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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의 사명 (눅 13:3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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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사명 (눅 13:31-35)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사는 형태를 따라, 3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1) 되는 대로 사는 사람이다.

아무 생각 없이 살고, 특별한 목적 없이 사는 사람인데, 이런 사람들은 대부분이다.

(2) 자기 이익을 따라 사는 사람이다. 

자기에게 이익이 되면 하고, 자기에게 이익이 되지 않으면 하지 않는, 자기중심적인 사람이다. 이런 사람들도 제법 많다. 

(3) 사명을 따라 사는 사람이다. 

사명에 따라 살다가, 사명에 따라 죽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런데 이 세상에 태어난 모두에게는, 주어진 사명이 있다. 우리는 어떤 사명을 가지고 있고, 어떤 형태의 사람인가요?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을 향해 부지런히 가고 계셨다. 그런데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어떤 바리새인들이, 지금 헤롯왕이 당신을 죽이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말해 주었다(31). 얼마나 고마운 전갈인가? 그런데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32) “너희는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 오늘과 내일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낫게 하다가, 제 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나의 앞에 죽음이 기다린다고 해도, 사명의 길이라면 가겠다는 말씀이다. 이처럼 예수님은 되는 대로 살지 않고, 자기 이익을 위해 살지 않고, 사명을 따라 사셨다.

1. 사명은 무엇인가? 

사명은 영어로 mission이라 한다. 이 말은 미씨오(missio)라는 라틴어에서 왔다. missio는 보낸다는 뜻이다. 사명은 나를 보내신, 하나님의 위대한 목적이다. 나의 생애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사명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거룩한 임무가 사명이다. 우리가 원하고 꿈꾸는 이상과 비전이 아니다.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거룩한 소원이 사명이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발견하여, 그 사명을 이루기 위해 살아야 한다.

사람이 가장 위대한 순간이 언제인가? 무엇을 이루었을 때가 아니다. 자기 사명을 발견하는 순간이다. 카알 힐티(Carl Hilty)는 “잠 못 이루는 밤을 위하여”라는 책에서, 행복의 원천을 이렇게 말했다.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날은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발견하는 날이다.󰡓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22세 때, 그의 일기에 이렇게 써놓았다. “온 세계가 무너진다 해도, 내가 꽉 붙들고 놓을 수 없는 이념, 내가 그것을 위해서 살고, 그것을 위해서 죽을 수 있는 사명을 나는 찾아야 한다.”

아인슈타인은 이렇게 말했다. “성공하는 인간이 되기보다, 가치 있는 인간이 되기 위해서, 우리는 사명을 깨달아야 한다.” 사람은 사명으로 산다. 사람은 사명이 살아있는 한 죽지 않는다. 내가 아직 살아있다는 말은, 사명이 살아있다는 말이다. 

나를 보내신 하나님의 위대한 목적을 깨달은 사람들은, 존귀한 삶을 살 수 있지만, 깨닫지 못한 사람은, 비천한 삶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과, 거룩한 소원이 무엇인지 발견한 사람은, 위대한 생애를 살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초라한 인생을 살 수 밖에 없다. 

한 때 독일이 낳은 세계적인 실존주의 철학자인 칼. 야스퍼스는 유대인 아내를 얻었다. 그런데 1933년 히틀러가 집권하자마자, 유대인들을 박해하기 시작하였고, 야스퍼스에겐 독일의 대학교수로 계속 일하기를 원하면, 유대인 아내를 포기하라고 강요하였다.

이때 야스퍼스는, 나의 아내는 나의 이상이자 철학이라고 하면서, 교수직을 헌신짝처럼 포기하고 아내를 택하였다. 그 이후 독일이 혼란에 빠지자, 스위스의 뛰어난 교수들이 야스퍼스를 피신시키기 위해서, 제네바에 교수자리를 마련해 좋고, 야스퍼스를 초청하였다.

그런데 독일의 압제자들은, 야스퍼스는 출국할 수 있으나, 유대인 아내는 출국할 수 없다고 하자 야스퍼스는 유대인 아내를 보호하고 지켜주겠다며, 출국을 기쁘게 포기하였다. 야스퍼스의 마음속에 ‘어떤 시련과 역경이 온다고 해도, 나는 내 아내를 지켜야 한다.’는 사명 때문이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발견해야 한다. 하루라도 빨리 발견해야, 멋있는 삶, 후회 없는 삶을 살 수 있다. 사명을 빨리 발견하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인생이 길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오직, 단 한 번 밖에 살 수 없는 인생이기에, 보람 있게 살아야 한다.

내 멋대로 살다가 죽으면, 보람되지 못하다. 사명을 따라 살아야만, 보람된 인생이 된다. 사명을 따라 산다는 말은, 이 세상에서 성공한다는 말이 아니다. 사명을 따라 살아도, 출세를 보장해 주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명보다 돈과 명예를 위해 산다.

하나님을 위해 산다고 하면서도, 돈 때문에 하나님을 믿고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돈이 되는 일이라면, 어떤 일이든지 마다하지 않는다. 돈은 세상을 살아가는데,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돈을 위해 살지 마시기 바란다.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설령 돈을 많이 벌지 못해도,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기쁘게 감당하며 사는 인생이 되어야 한다. 목회를 하는 것만이, 하나님의 사명이 아니다. 목사와 전도사, 선교사만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특별히 선택된 사람들만, 사명을 주시지 않았다. 우리 모두에게 사명을 주셨다. 교사로서 학생을 가르치는 것도 사명이고, 의사로서 환자를 치료하는 것도,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이다. 나라를 지키는 군인도 사명이고, 음악을 통해 사람들에게 감동과 기쁨을 주는 것도 하나님의 사명이다.

엄마가 밥을 하며, 아이들을 잘 양육함도 사명이다. 아빠가 가정을 잘 지키고, 다스리는 일도 사명이다. 세상에서 성공하고 출세하고, 돈 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선교사가 되고, 국회의원이 되고, 돈 많이 사장이 되고, 병을 고쳐주는 의사가 되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우리의 사명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세상을 아름답게 변화시키는 사명이다. 세상에 영향을 주고, 세상을 변화시킬 사명이 있다. 예수님은 오늘과 내일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낫게 하다가, 제3일에는 완전히 이루리라고 하셨다. 예수님의 사명 방향을 말씀한다.

예수님은 말씀을 가르치면서, 치유목회를 하셨다. 병든 자들을 고쳐주셨다. 귀신들린 자들을 온전하게 하셨다. 그러나 이것은 구원의 완성은 아니다.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물론 예수님의 치유목회를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죄를 용서받고 구원하는 대속의 목회다. 이것이 구원의 길을 완성하는 길이다. 실제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운명하시면서 “다 이루었다”고 하셨다. 세상 사람들은 거리끼는 것이지만, 하나님은 십자가를 가장 확실한 구원의 길로 정하셨다.


2. 그러면 예수님의 사역은 무엇인가?(33)

“…내가 가야할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 예수님께서는 다른 곳에서 죽지 않고, 예루살렘에서 죽기 위하여 올라가야 한다는 말씀이다.

(마20: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예수님은 자신이 이 땅에 오신 사명, 대속물로 생명을 주려고 오셨다. 왜 대속물로 주셨나? 

인간은 아담이 지은 죄, 원죄를 타고 태어났다. 우리 인간 속에는 유전되는 죄가 있다. 하나님께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으면, 반드시 죽으리라”(창2:17)하셨다. 그런데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비극은 시작되었다.

하나님 말씀에 인간이 불순종함으로 죄를 범했고, 그 결과 저주가 임했다. 심판받게 되고, 사망이 임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났다. 하나님과 단절되고 말았다. 잃어버린 영혼이, 파괴된 영혼, 멸망당할 영혼이 되고 말았다.

아담과 하와가 뱀의 유혹을 받아 죄를 범했을 때, 하나님께서 그 뱀을 저주하신다. 그리고 구원의 복음을 제시하신다. 장차 여인의 후손이 아담과 하와를 죄짓게 만든, 사탄의 머리를 친다는 복음을 제시했다. 사탄 때문에 아담이 죄를 범했고, 아담의 범죄로 사망이 찾아와, 잃어버린 영혼이 되었다.

그래서 원수 사탄의 머리를 치기 위해, 메시아를 보내신다는 말씀이다. (창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이것이 ‘원(原)복음’이다. 근본이 되는 복음이다.

마귀가 예수님의 발꿈치를 상하게 하는 사건이, 십자가에서 예수님을 죽인 사건이다. 예수님께서 마귀의 머리를 상하게 하신 사건은, 십자가에서 피 흘리시고, 죽음에서 부활하신 사건이다. 십자가를 통해서, 예수님은 마귀의 일을 멸하셨다(요일3:8).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는, 죄를 해결해야 한다. 그런데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는 일은, 오직 피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죄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레17:11).

죄는 반드시 누군가 대신 값을 지불해야 한다. 죄 값은 사망이기에, 죄 값을 치르기 위해서는 누군가 대신 죽어야 한다. 그러나 아무나 죄 값을 치를 수 없다. 죄인은 죄 값을 지불할 자격이 없다. 의인이 죽어야만 한다. 의인이 되기 위해서는, 태어날 때부터 죄가 없어야만 한다.

그래서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되셨다. 남자와 여자 사이에서 태어난 사람은, 누구나 원죄를 품고 태어난 죄인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성령으로 잉태되었고, 죄가 없이 태어나셨다. 그래서 이 땅에 예수님이 오셔서, 보배로운 피를 흘리셨다. 어린 양되신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구원한다. 

세상에 태어나는 자 중에, 죽기 위하여 태어나는 자가 어디에 있으며, 저주받기 위하여 태어나는 자가 어디에 있는가? 그러나 주님은 죽기 위하여 태어나셨으니, 이는 하나님의 뜻대로 따르심이다. 인간의 죄로 주님을 죽게 했으니 불행하게 되고, 예수님의 죽음으로 영생을 얻었다면 행복하게 된다.

그리스도의 죽음의 은혜를 무시하고, 피흘림을 오히려 조롱하며 핍박하는 자들이 있다면, 그들은 영원히 희망이 없는 자들이다. 왜냐하면 성도들을 핍박하거나, 예수님을 핍박함으로써, 그 보복으로 받는 저주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인하여 주어지는, 선물을 거절했기 때문이다.

이단들은 예수님의 피를 부정한다. 죽기 위하여 오신 예수님을 실패자라고 한다. 예수님의 피를 헛된 것으로, 부족한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무엇인가 예수님의 피에 첨가해야, 구원을 이룰 수 있다고 한다. 천주교도 그렇다. 그러나 모나리자 상에 눈썹이 없다고, 눈썹을 그리면 망치게 된다.

짐승의 피를 문설주에 발라도 ‘그 피를 볼 때에 내가 넘어 가리라’(출12:13)고 하셨다. 하물며 이제 독생자의 피를 보실 때, 그 구원의 힘이 어떠하겠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으로 지음 받은 것을 감사하고, 그리스도의 약속을 받음으로 감사하고, 그의 피가 우리 영혼을 적셔 주심을 감사하자.

  
3. 사명은 꼭 이루어져야만 한다(32-33).

“이르시되 너희는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 오늘과 내일은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고치다가, 제 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하라,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여기서 하리니(δεί 데이)는, 해야만 한다는 필연적인 뜻으로, 예수님의 구속 사역이 꼭 완성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헤롯의 협박에 못 이겨 도망가는 것이 아니라, 유대를 향한 자신의 여행을 계속하실 것이라는 의지의 표현이다. 예수님은 헤롯을 두려워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십자가의 길이 자신이 가야할 길임을 알고 계셨다. 그래서 쉬운 길을 택하라는 마귀의 유혹을 물리쳤다. 정치적인 메시아가 되면, 쉽게 인기를 끌 수 있다. 세상에서 부귀영화도 누릴 수 있다. 그러나 주님은 그 쉽고 편한 길을 마다하고, 십자가의 길을 택하셨다.
  
경제적인 메시아가 되는 것도, 쉽고 편한 길이다. 인기를 얻기 쉬운 길이다. 신비적 메시아가 되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모든 쉬운 길들을 버리고, 십자가의 길을 택하셨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고통을 모르면서, 십자가의 길을 택하신 것이 아니다.  

그때도 십자가는 가장 고통스럽고, 수치스러운 형벌이었다. 가장 저주스러운 형벌이었다. 예수님도 잘 알고 계셨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할 수만 있으면 피하고 싶다고 기도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이라면, 십자가를 지겠다고 기도하셨다.

사명을 위하여 자신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시는, 예수님의 모습과, 우리와 얼마나 대조되는지 보라. 예수님은 비록 무수한 어려움이 앞길을 진치고 있어도, 내가 가야 할 길을 가겠다는, 굳은 의지가 표현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작은 일에도 흔들린다. 

예수님은 헤롯에 대해, ‘저 여우’라고 했다. 여우는 간교하고 교활한 짐승의 상징이다. 그래서 고대 라비들의 문헌에도, 여우를 간교함의 대명사로 기록했다. 사실 헤롯은 교활하고 간사한 사람이었다. 그는 에돔 사람이면서, 사마리아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유대교인이라고 고백하면서도, 이교도의 생활을 하였다. 로마 황제에게 가서, 온갖 아첨과 아부를 떨어 정권을 잡았고, 용병의 후원으로 통치하는 자였다. 춤추는 탕녀를 즐겁게 하기 위하여, 훌륭한 선지자 침례요한을 죽였던 자다. 그뿐 아니라 동생의 아내를 꾀어, 자기 아내를 삼은 못된 인간이다. 

헤롯이 이런 인물이기에, “생각해줘서 고맙다”고 하며, 조용히 넘어갈 법도 한데, 예수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으셨다. 헤롯에게 일부러 빌미를 제공하는 말씀을 하셨다. 이는 헤롯이 그렇게 나온다고 해도, 나는 헤롯의 협박에 굴하지 않고, 담대히 내 길을 가겠다는, 주님의 엄숙한 선언이다. 

사명을 깨달은 사람은,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는다. 사명자의 앞에도 위험은 있다. 위협은 도사리고 있다. 그러나 사명자는 위험으로 인해, 멈춰 서지 않는다. 위협으로 인해, 중도에 포기하지 않는다. 비전이 사명을 이끌고 가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자신이 예루살렘에서, 죽임 당할 것을 아셨다. (33下)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 (34-35)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너희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찬송하리로다 할 때까지는,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그렇지만 예수님은 자기 사명의 길을, 멈추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그 사명은, 자신이 평생 동안 꿈꾸어 왔던 사명이고, 아버지께로부터 부여받은, 평생사명이었기 때문이다. 우리 주님은 십자가를 마지못해 지시지 않았다. 그 일은 자신이 해야 할 것으로 확신하셨기에, 자발적으로 순종하셨다.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우리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길이 아니면 가지 마라.” 바른 길로 가라는 말이다. 제대로 된 길로 가라는 말이다. 길에는 바른 길, 제대로 된 길이 있고, 잘못된 길, 가서는 안 되는 길이 있다. 사는 길이 있고, 죽는 길이 있다. 축복의 길이 있고, 저주의 길이 있다.

행복의 길이 있고, 불행의 길이 있다. 우리는 어떤 길이든, 선택할 권리가 있다. 그러나 그 길을 선택한 결과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한다. 그 길의 종착점에 이르러서는, 후회해봤자 소용없다. 많은 사람들이 길을 잘못 들어서, 고생하고 허송세월을 보내고 있다. 

신앙의 위인들은, 길을 잘 간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 자기들이 가는 길에서, 최선을 다했다. 비록 그 길이 힘들고 어렵다고 하여도, 주저앉지 않았던 사람들이다. 욥은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23:10). 

바울은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24). 우리는 길에서 머무르지 말고, 그 길을 계속 가야한다. 

우리가 가는 길은 좁은 길이기에, 세상에 한 눈 팔 수 없다. 자칫 한 눈 팔다, 천리 낭떠러지 길로 떨어질 수 있다. 오직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만 바라보며 걸어야 한다. 예수님이 먼저 가신 길을 따라가야 한다. 


결론이다. 예수님은 헤롯이 자기를 죽이려는 음모를 알고도, “오늘과 내일 모레는 내가 할 길을 가야 하리니”라고 말씀하신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주님의 일을 위해, 목에 칼이 들어온다 할지라도 계속 전진할 수 있는가?

사명은 우리를 보내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임무이다. 위대한 목적이다. 사명을 깨달을 때 행복하다. 사명은 꼭 이루어져야 한다. 사명자 앞에도 위험은 있다. 사명을 깨달은 사람은,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는다. 나의 사명은 무엇인가? 죄에 빠진 영혼들을 구원하고, 풍성한 삶을 살게 하자.

우리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친히 자기 생명을 십자가에 내 놓으신, 예수님의 크신 사랑과 은혜를 다시 한 번 감격하는 시간이 되시기 바란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가는 우리 역시 사람을 살리는 일을 위하여, 죽는 일도 각오하는 자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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