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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가 너희에게로 오리라 (요 14:1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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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너희에게로 오리라 (요 14:18-24)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것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겠음이라.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14:18-20)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가룟인 아닌 유다가 이르되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요14:21-24)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고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18) 주님은 우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부모 없는 고아가 얼마나 불행할까요? 저는 어느 책에서 고아였던 김 호걸 씨의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는 유년기에 부모 밑에서 자랐습니다. 싸리문 있는 시골 집에서 친구들과 논두렁으로 뛰어 다니면서 즐거운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어머니와 아버지가 다투고 가정불화가 생겼습니다. 부모의 갈등이 마침내 자식을 버리는 결과가 됐습니다. 아버지는 그를 데려다 딴 사람 손에 맡겼습니다. 처음에는 가끔 와 보더니 마침내 발길을 끊었습니다. 그래서 그를 데리고 있던 사람에게도 버림받고 고아원 신세가 됐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보호자 없이 뛰놀던 그는 어느 겨울날 사고를 당해 두 눈을 못 보는 장님이 됐습니다. 

나이 들면서 맹인학교에 다니게 되었는데 늘 외톨이였습니다. 사람이 싫어졌습니다. 자신을 버린 부모가 원망스럽고, 앞까지 못 보는 자신이 원망스러웠습니다. 앞을 보지 못하면 가족이나 있든지, 가족이 없으면 눈이라도 보였으면 하는 생각을 늘 했습니다. 가끔 그리워지는 것은 부모가 아니라 어려서 기어 다니던 누이동생의 모습이었습니다. 

그의 주변 장애인 가운데는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지만, 교회도 부모 갖춘 사람이나 다니는 것으로 생각하고 멀리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부르셨습니다. 그는 피아노 조율을 배웠기 때문에 조율하러 다니다가 교회와 인연을 맺게 됐습니다. 

어느 날 찬송가를 귀로 듣고 피아노를 치는데 목사님이 이 소리를 듣고 그에게 반주를 해 보라고 권했습니다. 이런 인연으로 마침내 주님을 영접했습니다. 그는 혼자 성경을 읽던 중에 놀라운 말씀을 대하게 됐습니다.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시27:10) 

정말로 마음에 와 닿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래 내 부모는 나를 버렸다. 그런데 하나님은 나를 버리지 않으시는 구나!” 그는 주님을 영접했습니다. 그는 지금도 늘 기도합니다. “내 부모는 나를 버렸습니다. 그러나 주님만은 나를 버리지 마소서!”
  
저는 6.25로 말미암아 유복자로 늘 외롭게 컸습니다. 형제자매 갖춘 애들이 참으로 부러웠습니다. 지금은 저도 환갑이 지나 상당히 체념하고 있지만, 젊었을 때는 아버지를 꼭 만나고 싶었습니다. 전화번호부에서 아버지 성함을 찾아 무조건 돌려 본 적도 있습니다. 만나서 감격하는 꿈도 자주 꿨습니다. 저는 어머니의 헌신적인 사랑과 보살핌 속에서 자랐습니다. 결혼해서 세 아이들의 아버지 노릇도 열심히 했습니다. 지금은 아이들도 다 결혼해서 손자가 다섯 명입니다. 그래도 아직 어딘가 살아 계시다면 얼굴이나 한번 뵈었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합니다. 하물며 고아들의 심정이야 오죽하겠습니까? 요즘도 TV를 통해서 부모를 찾는 해외 입양아들이 많습니다. 자기를 버린 부모지만 그렇게 보고 싶어 합니다.  
  
18절 말씀에서 주님은 우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뒤집어서 생각하면 주님이 떠나시면 인생은 고아라는 뜻입니다. 육신의 부모가 없으면 육신의 고아가 되듯이, 영적인 부모가 없으면 영적 고아가 됩니다. 세상에서 부모 없는 불행은 말로 형언할 수 없습니다. 헐벗고 굶주립니다. 거처 없이 떠돌아다니고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합니다. 어려운 일이 있어도 도와줄 사람이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힘든 것은 마음의 고통입니다. 항상 외롭고 방황합니다. 자기의 형편을 하소연할 데가 없습니다. 위로받지 못하고, 넘어져도 격려 받지 못합니다. 

영적 고아는 육신적 고아보다 훨씬 더 비참합니다. 자기가 온 곳을 모르고 갈 곳도 모릅니다. 인생이 뭔지 모릅니다. 고독합니다. 평생토록 안식처를 찾아 헤매다가 불현듯 죽음이 다가 오면 준비도 안 된 채로 지옥에 떨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의 고아는 될 수 있을지언정 영적 고아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인생들의 아버지이신 그리스도의 품으로 들어오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우리와 함께 사시는 하나님

그러면 주님은 부모로서 우리 삶에 얼마나 깊이 관여하실까요?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14:18-20) 

평생 가족, 영원한 가족이 되는 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지상 생애뿐만 아닙니다. 영원히 함께 사십니다. 여름에 해수욕장에 가면 안전 요원이 높다란 망대에 앉아 사람들을 살핍니다. 혹시 물에 빠진 사람이 보이면 뛰어들어 구조합니다. 하나님께서도 그런 식으로 하늘 의자에 앉아 우리를 관찰하실까요? 성도들에게 긴급한 문제가 생기면 멀리서 달려오실까요? 하나님은 긴급 시에만 나타나는 안전 요원이 아닙니다. 매 순간, 항상 우리와 함께 살고 계십니다.  
  
야곱은 형과 원수지고 도망쳐서 밧단아람으로 가는 도중 길가에서 홀로 노숙을 했습니다. 어느 곳인지도 모르는 낮선 땅에서 홀로 지새워야 했습니다. 몹시 외롭고 두려웠습니다. 들짐승이 물어갈 수도 있습니다. 강도나 도적에게 목숨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걱정 속에 잠을 청했는데 꿈속에 하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하늘이 열리고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하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하늘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서 동서남북에 편만할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창28:13-15) 

아무도 없는 빈들에서 하나님은 야곱과 함께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의 결혼 문제에 깊이 관여하셨습니다. 자녀 출산에 개입하셨습니다.(창29:31) 야곱의 20년 머슴살이에 함께하셨습니다. 야곱의 품삯을 찾아 주시고 재산을 모아 떠나게 하셨습니다.(31:11-13) 아무도 야곱을 해치지 못하게 하시고(31:24),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에 함께하셨습니다.(32:1,30) 야곱이 노숙하면서 처음 서약했던 벧엘까지 함께하셨습니다.(35:1) 하나님은 야곱의 전 생애에 매 순간 참여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 생애 전반에 참여하십니다. 전쟁터에서 골리앗과 싸우는 소년 다윗에게 이길 힘을 주셨습니다. 파사의 왕실에서 다니엘의 식탁과 건강을 지키셨습니다. 꿈을 해석하는 지혜를 주셨습니다. 고아로 자란 에스더가 왕비로 간택되도록 함께하시고, 유대인 모르드개가 하만의 음모에서 벗어나도록 함께하셨습니다. 풍랑 속에 바다를 건너는 바울과 시종 함께하시고, 독사에 물려도 죽지 않게 하시고, 감옥에 갇혀도 벗어나게 하셨습니다. 요셉의 생애에 참여하시되, 형제들과의 관계 중에 관여하시고, 종으로 팔려가는 일에 개입하시고, 시위대장의 집에서 종살이 하는 중에 개입하시고, 감옥에서 죄수로 있는 동안에 개입하시고, 바로의 꿈을 해석하게 하시고, 총리가 되게 하시고, 총리 직을 수행하는 일에 개입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성도들 속에 임하시는 방식은 구약시대와 신약시대에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첫 번째 차이점은 외형적인 것과 내재적인 차이입니다. 구약 시대에 하나님은 주로 눈에 보이게 임하셨습니다. 그러나 신약 시대에는 보이지 않게 심령 성전에 임하십니다. 두 번째 차이점은 집단과 개인의 차이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민족 단위의 공동체에 임하셨지만, 신약 시대에는 집단이 아닌 각 사람 속에 개별적으로 임하십니다.  
  
우리는 주님과 생존적인 관계에 있습니다. 신약에서 예수님과 성도들 사이의 관계를 비유적으로 나타낸 곳이 몇 군데 있습니다. 요한복음 15장에는 예수님을 포도나무 줄기로 성도들은 가지로 비유하셨습니다. 나무 가지가 줄기에서 떨어져 나오면 영양분을 받지 못해 말라 죽습니다. 성도들은 예수님으로부터 생명을 공급받아야만 생존합니다. 생존적인 관련성입니다. 

요한계시록 3:20에는 예수께서 우리의 마음 속에 들어 오셔서 함께 먹겠다고 하셨습니다. 매일같이 한 식탁에 참여하는 사람은 가장 가까운 가족입니다. 주님은 우리와 가장 가까운 가족이 되겠다고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0장에는 주님은 목자요 우리는 양이라고 하셨습니다. 양은 목자의 보살핌이 없으면 다 잡혀 죽고 맙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과 이런 인격적인 관계 속에 살고 있습니다.  
  
오늘 내가 가장 고민하는 문제가 뭡니까? 하나님은 지금 그 문제 중에 임하여 계십니다. 오늘 내 인생의 문제를 주님과 함께 풀어가세요. 주여, 내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주님은 지금 내 삶 속에서 어떤 일을 하고 계십니까? 하나님, 알려 주세요! 신앙은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주님은 아버지 안에 계십니다. 우리는 주님 안에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 안에 계십니다. 성 삼위 하나님이 우리와 거처를 함께 하십니다.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20)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23하) 

마치 혼자 사는 듯이 괴롭게 살지 마세요. 하나님과 함께 사는 사람답게 능력 있고, 힘 있는 모습으로 사세요.  


세상에는 숨기고 성도에게는 나타내시고

주님께서 임마누엘을 말씀하셨을 때, 유다(다대오)는 주님께 질문했습니다.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게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22) 

주님은 우리에게 나타내시고, 우리와 거처를 함께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저 안 믿는 사람들에게도 좀 나타내 보이시면 얼마나 좋을까요? 예수님이 메시아이신 위력을 세상 권력자들 앞에 나타내 보이시면 얼마나 효과가 클까요? 

오바마 대통령이나 시진핑 주석을 굴복시키고, 유엔 사무총장이나 IOC위원장을 굴복시킨다면, G7이나 OECD나 유럽 공동체 의장에게 타나내신다면 전 인류가 굴복할 것 아닙니까? 아무리 전도해도 뺀들뺀들 듣지 않는 사람들에게 날벼락을 치신다면, 이 사회의 흉악한 범죄자들을 모두 암으로 죽게 만든다면, 다 주님을 왕으로 모실 것 아닙니까? 예수님 당시, 로마 총독이나 헤롯 왕을 뒤집어엎으신다면 주님의 나라는 속히 이루어질 것 아닙니까? 그런데 이런 생각이 근본적으로 잘못된 생각입니다.
  
첫째로, 세상 나라는 본질상 예수를 왕으로 모시지 않습니다. 세상 나라가 어떤 나라입니까? 세상 나라는 돈이 지배합니다. 권모술수가 지배합니다. 위선, 사기, 자기 과시, 폭력, 강압이 지배합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면이 다 그렇습니다. 정의보다는 불의가 지배합니다. 

매스컴이란 괴물이 사람들의 허영심을 자극하고, 잘못된 가치관을 만들고 전파합니다. 이 세상은 판이 더럽습니다. 놀자 판, 먹자 판, 춤 판, 과시 판, 욕망과 자극의 판, 살인강도 판, 도적질 판, 사기꾼 판. 한 마디로 개판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가 제아무리 신령한 능력을 보인다 해도 결코 왕으로 받들지는 않습니다.  
  
실제로 주님이 세상에 오셔서 얼마나 많은 이적을 보이셨습니까? 그래서 주님을 왕으로 모신 사람들이 있습니까? 세상도 예수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지만, 주님도 이런 나라의 왕이 되는 것을 거부하셨습니다. 주님은 빌라도 앞에서 이렇게 선언하셨습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36) 

주님은 세속 권세를 지배하러 오신 분이 아닙니다. 더러운 이 세상은 종말에 사라지고 멸망합니다. 일찍이 하나님은 이렇게 경고하셨습니다. “어찌하여 열방이 요란하며 민족들이 허사를 경영하는고?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 기름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며, 우리가 그 맨 것을 끊고 그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도다. 하늘에 계신 자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저희를 비웃으시리로다. 

그 때에 분을 발하며 진노하사 저희를 놀래어 이르시기를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시리로다... 그런즉 군왕들아 너희는 지혜를 얻으며 세상의 관원들아 교훈을 받을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그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않으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다 복이 있도다.”(시2:1-5,10-12) 

세상 나라는 없어집니다. 그러나 주님의 나라는 영원합니다. 의롭습니다. 선합니다. 사랑의 나라입니다. 질서와 화목의 나라입니다. 유다가 기대한 것은 유대 민족 국가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세우시고자 하신 것은 영원한 하나님 나라입니다.
  
둘째로, 세상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볼 수 있는 영의 눈이 없습니다. 주님이 보이지 않으니 주님을 왕으로 섬기지 못합니다.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19) 

조금 있으면 세상이 주님을 다시 못 본다고 하셨습니다. 가까이는 육신적으로 십자가에서 죽으셔서 장사될 모습을 가리킵니다. 또한 부활 승천하셔서 사람들 곁을 떠나실 주님의 모습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이 보이지 않는 주님이 제자들에게는 계속 보이리라고 하십니다. “너희는 나를 보리니”(19) 

이 말씀은 현재형 동사로서(qewrei'tev) 확실히 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제자들은 그 말씀 그대로 부활하신 주님을 두 눈으로 목도했습니다. 그러나 이 보리라는 말씀은 단순히 부활하신 육신을 보리라는 말씀만이 아닙니다. 그들이 항상 보리라는 말씀인데, 이것은 영적인 눈으로 계속 본다는 뜻입니다.  
  
그들이 이렇게 주님을 계속 볼 수 있게 된 까닭을 주님은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19) 고 하셨습니다. “내가 살았고”(19) 하신 말씀은 현재형이고, “너희가 살겠음이라”(19) 하신 말씀은 미래형입니다. 

육으로 죽으신 주님은 부활하셔서 영원히 계십니다. 그리고 육으로 살아 있는 제자들은 주님의 살리는 영을 받아서 영원히 살 것이니 주님을 영원히 봅니다. 오순절 날 성령이 강림하셔서 제자들의 마음에 임하셨을 때, 제자들은 부활의 능력을 가지게 됐고 영의 눈을 뜨게 됐습니다. 

이것은 대단한 변화입니다. 처음 갈릴리에서 제자들이 부름을 받았을 때, 그들은 3년 6개월 동안이나 주님과 숙식을 함께 했어도 주님을 제대로 보지 못했습니다. 그런 제자들이 성령을 받음으로 오히려 마음 깊이 주님의 모든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육신의 주님은 눈에서 사라졌지만 영적으로 그들은 주님을 더욱 확실히 보게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육신의 주님을 볼 때 실족했지만 오히려 승천 후에 성령을 받고나서, 영으로 주님을 보게 된 후에는 더욱 담대한 증거자가 됐습니다.
  
유다는 왜 세상 사람들에게 주님을 나타내지 않느냐고 물었습니다. 우리도 때때로 구약시대처럼 하나님께서 눈에 보이도록 나타나셨으면 합니다. 그러나 실상 주님이 세상 사람들에게 나타나지 않으신 것은 아닙니다. 나타나셨지만 세상 사람들이 주님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은 것 뿐입니다. 

또한 그들의 영안이 어두워서 주님의 신성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왕은 오직 예수님뿐입니다. 다른 왕들은 다 버리고 예수님만 왕으로 모셔 들이세요. 세상은 예수님을 보지 못합니다. 영의 눈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을 봅니다. 성령을 받고 영의 눈을 떴습니다. 임마누엘의 주님을 육안으로가 아닌, 영의 눈으로 매일매일 보고 따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어떻게 사시겠습니까?

하나님의 품을 떠난 인생은 영적 고아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인생들을 하나님 품으로 인도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주님은 멀리서 우리를 지켜보는 감독자가 아닙니다. 우리와 항상 함께 사십니다. 언제 어디서나 우리가 사는 곳에 함께 계십니다. 형통의 때에든지 고난의 때에든지.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이 아무리 자신을 나타내도 믿지 않습니다. 왕이 너무 많아서 도저히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지 못합니다. 또한 세상 사람들은 영의 눈이 닫혀서 그리스도를 볼 수 없습니다.  
  
우리는 남은 생애를 영적 고아로 살 수는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곁에 계신 주님, 우리와 함께 사시는 주님을 왕으로 모셔 들이세요. 그리고 성령을 받아서 매일매일 신령한 눈으로 주님을 바라보시면서 주님의 가족으로 따라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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