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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교회창립] 내 교회를 세우리니 (마 16: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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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교회를 세우리니 (마태복음 16:13-20)

매년 12월 첫 주일은 우리 교회가 이 지역에 세워지고 제26주년을 맞이하는 주일입니다. 영국 땅에 살고 있는 한인 디아스포라들이 주일마다 함께 모여 하나님을 예배하며 서로 섬기고 이웃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거룩한 기관으로 세워주심을 감사하는 주일로 맞이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주보에 복음성가곡 ‘이런 교회 되게 하소서’가사를 실었습니다.  교회설립 기념주일을 앞두고 말씀을 준비하다 이 찬송 가사의 내용이 문득 떠올라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싶어 오늘 주보에 올렸습니다.  그리고 저는 지난 주간 이 찬송을 반복하여 듣고 또 따라 부르며 설립 26주년을 맞이하는 우리 교회와 성도들이 이런 교회를 세워가려는 열망으로 가득하길 바라며 이 말씀을 준비했습니다. 

이런 교회가 되면 좋겠다는 바램은 우리 교회 뿐 아니라 이 땅에 세워진 모든 교회가 소원하는 바입니다. 모든 목회자들이 꿈을 꾸며 모든 성도들이 기대하는 교회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 꿈은 우리 마음에 있기 전에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에 있었으며 지금도 주님은 우리를 향해 이런 교회를 세워가라고 간절히 부탁하십니다.  예수께서 교회의 주인이시며 교회가 곧 당신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오늘도 평안한 중에 신앙생활하며 지금보다 더 행복한 교회 만들기를 꿈꾸고 있지만  지구 곳곳에는 목숨을 걸고 성경말씀을 읽고, 비밀 장소에서 예배 드리며 목소리를 낮춰 찬송 부르고 기도하는 교회와 성도들이 있습니다.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생명 얻음을 감사하여 가난과 질병, 억눌림과 핍박 중에도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사모하며 주님 다시 오시기를 고대하는 순수한 교인들과 교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위로와 도우심이 고난 중에 있는 이땅의 모든 교회와 성도들에 임하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찬송 가사처럼 사랑과 은혜가 충만하여 매번 모일 때마다 기쁨이 넘치는 교회가 있는가 하면 마음이 하나 되지 못하여 한 교회 식구들이 서로 반목하며 비판하고 싸우면서 깊은 상처를 주고 받는 아픈 교회들도 있습니다. 그 교회 교인들만 힘들고 아픈 것이 아니라 서로 사랑하지 못하고 갈라진 교인들을 지켜보시는 우리 주님이 가장 슬퍼하시고 아파하십니다.  상하고 깨어진 교회가 주님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한국 기독교 초기의 교회는 순결한 믿음을 지키기 위해 핍박을 받으며 순교자적인 정신으로 신앙생활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를 살았던 우리 선배들은 지금보다 기독교인의 수효가 훨씬 적었고 가난하고 핍박받는 교회였지만 모든 것이 풍성하고 사람도 많은 오늘의 교회보다 비교할 수 없이 행복하고 아름다운 신앙으로 교회를 세워갔던 분들입니다. 

1980년대 까지만 해도 2천년 세계 기독교 역사상 가장 빠른 시간에 복음이 뿌리 내리고 교회가 폭발적으로 성장했다고 자랑했고 또 이웃 나라 교회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던 한국의 교회가 어쩌다 이런 상황에 이르게 되었을까요?  어쩌다 하나님의 교회가 순결성을 잃고 불신자들에게 비난과 조롱의 대상이 되어버렸고 이단들이 공공연하게 교회로 들어와 성도들을 약탈하며 교회를 무너뜨리는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지금의 교회가 사회적으로 많은 활동을 하며 대외적인 힘도 있어 보입니다.  학벌 좋고 문벌 좋고 돈 있고 권력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려면 교회에 가야 한다는 말을 듣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한국교회의 생명은 이제 끝이 났고 장례식 치룰 일만 남았다는 비참한 평가를 듣고 있으며 그것도 교회 밖의 사람들로부터 들어야 할 지경에 이르렀습니까?이것이 한국 교회의 한 지체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자신에게 질문해야 하고 또 답해야 할 문제입니다. 
  
세상의 어떤 곳보다 정결하고 순수하며 따뜻해야 할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지탄을 받고 배척을 당하는 것은 사람들의 괜한 오해나 천박한 시기심 때문만은 아닙니다.  어쩌면 한국 교회가 이런 과정을 통과하며 자신을 돌아보고 진정으로 회개하며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는 기회가 될 수도 있습니다. 교회 안에 슬며시 들어와 암덩어리처럼 자리잡고 있는 더러운 죄악들을 하나 하나 잘라내야 합니다.  교회를 무너뜨리려고 끝없이 공격하며 잔인하게 물고 늘어지는 밖으로부터의 죄와 맞서 싸워야 합니다.  그때 찢기고 떨어져 나가는 아픔을 겪지만 지금보다 더 건강해지고 성숙한 모습으로 변화된다면 그것이 부끄러움이나 퇴보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당신의 몸을 친히 정결케 하시는 수술과정인 줄 알고 함께 아파하며 치료받아야 합니다.

지난 주에 황 장로님 가정의 초청으로 다음 달 초에 귀국할 정용출 형제 가족과 함께 저녁식사를 하면서 교회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귀국하면 꼭 집 주변의 좋은 교회를 찾아가 이곳에 있을 때보다 신앙생활 더 열심히 하라 권면하였습니다. 그런데 정용출 형제가 어떤 교회가 좋은 교회입니까? 조심해야 할 이상한 교회도 있습니까? 물을 때 대답하기 참 난감하였습니다. 귀국하여 정착할 지역에 대해 우리가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어떤 특정한 교회를 추천하기 쉽지 않았지만 장로님과 함께 신앙의 선배로서 이런저런 조언을 해주었습니다. 

좋은 교회를 만나라는 말은 했지만 과연 어떤 교회가 좋은 교회라는 말인가? 좋은 교회가 있다면 나쁜 교회도 있으니 조심하라는 뜻으로 권한 말은 아닌데 듣는 입장에서는 나쁜 교회는 가지 말라는 말로도 들릴 수 있겠다 생각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교회가 좋다 나쁘다 구분하는 것이 너무 추상적이고 광범위한 표현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다고 우리교회가 좋은 교회이기 때문에 한국에 가면 꼭 이런 교회를 찾아가야 한다고 말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사람이 많이 모인 큰 교회가 좋을까요, 아니면 사람이 적은 아담한 교회가 좋을까요? 설교가 좋고 찬양이 뜨거우며 기도가 뜨거운 교회일까요?그래서 사람들이 찾아와 많이 모인 큰 교회가 좋은 교회인 것 같은데 교회 밖에서 보는 평가는 또 다르기도 하니 과연 좋은 교회라는 기준이 무엇일까 혼란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주보에 소개해 드린 찬송시 ‘이런 교회 되게 하소서’에 나오는 좋은 점들을 다 가진 교회라면 더 없이 이상적인 교회라 여겨 저도 추천 꾹~ 하고 싶습니다. 어느 지역을 가든지 집 주변에 이런 모습을 가진 교회가 있다면 염려하지 않고 그 교회에 등록하라고 추천하고 싶습니다.

좋은 교회란 무엇일까요?출석하는 교회에서 상처 받은 어떤 교인이 좋은 교회, 완벽한 교회가 어디 있으면 거기 가야겠다 했더니 누군가 그 말에 명답을 주었습니다.  ‘혹시 그런 교회 찾거든 나에게도 알려주세요.  그런데 당신은 절대 그 교회에 등록하지 마세요.  당신이 등록하는 순간부터 그 교회는 더 이상 좋은 교회가 아닙니다.  지금 당신이 상처 받은 교회를 떠나면 그 교회가 어쩌면 당신이 없는 그 순간부터 좋은 교회가 될지도 모릅니다.’  좋고 나쁜 교회의 기준을 다른 사람, 다른 곳에 두지 말고 자신으로부터 먼저 살펴보자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읽은 성경말씀을 토대로 교회란 무엇일까?교회의 존재 목적은 무엇이며 교회 안에 있는 나는 누구인가?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말씀에서 찾아보면 좋은 교회에 대한 기준을 얻게 되고 그런 교회 되기 위해 내가 담당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도 알게 됩니다. 좋은 교회는 남이야 어찌 살든 상관 말고 나만 말씀대로 잘 살면 된다는 개인주의나 누군가 다른 사람들이 수고하여 만들고 나는 그 좋은 교회를 찾아가 좋은 환경 속에 편안히 신앙생활하면 되겠지 하는 방관자적인 자세로는 결코 이룰 수 없는 것입니다. 좋은 교회는 좋은 신앙고백을 하는 나와 이웃들이 모인 믿음과 사랑의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교회를 세우신 이래로 지금까지 교회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은 천차만별이고 본래의 목적과 정신에서 빗나간 때가 너무 많았습니다. 교회에 대한 오해는 불신자들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 있는 교인들에게 먼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교인들이 건강한 교회관을 갖지 못하면 건강한 교회를 이루지 못하고 도리어 세상 사람들로부터 지탄을 받는 종교단체로 전락하고 맙니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와 교회 아닌 것에 대한 바른 분별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오늘 읽은 본문을 보면 예수께서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들으신 후 ‘내 교회’를 세우겠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교회’라는 말이 사복음서에서는 바로 이곳과 마태복음 18장17절에 두 번 이렇게 딱 세번 나옵니다. 그리고 신약성경 사도행전과 서신서에 초창기 교회의 다양한 모습들이 등장합니다.  우리가 몸 담고 있는 오늘날의 교회는 바로 예수님이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들으신 직후에 선언하신 말씀을 기초로 사도들에 의해 예루살렘에 처음 설립된 교회와 동일한 정신과 목적 아래 세워진 주님의 교회입니다. 

교회란 무엇일까요? 교회가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하고 교회를 다니는 교인들이 의외로 너무 많이 있기 때문에 그동안 수없이 듣고 또 들었을 교회에 대한 정의를 오늘 또 반복하여 설명합니다. 예수님이 ‘교회’라고 하신 헬라어의‘에클레시아’는 부름 받은 성도들의 모임이라는 뜻입니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것이다 하신 것은 이스라엘 어느 동네에 있는 든든한 바위 위에 건물을 세우겠다는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만일 예루살렘 성전과 같은 특정한 건물을 염두에 두셨다면 ‘에클레시아’가 아니라 다른 말을 사용하셨을 겁니다.  

‘에클레시아’라는 말은 성경에서 처음 사용한 말이 아니라 당시 사람들이 사용하던 ‘집회’ ‘회의’‘모임’이라는 말입니다.  일반 헬라어에서는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 아테네의 ‘시의원 총회’를 ‘에클레시아’라 불렀습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시의회 의원은 시민들을 대표하여 의회라는 모임으로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신약성경이‘에클레시아’라는 용어를 ‘교회’로 차용했을 때 역시 부름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뜻이었습니다.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고백했던 베드로의 신앙고백과 동일한 고백을 하는 사람들을 세상으로부터 구별하여 불러내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게 하신 것이 교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세우시겠다 하신 ‘내 교회’는 예수님의 소유로 등기낸 건물이 아니라 성도의 모임, 거룩하게 구별된 공동체입니다. 

1세기 초기에 예루살렘에 있던 사람들이 집이나 회당 그리고 성전에 모여 예배하며 예수를 구주로 믿을 때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고 믿는 자의 수가 날마다 더해졌습니다. 이것이 예루살렘 교회의 시작입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인 어떤 큰 건물을 가리켜 ‘예루살렘교회’라 이름한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 지역에 산발적으로 흩어져 주의 이름으로 모여 예배하고 성도의 교제를 나누고 전도하는 공동체를 가리켜 ‘예루살렘에 있는 주님의 교회’라 불렀습니다.  바울 사도가 아시아와 유럽에 흩어져 있는 교회들에 편지를 보낼 때도 ‘로마에 있는’ 혹은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영국교회 건물을 빌려 예배 장소로 사용하는 우리 교회는 내 이름으로 등기된 예배당 건물이 없어도 교회라는 이름으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건물이 없어도 교회는 존재하지만 사람이 없으면 교회도 없습니다. 어제는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교회 건물이었는데 거기 모이던 사람들이 떠나가고 예배드리러 모이는 교인이 없을 때 오늘은 그 건물이 팔려 체육관이나 술집과 심지어 이슬람 사원으로 용도가 변경되는 영국교회 예배당들이 있습니다. 밖에는 십자가가 달려 있고 스테인글라스에 성화가 그려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성도들이 모이지 않고 술집이 된 건물을 가리켜 교회라고 부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교회가 건물이 아니라 모임이라는 말은 바로 그런 뜻입니다.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하고  찬송을 부릅니다. 그것처럼 그곳이 어디든 예수께서 나의 주인이 되시고 주님과 동행하며 주님의 말씀과 인도하심을 따르는 곳, 이런 고백을 함께 나누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라면 장소가 좋고 나쁨과 상관 없이 주님의 교회가 됩니다. 나라와 민족이나 국적과 지역, 남여노소와  빈부귀천을 초월하여 주의 이름으로 모인 그곳이 교회입니다. 지구상에 수많은 교파와 교회가 있지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교회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주님의 교회입니다.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비유하면 세상에 흩어진 모든 지역 교회는 머리되신 주님과 연결되어 하나가 된 작은 지체들입니다. 이 지역에 살며 예수를 믿는 한인들이 모인 우리 교회는 국제장로회 한인노회라는 더 큰 의미의 교회에 속했고 더 크게는 전 세계 지구촌에 존재하는 보편적인 교회 혹은 우주적인 교회의 아주 작은 한 부분입니다.  주일 예배 때마다 고백하는 사도신경의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라는 구절에 나오는 ‘공회’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한 몸이 된 보편적인 교회 혹은 우주적인 교회를 말합니다.  

이때 ‘거룩한 공회’라는 말이 영어에서는 ‘Holy Catholic Church’라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천주교 신자들이 ‘거봐라 너희들이 따르는 신앙고백에도 ‘카톨릭교회’라고 나왔지 않느냐? 그러니까 천주교가 정통이고 개신교는 분리주의자들이야’ 하고 큰소리 합니다. 그래서 어떤 영어 번역에서는 ‘거룩한 공회’라는 말을 로마 카톨릭과 구별하기 위해 우주적인 교회라는 뜻을 살려 ‘Universal Church’로 번역하기도 합니다.

우리 교우들 중에 많은 분들이 이곳에 오기 전에 몸담고 있던 지역 교회들이 있습니다.  그 교회를 모교회라 부르며 언젠가 내 교회로 돌아가야 하니 여기에서 나는 손님이고 잠시 거쳐가는 나그네야.  그러니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지내다 가야지 하고 맘먹고 오신 분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아닙니다.  내가 몸 담고 있는 동안 한국에 있는 모교회도 나의 교회이고 본 교회도 나의 교회입니다. 나의 모교회도 이 교ㅎ회도 예수께서 주인이신 같은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나친 개교회 중심주의로 무장된 한국의 교회들이 전혀 다른 몸인 것처럼 서로 경쟁하고 비판하며 견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신도시의 아파트 단지 상가 건물에 입주한 교회들을 보면 그런 현상이 금방 드러납니다. 층층마다 서로 다른 교단의 교회들이 경쟁적으로 입주하여 간판을 걸고 눈에 더 잘 뜨이라고 높은 종탑을 세우며 각종 현수막을 걸어둡니다.  출입구는 하나 뿐인데 교회는 서너 개, 그래서 주일 아침이 되면 각 교회의 안내위원들이 주보와 전도지를 들고 문앞에 나와 새로운 교인이  보이면 경쟁적으로 모셔가느라 열을 내는 이상한 풍경이 벌어집니다. 이게 교회인지 고객을 모으는 시장인지 구별이 안가는 그런 광경이 교인들에게만 어색합니까?그 지역의 불신자들은 그런 모습을 보고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 고개를 절래절래 흔듭니다. 이웃의 작은 교회는 문을 닫든 이사를 가든 관심없고 아무쪼록 우리 교회만 부흥하여 더 큰 예배당 짓고 큰 교회로 성장하면 하나님 기뻐하시겠지, 우리 교회가 좋은 교회니까 사람들이 몰려오고 하나님도 좋아하시겠지 한다면 과연 그게 옳은 생각일까요? 

거룩한 공회라는 개념으로 보면 세상의 모든 지역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삼아 각각 몸의 한 부분을 맡은 지체일 뿐입니다. 우주적인 교회라는 더 큰 교회의 의미에서는 큰 집에 살면서 서울과 부산이라는 방에서 영국이라는 옆방으로 잠시 옮겨왔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여기서 신앙생활을 하는 동안 이곳이 나의 교회이며, 주님이 나에게 맡기신 사명을 성실히 수행해야 할 주님의 교회입니다. 그리고 이곳을 떠나 또 다른 지역으로 이사하면 그곳이 내가 아끼고 사랑하며 주의 이름으로 섬겨야 할 주님의 교회입니다. 교우 여러분, 교회에 대한 넓은 이해와 시각으로 건강한 교회관을 가지고 신앙생활하시기 바랍니다.

좋은 교회 혹은 참 교회와 아닌 것을 구별하기 위해 우리가 항상 경계하고 조심해야 할 것은 교회의 주인이 예수 그리스도신가 아닌가라는 점입니다. 신앙고백을 멋지게 한 베드로를 다른 제자들 앞에서 높이고 칭찬하시며 내가 너 베드로의 교회를 세워주겠다 하시지 않고 나의 교회를 세우겠다 하셨습니다.  주인의 뜻,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겸손한 일군들이 서로 한 마음되어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기는 좋은 교회를 세워가시기 바랍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 주보에 실린 ‘이런 교회 되게 하소서’는 교회의 주인이신 주님의 뜻이 잘 반영된 은혜로운 찬송 가사입니다. 다음 주일에 이 찬송을 함께 불러보려고 합니다. 그리고 좋은 교회, 참 교회로 주인의 뜻을 순종하기 위해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그 구체적인 실천덕목을 다음 주일에 한 번 더 상고하기로 합니다. ‘에클레시아’ 즉 세상으로부터 부름을 받은 거룩한 나라의 시민, 시의원답게 세상을 향한 시의원의 사명을 성실하게 감당하는 거룩한 공회와 성도의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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