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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가 서로를 필요로 하는 이유 (전 4: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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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서로를 필요로 하는 이유 (전 4:9-12)


세상에서 아름다운 모습들이 많이 있지만 그 가운데 하나를 이야기하라고 한다면 엄마가 서 있을 때 치맛자락을 붙잡고 거기에 기대어 있는 아이의 모습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가 하면 젊은 청춘 남녀가 사랑에 빠져서 등을 맞대고 밤이 새도록 별을 바라보면서 있는 모습도 아름다운 모습일 것입니다.  결국 우리 모두는 누구나 다 기댈 곳을 찾고 있습니다.  한자에서 사람 인(人)자도 누군가에게 기대야 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기댈 곳을 주지 않으니까 다 넘어지는 것입니다.  혼자 서려고 하니까 인생이 힘들고 삭막해 지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 모두는 기댈 사람이 필요합니다.  아무도 혼자 설 수 없고, 혼자 살아갈 수도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 2007년 9월 11일에 일어났던 알카에다의 테러에 의해 미국 세계무역센터가 무너지는 비극적인 사건의 참사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당시 유나이티드 93호기에 타고 있었던 토드 비머는 비행기에서 전화 교환수에게 비행기가 테러리스트에게 납치된 것을 알린 후 자기 부인에게 사랑의 안부를 전합니다.  그리고 침착하게 주기도문으로 기도하고 옆에 뜻을 같이 한 몇 사람에게 "행동개시"를 소리치고 비행기를 추락시켜 더 큰 비극을 막았던 사람입니다.  당시 뉴스위크지는 9·11 테러 1주년을 맞아 토드 비머의 아내 리사 비머에 대한 이야기를 소개했었습니다.

금발에 푸른 눈, 가냘픈 몸매가 천사 같은 그녀는 9·11 테러가 일어나기 전에는 그저 평범한 가정주부에 불과했지만 미국의 영웅이 되었던 인물입니다.  그때 한 월남전 참전용사는 그녀에게 자기가 받은 소중한 훈장을 보냈고, 미국의 부시 대통령은 의회와 국민 앞에서 임신복을 입고 의회에 나온 그녀에게 희생자 전원을 대표하여 경의를 표했습니다.  그녀는 남편이 남긴 재산과 보험금, 위로금을 모두 합하여 희생자들 중 어린이들을 돕기 위한 토드. M. 비머 장학 재단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그녀가 펴낸 남편과 그녀의 이야기 "Let's Roll"이란 책은 출간되자 마자 100만부가 팔리는 베스트 셀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뉴스위크지는 이런 그녀의 화려해진 공적 생활의 이면에 가려진 한 미망인, 어머니, 외로운 여성으로서의 삶을 취재해서 많은 감동을 주었습니다.

당시 뉴스위크지에 소개된 그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녀가 집에 돌아올 때 더 이상 남편은 집안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만 침실 탁상에 놓여진 비행기 잔해에서 수거된 남편 토드의 시계만이 9월 11일 날짜를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종종 세 아이를 혼자 키우는 것이 너무 힘들게 느껴질 때 그녀는 2층 침실에 올라가 벽장문을 연다고 합니다.  거기에는 아직도 남편의 옷가지가 그대로 걸려 있습니다.  거기서 리사 비머는 자주 남편의 옷가지를 만지면서 "어떻게 이렇게 나를 버려 두고 당신은 혼자 가버렸단 말이요"하면서 흐느껴 운다고 합니다.

그러나 뉴스위크지는 미망인 리사 비머가 정말 위로 받고 살아가게 된 두 가지 방법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일주일에 한 번씩 그 사건으로 희생을 당했던 사람들이 함께 만나는 자원그룹에 참여하여 슬픔과 사랑을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만나게 된 한 여성이 있었는데 그녀의 남편 스티브도 역시 세계무역센터가 붕괴될 때 목숨을 잃었던 사람입니다.  이 남편의 부인이었던 질 골드스타인이라는 이름을 가진 여성과 친구가 되어 매주 월요일 저녁에 만나 교제하는 모임을 가져왔다고 합니다.  그것이 지나간 1년을 버틸 수 있게 만들어준 힘이었다고 그녀는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함께 만나 아빠 없이 자녀들을 키우는 어려움을 이야기합니다.  아버지 없이 맞이하는 아버지날에 어떻게 해야 할지를 이야기합니다.  미국에서는 아이들이 생일파티에서 아빠에게 전화하는 습관이 있는데 이 시간을 어떻게 모면하는지를 함께 나눈다고 합니다.  또한 이 여인들을 측은히 여기고 접근하는 남자들을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에 대한 방법까지 함께 나누기도 합니다.  함께 울고 함께 웃고 함께 기도하는 이 만남이 지나간 1년을 버틸 수 있게 하는 힘이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었던 전도서 본문에는 바로 이런 이야기가 기록되고 있습니다.  본문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그들이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오늘 본문의 마지막 메시지는 이렇게 끝이 납니다.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오늘 본문의 초점은 우리들에게 있어서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는 그 이유를 교훈하고 있습니다.  인생의 길에서 홀로 걸어가는 길이 아니라 두 사람이, 아니 그 이상의 사람들이 함께 걸어가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혼자만이 살아갈 수 없는 그래서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서로를 필요로 하는 이유 그 첫째는, 다시 일어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인생의 길을 걸어가다 보면 누구나 예외 없이 넘어지는 순간을 경험하게 됩니다.  실제로 길에서 넘어집니다.  태어나서 얼마나 많이 넘어졌습니까?  한 번도 넘어지지 않고 이 자리에까지 걸어온 분이 계십니까?  사람은 어느 누구도 넘어짐의 자리에서 예외가 있을 수 없습니다.  문제는 넘어지느냐, 안 넘어지느냐가 아니라 넘어질 때 얼마나 빨리 다시 일어날 수가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다시 일어서고자 할 때 나의 일어섬을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곁에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전도서 10절의 마지막 부분에 보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일으킬 사람을 곁에 두고 살아가는 사람은 역설적으로 행복한 사람이라는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여기에 바로 결혼 생활의 행복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본문은 꼭 결혼 관계만을 전제로 해서 주신 말씀은 아닙니다.  인생의 길에서 내가 넘어졌을 때 넘어진 내 손을 붙잡아 일으킬 수 있는 친구를 가지고 있는 행복을 보다 넓은 의미에서 본문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전도서의 기자는 신앙의 사람으로 신앙공동체 안에서의 교제의 중요성을 강조할 의도로 이 말씀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교회가 교회로서 존재하는 중요한 기능 가운데 하나를 '코이노니아'라고 말합니다.  '코이노니아'라는 말은 쉽게 '교제'라는 말로 번역을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코이노니아는 친교라는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삶에 동참하는 것을 말합니다.  내가 이웃과 교제한다는 것은 그 이웃의 삶의 한 복판에 뛰어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특별히 그의 삶의 고난과 아픔을 함께 짊어지고 함께 나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교회는 인생의 길을 걷다가 넘어진 상처받은 사람들을 치유하기 위해서 예수의 이름으로 부름 받은 공동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교회 생활을 제일 잘 못하는 사람은 교회에까지 와서 다른 사람들을 비난하고 정죄하는 사람입니다.  성경은 "그리스도 안에서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지 않아도 삶이 힘들고 버거워 쓰러져 있는 사람들을 또다시 짓밟고 정죄하는 어리석음이 우리에게는 결코 없어야 합니다.

1960년대 초에 미국에서는 소위 히피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많은 젊은이들이 집을 뛰쳐나가고 기성세대들의 질서에 반항하면서 거리를 방황했습니다.  그들은 술과 마약 속에 자신들의 인생을 던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 길에 인생의 답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거기에서 삶의 공허를 경험한 젊은이들이 어느 한 순간부터 다시 교회로 돌아오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젊은이들의 마음을 만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수많은 히피들이 머리를 길게 내린 채로 교회를 찾아와서 교회 문을 노크하고 교회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미국의 교회는 목회자를 비롯해서 대부분의 교인들이 당황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밀려들어오는 젊은이들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당시 대부분의 교회는 이렇게 반응을 했습니다.  긴 머리를 내리고 교회 안으로 들어오려는 젊은이들에게 교회에 오려면 머리를 깎고 오시오.  옷을 단장하고 새 옷을 입고 오시오.  먼저 회개하고 그리고 교회로 오십시오.  교회는 이렇게 말하면서 젊은이들을 차갑게 대해 버렸습니다.  교회 문을 노크했던 젊은이들이 다시 교회 바깥으로 뛰쳐나갔습니다.  "교회도 우리를 받아주지 않는구나."  그들은 거리에 나가서 기타를 치며 멀리 있는 교회의 종탑을 바라보아야만 했었습니다.

이때 이런 상황을 안타깝게 여겼던 한 분의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누군가, 그리고 한 교회에서만은 이런 젊은이들이 마음대로 찾아올 수 있도록 이들을 받아주는 교회가 필요하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상처받은 그 모습 그대로 그들을 받아주는 교회, 이런 교회를 개척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상처받은 젊은이들이 비판받지 않고 적응할 수 있는 교회를 개척하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 교회를 시작하면서 히피 젊은이들에게 전단지를 뿌렸습니다.  그 전단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우리 교회는 당신의 있는 모습 그대로 당신을 환영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당신의 손을 따뜻하게 잡아줄 것입니다."

이 한 번의 메시지를 듣고 셀 수 없는 수많은 무리의 젊은이들이 교회로 밀려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이 교회가 갈보리 채플이라는 교회요, 이 목사님이 유명한 척 스미스 목사님이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교회는 거룩한 사람들이 모여서 자기의 의를 자랑하는 곳이 아닙니다.  초대교회로부터 하나님의 교회는 세상에서 버림을 받고 상처받은 사람들이 와서 치유 받고 용기를 얻었습니다.  이 땅이 암울했던 구한말과 일제 강점기에 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받고 희망 없이 살아갈 때 저들을 치유하고 삶에 희망을 주었던 곳은 바로 교회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반나절을 걸어가야 하는 먼 거리의 교회임에도 불구하고 기쁜 마음으로 달려갔습니다.  믿지 않는 불신자들은 교회를 가리켜 민족교회라고 했습니다.

당시에 저들은 알고 있었습니다.  교회에 가면 그들이 정죄받지 않고 용납될 수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저들은 알고 있었습니다.  교회에 가면 그들은 사람들에게서 공격받지 않고 깊은 사랑을 경험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저들은 압니다.  거기에 가면 그들은 넘어졌던 자리에서 다시 한 번 일어설 수 있다는 사실을 압니다.  민족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어서 희망이 없는 암울한 시기를 보내고 있을 때 뜻 있는 젊은이들은 교회로 찾아와서 민족의 꿈을 키웠습니다.  그래서 저들은 비록 자신은 믿지 않지만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을 보면 교회에 가보라고 권했습니다.  그래서 이 땅의 교회는 부흥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교회는 세상에서 고단한 삶에 버거워 지친 인생들을 더 짓밟는 곳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자신의 의를 드러내면서 정죄하고 비판하는 곳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서로를 세워주고 용납하고 사랑하는 곳입니다.  그래서 이 하나님의 교회에서 다시 일어섬을 경험하는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 그곳이 바로 하나님의 교회요, 우리가 세워가야 할 교회입니다.  저는 진실로 우리 교회가 그런 교회가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그리고 기대합니다.  우리가 서로를 필요로 하는 이유, 그것은 다시 일어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서로를 필요로 하는 두 번째 이유는, 서로 격려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왜 인생의 길에서 서로를 필요로 합니까?  이 길이 너무나 춥고 험하기 때문입니다.  혼자의 힘으로 헤쳐 나가기에는 너무 힘들고 버거운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본문 11절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본문 11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또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저는 여러분이 이 말씀을 읽고 너무 에로틱한 장면을 연상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연상하지 말라고 하면 꼭 더 연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기록된 팔레스틴은 사막지대에 속합니다.  사막은 낮에는 열사의 태양이 내려 쪼이는 뜨거운 곳이지만, 해가 떨어지면 춥습니다.  밤이 되면 뼛속까지 에이는 무서운 추위가 있는 곳이 사막입니다.  그래서 사막지대를 걸어가는 나그네들은 밤이 되면 친구를 만들고 서로 몸을 부비면서 등을 마주해야만 추위를 잘 견뎌낼 수 있다고 합니다.  물론 가족이나 동성끼리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이 시작되는 9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낫다."  사막지대의 유목민들은 과거에 길가는 동안에 그 사막지대를 무사히 건너는 중요한 방법은 좋은 친구를 만나는 것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혼자서 걷는 길이 둘이 함께 걷는 것보다 나은 예외적인 상황도 있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전도서의 기자는 지금 보편적으로 보다 나은 삶의 길을 우리에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전도서를 읽어보면 전도서에서 자주 반복되고 강조되는 단어 가운데 하나가 "보다 나음"이라는 단어입니다.  다시 말하면 전도서가 기록된 중요한 목적은 보다 나은 삶이 무엇인가, 보다 나은 인생의 질이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소개하는 데 있습니다.  다시 한 번 오늘 본문이 시작되는 9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본문이 끝나는 13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13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가난하여도 지혜로운 젊은이가 늙고 둔하여 경고를 더 받을 줄 모르는 왕보다 나으니."  여기에서도 보면 보다 나은 삶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보다 나은 삶을 소개하고 있는 것이 전도서의 목적 가운데 하나라고 할 것입니다.

보다 나은 삶, 그것은 둘이 하나되어 함께 걷는 인생 길입니다.  그리고 두 사람의 친구가 인생의 길을 함께 걸어가며 서로 격려하면서 살아가는 인생이 보다 나은 삶이라고 전도서는 우리들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격려하면 우리는 무엇보다 인생에서 용기를 얻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영어에서는 격려라는 단어와 용기라는 단어가 같은 단어입니다.  '격려'를 영어로 'encouragement'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en이라는 단어와 그 다음에 courage라는 단어가 바로 따라옵니다.  다시 말해서, 격려는 용기입니다.  격려를 받으면 우리는 용기를 얻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모두에게는 격려가 필요합니다.  무엇보다 우리가 서로를 필요로 하는 중요한 이유는 서로를 격려함으로써 용기를 주고, 용기를 받기 위함에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믿음의 공동체인 교회를 주셨다고 믿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성령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교회는 약한 자를 강하게 합니다.  어리석은 자를 지혜롭게 합니다.  그것은 바로 성령께서 우리들을 끊임없이 격려하시고 용기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사탄은 정죄하고 짓밟습니다.  그나마 있던 용기마저도 빼앗아버립니다.  그래서 아주 못 일어나게 만들어버립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모인 이곳은 성령께서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서로에게 격려하는 일에 인색하지 마십시오.  서로가 고슴도치 인생이 되어서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는 어리석은 인생을 살지는 마십시오.  그것은 결코 하나님의 교회에서 함께 하는 믿음의 사람들이 할 행동은 아닌 것입니다.  끊임없이 서로를 격려하고 용기를 불어 넣어주십시오.  그것이 하나님의 교회가 이 땅에 존재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일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아무리 힘들고 바빠도 매 주일마다 주님의 전에 나와서 예배하며 함께 교제하는 이유라고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넘어졌던 인생의 길에서 다시 일어서야 합니다.  그러나 일어섰다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일어서서 우리가 마땅히 가야할 그 길을 향해 계속해서 걸어가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계속해서 그 길을 걸어갈 수 있는 에너지를 어디에서 공급받아야 합니까?  그것이 우리에게 친구가 필요한 이유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들에게 교회가 필요한 이유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주일에 교회에서 뿐만이 아니라 주중에도 믿음의 형제들이 소그룹으로 모여서 삶을 나누는 만남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왜 우리들은 서로를 필요로 할까요?  잊지 마십시오.  그것은 서로 격려를 받기 위해서입니다.

세 번째로, 우리가 서로를 필요로 하는 이유 그것은 함께 승리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격려의 결과는 격려 받는 자만을 유익하게 하지는 않습니다.  격려는 격려 받는 자와 격려하는 자를 다 함께 유익하게 합니다.  우리가 이웃을 격려할 때, 혹은 내가 어떤 사람을 격려할 때, 나를 통해서 그 사람이 격려 받는 것을 보면 그를 격려하던 내가 또한 격려를 받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격려는 궁극적으로 두 사람을 함께 승리자로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반면에 많은 사람들에게서 소외당하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리고 많은 사람들에게서 비판을 받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는 틀림없이 다른 사람들을 그렇게 비판하고 비난하는 사람들입니다.  자기가 비난하고 비판하는 것을 그대로 돌려 받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것이 황금률입니다.  황금률이 얼마나 진리입니까?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다른 사람들에게서 존중되기를 원하십니까?  물론 원하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먼저 다른 사람을 존중하십시오.  다른 사람들이 여러분을 친절하게 대해 주기를 원하십니까?  원하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이 먼저 다른 사람을 그렇게 대하십시오.  여러분이 다른 사람들에게서 받기를 원하는 그 모습 그대로 먼저 다른 사람들을 대하십시오.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신 황금률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변하지 않는 진리입니다.

우리는 20년 전만 해도 시장에서 경쟁자를 바라보는 시각은 철저하게 흑백논리였습니다.  혹은 아군과 적군의 논리였습니다.  나에게 있어서 당신은 적이고, 내가 이기기 위해서 당신은 패배해야 한다는 논리와 시각이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적 마인드를 가진 리더십 이론가들이 출현하면서 시장에서도 함께 잘 되자, 함께 같이 승리자가 되자는 소위 "함께 더불어 승리하는 전략"(win-win strategy)이 소개되면서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변화된 사고의 배후에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스티븐 코비 박사와 같은 사람들의 영향력이 중요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더불어 함께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길을 함께 걸어가야 합니다.  한 사람이 승리자요, 한 사람이 패배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저는 함께 더불어 승리하는 대표적인 인간관계가 있다면 그것이 부부관계라고 생각합니다.  부부 싸움을 하면 승리자가 있습니까?  그들 중에 한 사람이 패배자가 됩니까?  아닙니다.  두 사람 다 패배자입니다.  그러므로 건강한 부부관계, 아름다운 부부관계는 두 사람 다 승리자로 만들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들의 이웃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웃을 경쟁자로 만들지 말고 협력자로 만들어보십시오.  나와 더불어 경쟁하는 사람이 아니라 나와 더불어 함께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서 일하는 협력자로 내 이웃을 바라볼 수가 있다면 세상은 얼마나 달라지겠습니까?  그리고 둘이 함께 손을 잡는다면 거기에서는 새로운 에너지가 창출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을 요즘 소위 시너지 효과라고 합니다.  상승효과라고 말합니다.  윈-윈 효과 말입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지금으로부터 약 3,000년 전에 이미 이 시너지 효과를 우리에게 증언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본문 12절의 말씀입니다.  본문 12절의 말씀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전도서의 기자는 두 사람의 관계에 있어서 협력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두 사람은 공동체의 최소 단위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전도서의 기자는 꼭 두 사람만을 말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 사람도 연합하여 함께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네 사람도, 다섯 사람도, 그 이상도 연합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 이상의 세 사람이 연합할 때 그 연합은 더 강해질 수 있다, 세 겹 줄은 끊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 있어서 어떤 성경학자는 아주 은혜가 되는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두 사람이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믿음으로 함께 하면 거기에 주님이 오신다.  그러면 주님과 두 사람은 세 겹 줄이 되고, 그 세 겹 줄은 결코 끊어지지 않는다."  은혜가 되지 않습니까?

저는 이것이 매우 성경적인 주장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마태복음 18장 20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두 사람이 정말 믿음으로 함께 한다면 거기에 주님이 오십니다.  그리고 주님과 우리가 함께 한다면 우리가 무엇을 두려워하겠습니까?  우리는 끊어지지 않는 견고한 세 겹 줄이 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저는 이것이 바로 세 겹줄의 견고한 교제의 모습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오늘 설교를 시작하면서 들려드렸던 리사 비머와 질 골드스타인은 둘 다 상처 입은 여인이었습니다.  두 사람 다 남편을 잃어버린 외로운 미망인이 되었습니다.  세상적으로 말하면 두 사람 다 패배자가 되어야 마땅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은 함께 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일주일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만나기로 했습니다.  월요일 저녁마다 그들은 함께 식사를 했습니다.  함께 공원을 걷고, 함께 공연도 가고, 함께 극장에도 갔습니다.  함께 삶을 나누면서 그들은 함께 상처를 극복해 가기 시작했습니다.

질 골드스타인은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러나 리사 비머는 훌륭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골드스타인은 유대인이었지만 리사 자매와의 교제를 통해서 믿음의 의미를 알고 기독교적 신앙의 의미를 깊이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두 사람은 마침내 함께 손을 잡고 기도하고, 함께 하나님을 의지하는 교제를 나누게 됩니다.  세속적인 잡지였던 뉴스위크지조차도 리사 비머를 취재하면서 이들이 비극을 극복했던 가장 중요한 요인은 신앙심과 하나님, 그리고 공동체이었음을 기록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리사 비머는 그녀의 책 "행동개시(Let's roll)"에서 이 비극을 통과하는 동안 무엇보다 그녀와 그녀의 가족에게 도움이 되었던 것은 바로 그녀가 출석했던 교회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느 정도 마음이 안정되었을 때 교우들의 사랑과 기도를 힘입고 그 마음의 상처를 극복할 무렵 그녀는 교회에 와서 정식으로 간증을 했습니다.  그 간증 가운데는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이 마땅한데 그대로 되지 않는다고 우리는 분노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내가 이 비극을 경험하면서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이 마땅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는 죄인이었고, 그 죄 때문에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을 받는 것이 마땅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그분을 통해서 나를 용서하시고 나와 내 남편에게 영생의 소망을 주신 것입니다.  저는 이 한 가지만으로도 기쁨과 감사의 삶을 살아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승리가 아니겠습니까?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며 세상에서 승리를 붙들 수 있는 삶의 길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경험하는 넘어짐의 아픔과 상처들, 그것이 아무리 심각한 것이라고 해도,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과 기도로 내 곁에 머물러 서 있는 친구들의 손을 붙들고 일어나 "내가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런 친구들, 그리고 이런 친구들이 있었던 교회, 그리고 이 교회의 주인이요 내 삶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 때문이었습니다." 라고 우리는 간증할 수가 있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들에게 교회가 필요한 이유입니다.  이것이 바로 나에게 당신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서로를 필요로 하는 이유입니다.  그리고 저와 여러분이 믿음의 공동체인 하나님의 교회에 들어와 함께 교제해야 하는 중요한 이유입니다. (오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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