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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눅 18: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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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눅 18:15-30)


윌리엄 워즈워스((William Wordsworth)라는 미국 시인이 지은 '무지개'(A Rainbow)라는 제목의 시가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하늘의 무지개를 바라보노라면 내 가슴이 설레게 되나니, 나 어린 시절에도 그러했고 어른이 된 지금도 그러하거늘 나 늙어서도 그렇게 되지 못한다면 차라리 죽는 것이 나으리라"고 시작되면서, 바로 그 다음에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The Child is father of the Man)라는 유명한 구절이 나옵니다. 
  
그 시인은 무지개를 바라볼 때마다 동심으로 돌아가게 되면서 바로 그런 순수한 마음이 나이 든 어른이 된 후에도 계속 유지되기를 간절히 기원하면서 이 시를 쓴 것이었습니다. 
사실 대자연을 아무런 사심 없이 바라보고 그 아름다움에 도취되어 설레기까지 할 줄 아는 것은 천진난만하면서도 감수성이 예민한 어린이의 마음이 있어야만 가능할 것입니다. 
이처럼 매사를 복잡하고 어렵게만 판단하는 경향이 있는 어른은 사물과 사건을 단순하게 보고 쉽게 생각하는 어린이에게 오히려 배워야 할 때가 많은데, 이것은 인생의 가장 중대한 문제인 '구원'에 있어서 더욱 그러하다고 예수님께서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에게 일깨워 주고 계십니다. 
사실 어린이란 어른이 보기에는 그저 미약하고 어른에게서 배울 것밖에 없는 존재로 여겨지기 쉽습니다. 
  
그러니 그런 어린이들이 어른을 가르쳐 줄 수 있다는 말씀도 비범하지만, 그 가르쳐 줄 수 있는 내용이 무엇인지를 들어 보면 더욱 더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게 해 주는' 지혜이기 때문입니다. 
말하는 법, 덧셈 뺄셈하는 법, 먹고 사는 것 - 이런 것들을 어른에게 배워야만 하는 어린아이들이, 사람이 천국에서 영생할 수 있는 법에 대해서는 오히려 어른의 스승이 된다는 실로 충격적인 말씀을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것입니다. 

우선 본문 15절부터 17절에 보면 "15사람들이 예수의 만져 주심을 바라고 자기 어린 아기를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보고 꾸짖거늘 16예수께서 그 어린아이들을 불러 가까이 하시고 이르시되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17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서 자기 아이들을 데리고 온 사람들이 "예수의 만져 주심"을 바랐다는 말은 '머리에 안수하고 축복해 주심'을 원했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제자들이 이를 보고 꾸짖었습니다. 
그러지 않아도 바쁘고 피곤하신 예수님을 하찮은 아이들이 더욱 귀찮게 할 것이라는 생각에서 그랬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당시 로마제국 산하의 모든 사회에서 거의 사람 취급도 받지 못하고 있던 어린아이들에 대하여 아주 특별하고도 자상한 관심을 보여 주신 유일한 분이었습니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아예 이런 어린아이들이야말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할 수 있는' 사람의 대표적인 모범이라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받들다'라고 되어 있는 말은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들이다'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 

그렇다면 어린이들은 과연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들이는 것이겠습니까?
어린아이의 특성은 여러 가지 있지만 그 중에 두 가지만 여기서 상기해 본다면, 그것은 우선 '가르쳐 주는 대로 순수하게 잘 믿는 것', 그리고 '자기보다 힘센 어른에게 완전히 의존하는 것'입니다.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은 어린아이의 이런 두 가지 특성이 '하나님의 나라를 받들고 그 나라에 들어가게 함'에 있어서 어른에게 가르쳐 주는 구체적인 교훈이 무엇인지를 이어지는 본문을 통해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의 선행'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들어갈 수 있습니다. 

18절부터 23절까지에 기록하기를 "18어떤 관원이 물어 가로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19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20네가 계명을 아나니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증거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21여짜오되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 22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이르시되 네가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나눠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23그 사람이 큰 부자인 고로 이 말씀을 듣고 심히 근심하더라"고 했습니다. 

여기 나타나는 "관원"은 그 당시 로마제국이나 유대사회의 공직에 있는 사람들을 일반적으로 부르는 호칭이었습니다. 
이들은 두말할 것 없이 상류층에 속한 자들로서 대부분이 부자였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찾아와서 "선한 선생님이여"라고 불렀습니다. 
'선생님'(랍비)이라는 존칭은 당시 흔히 사용되고 있었지만, 그 앞에 '선한'이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것은 유대사회의 랍비들과 그 제자들 사이에서 결코 쓰지 않았던 표현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 '선하다'라는 수식어는 오직 하나님께만 해당되는 말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무슨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 같은 '종교적 전문가'가 아니라 그냥 일개 '공무원'에 불과했던 그 관원은 그런 깊은 의미까지는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그저 가벼운 인사치레로 예수님을 그렇게 불렀을 것입니다. 

그 관원의 질문은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는 것이었습니다. 
'사람이 어떻게 영생을 얻게 되는가?'라는 것은 실로 의미심장하고 중차대한 질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영생'이란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여 모든 사람들이 다 꿈꾸고 바라는 가장 근본적이고도 궁극적인 염원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관원은 자신의 질문 속에서부터 이미 한 가지 결정적으로 잘못 알고 있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내가 무엇을 하여야"라는 말이었습니다. 
즉 그는 영생 구원이란 것이 전적으로 자기편에서 스스로 무엇을 어떻게 함으로써 결정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바로 그 잘못부터 지적해 주신 것으로서, 우선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너는 나에게 그런 표현을 함부로 쓰면 안 된다. '선하다'라는 말은 오직 하나님께만 써야 한다."라는 뜻으로 하신 것이 결코 아닙니다. 
이것은 "네가 방금 지금 나를 보고 '선한 선생님'이라고 불렀는데 너는 그 뜻을 바로 알고 있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는데, 너는 내가 곧 하나님인 줄을 알고 그렇게 부른 것이냐 아니면 그저 인사치레로 예의상 한 말이냐?"라고 반문하시는 말씀입니다. 
즉 사람이 영생을 얻는 문제는 '사람이 무엇을 하는가?'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예수님을 성자 하나님으로 믿는가?'라는 데에 전적으로 달려 있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이 점을 더욱 분명히 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네가 계명을 아나니"라고 말씀하시면서 십계명에 나오는 계명들을 몇 가지 인용하셨습니다. 
그 계명들은 간음, 살인, 도적질, 거짓증거를 하지 말라는 것과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이었는데, 예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십계명 중에서도 오직 사람이 '이웃에 대하여 지켜야 할 계명'들만 인용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그 관원은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라고 했는데, 그의 대답 속에는 스스로 자신만만해 하는 분위기가 엿보입니다. 
즉 '스스로 무엇을 함으로써' 영생을 얻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보기에는, 이 관원에게 있어서 영생이란 이미 '따 놓은 당상'이나 마찬가지였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예수님께서는 "네가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라고 폭탄선언을 하셨습니다. 
영생 구원을 위한 모든 조건을 초과달성한 듯이 보였던 그 관원에게 '오히려 부족한 것 한 가지'가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그것은 그가 '가진 소유를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준' 후에 '예수님을 좇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의 뜻을 깊이 새겨들어야 합니다. 
조금 전에 예수님께서는 십계명의 후반부만 언급하시며 그에게 질문하셨고, 그것들은 그 관원이 다 잘 지켰다고 자부한 것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것은 바로 십계명 제1계명부터 4계명까지인데, 이 계명들은 '사람이 하나님을 얼마나 잘 믿고 사랑하는가'를 테스트하는 계명들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로 그 전반부의 네 계명들을 인용하는 대신에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신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지 않습니까?
즉 예수님께서는 '나를 좇으라'는 이 말씀을 통하여 '사람의 눈에 보이도록 화육하신 성자 하나님 즉 당신을 따르는 것'이야말로 '눈에 보이지 않는 성부 하나님을 사랑하고 믿는 것'과 동격이라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그 관원에게 결정적으로 부족한 것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그는 부모를 잘 모시고 이웃에게 나쁜 짓을 저지른 적이 없는 '선행'만 있으면 영생을 얻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했던 대표적인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영생 구원에 정말로 필요한 것은 사람 자신의 선행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을 세상의 다른 그 무엇보다도 사랑하는 진실한 신앙'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하나님 사랑은 오직 그가 예수님을 '선하신 성자 하나님'으로 믿고 자신의 모든 재물보다 그 '영생의 구세주'만을 더 귀하게 여기면서 자신의 남은 전 인생을 오직 그 주님을 따라가는 일에 바치는 것으로써만 증명될 수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관원은 예수님의 그런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돌아갔습니다. 
그의 뒷모습은 상상만 해 보아도 너무나도 안타깝고 쓸쓸한 장면이 아니겠습니까?
여기서 그 관원의 실체는 드러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는 겉으로 사람들 앞에서는 선하게 행동하는 '세련된 어른'이었지만, 그의 속에는 예수님을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어린아이의 마음이 전적으로 결핍되어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자기가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더더욱 성숙한 인간이 되었다고 자부하는 것이 어른의 세계입니다. 
어릴 때보다 훨씬 더 인격적으로 성숙했고 예의범절도 잘 알고 도덕적으로 가장 수준 높은 상태에 도달했다고 자타 공인하는 것이 바로 어른인 것입니다. 
반면에 자기 자신이 어떤 수준으로 성장했다고 스스로 자랑할 수 있기는커녕, 그런 판단 자체를 아예 할 줄 모르는 것이 바로 어린아이 고유의 겸손한 마음입니다. 
즉 어린이의 생각이나 판단이란 것은 오직 어른들이 가르쳐 주는 대로 '믿는' 것밖에 없습니다. 
바로 그런 마음, 그처럼 '스스로 선하게 살고 있다'라고 하는 생각은 아예 머리에 떠올릴 줄도 모르고 그저 '나를 생명의 구세주로 알고 따라 오너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순수하게 받아들이는 어린아이 같은 '믿음'만이 진정 영생 구원에 이르게 해 주는 것입니다. 

스스로 신자라고 자부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대부분이 이 관원처럼 '하나님의 나라'를 어른의 사고방식으로 들어가려 하고 있습니다. 
즉 천국에 들어갈 만큼 거룩하고 선한 인생을 자기 자신이 이룩함으로써 그 자격을 얻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런 '어른'들에게 '네가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라고 정곡을 찔러 주십니다. 
예수님이 곧 화육강세하신 '하나님의 독생성자'이심과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하여 대신 죽으신 '그리스도'이심을 순수하게 믿는 '어린아이의 믿음'만이 사람을 영생구원의 길로 이끌어 줄 수 있음을 꼭 깨닫고 고백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의 공로'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함'으로써 들어갈 수 있습니다. 

24절 이하 30절 말씀에 "24예수께서 저를 보시고 가라사대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떻게 어려운지 25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 26듣는 자들이 가로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나이까 27가라사대 무릇 사람의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 28베드로가 여짜오되 보옵소서 우리가 우리의 것을 다 버리고 주를 좇았나이다 29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30금세에 있어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하시니라"고 기록했습니다.   그 관원이 돌아간 후에 예수님께서는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는 유명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다'라는 표현에 대하여 여러 가지 해석이 시도되고 있습니다. 
일부 성경역사 학자들에 의하면, 당시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는 문들 중에 '바늘귀'라는 별명으로 불릴 만큼 작은 문이 있었는데 높이가 너무 낮아서 약대가 통과할 때에는 무릎을 꿀려서 지나가게 했다고 합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예수님의 이 말씀은 그런 역사적 배경을 잘 알고 있던 동시대 사람들에게는 아주 자연스러운 비유가 되었을 것입니다. 
혹 그렇지 않고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인다 해도 그냥 '과장법'으로 보면 역시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어느 쪽이든지 간에 요는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주 어렵다는 점을 예수님께서 강조하려고 하신 것만은 틀림없는데, 이 말씀이 제자들에게는 큰 충격이었습니다. 
요즘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지만, 당시의 유대인들 역시 '부는 곧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축복의 대표적인 증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즉 부자일수록 더 많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사람이고 부자일수록 하나님께 바쳐 드릴 것도 더 많은 까닭에, 부자야말로 가장 확실하게 천당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이라고 여겨졌던 것이었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부자야말로 구원받을 수 있는 '영순위 후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런 부자가 오히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훨씬 더 어렵다고 하시니, 제자들로서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나이까"라고 물었던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사랑을 제일 많이 받고 하나님께 헌금도 가장 많이 할 수 있는 부자들조차 구원받기 힘들다면 세상에 도대체 어떤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겠습니까?'라는 의미의 질문이었습니다. 

바로 그때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구원을 가능케 해 주는 가장 근본적인 진리를 선포해 주셨습니다. 
바로 "무릇 사람의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시느니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구원은 '사람 스스로의 힘'으로써는 절대로 '할 수 없는 것'인 반면에 모든 것을 다 하실 수 있는 전능자의 힘 곧 '하나님의 능력'으로써는 얼마든지 가능한 것이며 또한 실제로 하나님께서 '하시는' 가장 큰 역사라는 선포인 것입니다. 
  
구원은 부자에게나 빈자에게나, 지식인에게나 일자무식꾼에게나, 강자에게나 약자에게나 아무 차별 없이, 오직 하나님께서 홀로 행하시는 기적이며 우리에게 거저 베풀어 주시는 선물입니다. 
그러니 구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사람의 공로'라는 것은 끼어들 틈조차 없고 오로지 '하나님의 능력'의 결과일 뿐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런 말씀을 들은 베드로는 즉시 "우리가 우리의 것을 다 버리고 주를 좇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베드로가, 제자들이 그리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무슨 공로를 쌓는 것'이 아니라 그저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예수님만 따르는 것' 바로 이것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 따르는 방법 역시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보다도 '더욱' 그리고 '오직' 예수님만을 사랑하는 이 한 가지밖에 없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얼마만큼의 능력이 있는가를 서로 견주어 보며 자랑하는 것이 어른의 세계입니다. 
반면에 어린아이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힘 있는 어른에게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뿐입니다. 
하지만 구원은 자기가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재물이나 자기가 하나님을 위하여 봉사할 수 있는 힘을 자랑하는 '어른'에게가 아니라, 오직 예수님만을 마음과 정성과 힘을 다하여 믿고 따르는 '어린아이'에게만 보장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믿음은 '사람 스스로는 할 수 없는 것'일 뿐이지만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써만 우리 심령에 일어날 수 있는 것이며, 그래서 '믿음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 앞에서 쌓는 공로로써 구원받을 자격을 획득할 수 있다는 소위 '이행득구'의 천주교 교리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소리입니다. 
그것은 '어른의 논리'에는 딱 들어맞는 말 같지만, 실상은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게' 만드는 교리입니다. 
  
천주교는 성자들이 쌓은 많은 공로 중에서 그들 자신이 스스로 구원받는 데에 쓰고도 아직 남아 있는 공로는 교황의 권한 아래에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교황은 구원받기에 충분한 공로를 미처 다 쌓지 못하고 죽은 사람들에게 그 남아 있는 소위 '잉여 공로'를 나누어 줄 수 있다고 하면서 자기 마음대로 '면죄부'도 팔고 소위 '희년 선포'라는 것까지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교리와 행위는 조금만 따져 보아도 '오직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구원'을 사람이 중간에서 가로채어 잇속을 채우는 엄청난 신성모독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구원에 대하여 사람 편에서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전무합니다. 
사람이 구원에 대하여 할 수 있는 것은, 또 꼭 해야 할 것은, 자신의 '전적무능력'을 인정하는 가운데 오로지 전능하신 하나님께 모든 것을 의지하는 어린아이의 자세일 뿐입니다. 
사람에 대하여 그 어떤 의무나 책임이 없으시면서도 오직 당신의 크신 은혜와 한없는 자비를 발휘하시고 그 전능하신 능력을 발동시키심으로써 구원 얻을 믿음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시는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의지함으로써 '하나님의 나라'로 영접받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성도 여러분,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는 질문은 꽤 진지하고 열성적인 '어른 종교인'의 생각 같지만 실은 '어린아이 신앙인'에게 다시 배워야만 할 말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거기에 들어갈 만큼 인격적으로 고상하게 변화된 까닭에 자격을 획득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거기에 들어갈 만큼 스스로 이루어 놓은 것이 충분한 까닭에 그 보상으로 얻게 되는 것도 절대로 아닙니다. 
그처럼 구원 얻을 만한 조건이 '나'에게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 자기가 무엇을 함으로써 구원은 당연히 주어져야 마땅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구원의 주님께 전적으로 의지할 마음이 생길 여유조차 없어집니다. 
즉 그런 사람은 절로 하나님 앞에서 교만해질 뿐이지 하나님을 전적으로 사랑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나이까'라는 말대로, 사람은 자신의 구원에 대하여 절대적으로 무력한 까닭에 자신의 지식이나 힘으로나 도덕이나 선행으로나 율법준수나 의식참여 따위로는 절대로 스스로 구원받을 수 없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자기가 해 놓은 것을 하나님 앞에 내어 놓고 보상을 바라는 식의 어른이 아니라, 그저 자기는 무력한 존재일 뿐임을 자각하고 어른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어린아이의 마음'만이 사람을 참된 영생 구원의 길로 인도해 줍니다. 
바로 그런 어린아이의 믿음과 자세를 가지고 당신 앞으로 나아오는 자에게 주님께서는 '사람의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고 영생구원을 보장해 주시는 것입니다. 

주일학교에서 흔히 배우는 '구원 열차'라는 제목의 유명한 복음성가가 있는데, "나는 구원열차 올라타고서 하늘나라 가지요 / 죄악역 벗어나 달려가다가 다시 내리지 않죠 / 차표 필요 없어요 주님 차장되시니 나는 염려 없어요 / 나는 구원열차 올라타고서 하늘나라 가지요"라는 가사의 노래입니다. 
그런데 제가 대학부 시절 우리 경향교회가 여의도에 있었을 때에 당시 저의 후배였던 김석찬 장로님께서 어떤 자리에서였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바로 이 복음성가를 통해 받은 은혜를 간증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그 간증의 요지는 '아하, 마치 열차를 타고 있는 사람은 아무 힘들이지 않아도 저절로 목적지로 가게 되는 것처럼 구원도 정말 나 자신의 어떤 노력이나 공로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그저 하나님께서 다 마련해 주신 구원열차를 타기만 자동적으로 확실히 이루어지는 것이구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처럼 대학생 때부터 찬송가는 물론이요 복음성가를 불러도 그 가사의 뜻을 생각하고 그 영감에 은혜를 받으면서 찬송할 줄 아는 김석찬 장로님이셨으니, 비록 그다지 뛰어난 노래 실력을 가지고 계시는 것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지금에 와서는 '할렐루야 찬양대'의 대장까지 되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실로 그 간증 그대로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선행'이나 '노력'이라는 '차표'가 있어서 구원열차를 탈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예수님께서 '차장'이 되시니 그냥 공짜로 그 구원열차를 타기만 하면 절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까닭에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어른의 교만과 자만'을 버리고 '어린아이의 겸손과 의존심'으로 얻게 되는 '믿음'을 소유하고 고백함으로써 다가오는 저 영광스러운 내세의 '하나님의 나라'에 꼭 들어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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