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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추수감사절] 감사하는 능력 (살전 5: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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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하는 능력 (살전 5:16-18)

 
추수감사절에는 추수감사절이 생기게 된 유래를 생각해 보는 것이 좋은 일입니다. 추수감사절은 두 가지 역사 유래가 있습니다. 하나는 구약 시대 맥추절에서 유래가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키는 3대 절기 중의 하나로서 맥추절이라고 했는데 칠칠절, 혹은 초순절이라는 말로도 사용합니다. 이스라엘은 우리나라와 같이 쌀농사가 없기 때문에 보리농사의 수확기가 추수 감사절이라서 이름을 맥추절이라고 정한 것입니다. 

출애굽기 23장 16절 “맥추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둠이니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첫 번 추수한 보리나 밀을 가지고 빵을 만들어서 종교 의식을 행하는데 두 덩어리를 제사장이 들고 먹을 것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요제로 드리고 제사장들이 먼저 그 떡을 먹습니다. 그 의미는 이제 우리는 또다시 하나님으로부터 새로운 곡식을 먹을 수 있는 은혜를 누린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제사 의식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들은 시편 113편에서 118편의 노래를 부릅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 여호와께 서원한 것을 내가 갚으리로다. 내가 주께 감사제를 드리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이다. 너희 모든 나라들아! 여호와를 찬양하며 너희 모든 백성들아! 저를 칭송할지어다. 우리에게 행하신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크고 그 진실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이렇게 노래를 부른 다음 온 마을 사람들이 함께 공동식사를 나누고 끝이 납니다. 

우리나라도 옛날부터 추수감사절에 시루떡을 해서 예배를 마친 다음에 온 교우들이 한 덩어리씩 나누어 먹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예배를 마치고 나가면 떡이 준비되어 있으니까 꼭 잡수시기 바랍니다. 민수기 28장 26절에서 31절에 “칠칠절 처음 익은 열매를 드리는 날에 너희가 여호와께 새 소제를 드릴 때에도 성회로 모일 것이요 아무 일도 하지 말 것이며 수송아지 두 마리와 숫양 한 마리와 일 년 된 숫양 일곱 마리로 여호와께 향기로운 번제를 드릴 것이며 그 소제로는 고운 가루에 기름을 섞어서 쓰되 수송아지 한 마리마다 십 분의 삼이요 숫양 한 마리에는 십 분의 이요 어린 양 일곱 마리에는 어린 양 한 마리마다 십분의 일을 드릴 것이며 또 너희를 속죄하기 위하여 숫염소 한 마리를 드리되 너희는 다 흠 없는 것으로 상번제와 그 소제와 전제 외에 그것들을 드릴 것이니라.”라고 했습니다. 맥추감사절을 이렇게 드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식까지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구약시대와 지금은 방법이 좀 달라졌습니다. 유대인의 제물 종류를 보면 아주 끝이 없습니다. 신년에 드리는 제물, 속죄일에 드리는 제물, 맥추절에 드리는 제물, 무교절에 드리는 제물, 월삭에 드리는 제물, 안식일에 드리는 제물, 날마다 드리는 제물, 초막절에 드리는 제물, 십일조, 번제, 화목제…. 끝이 없습니다. 구약시대는 유월절, 초막절, 맥추절 3대 절기를 아주 철저하게 지켰기 때문에 거기에서 추수감사절의 유래를 찾을 수가 있고, 두 번째 추수감사절은 미국의 청교도 사건입니다. 

유럽은 우리나라와 달리 기독교 역사가 거의 다 1500년, 2000년이 됩니다. 예수님 시대에 벌써 바울이나 베드로가, 또 다른 제자가 직접 그 주변 나라들에게 복음을 전했기 때문입니다. 영국은 1500년에서 1600년 사이를 헨리 가문이 왕정 통치하였습니다. 헨리 8세 때 와서 왕궁과 교회 간에 큰 싸움이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문제의 발단은 헨리의 사생활 때문에 그렇게 되었습니다. 왕으로서 나라의 여자들이 얼마든지 있는데 형수와 결혼을 해버렸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이 왕의 결혼은 불법이라고 경고한 것이 싸움의 시작이 된 것입니다. 헨리는 아주 잔인스럽게 계속해서 부인을 바꿔갔는데 부인을 버릴 때는 반드시 누명을 씌워서 사형시켜 버렸습니다. 첫 번째 부인 캐서린도, 두 번째 부인 앤 불린도, 다섯 번째 부인 하워드도 모두 죽여 버렸습니다. 세 번째 부인 제인 시모어는 아기 낳다가 죽고 네 번째 부인은 금방 이혼했고, 마지막 부인 캐서린 파만이 왕보다 나중에 죽는 역사가 진행되었습니다. 

그래서 교회와 왕궁은 잔인한 신경전을 계속하고 이때 이것을 반대하는 수없이 많은 성직자가 처형을 당했습니다. 나중에 그 많은 부인들에게서 출생하는 많은 자녀가 다 죽고 하나만 남았습니다. 메리라고 하는 여자만 남은 것입니다. 메리 여왕은 어려서부터 아버지와 교회 갈등을 보면서 자라났습니다. 더 큰 문제가 생겼는데 영국 교회에서 메리는 사생아라고, 왕손이 아니라고 정의해버렸습니다. 그래서 메리는 어려서부터 영국 교회 지도자에 대한 한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합법성이 없는 자녀라고 해서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다 죽고 그래도 왕의 혈통이라고 남은 사람이 메리 밖에 없으니까 할 수 없이 그녀가 왕위에 오른 것입니다. 

그때 메리의 나이 37살이었습니다. 그녀는 사무친 자기의 그 개인 역사의 한을 풀기 시작했는데 왕이 되자마자 제일 먼저 한 것이 교회 지도자 핍박이었습니다. 영국에 가시면 스미스 필드라고 하는 순교 성지가 있는데 바로 그 자리에서 288명의 영국 교회 최고 훌륭한 지도자가 처형을 당해 죽었습니다. ‘피의 메리’라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영국 교회 가장 큰 비극으로 계속되었고, 이에 항거하는 신앙인들의 고통은 점점 커져가는 역사, 기독교 국가에서 기독교 핍박의 사건이 일어나는 일이 생겨버렸습니다. 

그 중에서도 이 청교도라고 하는 무리는 매우 철저하고 엄격한 규율적 삶을 살았으므로 왕궁과 가장 큰 마찰을 가져왔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차라리 이렇게 핍박받으며 사는 것보다는 이 땅을 떠나 신앙의 자유 개척지를 가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영국은 섬나라이니까 정처가 없이 좌우간 이 섬을 떠나자.’ 그래서 1623년 메이플라워호 사건이 터진 겁니다. 배를 하나 만들어서 ‘이 배를 타고 이 배가 정처 없이 가다가 닿는 곳에 하나님의 뜻이 있다고 생각하고 거기서 하나님을 자유롭게 섬기며 살자.’ 해마다 이때가 되면 미국의 매사추세츠 플리머스에서 대대적인 청교도 기념행사를 합니다. 

처음에는 이것이 매사추세츠 커네디커트에서 소규모적으로 첫 번 추수시에 드리던 감사예배가 소문이 나서 발전하고 퍼져서 마침내 미국 전역에서 이때의 조상을 생각하며 하나님께 드리는 추수감사절이 되었고, 링컨 대통령은 대통령령으로 추수감사절 선포를 해서 지금까지 지켜오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두 가지 역사 배경을 가진 것이 추수감사절의 유래입니다. 

그러면 오늘 같은 날 우리는 무엇을 하나님께 정말 감사해야 될 것인가 하는 그 문제를 놓고 현실적으로 우리 자신을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사람마다 감사의 조건과 상황은 모두 다릅니다. 그러나 전체 공동체적으로 감사해야할 것이 몇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을 생각해야 우리가 감사드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주시는 많은 복의 종류 가운데서 시대적인 복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그런 것을 생각해야 감사가 나옵니다. 

내가 아무리 능력이 있고 피나는 노력을 했다고 합시다. 그 노력의 대가는 시대가 맞아야 내게 복이 되는 것이지 이 시대에 복이 없을 때는 내 능력, 내가 가진 소유가 나한테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여러분! 20세기 70년의 시간은 사회주의 국가들의 암흑의 시간이었습니다. 그 시대에 거기에 태어난 사람들은 자신의 의사와는 관계없는 고난의 삶을 70년 동안 살았습니다. 우리나라 말에 “사람 팔자 시간문제”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러분! 일제 식민지 시대 젊은 청년들은 다 울분에 지쳐 살다가 죽었습니다. 그 시대에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손기정 선수는 세계에서 마라톤 1인자가 되어서 금메달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의 가슴에 태극기를 달지 못하고 일장기를 달았기 때문에 월계관을 쓰고도 고개를 숙이고 말았습니다. 그 시대에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시대가 그를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카터 대통령은 재임 시절에 모스크바 올림픽 보이콧을 선언했습니다. 그랬을 때 대한민국도 그 올림픽에 안 나갔습니다. 그런데 큰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그 시간을 위해서 젊음을 다 불태우고 훈련한 운동선수들은 “그러면 우리는 뭐냐? 내 인생은 이때를 내가 준비하면서 지금까지 훈련해 왔는데 이때가 지나가면 연령적으로 다시는 기회가 없는데….” 한 사람도 참석 못했습니다. 그때 올림픽을 준비한 선수들은 다 무효가 되었습니다. 

그 시절에 그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블라디보스토크에 여러 번 다녀왔습니다. 거기 고려인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분들의 말을 들어보십시오. “왜 우리는 그때 거기 있었는가?” 그때가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가 어느 시대에 살고 있습니까? 지금 한반도 역사 가운데 대한민국은 5천년 역사 가운데 가장 좋은 시대적인 삶을 살고 있습니다. 지금입니다. 저 같은 나이에 있는 사람을 6·25 세대라고 합니다. ‘왜 우리는 그때 거기서 태어나서 그토록 고난스러운 위험한 시절을 보내고 살았는가?’ 그때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런 6·25 세대가 요즘의 학생들을 보면 약 오릅니다. ‘어휴! 요즘의 아이들이 누리는 것은 하나도 보지 못하고 억울하게 살았다.’ 이런 생각이 듭니다. 

그 다음에는 공동체적인 복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북한에 산다면 북한 사람입니다. 방글라데시에 있다면 방글라데시 사람으로 살아야 합니다. 나 혼자 아무리 잘났어도 이 민족 공동체 속의 일원으로 살아야 합니다. 유럽의 역사를 보십시오. 한때는 스페인이, 한때는 나폴레옹이, 한때는 로마가, 오스만터키가, 영국이, 독일이, 소련이 쓸고 지나갔습니다. 역사의 주인공이 수시로 바뀌는 그 과정에서 약소국가들이 끝없는 고통을 받았지 않습니까? 그때 그 민족 가운데 하나였기 때문입니다. 참다못한 약소국가들은 죽음의 투쟁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1956년 헝가리 부다페스트 광장에 민족 폭동이 비로소 일어났습니다. 3천명이 총 맞아죽었고 1천명이 교수형 당했고, 3만 명이 장애인이 되었고, 30만 명이 외국으로 탈출하고 실패로 끝났습니다. 그러나 1960년대 체코슬로바키아 두부체코의 반란이 일어났는데, 지금도 우리가 그 시절 동부권의 소원을 기억하고 있는 말이 있습니다. 바로 “프라하의 봄은 오는가?”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때 반란도 실패로 끝냈습니다. 1980년대에 와서 폴란드 바웬사의 민주항쟁 역사가 마침내 불을 비추어 성공함으로써 그 사람이 대통령이 되고 이로 연결된 역사가 공산권 사회주의 국가의 붕괴가 되어 마침내 봄이 왔지 않습니까? 

제가 프라하에 갔을 때 맥도날드 햄버거 가게에서 점심을 먹다가 나이 많은 노인 몇 사람이 그 빅맥을 먹으면서 웃으면서 떠드는 말을 들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좋은 음식점에서 이렇게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이렇게 웃고 떠들 수 있는 이런 행복이 우리나라에 찾아올지 누가 알았겠소?” 껄껄대며 웃으면서 빅맥을 먹고 콜라를 마시면서 좋아하는 겁니다. 지금 우리들은 민족 공동체 속에 살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은 자유주의 민주 국가입니다. 

만약 내가 여기서 200마일만 넘어가서 거기서 산다면 그 민족 공동체 하나로 살아야 하지 않습니까? 이런 것이 우리들에게 감사의 조건이 된다는 능력을 우리 영적인 것으로 발견할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할 조건들이 생겨지는 것이지 그렇지 않으면 뭐가 감사합니까? 

감사 생활은 능력입니다. 능력 없는 사람은 절대 감사하지 못합니다. 이러한 환경에서도 감사를 모르는 사람은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환경이 좋아지면 오늘 추수감사절인데 이것은 물질 감사에 큰 뜻이 있잖아요? 감사하는 것도 늘려가야 합니다. 다른 것은 생활수준이 다 늘어 가는데 감사는 10년이 지나가도 그대로 있으면 안 됩니다. 좋은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저는 교회 집사님과 언짢은 시간을 할 수 없이 가진 적이 있습니다. 

이분은 맨 앞자리에 앉았는데 헌금 시간만 되면 이상한 행동을 하십니다. 헌금시간이면 헌금함에 헌금을 하면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1불짜리 한 장을 꺼내서 똘똘 맙니다. 뾰족하게 담배 마는 것처럼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헌금함이 지나갈 때 농구 슛하는 것처럼 던져서 쑥 들어가게 합니다. 앞에 앉기 때문에 뒤에 있는 사람이 다 보지 않습니까? 견딜 수가 없어서 한번 찾아갔습니다. “집사님! 다음 주일부터 헌금하지 마십시오.” “왜요?” “왜라니? 거지들도 집사님이 그렇게 던져서 주면 자존심 상해서 1불짜리 안 받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감격적 봉헌입니다. 

집사가 되어서 그렇게 헌금하시다니…. 내가 말을 잘못 했나요?” 양보를 안 하고 따졌습니다. 회개하셨습니다. “잘못했습니다. 목사님!”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이 다 여호와의 것이니라.” 우리가 다 하나님의 것 가지고 다 살지 않습니까? 그래서 감사가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능력 없는 사람은 절대 감사 생활 안합니다. 요한 웨슬리가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주머니가 열리지 않은 사람을 믿음 있다고 하지 말라.” 자유 대한이라고 하는 이 시대적인 축복 속에서 민족 공동체 안에서 21세기라고 하는 이러한 문명 혜택 속에서 많은 유익과 행복이 마련된 문화를 누리면서 감사의 능력이 있는 사람만 감사하지 그렇지 않은 사람은 안합니다. 

그 다음에는 우리 하나님의 백성이 감사할 가장 큰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영적인 복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택함을 입어서 이렇게 영적 은혜 속에서 존재하는 이 조건은 다 똑같습니다. 다소 다른 조건들이 내 마음에 충분치 아니하다 할지라도 가장 큰 것을 소유한 기쁨은 능력 있는 사람만이 갖는 감사입니다. 내게 어떤 권세가 없다 하여도 재벌이 못되어도 다소 건강 조건이 약할지라도 출세라든가 성취라든가 자녀들의 문제 등등 내 마음에 충분한 만족이 없을지라도 내가 이 영적인 은혜 속에 하나님의 자녀가 된 그 자리에 내가 있다는 것을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이 능력자입니다. 

우리가 부르는 찬송가 가운데 438장이 있습니다.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라고 했습니다. 초막에 살지라도 영적 은혜에 감사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궁궐에 있어도 이 능력이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환경에 있든지 초막 속에 있든지 궁궐 속에 있든지 아무 상관이 없이 나는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이 하나에 만족한다고 하는 신앙 고백을 곡조 붙인 것이 이 찬송이란 말입니다. 

갈보리 교인들에게 묻습니다. 이필재 목사가 여기서 10년 목회를 했는데 제 입에서 교회에 대한 불평을 단 한마디라도 하는 것을 들어보신 분 손 들어보십시오. 안 계실 것입니다. 제가 불평을 안했기 때문입니다. “갈보리 교회는 조건이 좋은데….” 저는 개척교회 할 때 더 기뻤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나 때문에 이 세상에 교회가 하나 더 생긴다는 기쁨 때문입니다. 해 본 사람만 압니다. 제가 5개 했습니다. 저는 후임자로는 갈보리교회에 처음 온 사람입니다. 

오늘 여기 바울 사도가 “항상 기뻐하라.”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슬플 때도 있지 어떻게 항상 기뻐합니까? 그러면 항상 기뻐하라는 이 성경 말씀은 왜곡된 것인가? 우리가 지킬 수 없는 것인가? 아닙니다. 항상 기뻐할 수 있습니다. 육신적 조건이 아닙니다. 영적 조건 때문에 항상 기뻐하는 것입니다. 육신적인 조건은 날마다 변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조건은 하나님이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이 없기 때문에 그 영적인 조건을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입니다. 

신체적 조건이 건강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면역력이 강해서 웬만한 바이러스는 문제가 안 됩니다. 이겨냅니다. 그러나 면역이 약한 사람은 항상 질병 감염이 되는 것 같이 영적으로 능력이 있는 사람은 어떤 환경이 와도 감사합니다. 불만 바이러스가 들어오지 않습니다. 어느 교회를 가도 감사합니다. 개척교회를 가도 상가 교회를 가도 감사합니다. 그런데 영적으로 면역력이 약한 사람은 아무리 좋은 교회에 가서 일을 해도 짜증만 부립니다. 불만만 많습니다. 

그런 교인도 많고 그런 목사도 있습니다. 자기가 목회하는 교회에 불만이 있으면 그 목사는 떠나야 합니다. 교인도 마찬가지입니다. 핍박시대는 모든 신자들의 신앙이 본질적으로 갑니다. ‘아! 하나님을 섬기는 이 한 가지 조건!’ 핍박을 받으면서도 ‘하나님만 잘 믿고 살면 될 텐데….’ 본질 하나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신앙의 자유시대가 되면 교인들이 비본질적으로 변합니다. 문제가 되지 아니할 것에 마음을 너무 많이 써서 문제를 일으킵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청교도는 무엇입니까? 본질적인거 하나만 생각했습니다. 영국은 그때 세계에서 제일 선진국이었습니다. “떠나! 여기 미련 둘 거 아무것도 없어. 무조건 배를 만들어서 여기를 떠나면 돼. 이 배가 닿는 곳에서 우리가 하나님께 마음껏 찬송하고 예배드리며 살면 그게 우리의 행복이야.” 이 본질 하나를 생각하고 갔는데 그 배가 자기들이 목적하지 아니한 미국의 매사추세츠 플리머스에 닿은 것입니다. “그러면 이게 하나님의 뜻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거기에서 제일 먼저 통나무를 찍어다가 예배당을 만들고 첫째 곡식을 “와! 먹을 것이 생겼어. 다 가져와.” 교회에 쌓아두고 하나님께 물질 감사를 드린 것이 이 추수감사절의 유래가 된 것입니다. 

제가 텍사스에서 목회를 할 때 공휴일이 되면 전 교인이 늘 찾아가는 바다가 있습니다. 갈베스톤이라고 하는 바닷가입니다. 전 교인 낚시대회를 했습니다. 제일 재미있어 했습니다. 외국에 가서 외롭고 할 것도 없습니다. 공휴일이면 “목사님! 이번에도 낚시대회 할거죠?” “그럼!” 고기가 얼마나 많은지 한 사람이 수백 마리씩 잡습니다. 그래서 제일 많이 잡은 사람 상주고 제일 큰 거 잡은 사람 상주고 제일 작은 거 잡은 사람 애석상이라고 해서 상주고 상을 수없이 만들어서 누구든지 상금 하나 받아가고 고기 한 바구니씩 다 잡고 고기가 얼마나 많은지 낚싯대 넣었다 하면 그냥 걸려 나옵니다. 재미있습니다.

그런데 그 갈베스톤 바닷가에 전설이 하나 있습니다. 그분이 돌아가셨는데 노인 한분이 항상 멸치를 잔뜩 상자에 담아가지고 와서 갈매기들에게 뿌려줍니다. 그 노인만 나타났다 하면 갈매기 수백 마리가 노인을 에워싸고 바글바글 합니다. 먹을 것을 주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물었습니다. “아니, 생활비에 멸치 값도 못 감당하겠네요.” “맞습니다. 나는 생활비 50퍼센트 이상이 멸치 값으로 나갑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하십니까?” “갈매기한테 입은 은혜 때문입니다.” 자기가 2차 대전 때 해군이었답니다. 배가 폭격을 받아서 침몰했다는 겁니다. “고무보트 하나 몸에다 걸고 바다에 떴는데 살 길이 있어야지요. 우선 배가 고파서 며칠이 지났는데 춥고 배고프고 견딜 수 없어서 나는 이대로 죽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난데없는 갈매기 하나가 날아가다가 피곤한지 자기 머리 위에 앉았다는 것입니다. 

“제 머리 위에 앉은 갈매기를 잡아서 생으로 뜯어먹고 제가 살았습니다. 그래서 구조선이 와서 제가 이렇게 멀쩡하게 살아서 인생의 후반기를 잘 누리고 살고 있습니다. 나를 살려준 그 갈매기를 기억하면서 제가 이 갈매기들에게 먹이를 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나 때문에 예수님이 죽었지 않습니까? 그래서 감격적인 감사를 그분에게 그리면서 우리가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그렇게 감사하며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 하나님 아버지! 오늘 추수감사주일에 왜 항상 기뻐하라고 했는가? 왜 범사에 감사하라고 했는가? 그 이유를 저희들이 깨닫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하는 이 영적인 한 조건에서 삶의 중심을 찾을 수 있는 능력 있는 감사인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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