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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바람아 잠잠하라 (마 8:23-27, 막 4:3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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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아 잠잠하라 (마 8:23-27, 막 4:35-41)

I. 예수 - 그가 누구이기에?

마태복음 7장은 산상보훈의 마지막 결론입니다. 산상보훈을 마치고 난 다음에 짤막한 두 절은 예수님으로부터 천국의 보화같은 말씀을 들은 무리들의 반응이 나옵니다. 한 마디로 요약하면 "권세있는 자와 같다"고 얘기했습니다. 산상보훈은 권세있는 자의 가르침이었습니다. 산상보훈이 마치고 8장 9장 10장까지 권세 있는 가르침을 주셨던 예수님께서 권세를 직접 행하신 사건들이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마태복음 8장은 7장까지 있는 산상보훈에 연결선상에서 이해를 해야 합니다. 

권세있는 가르침 다음에 직접 예수님께서 권세를 행하신 내용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0장에 가서보면 권세를 제자들을 선택하여 위임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너희들도 세상에 나아가서 권세있는 선포를 할 수 있다. 권세있는 천국복음을 가르칠 수 있다. 권세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 권세를 행할 수 있다. 제자들에게 권세를 위임하는 것이 10장에 나옵니다. 권세를 행하시는 사건에 보면 10가지의 다양한 기적들이 나옵니다. 병을 고치기도 하시고, 풍랑을 잔잔케도 하시고, 죽은자를 살리기도 하시고... 다양한 기적사건 가운데 마태복음을 기록한 마태는 놀라운 사건 한가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마태 자신의 개종사건입니다. 

예수님의 기적사역 가운데 자신이 개종된 예수님의 제자로 부름받은 이 사건을 기적사건 속에 집어넣고 싶은 마태의 마음을 읽어볼 수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마태는 이 세상에 치유가 많고 많지만 손가락질 당하고 세리로서 비웃음 당하던 마태 자신이 영혼이 치유되어지고 죄가 치유된 이 사건보다 더 큰 치유는 없다고 본 것이지요. 이 세상에 기적이 많고 많지만 영원히 지옥에서 멸망 받을 수밖에 없는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의 가족이 된 이 구원받은 사실보다 더 엄청난 기적은 없다고 하는 것이지요. 자신의 개종사건을 기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태는 자신의 개종을 기적 사건속에 넣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권세 있는 가르침을 하시고 권세를 행하시고 권세를 위임하는 연결선상속에 자신이 주님의 제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자신도 이렇게 못난 사람이지만 예수님으로부터 권세를 위임받아서 이 세상에 권세를 나누는 권세를 선포하는 권세를 가르치는 권세를 행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에 대한 감사와 감격이 묻어 있는 마태의 의도적인 기록입니다. 

얼마전 제가 오랫동안 썼던 안경을 벗었습니다. 이 일을 두고 교우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했던 모양입니다. 여러 가지 추측의견들 중에 제일 많은 의견은 세 가지였습니다. 어떤 이들은 목사님이 라식수술을 했을 것이라고 했답니다. 어떤이들은 콘텍트 렌즈를 낀 것 같다고 했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우리 목사님에게 병고치는 은사와 능력 행함의 은사가 나타나더니 당신의 나쁜 눈을 기적적으로 고쳤을 것이라는 겁니다. 저는 라식수술을 한 것도 콘텍트렌즈를 낀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기적이 나타난 것도 아니었습니다. 안경을 닦다가 안경테가 부러졌습니다. 제 눈에는 아직 기적이 일어나지 않았지만 예수 안에선 언제나 이적과 기사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신약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 친히 행하신 이적이 37가지 정도가 나옵니다.
① 병을 고치신 치유기사가 제일 많고 
② 그 다음이 풍랑을 잠잠케 하고 물위로 걸어가시고 무화과 나무를 말라 죽게 하는 등 자연을 변화시킨 기사입니다. 
③ 죽은 사람을 살리신 기적도 3번 나옵니다.

자연을 변화시켜주신 기적 중 풍랑을 잔잔케 하신 기사는 두 번 나옵니다.
① 오병이어의 기적이 있은 이후 제자들만 배를 타고 가다가 풍랑을 만났습니다.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 오시사 바다를 잔잔케 하신 사건입니다.

② 그리고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가시다가 풍랑을 만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배 밑에 깊이 잠들어 계셨고 곤혹을 치루던 제자들은 예수님을 깨웠지요. 주무시던 예수님이 일어나 풍랑을 잔잔케 하신 기사였습니다.

이 사건이 마태복음 8:23-27, 마가복음 4:35-41, 누가복음 8:22-25, 공관복음에 똑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풍랑을 잔잔케 하신 이 사건을 통하여 성경이 말씀하고 싶은 얘기가 무엇일까요? 이 사건을 보는 공관복음서의 결론이 동일합니다. 「예수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하는 것입니다. 

모든 이적 사건의 목적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천지의 창조주이십니다.
·이 자연과 역사의 운행자이십니다.
·그러므로 바람과 바다도 그분께 순종합니다.
·그분은 역사의 심판주이십니다. 


II. 풍랑을 만나 두려워 떨고 있는 사람들

예수님께서 저물 때에 갈릴리 바다 저 건너편으로 가자고 제자들을 종용하셨습니다. 그 밤 큰 광풍이 일어나 물결이 커지더니 물결이 배에까지 들어오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풍랑을 모르시듯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제자들은 곤히 주무시는 예수님을 깨웠고, 예수님께서는 바람과 풍랑을 잔잔케 하셨다고 하는 너무나도 익히 잘 알고 있는 사건입니다.

갈릴리 바다는 신비가 흐르는 바다입니다. 언제 어디서 바람이 불어와 누구의 배를 삼킬지 전혀 예측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갈릴리 바다엔 일기예보가 없습니다. 이것이 인생입니다. 인생의 바다엔 일기예보가 없습니다. 

1. 본문의 제자들이 풍랑을 만나 곤혹을 치루고 있는 것은 배를 젖는 저들이 애숭이라서 초보라서 그런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인생의 바람은 인생항해가 서툰 사람에게만 오는 것 아니지요. 건강하던 사람도 질병으로 쓰러집니다. 노련한 경영가들도 사업에 실패를 겪을 수가 있습니다. 능숙한 신앙인들도 시험을 만나고 유혹에 부딪힐 수가 있습니다.

2. 본문의 제자들, 요나처럼 불순종하여 도망하다가 만난 풍랑이 아닙니다. 인생의 바다에서 믿음대로 순종하여 살던 사람들도 시련, 고난이 있을 수 있습니다. 고난은 하나님의 징계의 채찍으로만 오는 것이 아닙니다. 더구나 예수를 모시고 가던 제자들에겐 일어났던 풍랑 마져도 멈춰야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러나 예수님을 모시고 가는 이 배 한가운데서 지금 풍랑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3. 제자들이 이해할 수 없었던 사실이 또 하나 있었습니다. 이 난리 풍랑 속에서 예수님은 고요히 주무시고 계셨다는 사실입니다. 때로 인생의 바다에서 당신의 자녀들이 파산을 겪습니다. 실패를 경험합니다. 질병으로 신음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도무지 무관심한 듯 보일 때가 있습니다. 당신의 자녀들이 울부짖습니다. 부르짖어 기도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무지 응답이 들려오지 않습니다. 이때 흔히 사람들이 말합니다. 야! 정말, 인생 모르겠다. 저희들이 어릴 때 어른들에게 인생에 관하여 물으면 어른들은 그렇게 대답하곤 했습니다. 크면 알게 될거라고... 그러나 크면 클수록 더욱 모르겠는게 인생 아니었습니까? 

그래서 종교가들이나 철학자들은 "인생은 고해다. 인생은 괴로운 바다다."라고 합니다. 인생은 바람 부는 이 바다 한가운데 혼자 태어나 혼자 죽는 바다입니다. 이 인생의 고통은 누구하고 나누어 가질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게 실존주의자들이 본 인간입니다.

어느 조간 신문에 이런 만화가 있었습니다. 한 뚱뚱한 아주머니가 약방에 들어갔습니다. "살빼는 약 주세요." 그래서 약사가 알약 한 병을 주었습니다. "하루에 몇 알씩 먹을까요?" "이 약은 먹는 약이 아니요, 일어서서 방바닥에다가 약을 몽땅 쏟았다가 앉아서 다시 주워 담고 또 일어나서 약을 쏟고 다시 주워담고 하루종일 그렇게 하면 살이 빠질거요." 그리고 그 밑에 주석을 그렇게 달았습니다. 「약은 약사에게 살은 각자 자기가 빼자!」

실존주의자들이 볼 때 내 인생의 문제는 내가 해결하는 겁니다. 이 괴로운 인생의 바다에서 본문의 제자들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이 신음은 오늘을 살아가는 모든 인생들의 한결같은 외침이 아니겠습니까?


III. 예수님: 풍랑속에 주무시다

1. 주무시는 예수님

제자들이 이렇게 두려워 떨고 있는 시간에 예수님은 "베개를 베고 주무시더니"라고 마가복음 본문은 기록하고 있습니다.(마태8:24 "예수께서는 주무시는지라")
제자들이 깨워 일어나신 예수님, 바람을 꾸짖어 잔잔케 하시고 제자들을 나무라십니다.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 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이때 제자들의 반응이 마지막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제자들이 놀라야 될 질문이 또 하나 있습니다. "예수님은 어찌 이 큰 풍랑속에서 주무실 수 있단 말인가?" 그 광풍속에서 고요히 주무시는 예수님의 인격에 놀라야 합니다. 

비바람 가운데에서도 편히 쉬시고 주무시는 예수님의 그 믿음속에 우리가 놀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구약 성경에 하나님께서 주무신다는 기록은 전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주무셨다는 기록도 이 사건에만 나타납니다. 물론 인성을 가지신 예수님, 밤이 되면 주무셨겠지요. 그런데 성경 상에 기록은 이 사건에서만 예수님께서 주무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풍랑속에서, 질풍노도한 가운데서 예수님이 편히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그만큼 예수님의 이 본문의 주무신 사건은 의미심장한 사건이요, 오늘 우리에게 들려주시고자 하는 커다란 메시지가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주무신 것은 상당히 의도적 행동이었습니다. 

풍랑을 잔잔케 하든 더욱 거센 풍랑을 일으키시든 그것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실 일입니다. 하나님은 풍랑을 일으킬 수도 있고 하나님은 풍랑을 잔잔케 하실 수도 있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산을 세우기도 하시는 분이시며 산을 무너뜨리기도 하시는 분이시기도 합니다. 다만 우리는 그분을 신뢰하고 풍랑속에서도 평안할 수 있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것을 우리에게 기대하십니다. 

지난 주간에 어느 집사님 가정에 심방을 하고 점심을 같이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차를 나누면서 집사님이 그런 고백을 했습니다. "목사님, 길지 않은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지금 제가 절실하게 깨닫는 것은 하나님 앞에 두 손 들고 사는 길밖에 없습니다. 모든 것이 잘 준비되고 완벽하게 준비되어 졌는데 그것이 안됩니다. 그런데 이것은 결정적으로 실패할 수 밖에 없고, 무너질 수 밖에 없고, 망할 수 밖에 없는 막다른 인생의 골목에 있는데 거기서 결정적인 승리와 결정적인 축복을 누릴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면 사건이 손바닥 뒤집히듯 너무나도 쉽게 역전됩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님 앞에 항복하고 사는 길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풍랑을 일으킬 수도 있는 분이시며, 풍랑을 잔잔케 할 수도 있는 분이십니다.

이제 우리가 구해야 할 일은 "환경을 잠잠케 해 주시옵소서, 풍랑을 꾸짖어 주십시오"라고 기도할 것이 아니라, "어떤 환경 속에서도 안식할 수 있게 해주시옵소서! 어떤 풍랑 한 가운데서도 평안을 누릴 수 있도록 주여! 제게 믿음을 주시옵소서!" 우리가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2. 꾸짖으시는 예수님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꾸짖으셨다고 했는데 여기 꾸짖는 사건이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 조금 다르게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마태복음은 제자들의 믿음없음을 먼저 꾸짖으시고 그 다음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신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마가복음에서는 먼저 풍랑을 꾸짖으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의 믿음 없음을 나무라시는 것으로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인생의 풍랑을 잠재우기 전에 내 마음의 풍랑을 잠재워야 할 때가 있는 것이고, 다급한 인생의 바람을 끄신 다음에 내 마음의 풍랑을 치료해 주실 때가 있는 거지요. 아무튼 결론은 "믿음의 문제이지, 환경의 문제가 아니다"하는 것입니다. 풍랑이 문제가 아니라 믿음 없음이 문제더란 말입니다.

"꾸짖다"라는 이 단어는 "귀신을 꾸짖어 가라사대 이 더러운 귀신아 나가라" 
귀신을 꾸짖으시되 이때 "꾸짖다"라는 단어와 동일한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인생의 문제는 내 환경속에 있는 것이 아니고 내 생각속에 있는 것입니다. 
기도를 바꿉시다. "환경을 꾸짖어 주세요" 하기전에 "내 믿음 없음을 꾸짖어 주세요"라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믿음 없음을 꾸짖으실 때 사용하시는 단어가 재미있습니다. "믿음이 적은 자들아" 「올리고 피스토이」라고 하는데 양이 적고 크기가 작고 무게가 가볍다는 뜻의 「올리고스」라는 말과 믿음 「피스디스」라는 말이 합쳐서 된 말입니다. 

이 말은 지난 시간 배운 백부장의 믿음, 즉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했다는 말씀과 가나안 여인의 "네 믿음이 크도다"라는 말과 대조되는 말입니다. 이방인의 믿음은 이토록 크고 놀라운데 제자인 너희들의 믿음은 고작 이 정도냐? 「올리고 피스토이」 이런 뜻을 담고 있습니다. 

메리큐스 마네라는 부인이 있습니다. 남편은 사업에 부도를 내고 어디론가 몸을 숨기고 말았습니다. 살림을 다 잃어버리고 알거지가 되어 길거리로 나 앉게 되었습니다. 어린 아들 하나가 문방구에서 연필 하나를 훔치다 들켰습니다. 학교에서 쫓겨났습니다. 더 이상 살고 싶은 마음이 없었습니다. 깨끗이 죽자! 아이들을 재우고 가스를 켰습니다. 가스가 스며 나오는데 정신이 몽롱해져 옵니다. 이웃집에서 찬송소리가 들려왔습니다. 

♪ "내 모든 시험 무거운 짐을 주 예수 앞에 아뢰이면 근심에 쌓인 날 돌아보사 내 근심 모두 맡으시네." 그래 내가 죽을 생각을 하면서 왜 기도할 생각은 못했는고? 아이들을 밖으로 밀어내고 가스를 잠궜습니다. 방 한가운데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리는 데 눈물이 왈칵 쏟아집니다. 용기를 냈습니다. 시골에 내려가 빈 집 하나를 얻어 새 삶을 꾸리기 시작합니다. 훗날 자녀들은 모두 멋지게 성공을 합니다. 그의 자서전적인 글 "근심이여 안녕"이라는 책 마지막 결론에서 그렇게 말합니다. "죽을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자들이여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 있는 용기로 바꾸어 보십시오!" "백 번의 탄식보다 한 번의 기도가 당신에게 기적을 가져다 줄 것이요. 백 번의 절망보다 한 번의 믿음이 당신의 운명을 바꾸어 줄 것이요."


IV. 바람아 잠잠하라

어리석은 사람들은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시련에 부딪힐 때마다, 고난 한 가운데 서 있을 때 마다, 왜 내가 이 어려움을 당해야 하는가? 이유를 캐묻고 다닙니다. 그러나 왜 제자들이 갈릴리 바다 한 가운데서 그와 같은 고생을 해야 했는가? 성경은 침묵하고 있습니다. 그 대신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습니다.

1. "그 시련, 풍랑의 자리에 예수님께서 함께 동행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들이 시련을 당할 때에 고독한 인생길을 걸어 갈 때에 고아와 같이 너희들을 버려 두지 않으신다. 주님은 너희를 혼자 두지 않는다. 늘 동행하신다. 우리 인생 항로에 동행하신다. 당신의 고난의 배 위에 동승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2. "예수님, 내 인생의 선장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와 함께 여행을 하는 인생 바다라 하면 너는 평안할찌어다!" 마지막에 배가 뒤집혀져 죽으면 제자들만 죽습니까? 예수님이 그 안에 함께 계십니다. 예수님은 선장 되십니다. 

어떤 한 소설가가 여객선을 타고 여행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바다 한 가운데서 풍랑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무섭게 바람이 몰아쳐 옵니다.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어 갑판위로 뛰어 올라가 두려움에 떨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린아이 하나가 아무일도 없다는 듯이 깡총깡총 뛰어놀며 재미있게 갑판을 오가지 않겠습니까? 아이의 손을 꼭붙들고, "얘야, 너는 무섭지 않니! 얘야, 너는 저 풍랑이 무섭지 않니?" "아저씨, 제가 지금 선장실에서 나오는 길이예요. 우리 아빠가 선장이예요. 그런데 우리 아빠의 얼굴을 보니 아빠의 얼굴이 편안했어요, 아무일 없을 거예요 아저씨!" 

여러분 두려우십니까? 불안하십니까? 예수님의 얼굴을 보시기를 바랍니다. 
괴로울 때 주님의 얼굴 바라보라. 주님의 얼굴이 평안하시거든 여러분 평안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이 아무 일 없다 말씀하시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3. 예수님, 마침내 풍랑을 꾸짖어 잔잔케 하셨습니다.

파도를 마가복음은 큰 광풍이라고 했고 마태복음은 "바다에 큰 놀이 일으나"라고 했습니다. "큰 놀"을 원문에서는 "세이스모스 메가스"라고 하는 여기 "세이스모스"는 "지진"이라는 뜻입니다. 지진이 일어나고 그 지진으로 말미암아 큰 풍랑이 일어난 것을 요즘말로 "쓰나미"라고 하지요. 쓰나미가 일어난 것입니다. 마태는 이 지진, 쓰나미가 종말의 때에 일어날 것이라고 여러 곳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엄청나게 큰 지진, 엄청나게 큰 광풍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엄청나게 크다"고 하는 단어 "메갈레"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우리가 크다고 할 때, "빅(Big)"이라고 하는 단어를 씁니다. 좀 더 클 때, 영어로 "그레이트(Great)"라고 하는 단어를 씁니다. 그런데 너무나 엄청나게 클 때는 "메가톤(Megation)"이라는 단어를 씁니다. 

오늘 본문에 메가톤이라는 단어가 세 번이나 반복적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큰 광풍이 일어나, 메가톤급 광풍이 일어났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풍랑을 꾸짖으시사 아주 잔잔해졌다. 메갈레라고 하는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메가톤급 고요가 흐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제자들이 심히 두려워했다고 말합니다. 메가톤급 두려움에 사로잡혔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무슨 얘기입니까? 메가톤 광풍을 예수께서 꾸짖으시니 메가톤 고요가 흘렀고 그 엄청난 사건을 보고 제자들은 메가톤 감격, 메가톤급 경외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광풍이 클수록 고요도 클 것입니다.
고난이 클수록 위로도 클 것입니다.
아픔이 클수록 더욱 큰 능력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믿음은 능력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능력입니다.

전쟁의 승패에는 숫자나 장비에 따라서만 결판이 나는 것 아니지요. 뜻밖의 편이 승리 할때가 있는 겁니다. 기드온의 300용사는 미디안의 수십만을 무찔렀습니다. 군대에도 숫자나 장비를 초월하는 "사기"라고 하는게 있습니다. 의사들도 환자의 치료를 위해서는 신념과 의지가 중요하답니다. 


V. 당신에게도

이년전 종합검진에서 보기에도 흉하고 큼지막한 용종 두 개가 저의 식도와 위에서 발견되어졌습니다. 위암으로 발전될 수 있으니 자주 추적 관찰해 보는 것이 좋겠다고 했습니다. 믿어지지가 않아 암진단 전문 한의원을 찾아 검진을 해보았더니 꼭같은 말을 했습니다. 

다시 일년전 꼭같은 병원 종합검진에서도 용종은 그대로 있었습니다. 제가 "이상하네 없어지질 않네"라고 했더니 의사가 "어떻게 하셨는데요?"라고 물었습니다. 다시 제가 하는 말 "기도했지요" 의사는 묘한 웃음으로 나를 보고 비웃었습니다. "더 크지 않고 나빠지지 않으면 다행이고요 수술할 준비도 하셔야 할 겁니다"라고 했습니다. 

일년동안 지속적으로 기도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령했습니다. 식도와 위의 흉한 용종은 사라지고 식도와 위가 모두 건강해지라고요. 다시 일년이 지난 지난 1월말 꼭같은 병원에서 종합검진을 받았습니다. 내시경 결과 그 흉하던 용종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저는 저를 비웃던 의사, 하나님의 능력을 비웃던 의사에게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치료하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풍랑을 잔잔케 하십니다. 
·바람아 잠잠하라.
·풍랑아 멈추어라. 

풍랑을 잠잠케 하신 이 사건이 오늘 이 시간 당신에게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찬송가 중에 이동훈 선생님이 만들고 김활란 박사가 지은 노래 가운데에 그런 노래가 있습니다. 

캄캄한밤 사나운 바람불때 만경창파 망망한 바다에
외로운배 한척이 떠나가니 아 위태하구나 위태하구나

비바람이 무섭게 몰아치고 그놀란물 큰파도 일때에 
저뱃사공 어쩔줄 몰라하니 아 가련하구나 가련하구나

절망중에 그사공 떨면서도 한줄기의 밝은빛 보고서
배안에도 하나님 계심믿고 오 기도올린다 기도올린다

아버지여 이죄인 굽어보사 성난풍랑 잔잔케 하시고
이불쌍한 인생을 살리소서 오 우리하나님 우리하나님

모진바람 또험한 큰물결이 제아무리 성내어 덮쳐도
권능의손 그노를 저으시니 오 맑은바다라 맑은바다라 
(류영모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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