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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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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1) ▣ 본문 : 갈라디아서 5장 1절, 13절 ▣ 제목 :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1) 우리 믿는 사람은 예수님을 구주로 믿기 전에는 자기 속에 사람이 하나였지마는, 예수님을 구주로 믿은 후에는 자기 속에 새로이 한 사람이 생겨져서 사람이 둘이 되었는데, 예수님을 구주로 믿기 전에 자기 속에 있던 사람을 옛 사람이라 하고, 믿은 후에 새로이 생겨진 사람을 새 사람이라, 속 사람이라고 하는데, 에베소서 4장 22--24절에 보면, 옛 사람을 가리켜서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셨고 새 사람을 가리켜서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사람이라고 말씀했는데 우리 믿는 사람 속에는 위에 말한 대로 두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새 사람은 창세기 1장 26--27절에 말씀하신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영(靈)을 말하는데, 영은 사람에게 있어서 마음과 몸을 주관하고 다스리고 통솔하는 주격위치(主格位置:supervisory position)에 있고, 마음과 몸은 영에게 다스림을 받는 소유격 위치(所有格 位置:possessive position)에 있는데, 마음과 몸이 마귀의 유혹을 받아서 주격위치에 있는 영을 배반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거역하는 죄를 범하므로 하나님에게 정죄를 받아서 영과 육(肉:마음과 몸을 합하여 육이라고 함)이 한꺼번에 죽었습니다. 그런데 영은 육을 단속하지 못하고, 관리하지 못한 주격책임에서 정죄를 받아서 죽었고, 마음과 몸은 죄를 범한 당사자로서 정죄를 받아서 죽었는데, 죽었다고 하는 말은생명이 되신 하나님에게서 끊어져서 생명 적인 작용과 활동을 전혀 하지 못하기를 시체처럼 하지 못한다라고 하는 말인데 마음과 몸은 자기네의 주격인 영을 죽게 만들어 놓은 마귀를 원수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히려 주인으로 맞이하여 그 명령에 순종하고 있는데, 원수인 마귀가 나타난 것은 남아있는 마음과 몸도 죽이기 위함인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과 몸은 그것을 전혀 모르고 마귀의 시키는 대로 순종하니까, 마귀는 가짜주인인데, 진짜 주인처럼 행세를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마음과 몸의 진짜 주인이요, 사람에게 있어서 주격위치에 있는 영을 살려서, 영이 다시 마음과 몸의 주격으로서, 주인으로서 마음과 몸을 주관하고 다스리고 통솔함으로 영생의 구원을 이루도록 하기 위하여 영에게 예수의 십자가의 대속의 공로를 입혀서 진리와 성령의 역사로 다시 살리셨는데, 이렇게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와 진리와 성령으로 다시 살아난 영을 가리켜서 새 사람이라, 속 사람이라, 중생 된 영이라, 거듭난 영이라고 이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믿는 사람이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자기에게 있어서 주격인 영은 죽어 있었고, 영을 죽게 만든 원수인 마귀에게 자기의 마음과 몸이 지배를 받고 살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마귀가 원죄(原罪:original sin)와 본죄(本罪:actual sin)를 끄나풀로 삼아 그것을 타고 우리 믿는 사람 속에 들어와서 가짜 주인노릇을 할 때에 마음과 몸이 거기에 복종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 믿는 사람의 죽은 영에게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의 공로를 입혀주셔서 사죄(赦罪:죄를 사하여 주심:Remission)와 칭의(稱義:의롭다고 하심:Justification)와 화목(和睦: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심:Reconciliation)을 받게 하시고 진리와 성령의 역사로 다시 살려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 믿는 사람 속에서 마음과 몸을 지배하던 가짜 주인, 마귀를 쫓아 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입은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는 마귀가 주인 노릇을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마귀가 사람 속에 들어가서 주인 행세를 하여 작용하고 활동함으로 말미암아 생겨진 사람이 있으니, 그 사람을 가리켜서 옛 사람이라고 말하는데, 이 옛 사람의 구성요소(構成要素:얽어서 이루는 요소:element of composition)는 악령과 악성 (惡性:self-centered nature)과 악습(惡習:self-centered habit)인데, 악령과 악성과 악습으로 되어 있는 이것을 사람이라고 말한 것은 인격체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요, 옛 사람이라고 말한 것은 영이 살아나기 전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조금 전에 우리 믿는 사람 속에는 새로이 생겨진 새 사람이 있다고 말씀했는데, 없었던 사람이 새로이 생겨졌다고 하는 말이 아니고, 없는 것과 같이 완전히 죽어있었는데,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의 공로로 말미암아 진리와 성령의 역사로 새로이 생겨나는 것처럼 다시 살아났기 때문에 새로이 생겨난 새 사람이라 고 말한 것입니다. 그런데 마귀가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와 진리와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우리 믿는 사람 속에서 쫓겨났지만, 우리 믿는 사람 속에 마귀가 만들어 놓은 옛 사람이 있고, 또 마음과 몸이 마귀를 완전히 배척하지 아니하기 때문에, 기회가 생기면 옛 사람을 통해서 우리 믿는 사람 속에 들어오려고 쉬지 않고 노리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전쟁이 끝난 후에 패잔병(敗殘兵:싸움에서 패한 나머지의 병사:remnants of a defeated army)들이 여기 저기에 불쑥 불쑥(갑자기 쑥 내미는 모양:all of a sudden) 나타나서 사회를 어지럽히는 것처럼, 마귀가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로 말미암아 우리 믿는 사람 속에서 모든 권세를 빼앗기고 쫓겨났지만 옛 사람이 있고, 또 마음과 몸은 아직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마귀는 옛 사람을 줄로 삼고서 마음과 몸으로 하여금 죄를 범하게 하려고 쉬지 않고 기회를 노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믿는 사람 안에 있는 새 사람과 옛 사람이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고, 언제든지 함께 있기 때문에, 마음과 몸이 조금만 정신을 차리지 아니하면 옛 사람을 영접하여 옛 사람의 소원에 따라서 옛 사람의 시키는 대로 하나님의 계명을 거역하는 멸망의 행동을 하게 됩니다. 또 새 사람과 옛 사람이 굉장히 빨리 바꾸어집니다. 언제 바꾸어 졌는지 모르게 바꾸어지고, 또 언제 바꾸어 졌는지 모르게 바꾸어지기 때문에, 잘못하면 옛 사람이 주동(主動:어떠한 일에 주장이 되어 하는 행동:prime mover)되어 안 믿는 사람과 같은 말과 행동을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믿는 사람이 예수님을 믿은 후에는 자기 속에 새 사람, 옛 사람, 이렇게 사람이 둘이요, 또 사람이 둘이기 때문에 소원도 둘인데, 하나는 새 사람의 소원이요 또 하나는 옛 사람의 소원이요, 그런데 소원이 둘이기 때문에 새 사람의 소원대로 행하는 자유와 옛 사람의 소원대로 행하는 자유가 있는데, 자유는 자기 마음대로 소원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믿는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인 신구약 성경을 읽든지, 듣든지, 배우든지, 또 성경말씀을 명상하든지, 어려운 형편을 만나게 되면, 새 사람이 주장 권을 가지고서 마음과 몸을 주관하고 통솔하게 되기 때문에, 마음과 몸이 새 사람의 소원을 가지고서 그 소원대로 살려고 노력하는데, 우리 믿는 사람은 그런 경우를 많이 경험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다가 진리도 천국도 생각하지 아니하고 이 세상만 보고 위하여 살고, 이 세상에서만 좋고 유익한 말을 하는 사람을 만나서 몇 시간동안 이야기를 하고 나면 소원이 당장에 바꾸어지는데, 조금 전까지는 소원이 저렇다가 지금에는 소원이 정반대로 바꾸어 져서 소원이 이렇게 되어지는 그런 경우도 많이 경험하였을 것입니다. 자기가 하나님에게 예배하기 위해서 예배당에 출석하여 기도하고 찬송하고 설교를 들을 때에 은혜를 받은 데에서 소원이 명확하게 새로워지고, 어려움이 있어도 그 소원대로 행하겠다고 결심도 합니다. 그런데 예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다가 어떤 사람을 만나고, 어떤 사건이나 사물을 만나게 되면 예배시간에 은혜를 받을 때에 가졌던 소원은 온데 간데도 없이 (갑자기 어디로 갔는지 찾을 수가 없이:out of sight) 사라지고, 엉뚱하게 다른 소원이 생겨지는 그런 경우도 경험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믿는 사람은, 자기 속에 두 사람이 있는데, 하나는 예수님의 대속과, 진리와, 성령 역사로 다시 살아난 새 사람 그리고 악령과 악성과 악습으로 뭉쳐진 옛 사람, 이렇게 옛 사람, 새 사람, 두 사람이 있습니다. 또 이렇게 두 사람이 있기 때문에 소원도 두 가지요, 자유도 두 가지인데, 우리 믿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새 사람의 소원과 자유, 옛 사람의 소원과 자유, 이것이 절반씩 섞어서 사는 사람도 있고, 옛 사람과 소원과 자유로만 사는 사람도 있고, 새 사람의 소원과 자유로만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은혜의 장소에 가면 새 사람의 소원이 생겨졌다가 그 장소를 떠나면 그 소원이 없어지고 옛 사람의 소원이 일어나고, 이 소원을 이루는 옛 사람의 자유로 사는 그런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또 옛 사람의 소원은 마귀의 소원이요, 죄악의 소원이요, 타락한 원죄의 소원이요, 죄악의 습성의 소원이요, 멸망의 소원임을 알고서 이 소원이 마음속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물리치고, 일어나지 못하도록 단속하고, 새 사람의 소원을 가지고, 이 소원을 이루는 새 사람의 자유로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자기의 마음에 무슨 소원이 생기면 그것을 구별하여 이 소원은 나쁜 소원이다. 옛 사람의 소원이다. 옛 사람이 내 마음과 몸을 주장해서 일으킨 소원이다 라고, 이렇게 판정하여 옛 사람의 소원을 버리고, 새 사람을 일깨워서 새 사람의 소원을 가지고 새 사람의 소원대로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믿는 사람 속에는 새 사람과 옛 사람, 이렇게 사람이 둘이 있는데,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자기 마음에서 나쁜 생각이 나오면 내 안에서 이런 나쁜 생각이 나오는 구나 이렇게만 생각하고, 자기 안에 있는 두 사람을 생각하지 아니하기 때문에 믿는 생활을 하는 것 같지마는, 거기에 속아서 자기의 구원을 망치는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은 자기 속에 두 사람이 있는데, 하나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와 진리와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죽었던데 에서 다시 살아난 영(靈), 곧 중생 된 영(重生된靈:거듭난 영:regenerate spirit)인데, 이 영은 마음과 몸의 진짜 주인이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하나님의 모형존재로서 새 사람이요, 또 하나는 새 사람과 항상 대립이 되고, 마귀의 부하로서 우리 믿는 사람의 믿음과 구원을 망쳐서 영원히 불행하게 하는, 악령과 악성과 악습으로 되어 있는 옛 사람인데, 우리 믿는 사람 속에는 이렇게 두 가지 사람이 있음을 명심해서, 자기가 무슨 생각을 가질 때에나, 무슨 말을 할 때에나, 무슨 행동을 할 때에, 그것이 자기 안에 있는 어떤 사람에게서 나왔는지 거기에 대하여 구별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대속을 입고 진리와 성령으로 중생 되어 영생하는 하나님의 자녀요, 천국의 시민이요, 사죄와 칭의와 새 생명을 받은 새 사람에게서 나온 것인지, 그렇지 아니하면 악령과 악성과 악습이 뭉쳐서 된 옛 사람에게서 나온 것인지 거기에 대하여 구별해야 합니다. 자기 속에 있는 어떤 사람에게서 나왔는지, 먼저 사람을 구별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가 무슨 생각을 가지거나, 무엇을 소원하거나 무슨 말을 하거나, 무슨 행동을 할 때에, 무엇이 주체가 되어 가지고 하는 것인지, 새 사람이 주체가 되어서 하는 것인지, 옛 사람이 주체가 되어서 하는 것인지 주체를 구별해야 합니다. 그런데 자기 속에 있는 사람을 구별하여 보면, 주체를 구별하여 보면 내가 이 생각을 가지는 것, 내가 이 말을 하는 것, 내가 이 행동을 하는 것의 주체가 새 사람이 아니고, 옛 사람이구나, 옛 사람이 아니고 새 사람이구나 고 하는 이것을 똑똑히 구별하여 알 수가 있습니다. 구별하지 않기 때문에 모르는 것이지, 구별해 보면 어느 것이 주체인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믿는 사람은 자기 속에 언제나 두 사람이 있다고 하는 이 사실을 명심하고,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간에 새 사람과 옛 사람을 구별해야 합니다. 내가 지금 이 생각을 가지고, 이 소원을 가지고, 이 말을 하고, 이 행동을 하는 것은 어느 사람이 주체가 되어서 하는 것인지 그것을 분별하여 생각하고, 소원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은 잘난 사람이요, 영원히 복있는 사람이요, 지혜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천하를 얻는 것보다 무한히 큰 것인데, 그것은 돈을 주고 사는 것도 아닙니다. 몇 십 년 동안 머리를 동여매고 학비를 내어가면서 공부해야 되는 것도 아닙니다. 높은 지위에 올라간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닙니다. 강한 권세를 가진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닙니다. 사업을 크게 한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닙니다. 출세를 한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닙니다. 천하에 있는 모든 지식을 통달(通達:숙달하여 막힘이 없음:thorough knowledge)해도 새 사람과 옛 사람을 분별하지 못하고, 자기를 영원히 망치고 불행하게 하는 옛 사람의 주장대로 따른다고 하면 통달한 그 지식이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을 영원히 망치고 불행하게 하는데 에만 쓰여 지지,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주는 것은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돈도 그러하고 지위도 그러하고, 권세도 그러합니다. 자기 속에 있는 새 사람과 옛 사람을 분별하여,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을 망치고 불행하게 하는 옛 사람을 꺾어서 쫓아내고,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와 진리와 성령의 역사로 중생된 새 사람은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을 영원히 복되게 하는 사람이요, 영생을 가진 사람이요 사죄와 칭의를 가진 사람이요, 하나님으로 더불어 하나가 된 사람이요,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인데, 이 사람은 천하보다, 우주보다 가치가 있고 큰 사람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은 자기 속에 있는 이 두 사람을 구별해야 합니다. 자기 속에 있는 새 사람이 주체가 되어서 마음을 주관하고 몸을 주관하고, 몸밖에 있는 사물을 주관하게 하는 사람은 우주보다 무한히 가치 있고 존귀한 사람입니다. 왜 그런고 하니 이 우주는 이 사람의 소유물이 되고, 이 사람은 하나님의 대리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대속과 진리와 성령으로 중생된 새 사람은 영생을 가진 사람이요, 사죄와 칭의를 받은 사람이요,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 있는 사람이요, 이 우주보다 무한히 크고 존귀하고 가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범사에 자기 속에 있는 두 사람, 새 사람과 옛 사람을 구별하는 노력을 해야 하고, 또 구별해서 생각하고 소원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이 복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구별하지 아니하고, 마구잡이로 사는 사람은, 하나님에게 택함을 받은 사람으로서 영생하는 생명을 얻었지마는, 이 사람의 행동은 택함을 받지 못한 사람과 똑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믿는 사람이 하나님에게 택함을 받고 예수님의 대속공로와 진리와 성령 역사로 중생 되어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다고 해도, 이름만 믿는 사람이요 생각과 행동이 택함을 받지 못한 안 믿는 사람과 같은 것을 가리켜서 잔다고 말씀하셨고, 그런 사람에게 깨어 근신하라고 말씀하셨는데, 우리 믿는 사람은 자기 속에 두 사람이 있다고 하는 이 사실을 확신하고, 자기의 생각이나 소원이나 비판과 평가나 말이나 행동에 있어서 그 주체가 어떤 것인지, 그것을 구별해야 하는데 그것을 구별하지 아니하고, 자기 속에서 발생한 소원만 이루어 보겠다고 날뛰는 자는, 일생동안 신앙생활을 한다고 해도, 천하 사람들이 인정한다고 해도 풀과 나무와 짚으로 지은 집과 같은 것으로서 하나님의 심판으로 날아가고 맙니다. 그런데 새 사람과 옛 사람과 구별하지 아니하고, 자기 속에서 일어난 소원만 이루어 보겠다고 하는 그런 종류의 신앙생활을 세상이 알아줍니다. 타락한 신자들이 알아줍니다. 속화된 신자들이 알아주는데, 바로 믿는 신자의 숫자보다 속화된 신자의 숫자가 더 많고, 속화된 신자보다 안 믿는 사람의 숫자가 다 많은 것입니다. 오늘에는 바로 믿는 신자는 얼마 되지 아니하고, 속화된 신자가 많을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했습니다. 그런데 속화된 신자들이 인정하고, 세상이 인정하여, 인정하고 찬성하는 숫자가 아무리 많아도, 그것은 가치가 얼마 되지 아니합니다. 가치가 너무나 작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찬성하시는 것이라야 가치가 큰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알지 못하심이 없고 모든 것을 다 아시고, 능치 못하심이 없고 모든 것을 다 하시는 전지전능(全知全能:omniscience and omnipotence)하신 하나님께서 이것은 잘 되었다고 인정하시고 찬성하시는 것이라야 가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아니하시는데, 천하가 인정한다고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믿는 사람은 자기가 어떻게 모든 일에 조심하고 의(義)로운 일을 하고, 복음운동을 크게 하고, 헌신을 한다고 해도, 그것을 하는 주체를 구별하지 못하고 잊어버렸다고 하면 그 사람은 옛 사람이 새 사람처럼, 예수 믿는 것처럼 하여, 예수를 잘 믿는 사람을 미혹하여, 자기처럼 거짓되게 믿도록 만들기 위해서, 마귀가 보낸 간첩과 같은 사람이요, 인본주의와 세상본위의 사람이요, 모래 위에 집을 짓는사람과 같은 사람이요 풀과 나무와 짚으로 집을 짓는 사람과 같은 사람이기 때문에 아무런 결실이 없는 허무한 생애로 끝을 마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믿는 사람은 먼저 자기 속에 있는 새 사람과 옛 사람을 구별하는데 에 힘써야 합니다.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와 진리와 성령으로 중생 되어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사람이라고 하면, 어떤 사람이든지 그 사람 속에 새 사람과 옛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로 말미암아 진리와 성령의 역사로 다시 살아난, 거듭난, 중생한 새 사람이 있고, 악령과 악성과 악습으로 되어있는 옛 사람이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소원을 구별하는데 에 하는데 에 힘써야 합니다. 새 사람이 주체가 되어 가지고 일으킨 소원이 있고, 옛 사람이 주체가 되어 가지고 일으킨 소원이 있기 때문에, 소원을 구별하는데 에 힘써야 합니다. 소원을 일으킨 주체가 둘이라는 사실을 모르면 일생의 생애가 헛되게 됩니다. 믿는 다고 하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자기 속에 새 사람이 있고, 옛 사람이 있다 고하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래서 자기 속에서 무슨 소원이 생기면, 그 소원은 자기 소원인줄 알고, 또 그 소원이 이루어지면 자기에게 유익 된 줄 알고, 무슨 소원이든지 자기의 마음속에서 생겨지면, 그 소원을 이루어 보겠다고 전력을 기울이는데, 그것은 너무나 철없는 행동이요, 미련한 행동이요, 어처구니가 없는 행동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믿는 사람은 자기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소원을 이루어 보겠다고 애를 쓰기 전에 소원을 선별(選別:가려서 구별함:selection)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그 소원이 옛 사람이 주체가 되어서 일으킨 소원인지, 새 사람이 주체가 되어서 일으킨 소원인지 거기에 대하여 구별해야 합니다. 그런데 거기에 대하여 구별하는 사람이 많지 못합니다. 그러면 이 소원을 구별하려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나님께서 우리 믿는 사람에게 주신 신구약 성경을 가지고 심사하고 구별해야 합니다. 신구약 성경을 가지고 마음속에서 일어난 소원이 새 사람에게서 나온 것인지, 옛 사람에게서 나온 것인지, 심사하고 진찰하고 구별해야 합니다. 그리고 신구약 성경을 가지고 심사하고 구별해도 새 사람에게서 나온 소원인지, 옛 사람에게서 나온 소원이지, 명확하게 구별되지 아니하면, 이제는 범위를 넓혀서 내가 죽으면 이 소원은 어떻게 되겠나, 내가 부활하여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가면 어떻게 되겠나, 내가 영원무궁한 세계에 가면 이 소원은 어떻게 되겠나, 나는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로 영원한 멸망에서 구원을 받은 사람으로서 이 소원을 가지면 어떻게 되겠나 라고 이렇게 범위를 넓혀서 심사하고 구별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새 사람이 주체가 되어서 일으킨 소원인지, 옛 사람이 주체가 되어서 일으킨 소원인지, 그것이 대개는 구별이 되는데, 하나님의 소원이면 새 사람의 소원이요, 하나님의 소원이 아니면 옛 사람의 소원이요, 마귀의 소원이요, 원죄의 소원입니다. 원죄는 악이요, 악은 자기나 피조물 중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믿는 사람은 자기 속에 있는 사람을 구별하고, 소원을 구별하여 한번으로 끝나고, 두 번 거듭이 없는 귀중한 인생 일생을 헛되게 살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복 있는 생애요, 지혜로운 생애인 것입니다. -----아멘-----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 (1) 본 문 : 갈라디아서 5장 13--26절 제 목 :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 (1) 오늘 이 시간에는 본문에 기록되어 있는 말씀을 중심으로 해서 간단하게 세 가지를 증거코자 하는데, 첫째로는 우리 믿는 성도의 자유에 관한 것이요, 둘째로는 우리 믿는 성도의 진실한 생활에 관한 것이요, 셋째로는 우리 믿는 성도의 죽여야 할 것에 관한 것입니다. 첫째로, 13절에 보면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로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고 말씀하셨는데, 우리 믿는 성도가 이 자유에 대하여 잘못 깨닫거나 잘못 해석하면 큰 폐단을 일으킵니다. 자유는 자기의 마음대로 행동하는 것이요, 무엇에게도 제재를 받지 아니하는 것인데, 거기에는 전제조건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자유에 대하여 원만한 파악을 하지 못하고, 외부만 알고서 폐단을 일으키고 있는데, 자유에 대하여 잘못 알고서 잘못된 자유로 자라면 바로 잡기가 힘이 듭니다. 잘못된 자유로 자라면 자기가 왕이기 때문에 누구에도 꺾이지 아니합니다. 그 사람은 아무에게 대해서도 겁을 내지 아니합니다. 경제적인 타격이 온다고 해도 겁을 내지 않고, 가정이 파괴된다고 해도 겁을 내지 않고, 자기의 자녀가 어떻게 된다고 해도 겁을 내지 아니합니다. 그것이 큰 폐단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어떻게 해서 잘못된 자유로 큰 폐단을 일으키고 있는가? 자유는 그 종류가 하나가 아니고 두 가지인데, 이 두 가지 자유를 혼합하여 같은 것으로 잘못 알고서 자유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런데 13절에 말씀하신 자유는 진리와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의 자유인데,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고, 신앙양심으로 살고 싶고, 성경의 사람으로 살고 싶고, 의(義)의 사람으로 살고 싶고, 온전한 사람으로 살고 싶은 소원이 있는데, 그 소원대로 행하는 이 자유를 가리켜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천인 만인이 죄악의 길로 가도, 천인 만인이 불의를 행하여도, 죄악의 길로 가지 않고, 불의를 행하지 아니하고 의를 행하고, 선을 행하고, 자기에게 잘못되고 비뚤어진 습관을 고치고자 하는 소원을 가지고 그 소원대로 행하는 이 자유를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 믿는 성도를 불러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되도록 하신 것은, 위에 말한 그런 자유로 자유하는 사람이 되도록 하기 위함인데, 이 자유는 악의 자유가 아니고, 선의 자유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13절에 말씀하신 자유는 악의 자유가 아니고, 선의 자유인데,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는 옆도 앞도 뒤도 보지 않고 어쨌든 자기의 마음대로 하는 이 자유로 큰 폐단을 일으키는 사람이 많은데, 그런 사람은 잘못하면 팔방미인(八方美人:누구에게나 잘 보이도록 처세하여 나가는 사람:every body's friend)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믿는 성도는 선의 자유로 자유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과는 대립이 되어도 진리와는 대립이 되면 안 됩니다. 물론 진리와 사람이 하나이면 둘 다 맞추어야 합니다. 그러나 진리와 사람이 대립이 될 때에는 사람과는 대립이 되어도 진리와는 대립이 되지 말고 진리와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는 소원, 진리대로 살려고 하는 소원, 천국소망을 이루기 위해서 살려고 하는 소원, 이 소원을 이 세상에 있는 그 무엇과 부딪친다고 해도 양보하지 않고, 이 소원대로 해야 합니다. 그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자유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 것도 돌아보지 말고 소원대로 하라고 하는 이 자유는 어떤 자유인고 하니, 하나님과 진리대로 행하는 자유인데, 선한 자유인 것입니다. 하나님과 진리대로 행하고자 하는 소원과 자유는 선한 소원과 자유이기 때문에, 이 소원과 자유를 이 세상에 있는 어떤 것에게도 간섭을 받아서는 안 됩니다. 중단을 당해도 안 됩니다. 하나님과 진리는 인간보다 무한히 크시고 강하시기 때문에, 하나님과 진리대로 행하는 것을 물질이나 지위나 권세나 사업이나 직장이나 몸이나 생명이나, 그런 것 때문에 방해를 받거나 중단하면 안 됩니다. 자기 자신을 중심하고 위하는 소원, 이 소원을 이루기 위하여 사람이나 가정이나 사회를 버리고, 부모형제를 버린다고 하면 그것은 악 중에 악이요, 그 댓가로 영원한 결박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 믿는 성도가 자기 자신을 위하는 것은 악 중에 악인데, 자기 자신을 위하는 소원을 가지고 행동할 때에, 곁에서 어린아이가 그것을 보고서 잘못 되었다고 지적하여 주면 즉시 시정(是正:그릇된 것을 바로 잡음:correction)해야 합니다. 그것이 지혜요, 능력인데, 시정하지 아니하면 마지막에는 심히 불행하게 됩니다. 우리 믿는 성도는 자기를 중심하고 위주로 하는 이 생각과 사상과 소원과 행동을 가지면 안 됩니다. 완전히 버려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중심하고 위주로 하는 소원과 행동을 방해할 때에는 방해를 받아야 하고 반대할 때에는 반대를 받아야 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는 그 소원과 행동을 가지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진리를 중심하고 위주로 하는 이 소원과 행동을 가져야 하고, 하나님과 진리대로 행하는 그 행동은 무엇이 방해한다고 해도 방해를 받지 말아야 합니다. 자기의 소유나 몸이나 생명에게도 제한을 받지 말고, 방해를 받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어떤 곳인고 하니, 자기 자신을 중심하고 위주로 하는 소원과 행동을 죽이는 곳이요, 잘못된 자유를 죽이는 곳이요, 하나님과 진리를 위하는 소원과 행동을 기르는 곳이요, 선한 자유를 기르는 곳입니다. 그런데 믿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죽여야 할 잘못된 자유를 가지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많이 있는데, 하나님과 진리를 중심하고 위하는 이 선한 자유는 자기 자신과 자기에게 소속한 사람들을 위하고 유익 되게 하는 결과를 맺게 되고, 자기 자신을 위하는 악한 자유는 자기와 자기에게 소속한 사람들을 해치는 결과를 맺게 됩니다. 둘째로, 22-23절에 보면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 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은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고 말씀하셨는데, 우리 믿는 성도가 직장에서 근무를 해도, 상점에서 물건을 팔아도, 막노동판에서 노동을 해도, 학교에서 공부를 해도, 부엌에서 설거지를 해도, 성령의 열매를 맺기 위하여 해야 합니다. 그것이 진실한 생활이요, 알맹이 생활인 것입니다. 그러나 돈이나 권세나 지위나 향락이나 사업이나 지식이나 직장이나 출세를 위하여 생활한다고 하면, 그것은 외식하는 생활이요, 껍데기 생활이요, 배설물을 가져오는 생활인데, 우리 믿는 성도는 그런 생활을 하면 안 됩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열매를 맺는 것이 우리 믿는 성도의 생활이요, 우리 믿는 성도의 형편과 현실은 성령의 열매를 맺는 형편과 현실인데 성령의 열매를 맺는다고 하면, 우리 믿는 성도가 어떤 형편을 만나도 우리 믿는 성도에게는 평가 적으로는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 믿는 성도에게 형편을 주시되, 가장 적절한 형편을 주시는 것입니다. 의를 행한다고 해서 영광스러운 형편을 주시고 악을 행한다고 해서 천한 형편을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믿는 성도에게 적절한 형편을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믿는 성도 속에 교만이 있으면, 그것을 뽑는데 에 적절한 형편을 주시고, 우리 믿는 성도가 약하여 낙망하면, 담력과 용기와 소망을 가지는데 에 적절한 형편을 주시고, 우리 믿는 성도 속에 의(義)가 있으면 의를 연단하는데에 적절한 형편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믿는 성도가 만나는 형편은 어떤 형편이든지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믿는 성도를 사랑하셔서 주시는 것인데, 우리 믿는 성도가 죄악 중에 빠졌을지라도, 거기서 소망을 가지고 일어서야 하고, 또 일어섰으면 굳게 서서 나아가야 하기 때문에, 우리 믿는 성도에게는 낙망이나 절망이 있을 수가 없고, 또 하나님의 변함없으신 사랑을 의심하게 하는 미혹을 받지 아니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믿는 성도를 인도하시되, 끝까지 책임을 지시고 인도하십니다. 중단하지 않고 끝까지 계속하십니다. 인도하시는 그 방편이 다른 것뿐이지, 한번 시작하신 인도는 영원히 변함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예수의 피공로로 구속하신 우리 믿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기 위하여 끝까지 인도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 믿는 성도가 온전하게 되는데 에 가장 적절한 형편을 주시고, 가장 적절한 방편을 사용하시기 때문에, 우리 믿는 성도의 짧은 지식으로 이것은 좋다, 저것은 나쁘다. 이것은 나에게 합당하다, 저것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라고, 속단 적으로 평가하면 안 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믿는 성도는 자기의 어둡고 짧은 지식으로 이 형편과 방편은 평안하고 좋으니까 내게 주십시오, 저 형편과 방편은 고통스럽고 나쁘니까 내게 주지 마십시오라고 속단으로 평가하면 안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믿는 성도는 자기에게 당하는 형편에 대하여, 하나님이 가장 적절한 것으로 주신 것임을 확정짓고 요동하지 말아야 하고, 또 하나님께서 어떤 형편을 주실 지라도 거기서 소망을 굳게 가지고, 자기에게 있는 힘을 다하여 성령의 아홉 가지를 맺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충성을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가만히 서서 있는 의인보다 바르게 살아 보겠다고 힘쓰는 죄인을 더 기뻐하시고 사랑하시는데, 우리 믿는 성도가 이 세상에서 살 때 목적하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성령의 열매 아홉 가지를 이루는 것, 곧 영원한 구원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 믿는 성도로 하여금 구원을 이루도록 하기 위하여 우리 믿는 성도에게 적절한 형편과 방편을 주시고, 또 우리 믿는 성도는 이 구원을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의 주신 그 형편에서, 또 주신 그 방편대로 힘써 노력해야 합니다. 최선을 다 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도 자기에게 어떤 형편이 오든지, 그것을 하나님의 선물임을 알고, 있는 힘을 다하여 영원한 구원을 이루려고 노력했는데, 하나님은 우리 믿는 성도로 하여금 구원을 잘 이루도록 하기 위하여 적절한 형편을 주시고, 그리고 그 형편에 따라서 구원을 이루는데 에 적절한 은혜를 주시기 때문에, 우리 믿는 성도가 만나는 형편은 어떤 형편이든지, 그것은 성도의 목적을 이루는데 에는 똑같은 가치와 효력을 가지고 있는 것인데, 우리 믿는 성도는 이 사실을 확정짓고, 자기의 형편에게 제재를 받지 말고, 그 형편을 잘 이용해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말씀하신 성령의 열매라고 하신 말씀은 성령이 오셔서 이루어 놓으신 결과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신 성령이 오셔서 성령의 소원을 이루어 놓으신 결과라, 하나님이신 성령이 오셔서 하나님과 같은 것을 이루어 놓으신 결과라고 하신 말씀인데, 하나님과 같은 것은 무엇인고 하니, 우리 믿는 성도의 인격성이 하나님의 신격을 배우고 본받고 닮는 것이요, 우리 믿는 성도의 행위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대로 실행하므로 온전하게 되는 것이요, 우리 믿는 성도의 하는 일이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따르므로 하나님의 하시는 일과같이 온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은 이것을 위하여 역사 하시는데, 위에 말한 세 가지가 성령이 오셔서 이루어 놓으신 열매, 곧 결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22-23절에 있는 말씀은, 우리 믿는 성도의 목적인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실례(實例:실제의 본보기:example)로 들어서 몇 가지 종류를 말씀하신 것인데, 우리 믿는 성도는 아홉 가지와 같은 인격과 행위와 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인생의 행복과 불행이 생활의 방편에 따라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고, 성령의 열매를 맺느냐, 맺지 못하느냐라고 하는 그것으로서 결정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인생의 행복과 불행의 기준은 성령의 열매를 맺느냐, 성령의 열매를 맺지 못하느냐고 하는 것인데, 아무리 부요한 형편을 만났다고 해도 성령의 아홉 가지를 맺지 못했다고 하면 심히 불행한 형편이요, 인생의 노정에서 실패한 토막이요,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토막이요, 이와 반대로 가난한 형편을 만났다고 해도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맺었다고 하면 심히 행복한 형편이요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토막이요 인생살이를 성공한 토막인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이 평가하는 것과 우리 믿는 성도가 평가하는 것이 다른데 성령의 열매를 기준으로 하여 성령의 열매를 많이 맞았으면 수입을 거둔 자요, 맺지 못했으면 실패한 자인 것입니다. 자기의 재물이나, 지위나, 권세나, 사업이나, 지식이나, 활동무대가 커지므로 성령의 열매를 많이 맺었다고 하면, 재물이나 지위나 사업이나 권세나 지식이나 활동무대나 명예나 영광이 되지마는, 그런 것들이 커지므로 자기의 사욕이 자리고 강하여 지고 성령의 열매를 맺지 못하고 세상만 자라고 강하여 진다고 하면 그런 것들은 자기를 망치고 죽이는 것이기 때문에, 자기에게 저주인 것입니다. 시편 73편 1절 이하에 보면 복있는 사람은 조금만 실수를 하고 잘못해도 하나님의 징계가 오고, 저주를 받은 사람은 범죄해도 점점 형통하게 되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버렸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세상 사람들은 지식이 잘못되고 비뚤어졌기 때문에, 생각하는 것이나, 비판하는 것이나, 평가하는 것이나, 소원하는 것이나, 계획하는 것이나, 말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것이나, 경영하는 것이 잘못되고 비뚤어졌고, 마지막에는 심히 불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믿는 성도는 안 믿는 세상 사람들과 같은 그런 희로애락을 누려서는 안 됩니다. 신령한 희로애락을 누려야 하고,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으로 부요한 것 보다 하나님과 진리로 부요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지혜 있고 행복한 사람이요, 잘난 사람인데, 누가복음 12장 21절에 보면 하나님과 진리로 부요하지 못하고 이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으로 부요한 자를 어리석은 자라고 말씀하셨고, 시편 52편 7절에 보면 이 사람은 하나님으로 자기 힘을 삼지 아니하고, 오직 재물의 풍부함을 의지하며, 자기의 악으로 스스로 삼지 든든하게 하는 자라고 말씀하셨는데, 우리 믿는 성도는 어떤 형편에서든지 성령의 열매를 맺는데 에 있는 힘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런데 갈라디아서 5장 23절에 보면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씀은 성령의 열매, 아홉 가지를 정죄할법이 없다고 하신 말씀으로서, 하나님의 심판에서도 잘못되었다고 정죄하지 못합니다. 성령의 열매를 정죄할 법이 없습니다. 셋째로, 24-26절에 보면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헛된 영광을 위하여 서로 격동하지 말고,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고 말씀하셨는데, 우리 믿는 성도는 정(精)과 사욕을 죽여야 합니다. 그것을 죽이는 것이 우리 믿는 성도의 생애인 것입니다. 사욕은 우리 믿는 성도에게 있어서 일대 원수인 것입니다. 그런데 사욕을 다른 말로 하면 육체의 생각이라, 육체의 소욕이라, 땅에 있는 지체라고 하는데, 우리 믿는 성도는 그것을 죽여야 합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6장 24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자기를 부인하라고 말씀하셨고, 골로 새서 3장 5절에 보면 사도바울은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면 우리 믿는 성도가 무엇 때문에 자기를 부인해야 하는가? (1), 자기를 부인하지 아니하고,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지 아니하면 십자가를 질 수가 없고,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없기 때문이요, 하늘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2), 자기를 부인하지 아니하면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가 없고, 마지막에는 사망과 고통이기 때문이요,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 믿는 성도는 자기 속에 잇는 사욕을 죽여야 합니다. 자기 속에 있는 고집을 꺾어야 합니다. 자기의 주관이나 주장을 부인해야 합니다. 세상지식을 부인해야 합니다. 땅에 있는 지체를 죽여야 합니다. 그런데 26절에 보면 헛된 영광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죽음을 통과하지 못하는 것은 어떤 것이든지 전부가 헛된 것입니다. 인생에게 있어서 죽음은 최종의 연단인데, 죽음에 놀라지 아니하고 죽음을 통과할 때에 없어지지 아나하는 것은 영원히 존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많은 돈을 자기의 이름으로 은행에다가 예금을 해놓았다고 해도, 그것이 죽음을 통과하지 못한다고 하면 자기 것이 아니요, 사람이 많은 부동산을 자기의 이름으로 등기소에다가 등기를 해놓았다고 해도, 그것이 죽음을 통과하지 못한다고 하면 자기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격동하고, 서로 투기하지 말라고하신 말씀은 죽음이라고 하는 최종의 시련이 와도, 없어지지 아니하는 그것을 위하여 힘쓰라, 오늘 있다가 내일 없어질지 모르는 이 헛된 것을 위하여 서로 싸우지 말고, 서로 충격을 주지 말고, 받지 말아라, 죽음을 통과할 수 있는 옳고 바르고 참된 것을 위하여 힘쓰고 분투 노력하라고 하신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면 옳고 바르고 참된 것을 위해서 사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인가? 진리대로 취득하고, 진리대로 사용하고, 진리대로 관리하는 것인데, 진리대로 취득한 것은 자기 것이요, 진리대로 사용했으면 영원히 자기 것입니다. 진리대로 취득한 행복은 없어지지 아니합니다. 취한 것도 의(義)가 되고, 진리대로 사용한 것도 의(義)가 되고, 영원히 없어지지 아니합니다. 영원히 자기 것입니다. 믿음으로 공부하고, 믿음으로 물질을 취득하고, 믿음으로 지위를 취하고, 믿음으로 사업을 하고, 믿음으로 직장에서 근무하고, 믿음으로 가정을 다스리고, 믿음으로 장사를 하는 것은 의(義)가 되는 것인데, 그것은 없어지지 아니합니다. 전부가 영생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에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있는데, 우리 믿는 성도는 양면을 보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세상영광 이면(裏面:속:inside)에 세상이 모르는 영광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상대하고 위해서 살고, 눈에 보이는 사업이면에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참된 사업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상대하고 위해서 살고, 눈에 보이는 자유 이면에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영생하는 자유가 잇기 때문에 그것을 상대하고 위해서 살고, 눈에 보이는 직장 이면에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영원한 일터가 있기 때문에 그것을 상대하고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은 죽음이 와도 없어지지 아니합니다. 우리 믿는 성도는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그것을 상대하고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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