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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계시록의 6대 축복 (계 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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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시록의 6대 축복(계 1:1-3)

흔히 요한계시록을 무섭게만 생각하는데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말씀대로 사는 사람들에게는 무서운 책이 아니라 축복된 책입니다. 의외로 요한계시록에서는 복에 관한 말씀이 많습니다.
   
오늘 설교는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6대 축복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이 말씀을 들으시고 말씀대로 살아서 종말론적인 신앙으로 무장하기를 바랍니다. 
 
1.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지키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계 1:3에 보면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이 예언의 말씀’은 2절에서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요한이 보고 증언한 계시록의 말씀입니다. ‘읽는 자’는 그 당시 상황으로 볼 때 가르치는 자를 말합니다. ‘듣는 자’는 배우는 자를 말합니다. 그리고 ‘지키는 자’는 말씀대로 사는 자를 말합니다.
우리가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이 4가지 있습니다. 
 
1) 계시록을 가르치고 배우는 것은 위험한 일이 아니라 복된 일이라는 것입니다. 
   
요한 계시록은 비유가 많아서 자칫하면 잘못 풀 수 있기 때문에 위험하다고 생각하고 계시록을 아예 건드리지 못하는 목회자들이 많습니다. 저도 과거에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1절에 보면 계시록은 하나님이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의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요한에게 알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의 종들에게 보이시기 위하여 기록하게 하신 것이기 때문에 성령의 인도를 받는다면 절대 위험한 말씀이 아닙니다. 
 
2) 계시록을 가르치고 배우는 것은 교만한 일이 아니라 복된 일이라는 것입니다. 
   
목사님들 가운데는 장로교의 창시자인 칼빈도 계시록 주석을 하지 않았는데 우리가 계시록을 가르치는 것은 상당히 교만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저도 신학교 다닐 때 그렇게 배웠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종들에게 알게 하시려고 주셨다면 하나님께서 열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을 가르치는 일에 기준은 칼빈이 아닙니다.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3) 계시록은 닫힌 책이 아니라 성경의 사람들, 성령의 사람들에게 열린 책입니다. 
   
계시록은 닫힌 책이기 때문에 함부로 건드렸다가는 큰 일 날 것처럼 말하는데 아닙니다. 절대 닫힌 책이 아닙니다. 계 22:10입니다. “또 내게 말하되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 천사가 요한에게 한 말입니다. 계시록을 인봉하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계시록은 닫힌 책이 아닙니다. 성경의 사람, 성령의 사람에게는 열린 책입니다. 
 
4) 말씀은 아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는데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계시록의 내용을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켜야 합니다. 지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삶에 실제가 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계 22:7입니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으리라 하더라” 여기서 지킨다는 말은 실천한다는 의미입니다. 공동번역개정판에 보면 “이 책에 기록된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은 행복하다”라고 번역 되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붙잡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모든 것의 기준은 말씀입니다.
   
어떤 조종사가 비행학교에서 훈련을 받을 때였습니다. 훈련 교관은 늘 이렇게 강조했습니다. “비행기 조종석에 앉아서는 절대로 자신의 감각을 믿지 말라. 특히 악천후 속에서 비행할 때나 고도가 높아질 때, 공중의 한복판에서 항로를 이탈했을 때 더욱 자신을 믿지 말라. 그때는 계기판을 믿어라.”
   
다른 조종사들과 마찬가지로 이 조종사도 비행 감각에 대해서는 자신 만만해 했습니다. 훈련을 통해서 이미 비행 감각을 키웠기 때문입니다. 시험 비행 때도 감각에 의지하여 무난히 비행에 성공하였습니다.
   
이 조종사가 한번은 비행기를 조종하며 가다가 좋지 않은 일기를 만났습니다. 앞뒤를 분간할 수 없는 짙은 안개 속에 갇히고 말았습니다. 이 조종사는 자신의 비행 지식을 총동원하였지만 점점 더 오리무중이었습니다. 방향조차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비행학교 훈련 교관의 말이 떠올랐습니다. “계기판을 보아라. 계기판을 믿고 따라가라.” 자신이 느끼던 것과 계기판의 기록은 판이했습니다. 이 조종사는 계기판을 보면서 방향과 고도를 잡고 침착하게 조종을 해서 곧 이 상황을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인생길을 가는 동안 악천후와 같은 상황을 만날 때가 허다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내 지식을 의존하거나 감각을 따르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 인생길에 계기판은 내가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을 인생의 계기판으로 삼아 말씀이 지시하고 있는 방향으로 길을 잡아나가야 제대로 갈 수가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은 다시 오실 주님을 맞이하도록 성도들을 신부단장 시키는 말씀입니다. 저는 앞으로 요한계시록의 말씀을 가르칠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열심히 들으십시오. 그리고 저와 여러분이 함께 말씀을 지키도록 하여 마라나타의 신앙으로 무장합시다. 그렇게 되면 복이 있는 것입니다. 
 

2.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이 복이 있습니다. 
   
죽음이 복된 것은 영원한 세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계 14:13입니다.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이르되 기록하라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이르시되 그러하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이 말씀에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계 13장과 14장의 말씀을 종합해 보면 짐승과 짐승의 우상에게 절을 하지 않고 짐승의 표를 받지 않아서 순교하는 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재림하시기 전에 7년 대환난이 있게 되는데 믿는 자들이 환난을 통과하느냐 통과하지 않느냐에 대한 신학적인 논쟁이 있습니다. 저는 환난을 통과한다고 봅니다. 물론 모든 환난을 통과하는 것은 아니지만 7년 막바지까지 믿는 자들도 환난을 통과한다고 봅니다.
   
7년 환난 중에 전 3년 반 동안은 믿는 자들의 핍박이 눈에 띄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후 3년 반 동안은 극심한 핍박이 있을 것입니다. 계 13장에 보면 후 3년 반 동안에는 짐승이 일할 권세를 받아서 성도들과 싸워서 이기게 되고 각 족속과 백성과 방언과 나라를 다스리는 권세를 받게 됩니다. 이때는 짐승과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않으면 다 죽입니다. 그리고 666 짐승의 표를 받게 하는데 그 표를 받지 않으면 매매를 못하게 되어 엄청난 고난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계명과 믿음을 지키면 순교하게 되는데 이 때 순교하는 자들이 복이 있는 것입니다.
   
앞으로 신앙생활 하기가 점점 어려워질 것입니다. 특히 복음적인 신앙을 지키기는 더 어려울 것입니다. 우리는 죽음을 각오하고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적당히 타협하며 신앙생활을 하려다가는 짐승에게 경배하게 되고 666표를 받게 되어 영원히 멸망하고 말 것입니다.
   
저는 두 아들에게 가끔 환난에 대해서 말합니다. “어쩌면 우리 시대에 7년 대환난이 올 것인데, 그 때 타협하여 짐승의 표를 받으면 안 된다. 짐승의 표를 받느니 차라리 죽어야 한다. 잠시 편안하려고 타협하여 지옥에 가는 것보다 이 땅에서 고난을 당하더라도 천국 가는 것이 낫다”고 말해줍니다.
   
일본의 기독교 작가인 엔또 슈샤꾸의 작품에 [침묵]이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일본에 처음으로 천주교가 들어가던 때의 이야기를 엮은 소설입니다. 말 못할 박해를 받으면서도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끝까지 지켜서 순교해 가는 사람들, 약해서 굴복하고 배교하는 사람들, 이들을 지켜보는 신부의 고뇌와 회의 이런 것을 밀도 있게 그린 작품입니다. 예수 믿기로 작정한 사람들이 말로 표현하기조차 끔찍스러운 온갖 박해와 고문을 다 당하면서 예수를 부인하라는 협박을 받습니다. 이를테면 썰물 때에 바닷가에 십자가를 죽 세워 놓고 거기에 사람을 매어 둡니다. 밀물 때가 되어 바닷물이 밀려들어 오면 잠겨서 죽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부인하면 살 수 있는데도 수많은 사람들이 이처럼 순교해 갑니다. 

이 사람들에게 믿음을 심어 주었던 포르투갈 신부는 너무도 답답해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합니다. “능력을 나타내 주옵소서, 저들을 구원해 주옵소서”하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능력을 나타내시지 않습니다. 신부는 피땀을 흘리며 더욱 안타깝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왜 침묵하고 계시는 것입니까?” 그러자 그의 귀에 들려오는 뚜렷한 음성이 있었습니다. “나는 침묵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고통을 함께 나누고 있을 뿐이다.” 주님은 고통을 함께 하시고 있지만 당사자들에게는 주님의 침묵으로 느껴질 수 있습니다. 마지막 때에는 이런 침묵을 우리가 경험할 수도 있습니다.
   
순교는 인간적으로 비참한 죽음 같이 보이지만 영적 차원에서 보면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리고 하늘에서 가장 큰 상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 안에서 죽는 자가 복이 있는 것입니다. 
 

3. 깨어 옷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계 16:15입니다. “보라 내가 도둑 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 말씀은 계 19:8로 푸는 것이 합당합니다.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계 19:8에 비춰볼 때 옷을 지키지 못해서 벌거벗고 다니는 부끄러운 모습은 성도들이 옳은 행실을 버린 것을 말합니다. 여기서 옳은 행실이란 하나님의 말씀, 계명대로 사는 것인데 벌거벗고 다닌다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이광복 목사님은 자신의 책 [계시록 강해]에서 이 부분을 해석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금 얼마나 벌거벗고 다니는가? 주일도 모르고, 성경도 모르고, 기도도 하지 않고, 세상과 짝하고, 신앙도 잃어버린 것은 완전히 벌거벗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 때를 사는 성도들이 이 땅에서 좀 더 나은 삶을 사는 것에 삶에 우선순위와 목표를 둔다는 것은 비극이다”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신 30:19에 보면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내가 오늘 하늘과 땅을 불러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말씀대로 사는 것이 생명을 선택하는 것이고 복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것은 벌거벗고 거리를 활보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많은 교인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서도 벌거벗은 수치를 모르고 있습니다.
   
인본주의로 사는 것은 영적으로 벌거벗고 사는 것입니다. 내 생각, 내 감정을 하나님의 말씀보다 앞세우는 것은 영적으로 벌거벗고 사는 것입니다. 세상의 흐름을 따라서 적당하게 타협하고 사는 것은 영적으로 벌거벗고 사는 것입니다. 물질 때문에 말씀을 저버리는 것은 영적으로 벌거벗고 사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계명 즉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서 영적으로 벌거벗은 수치가 아니라 거룩한 옷을 입은 아름다운 신앙생활, 복된 신앙생활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4.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이 복이 있습니다. 
   
계 19:9입니다.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하기로”
   
여기서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은 문맥상 휴거된 성도로 보는 것이 합당합니다. 이 말씀 바로 뒤에 보면 주님께서 백마를 타고 지상재림을 하시는데 백마를 타고 주님을 따르는 하늘 군대가 나옵니다. 그 하늘 군대가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었는데 계 19:7,8에 보면 그들이 바로 어린양의 아내들입니다.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참석하는 자들은 계 20:4에 보면 보좌에 앉아서 천년 동안 왕노릇합니다. 그리고 계 22:4에 보면 그들이 영원한 천국에서 세세토록 왕노릇합니다. 그래서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참여하는 자들이 복이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주님 다시 오시는데 그 때, 지상에 남는 사람들이 한 사람도 없기를 바랍니다. 모두가 공중으로 들림 받아서 공중 혼인 잔치에 참석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공중 혼인잔치에 누가 참석합니까? 아무나 참석하는 것이 아닙니다. 계 19:8입니다.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깨끗한 세마포를 입어야 합니다. 옳은 행실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믿는다고 하면서 자기 마음대로 사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계명대로 사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기회를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무슨 기회입니까? 신부단장하는 기회입니다.
   
한 여행자가 스위스에 가서 아름다운 호숫가에 좋은 별장이 있는 것을 보고 출입문에 있는 벨을 눌렀더니 나이가 많은 관리인이 나왔습니다. 별장을 좀 구경할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들어오라고 해서 들어갔습니다. 정원과 별장 안 전체가 아주 깨끗하고 아름답게 잘 손질이 되어 있었습니다. 

여기에 몇 년 동안 계셨느냐고 물었더니 24년간 있었다고 했습니다. 별장 주인은 자주 오시느냐고 물었더니 그동안 4번 오셨다고 했습니다. 4번째 다녀가신 것은 언제냐고 물었더니 12년 전이라고 했습니다. 주인께서 그렇게 오랫동안 오시지 않은데 별장을 이렇게도 깨끗하게 잘 정리해놓았느냐고 물었더니 주인이 오늘 오실지 모르기 때문에 날마다 깨끗하게 손질해 놓고 기다린다고 했습니다.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는 그리스도인의 자세도 이러해야 합니다. 날마다 준비하고 항상 깨어있는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언제 다시 오실지 모릅니다. 저와 여러분은 주님이 다시 오시기전 어린양의 피로 두루마기를 빨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서 아름답게 신부당장하기를 바랍니다. 
 

5. 첫째 부활에 참여한 자들이 복이 있습니다. 
   
계 20:6입니다.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부활은 첫째부활이 있고 둘째 부활이 있습니다.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두 종류의 사람들입니다. 첫째는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이미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여 공중으로 들림을 받아서 공중에서 주님을 만나는 사람들입니다. 둘째는 주님이 재림하실 때 죽지 않고 살아 있다가 공중으로 휴거 되어 공중에서 주님을 만나는 사람들입니다.
   
살전 4:16,17을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17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이 복이 있는 이유를 계 20:6에서 말씀합니다.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
   
성경에 둘째 부활이라는 직접적인 표현은 없습니다. 하지만 순서상 둘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계 20:11-15에 보면 크고 흰 보좌 심판이 나옵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백보좌 심판입니다. 그 심판을 받을 자들은 첫째 부활에 참여하지 못한 자들입니다. 심판을 위하여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니 각 사람이 자기가 행한 대로 심판을 받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결국 불못에 던져집니다. 둘째 부활에 참여한 자들이 가는 불못은 지옥입니다.
   
여러분 천국과 지옥은 실재합니다. 상상의 산물이 아닙니다. 성경은 분명히 천국과 지옥이 있다고 말합니다.
   
한 친구가 그의 다정한 친구부부를 저녁식사에 초대 했는데 화기애애하게 식사를 마친 후, 차를 마시며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오늘 교회에서 설교시간에 목사님이 이런 설교를 하시더군! 곧 예수님이 오시는데 이를 재림이라고 하네. 그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느냐 하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모두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 천국으로 가지만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지옥의 형벌을 당한다네. 나는 그 사실을 믿지만 자네는 무신론자이니 믿지 않겠지? 그래서 하는 말인데 예수님이 오시면 그때 자네가 나의 재산을 다 가지게. 이 집도, 내 땅도, 은행에 예금되어 있는 돈도... 다 합하면 한 100억쯤 될 걸세. 차도 전부 자네가 그냥 가져. 각서를 써 달라고 하면 지금 당장 써주지”
   
친구 집에 초대를 받아 갔다가 횡재를 한 친구부부는 집으로 돌아와 그날 밤 좋아서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각서까지 받아 놨으니 빨리 예수님이란 분이 왔으면 싶었습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날이 갈수록 그 좋던 마음은 사라지고 친구가 자기의 모든 것을 한 점 아쉬움도 없이 선뜻 포기할 만큼 그 하늘나라가 그렇게도 좋은 곳인가? 하는 생각과 함께 지옥의 형벌을 당한다는 말이 사실처럼 믿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몇 날을 고민하던 친구부부는 드디어 전화 걸었습니다. “이보게 친구, 나에게 자네의 전 재산을 주지 말고 예수 믿고 구원받아 천국 가는 방법을 알려주게. 우리 부부도 천국에 가고 싶네.”
   
첫째 부활에 참여한 자들은 둘째 부활 즉 심판의 부활에 참여하지 않기 때문에 복이 있는 것입니다. 
 

6.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이 복이 있습니다. 
   
계 22:14입니다.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그들이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받으려 함이로다”
   
두루마기를 빠는 것은 더럽혀진 옷을 빠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회개를 의미합니다. 세상을 살다보면 죄를 범하지 않으려고 노력하지만 때로는 알게 때로는 모르게 죄를 범하게 됩니다. 마치 깨끗한 옷이 시간이 지나면 때가 묻어 더러워지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럴 때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 앞에 죄를 자백하고 예수님의 피로 죄사함을 받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 회개와 자백의 차이가 있지만 넓게 같은 의미로 죄사함이라는 태두리 안에서 보면 될 것입니다.
   
계 22:14에서는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에게 주어지는 복 2가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 2가지 복이 회개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해줍니다. 먼저는 두루마기를 빠는 자가 생명나무에 나아갈 수 있는 복을 받습니다. 생명나무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생명나무에 나아갈 수 있다는 말은 회개한 자만이 예수님과 교제가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또 하나 두루마기를 빠는 자가 받는 복은 성에 들어갈 권세를 받습니다. 여기서 성은 새예루살렘을 말합니다. 회개한 자가 영원한 천국에 들어갈 권세를 얻는 것입니다. 정리하면 회개한 자가 예수님과 교제할 수 있고 회개한 자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회개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요한과 예수님께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고 외치셨던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는 회개하지 않는 자에 대해서 상당히 부정적인 결론을 내립니다. 계 2:16에서는 회개하지 아니하면 주님께서 그와 싸우실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계 2:22에서는 회개하지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에 던지겠다고 말씀합니다. 계 3:3에서는 회개하지 않는 자에게는 주님이 도둑 같이 임하신다고 말씀합니다. 계 9:20,21,16:9,11을 보면 회개하지 않는 자들은 멸망을 당하게 됩니다.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고 천국을 소망하는 우리들은 철저히 회개해야 합니다. 마 5:8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회개하지 않으면 마음이 더러워서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영혼의 등불이 꺼지기 때문입니다.
   
어느 가정의 남편은 시각 장애인이었고 부인은 비장애인었습니다. 어느 날 늦은 밤에 급한 일이 생겨서 남편이 갑자기 그 일을 처리해야 했습니다. 밤늦게 길을 나서는 남편에게 부인은 등을 준비하여 손에 들려주면서 들고 가도록 했습니다. 그러자 남편은 자신은 시각 장애인이라 앞을 보지 못하고 언제나 눈을 감고 다니는데 무슨 등불이냐며 껄껄 웃었습니다. 

그러나 부인은 “당신에게는 등불이 필요 없겠지만 밤에 걸어오는 상대방 사람이나 자동차가 당신을 보지 못하면 부딪힐 수 있다”며 등불을 들고 가도록 말했습니다. 그래서 이 시각 장애인은 부인의 말대로 준비한 등불을 들고 길을 걸어갔습니다. 한참을 가는데 어떤 사람과 심하게 부딪쳐 등을 든 채로 넘어졌습니다. 그는 일어나면서 “여보시오 등불을 들고 가는 나를 보지 못했습니까?”라며 고함을 쳤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이 등불이 꺼졌다고 가르쳐주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날마다 회개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영혼의 등불이 꺼지지 않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죄를 씻는 것은 어린 양 되시는 예수님의 피 밖에 없습니다. 계 7:14입니다.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이들은 환난을 통과하고 천상에서 주님에게 예배할 자들입니다. 그들이 누구입니까?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된 자들입니다.
   
우리를 희게 할 것은 오직 예수님의 피 밖에 없습니다. 다른 어떤 방법으로는 절대 우리의 죄를 희게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을 의지하여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우리의 죄를 자백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흰눈처럼, 양털처럼 깨끗하게 씻어주실 것입니다. 요일 1:7입니다.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요일 1:9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저와 여러분은 날마다 회개하여 어린양의 피로 두루마기를 빨아 죄사함 받으시고 복된 신앙생활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계시록의 6대 축복을 살펴봤습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계시록의 말씀으로 충만하여 마라나타신앙으로 무장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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