그것은 우리 안에 신앙으로 감춰진 불신앙의 모습이다. 그런 모습, 그런 태도가 예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이요 눈물 흘리시게 하는 것이다. 

여러분! 만약 예수님께서 우리의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실 수 없는 분이라면 이 땅에 기독교는 더 이상 존재 의미가 없는 것이다. 복을 비는 다른 종교와 다를 것이 없다. 그러나 예수님은 믿지 못하는 마르다를 향하여 크게 말씀하셨던 것처럼 오늘 이 시대에도 말씀하신다.

(요 11:25)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요 11: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저와 여러분의 신앙고백이 결정적인 순간에 날아가지 않도록 평상시에 믿음을 강화시키시기 바란다. 얕은 물가에서, 늘 안전지대에서 안주하려 하지 말라. 때때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강화시키시기 위해 광야로 들여 보내신다. 그때 불평 원망 분노하지 말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며 나의 믿음을 한 단계 더 성장시킬 수 있는 기회로 삼기 바란다. 

그리고 예수님은 부활이요 생명이 되신다. 그 생명을 모든 신자의 심령 속에 넣어 주셨다. 그 부활의 생명은 이 세상의 모든 고난과 역경, 죽음까지도 극복할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신다. 그 증거가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이시다.

이 세상에서 영원까지 이어진 성도의 복된 삶을 인해 감사하고 자신감 있게 그리스도를 증거하며 승리하는 삶이 되기를 축원한다. 주님의 기쁨이 되는 성도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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