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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벧전 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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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벧전 5:7)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는 ‘실존주의 철학자’라 불립니다. 그가 인간의 ‘실존’을 철학의 중심 주제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실존’이란 인간이 자신의 존재를 문제 삼으면서 어떻게 살 것인가를 ‘염려’하는 삶의 방식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하이데거는 인간이 자신의 존재를 의식하면서 인간다운 삶을 살고자 할 때 나타나는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 바로 ‘염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이데거의 눈으로 보면 인간은 ‘염려하는 존재’입니다.

하이데거는 염려를 설명하기 위해 [존재와 시간]이라는 책에서 그리스 신화를 인용합니다.

고대 그리스에 쿠라라는 염려의 신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강을 건너다 점토를 발견하고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한 덩어리를 떼어내 빚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이 빚은 것을 바라보며 곰곰 생각하고 있는데 그때 주피터라는 신이 다가왔습니다. 쿠라는 주피터에게 자신이 빚을 점토 덩어리에 혼을 불어넣어 달라고 했습니다. 

주피터가 혼을 불어넣어준 후 쿠라는 그 형상에 자기 이름을 붙이려했습니다. 그러자 주피터가 자신이 혼을 넣었으니 자신의 이름을 붙여야한다고 했습니다. 둘이 이렇게 다툴 때 대지의 신 텔루스도 나섰습니다. 그 형상이 자신의 몸의 일부인 진흙으로 만들어졌으니 자신의 이름을 붙여야한다는 것입니다. 

한참을 다퉜으나 결론이 나지 않자 이들은 시간의 신인 사투르누스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사투르누스는 모두가 불만이 생기지 않게 그럴듯한 결론을 내려 주었습니다. 주피터는 혼을 줬으니까 그가 죽을 때 혼을 받고, 텔루스는 육체를 선물했으니 육체를 가져가라. 하지만 쿠라는 이것을 처음으로 만들었으니 이것이 살아있는 동안 네 것으로 삼아라. 그러나 이름은 후므스, 즉 흙으로 만들어졌으니 호모, 즉 인간으로 부르는 것이 좋겠다. 

이리하여 인간은 살아있는 동안 염려의 신의 것이 되었고, 태어나 죽을 때까지 늘 염려하는 존재로써 살 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이데거가 볼 때 인간은 태어나면서 죽을 때까지 늘 염려하며 살 수 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의 인간의 숙명적인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하이데거의 말이 일견 일리가 있습니다. 우리가 만나 본 세상 사람들은 대부분 염려하며 살아갑니다. 하루 종일 염려하며 살고, 한 평생을 염려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다 염려하며 살 수 밖에 없을까요? 과연 염려를 벗어날 수는 없을까요?
물론 그렇지 않습니다. 특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염려를 벗어날 수 있습니다. 아니 염려를 벗어버려야 합니다. 

염려

그러면 염려가 무엇인지부터 살펴보겠습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말하는 염려와 성경이 말씀하는 염려는 조금 차이가 있습니다.

우선 일반적인 염려의 뜻을 살펴보려면 사전적 정의를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말 큰 사전에는 ‘염려란 앞일을 이리저리 헤아려 걱정하는 것’이라고 정의되어있습니다. 그러니까 앞으로 생겨날 일을 생각하며 신경을 쓰고 안달하며 속을 썩이는 걱정을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염려는 앞일을 생각할 때 생겨나는 걱정입니다. 뗏목을 타고 강을 따라 내려가고 있는 사람이 강 저 앞 쪽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습니다. 그 때 폭포라도 나타나면 어떻게 하나는 생각에 사로잡히게 되면 그 기분이 어떨까요? 어떻게 저 앞에 폭포가 있는 것을 알게 됐다면 그 기분이 어떨까요? 바로 이것이 염려입니다.

사실 사람들은 뗏목을 타고 강을 따라 내려가고 있는 사람처럼 앞일에 대해 잘 모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 끝에는 큰 폭포처럼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언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몰라 염려합니다. 그리고 결국은 만나게 될 죽음을 어떻게 맞게 될지 몰라 염려합니다.

그래서 하이데거 말처럼 인간은 자신의 존재를 깨닫게 될 때 필연적으로 염려하게 됩니다. 자신의 인생을 깊이 생각할 때 염려하지 않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염려를 다르게 설명합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의 백성들은 염려하지 말아야 하는데 염려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염려라는 말이 나옵니다. 성경 원어를 보면 ‘메림나오’(merimnao)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메림나오라는 말은 두 가지 말이 합해져서 생겼습니다. 하나는 ‘나누다’라는 뜻의 ‘메리조’(merizo)라는 동사이고, 다른 하나는 ‘마음’이라는 뜻이 ‘누스’(nus)라는 명사입니다. 그러니까 염려는 마음이 나뉜 상태를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마 6:24-25에서 이런 염려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우선 사람이 마음이 나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면서 또 재물을 섬기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때 마음속에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만을 믿는 믿음이 흔들리게 될 때 염려가 찾아옵니다. 갑자기 생각지 못했던 인생의 위기가 찾아올 때 믿음이 흔들립니다. 그 때 마음속에 염려라는 파도가 일어납니다. 

야고보 사도는 약 1:6-8에서 이이 점을 보다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그러니까 하나님만 믿고 의지하던 마음에 의심이 들어오게 되었고, 그래서 마음이 나뉘어 흔들리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의심이 찾아들 때 염려라는 물결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믿는 마음과 믿지 못하는 마음으로 나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 안에 두 마음이 서로 싸웁니다. 그래서 마음이 평안하지를 못합니다. 

이 때 우리 마음속에 염려가 찾아들어 자리를 잡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기 시작합니다. 결국 염려라는 수렁에 빠져들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염려하지 않을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염려는 누구나 숙명적으로 안고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염려하지 말아야 하며 염려가 찾아올 때 물리쳐야 합니다.

염려를 맡기라

그러면 어떻게 하면 염려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염려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이 분명하게 답을 제시해 줍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우리 마음속에 일어나고 있는 모든 염려를 남김없이 주님께 맡기라는 것입니다. 

한번은 젊은 부부가 찾아왔습니다. 맞벌이를 하고 있는데 생각보다 일찍 아기를 갖게 됐다는 것입니다. 직장을 그만둘 수도 없고 그렇다고 아이를 포기할 수도 없고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두 사람의 어깨 위에 감당하기 힘든 염려의 짐이 얹혀있었습니다.
얼마 뒤에 다시 찾아왔습니다. 얼굴 표정이 무척이나 밝아보였습니다. 친정 엄마가 아이를 맡아주기로 했다는 것입니다. 출근하면서 아이를 가까이에 사시는 엄마에게 맡기고 저녁에 퇴근하면서 찾아오기로 했다는 것입니다. 무거운 염려의 짐을 엄마에게 다 맡긴 것입니다.

같은 이야기입니다. 우리를 짓누르는 염려의 짐을 하나님께 다 맡기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염려의 수렁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염려를 주께 맡기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첫째,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요 14:1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우리가 염려를 주께 다 맡기기 위해서는 우선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 주부가 도둑이 들까봐 염려하면서 몇 년 째 잠을 제대로 못자고 있었습니다. 밤중에 조금만 이상한 소리가 들려도 곤히 자는 남편을 깨우는 통에 제대로 잠을 잘 수가 없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중에 아파트 윗집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서 남편이 올라가 보았습니다. 도둑이 든 것입니다. 남편이 도둑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부탁 좀 들어주시오. 우리 집으로 가서 내 아내 좀 만나주시오. 우리 아내가 당신을 몇 년 째 기다리고 있소”

그렇습니다. 염려도 일종의 믿음입니다. 도둑이 올 것이라는 믿음 말입니다. 안 올 것을 바라면서도 혹시 오지 않을까 기대하는 믿음입니다. 

이런 염려를 물리치기 위해서는 제대로 된 믿음이 필요합니다. 

마 8장에는 예수님 공생애 초기에 예수님의 아주 특별한 모습을 기록되어있습니다. 너무 놀라운 모습이어서인지 막 4장, 눅 8장에도 같은 말씀이 기록되어있습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바람과 바다를 잔잔케 하시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고 계셨습니다. 갑자기 돌풍이 불고 풍랑이 일어서 배가 위태로운 상황입니다. 그런데 이 와중에 예수님께서는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말입니다.

물론 제자들은 염려하기 시작했습니다. 염려가 점점 더 심해져서 견디기 힘들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할 수 없어서 예수님을 깨웠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일어나셔서 제자들을 책망하셨습니다.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그렇습니다. 우리가 염려하는 이유는 믿음이 작아지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작아지는 만큼 그 빈 자리를 염려가 채우기 때문입니다. 믿음과 염려의 관계는 마치 빛과 어둠의 관계와 같습니다.

낮에 태양이 하늘 높은 곳에서 비추게 되면 온 천지에는 빛이 가득합니다. 이 때 어둠은 거의 사라지고 그림자로 구석 한 곳에 숨어있습니다. 그러나 태양이 서산 넘어 사라지게 되면 빛이 자취를 감추게 됩니다. 순식간에 어둠이 온 천지를 장악해 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우리가 염려를 벗어버리려면 믿음을 굳건히 해야 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홍해에 길을 내셔서 하나님의 백성을 인도하신 하나님! 매일 만나를 내리셔서 하나님의 백성을 광야 길에서도 먹이신 하나님!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보호하신 하나님! 그 하나님이 오늘도 나의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둘째, 기도하는 것입니다.

빌 4:6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우리가 염려를 다 주께 맡기기 위해서는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현대를 대표하는 영성가 헨리 나우엔은 [꼭 필요한 것 한 가지; 기도의 삶]이란 책에서 이런 말을 하고 있습니다. “염려를 떨쳐버리는 가장 효과적이지 않은 방법 가운데 하나가 염려하고 있는 그 일을 생각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다.” 염려는 우리의 생각으로 떨쳐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그렇습니다. 염려하지 않으려고 아무리 애써도 염려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염려하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면 칠수록 염려하는 그 문제를 더 깊이 묵상하게 되기 때문에 염려는 더욱 깊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바로 기도입니다. 기도하면 우리 마음 안에 믿음이 생겨나고 그 믿음이 염려를 몰아내고 우리 마음속에 평강으로 가득 채워주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염려 대신 기도’를 해야 합니다.

사람들의 인사 가운데 이런 말을 흔히 들을 수 있습니다. “염려해 주신 덕에 잘 지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인사를 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성경적인 인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마 6장에서 예수님께서 친히 강조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 할 수 있겠느냐...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그렇습니다. 우리는 나 자신을 위해서 염려하는 일을 해서도 안 됩니다. 또한 남들을 위해서도 염려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면 무엇을 해야 할까요? 기도입니다. 염려 대신 기도를 해야 합니다. 그래서 인사도 이렇게 해야 합니다. “기도해 주신 덕에 잘 지내고 있습니다.”

이제 본문을 다시 살펴보겠습니다. 우리가 믿고 기도함으로 우리의 염려를 다 주께 맡기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보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여기서 돌보신다는 것은 “관심을 가지신다”, “...에 마음을 쓴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피조세계에 대한 보편적인 관심이 아니라 그 문제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가지신다는 것입니다. 책임지시고 그 문제를 처리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번 성전재건축 과정에서 제가 또 한 번 깊이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전문가들에게 맡기는 것이 시간도 절약하고 돈도 절약하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목양실에 전기 스위치 위치를 옮겼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무리 궁리를 해 봐도 좋은 방안이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그냥 선을 밖으로 끌고 나와서 연결하자니 새 건물을 아름답게 단장을 해 놓았는데 눈에 거슬릴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전기 전문가라는 분에게 부탁했더니 잠깐 만에 해결을 했습니다. 천정 안에 어떻게 선을 연결하더니 감쪽같이 스위치 위치를 옮겨놓았습니다. 염려하지 않고 전문가에게 맡겼더니 정말 멋지게 해결해 놓았습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인생의 문제 때문에 염려하지 말고 주님께 다 맡기면 주님께서 친히 돌보시고, 친히 해결해 주셔서 우리가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처리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말씀은 명령입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 명령을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약속입니다.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이 약속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도 우리 마음속에는 끝없이 염려의 파도가 일어납니다. 그 때마다 모든 염려를 다 주께 맡기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주께서 돌보실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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