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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대림절] 잃어버린 예수님을 찾읍시다 (눅 2:4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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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예수님을 찾읍시다 (눅 2:41-51) 

오늘부터 이 당에 구원자로 오신 예수님을 기다리는 대림절입니다. 이 대림절 기간을 통하여 우리의 주인 되시고 구원자 되시는 예수님을 깊이 체험하는 기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인도에 왕비를 극진히 사랑하는 왕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왕의 극진한 사랑을 받던 아름다운 왕비가 불행하게도 결혼 1년 만에 병으로 죽고 말았습니다. 왕은 왕비를 위해서 아름다운 무덤을 만들고 그 무덤에 묻었으나 너무나 슬펐습니다. 그래서 날마다 무덤을 찾아가서 왕비를 생각하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무덤에 가서 생각해 보니 무덤이 너무 쓸쓸해 보였습니다. 그래서 무덤 곁에 기념이 될 만한 것을 세워 왕비에 대한 사랑을 보충하리라고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동쪽에는 자기 자신을 상징하는 최고의 미남자 조각을 세우고, 서쪽에는 가문을 상징하는 호랑이 조각을 세우고, 남쪽에는 재력을 과시해서 호화스러운 집을 세우고, 북쪽에는 권력을 과시해서 성을 쌓았습니다. 1년이 지난 어느 날, 그곳을 거닐던 왕은 눈에 거슬리는 것 하나를 발견하고 신하에게 명령을 하였습니다. “무덤을 치워 버리라!”

이 이야기는 처음에는 그렇게 사랑했고 중요시 하던 것이 다른 것들이 생기고 나니까 그 처음 것들의 중요성을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일들을 우리 주변에서 얼마든지 보게 됩니다. 가난한 날에는 행복했던 부부가 돈이 생기고, 명예, 권력, 인기, 안정을 찾게 되니까 부부사이에 금이 가고 행복이 깨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신앙인들의 경우에도 처음 예수를 만나고 은혜를 받았을 때는 예수님을 중심에 모시고 살면서 행복하고 기쁨이 넘쳤는데, 세월이 지나 자기가 드러나고 재물과 권력이 들어나면서 예수님은 주변으로 밀려나는 경우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세주로 믿고 고백할 뿐 아니라, 예수님을 마음 중심에 모시고, 그 분과 함께 동행 하는 생활입니다. 그리고 한걸음 더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생활입니다. 그러나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잃어버리고, 예수님과는 상관없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일찍이 구세군의 창시자인 월리엄 부스목사님은 이러한 일들이 일어날 것을 예측하고 다음과 같이 경고 하였습니다. “장차 다가올 20세기를 맞이하면서 큰 위험은 종교는 있으나 성령이 없고, 교회는 있으나 예수가 없는 시대가 오리라”

이러한 현실 속에서 오늘 성경본문에 예수님을 잃어버린 사건은 우리에게 큰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12살 되던 해에 부모님과 함께 유월절 의식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을 방문했다가 모든 절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예수님의 부모들이 예수님을 잃어 버렸습니다.

오늘 말씀 속에서 예수님의 부모들이 예수를 잃어버린 것처럼, 우리도 실제 생활 속에서는 예수님을 잃어버리고 예수 없는 생활을 할 때가 많습니다. 열심히 교회에 출석하여 예배를 드리고, 예물과 헌신, 섬김의 삶을 살아가면서도 진작 중요한 예수님을 생활 속에서 잃어버리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더욱 안타까운 것은 예수님의 부모처럼 예수님을 잃어버리고 살지만,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사실조차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다는데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예수님과 함께 동행 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그리고 여러분의 마음속에는 항상 예수로 가득 차 있습니까? 특별히 주님 오심을 기다리는 이 대림절 기간을 맞이하여, 예수를 잃어버린 우리 삶의 부정적인 모습과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잃어버린 이유가 무엇인지를 깊이 생각하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잃어버린 예수님을 다시 찾고, 다시 찾은 예수님과 늘 동행하는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잃어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요셉과 마리아가 예수를 잃어버린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요셉과 마리아는 아이 예수가 없어졌다는 충격으로 큰 근심에 짓눌리면서 정신없이 예수를 찾아 헤매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을 다시 찾을 때까지, 사흘 동안 미친 듯이 쫓아 다녔을 것입니다. 밥맛을 잃었을 것이고, 편한 잠을 잘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사흘 후에 성전에서 예수를 만날 때까지 그들은 죽을 맛이 되어 허둥대고 다녔을 것이니 그 고통이 오죽 하였겠습니까?

예수님의 부모님들은 예수님을 잃어버린 것을 깨닫자 말할 수 없는 심적인 고통을 당했습니다. 본문 48절에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를 잃어버리니까 마음에 근심과 불안, 염려가 생기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근심을 하였다는 것은 평안이 없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곧 예수를 잃은 사람은 그 마음에 평안이 없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 중에 몸도 건강하고, 가정도 행복해 보이고, 사업도 잘하고, 친구들도 많이 있고, 세상살이에 아무런 불편이 없을 것 같은데, 그 마음속에는 전혀 평안을 누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예수가 아니면 그 어떤 것으로도 평안을 주지 못합니다. 그것은 예수님만이 참 평안의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잃어버리면 기쁨을 다 잃어버립니다. 아무리 부요하고 넉넉한 삶을 산다고 할지라도 예수 없는 삶은 우리에게 근심과 염려를 갖다 줍니다. 잠시도 기쁠 수가 없습니다. 그 고통이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절대로 예수님을 잃어버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부모들이 왜 예수를 잃어 버렸습니까? 오늘 본문에 보면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1. 예루살렘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다가 예수를 잃어버렸습니다. 

43절에 ‘그 날들을 마치고 돌아갈 때에’라고 했습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곳입니다. 성전은 하나님이 임재해 있는 곳이요, 예배의 중심입니다. 신약의 성전은 바로 지금의 교회입니다. 이 교회는 성도의 신앙생활의 중심이며 핵심입니다. 

마리아와 요셉이 예수님을 잃어버린 것은 그들이 성전을 떠났을 때였습니다. 예루살렘에서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하나님 중심, 신앙중심에서 인간중심, 세상중심으로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중심의 신앙생활을 해야 할 우리 신앙인들이 세상중심으로 살아가면 당연히 실패와 위기를 만날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잃어버리는 가장 큰 이유가 교회를 떠날 때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버릴 때 타락하기 시작함을 알게 됩니다. 비록 교회가 완전치 못해도 교회는 주님의 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예수님이 거하시는 성전입니다. 교회를 떠나면 곧 예수님을 잃은 고아가 됩니다. 성도는 어떤 경우에도 교회를 떠나서는 안 됩니다. 

꽃이 흙을 떠난 필 수 없고, 물을 떠난 물고기가 살 수 없듯이 교회를 떠난 신앙은 유지할 수가 없습니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열매를 맺듯이, 좋은 교회에 신앙의 뿌리를 잘 내리는 성도가 믿음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예수님을 성전에 가두어 두고 생활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주일날 거룩한 모습으로 하나님의 성전에서 예배를 드리고 집으로, 세상으로 나갈 때는 하나님과 주님을 성전에 가두어 두고 나 혼자만 빠져나가는 것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를 잃어버리고 세상으로 나가면 그 결과는 분명합니다. 사랑하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은 항상 교회 중심, 신앙중심,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 갈 수 있기를 기도드립니다.


2. 예수를 잃어버린 이유는 예수님에게 관심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유월절에 성전에 올라가거나 내려갈 때 남자는 남자끼리 여자는 여자끼리 갔다고 합니다. 긴 여행길에 서로가 수다를 떨면서 갑니다. 여자들은 남편 흉도 보고, 자식 자랑도 하면서 갑니다. 남자들은 정치얘기도 하고, 사업이나 직장얘기를 하면서 갑니다. 그 사이에 아이들은 엄마와 아빠 사이를 왔다 갔다 합니다. 

그러니까 엄마는 아빠하고 가겠지 생각할 수 있고, 아빠는 엄마하고 가겠지 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동네 친구들이나 친척들하고 동행하고 있겠지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룻길을 내려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결국 요셉과 마리아는 ‘당연히 어딘가 있겠지’라는 막연한 생각과 무관심 속에 예수님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우리가 화초를 가꾸더라도 아침저녁으로 물을 주고 관심을 기울려야 합니다. 배추 씨를 뿌렸다고 해서 저절로 다 잘 자라는 것 아닙니다. 아침저녁으로 달팽이를 잡아 주어야 하고 가물면 물을 주어야 하고 잡초가 있으면 뽑아주고 거름을 주고 하면서 정성을 다하여 가꾸어야 제대로 자라는 것입니다. 

어머니는 사랑하는 자식을 위해서 깊은 염려와 관심을 가집니다. 얼굴빛이 창백해지면 어디 아프지 않니 하면서 묻습니다. 밥을 제대로 먹지 못해도 어디 아픈 것이 아닌가 하면서 깊은 관심을 가지고 돌보아 줍니다. 식사를 적게 해도 자식의 건강을 걱정합니다. 

남편은 아내의 머리 스타일부터 입는 옷에까지 생각을 하고 깊은 관심을 가지고 충고합니다, 아내는 남편의 넥타이에서부터 양말에 이르기까지 관심을 가지고 준비해 줍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이 세상가운데 우리가 살아가면서 우리가 해야 할 것들, 하고 싶은 것들이 많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시선, 우리의 관심은 당연히 예수님에게 두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금방 예수님을 잃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어떤 것에 관심하고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이제 우리들의 관심을 예수님께 집중해야 할 때입니다. 우리 관심의 우선순위를 예수님께 두어야 합니다. 삭개오가 자신의 관심이 변화된 후 삶이 변하고 구원의 소식을 들었던 것처럼, 우리 관심의 0순위를 이제 예수님께 두고 우리 할 일을 마땅히 한다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될 것입니다.

히 12:2절에는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히3:1절 말씀에는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한마디로 예수님에게만 관심을 두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어디를 바라보고 계십니까? 여러분의 마음속에는 무엇에 관심이 있습니까? 여러분은 예수를 깊이 생각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예수님만 바라보고 있습니까?

이제는 우리의 영적인 시각을 세상에서 하나님과 주님에게로 돌리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속에 예수님으로 가득 채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교회 모든 성도님들은 영적인 눈을 우리의 푯대이신 예수에게 고정시키고 좌우로 치우치지 않는 믿음의 삶을 살아 가시를 바랍니다.


3. 예수님을 잃어버린 이유는 예수님이 함께 있는 줄로 착각했기 때문입니다.

44절에 보면 ‘동행중에 있는 줄로 생각하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도 신앙생활을 하면서 많은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마 19장에 보면 한 부자청년이 예수님에게 와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그러자 예수님은 ‘계명들을 지키라’ 고 하였습니다. 이 대답에 부자청년은 서슴없이 ‘네가 모든 계명들을 지켰다’고 자신 있게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자 다시 예수님은 부자청년을 향하여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빈손으로 나를 좇으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이 말씀에 부자청년은 어떻게 행동했습니까? 부자청년은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돌아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부자청년은 자신이 추구하던 영생의 방법을 발견하였지만 결국은 영생을 소유하지 못했습니다. 이 부자 청년을 통해 한 가지 중요한 신앙의 교훈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부자 청년의 외형적인 모습만을 본다면 우리는 이 청년이 ‘영생에 대해 많은 관심과 영생을 갈망하고 있구나’ 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 부자 청년의 주된 관심사는 세상의 재물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자기 자신은 영생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세상적인 것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살아가지만 예수님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예수를 잃어버리고도 이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나는 항상 예수와 동행하는 삶을 살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을 잃어버리고 예수 없는 공허한 삶을 살고 있으면서도 예수님과 함께 동행하는 것으로 착가하고 있는 성도들이 있다면, 이 시간 잃어버린 예수님을 다시 찾아 빨리 영적인 착각에서 벗어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어떻게 잃어버린 예수님을 찾을 수 있습니까? 

본문 45절에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부모들은 마음이 갈급했습니다. 그들은 성전으로 돌아갔습니다. 마침내 예수님을 성전에서 만났습니다. 예수님은 성전에서 하나님과 갚은 대화를 나누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이 계셔야 할 곳은 성전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머무시는 곳은 성전이요, 교회입니다. 

어머니 마리아가 묻습니다. 본문 48절입니다.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며 찾았노라" 예수님의 대답이 무엇이었습니까? 49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가만히 생각해보십시오. 신앙생활을 하면서 어디에서 예수님을 잃어 버렸습니까? 만약 잃어버린 예수님을 찾으려고 한다면 어디서 찾아야 하겠습니까? 당연히 교회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쉽게 찾을 수 있는 길을 두고 자기가 아는 곳을 먼저 갑니다. 자기의 지식에 따라 인맥을 동원하고 권력에 의존하고 재물이나 명예나 또는 예술과 문화와 같은 세속적이고 인간적인데서 예수를 만나려고 애를 씁니다. 예수의 부모는 자기 아는데서 만나지 못했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집으로 나아오면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도들은 하나님의 집인 교회로 나와서 성경 말씀을 듣기도 하고 읽기도 하는 가운데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이 있어야 할 곳은 어디입니까? 하나님의 사람들이 진정으로 있어야 할 곳은 어디입니까? 바로 아버지의 집, 하나님이 계신 교회가 바로 우리들이 있어야 할 신앙의 자리여야 하고, 내 삶의 현장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씀이 살아있고, 성령의 역사가 있고, 하나님의 축복이 있는 내 아버지의 집이 바로 우리들의 삶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소크라테스가 물가를 걷고 있을 때였습니다. 어떤 젊은이가 그에게 다가와 "선생님, 제가 당신의 제자가 될 수 있을까요?" 라고 물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물속으로 계속 걸어 들어갔습니다. 그 청년도 따라 들어가면서 반복해서 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물이 가슴에 차는 곳에 이르렀을 때 그 청년을 향하여 돌아섰습니다. 그리고 그 청년의 머리를 꽉 붙잡아 물속으로 힘껏 밀어 넣었습니다. 이 청년이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때까지 그의 머리를 눌렀습니다. 한 참후에 그 청년은 숨을 헐떡거리며 떠올랐습니다.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청년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젊은이, 자네가 공기를 원하는 만큼 진리를 원할 때 내 제자가 될 수 있을 것이오"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도 우리가 삶속에서 숨이 차서 공기를 갈급 하는 다급한 심정으로 찾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찾기에 갈급해 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대림절 첫째 주일입니다. 이번 대림절 기간을 통해서 잃어버린 예수님을 다시 나의 삶의 가운데로 찾아놓는 기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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