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히 10:1-39)

첨부 1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히 10:1-39)

예수님을 바로 믿는다는 것, 예수님을 잘 믿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세 가지 증거가 있어야 합니다.

첫째는 속죄의 확신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죄에서 벗어나 거룩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세째는 끝까지 믿음을 지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신 것도 이런 믿음을 갖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죄의 권세에서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백성답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게 하셔서 복을 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깨닫기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율법으로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히 10:1 율법은 장차 올 좋은 것들의 그림자일 뿐이요, 실체가 아니므로, 해마다 반복해서 드리는 똑같은 희생제사로써는 하나님께로 나오는 사람들을 완전하게 할 수 없습니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속죄의 확신 조차 갖게 하지 못한 것입니다.

2절 만일 완전하게 할 수 있었더라면, 제사를 드리는 사람들이 한 번 깨끗하여진 뒤에는, 더 이상 죄의식을 가지지 않을 것이고, 따라서 제사 드리는 일을 중단하지 않았겠습니까? 

속죄 제사를 제대로 드렸다면 죄를 범하고 또 죄를 범하고 “또 죄 지었어요 또 죄지었어요” 하겠느냐, 점점 거룩한 백성이 되어가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백성다워지기 보다 밤낮 없이 속죄제사만 드리는 형편이 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속죄 제사 마저 아무런 회개없이 드리고 형식적인 제사가 되고 말았습니다. 
심지어 제사장이 타락하여 병든 짐승을 잡아 바치기도 하고 제물을 가지고 돈버는 장사꾼이 되기도 하니 하나님께서 기가 막히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속죄 제사가 드리는 것이 싫어지셨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5-6절 ...주님은 제사와 예물을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번제와 속죄제를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

이 말씀은 구약 예언서에 너무나 많이 나옵니다. 

사 1:12-13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13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예레미야도(렘 7:4) 호세아도 (호 6:6) 아모스도 (암 5:21-22) 미가도 (미 6:6-8) 동일하게 외쳤습니다. 말라기는 극단적인 선언을 하였습니다.

말 1:8-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 먼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을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 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으며 너를 받아 주겠느냐 ...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제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가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무서운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 보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도 이처럼 예배드리는 자가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늘 “죄짓고 왔습니다. 용서해 주옵소서” 만 반복하는 예배가 되면 안됩니다. 교회에 나와 앉아 있으면 예배를 드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마음 중심과 한 주간의 삶이 어떠신지를 보심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마음이 둔하여져서 확신도 기쁨도 없고, 형식적으로 회개하고 의무적으로 예배를 드린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아니라 율법적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율법적 신앙생활에서 건져주시려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신 것이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보배같은 피를 흘려 주신 것입니다. 

9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나는 주님의 뜻을 행하러 왔습니다" 선포하셨다고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자녀들이 죄사함의 확신을 갖고, 거룩한 삶을 살며, 끝까지 믿음을 지키는 것입니다.
이런 신앙생활은 교리나 성경 지식으로 되지 않습니다. 
오직 우리 안에 임하신 성령 하나님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15-17절 그리고 성령도 우리에게 증언하여 주십니다. 먼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그날 이후에, 내가 그들에게 세워 줄 언약은 이것이다. 나는 내 율법을 그들의 마음에 박아주고, 그들의 생각에 새겨주겠다. 또 나는 그들의 죄와 불법을 더 이상 기억하지 않겠다.'"
 
우리 안에 오신 성령님께서 예수님을 피를 증거하십니다. 주님의 보혈이 항상 새롭습니다. 그러므로 죄사함의 확신이 생기는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십니다. 주님과 동행하니 거룩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오신 성령님은 상황과 여건이 변하여도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인을 치셨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유혹 앞에서도 핍박 앞에서도 우리는 믿음을 지킬 수 있는 것입니다.

존웨슬리 목사님이 회심할 때, 결정적인 역할을 한 책 하나가 있습니다. 17세기 후반에 살았던 헨리스쿠걸 목사님이 쓴 [인간의 영혼 속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입니다. 

스쿠걸목사님은 이 책에서 “기독교란 인간의 영혼 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들어온 것이라”고 정의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단순히 선하고, 단정하고, 도덕적인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그 사람 안에 들어간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 속에는 힘, 권능, 생명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그 사람을 특별하고도 독특한 그리스도인으로 만듭니다.”

이 책을 읽을 때까지 웨슬리 목사님은 하나님이 자기 안에 임하셨음을 알지 못하였다고 했습니다. 자신이 목사의 아들이었고 목사였고 선교사였지만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교회 생활과 성경 말씀대로 사는 열심은 있었지만, 자신 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있음을 알지 못하는 종교인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정말 영원히 살아계실 뿐더러 여러분 안에 계심을 믿습니까?

목사님 한 분이 손녀를 데리고 사는 심정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손녀를 데리고 살기로 결정하시고는 처음에는 너무 불편하고 힘들어서 괜히 딸 가정과 같이 살자고 했다는 후회까지 되더랍니다. 그러나 지금은 손녀 때문에 너무 행복하다고 했습니다. 이 손녀가 없으면 어떻게 사나 하는 생각이 든답니다. 여러분 이 목사님, 이해가 되십니까?  

손녀도 그렇다면 예수님은 어떻겠습니까?
여러분은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고 사니 불편하십니까? 

어느 목사님께서“예수님을 영접하고도 전혀 불편하지 않으니 문제예요!”라고 고백하셨습니다.

솔직히 말해 보세요! 전혀 불편하지 않게 사십니까? 만약 예수님을 영접하고도 전혀 불편함이 없이 사셨다면 큰 일입니다. 주 예수님께서 불편하신 겁니다! 완전 무시당하고 사신다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만약 누가 집에 들어가 함께 사는데, 인사도 대접도 배려도 하지 않으면 얼마나 불편하겠습니까?

로버트 멍어가 쓴 [내 마음 그리스도의 집]에 보면 예수님을 구주로 믿었지만 정말 마음에 주님으로 모시고 살지 못하던 사람이 예수님을 마음에 주님으로 영접한 다음에 예수님과 함께 자신의 집 여기저기를 다니는 장면이 나옵니다. 

서재에 들어갔다가 예수님께는 차마 보여드릴 수 없는 책과 잡지, 벽에 걸린 그림 때문에 당황해 합니다. 주방에 가서는 주님께 대접해 드릴 마땅한 것이 없습니다. 거실에서는 주님과 함께 볼 수 없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보고 살았음을 알았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할 수 없는 오락에 빠져 산 것을 깨달았습니다. 친구들과 놀러가면서 도무지 예수님을 모시고 갈 수가 없었습니다. 침실에서의 자신의 모습은 너무나 부끄러웠습니다. 성적으로 문란했습니다. 주님께 도저히 보여드릴 수 없는 방도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바삐 출근하다 문득 누가 혼자 거실 벽난로 앞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주님이셨습니다. 그는 조심스럽게 주님께 다가가“주님, 아침마다 늘 여기에 오셨습니까?”“그럼.”하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너무나 부끄러웠습니다. 주님을 손님처럼도 대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고 사는 것이 부담스럽고 힘든 일이라고만 생각하면 큰 오해입니다.
손녀를 데리고 사는 불편함이 있었지만, 결국 손녀가 주는 행복이 너무 크다고 고백한 목사님처럼 주님과 동행하는 사람에게 임하는 담대함과 기쁨과 행복은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저는 최근 한달 정도 심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단지 몸이 피곤해서 그런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지난 주간 기도 중에 주 예수님이 제 삶에 진정한 왕이 되시는 과정에서 겪는 영적 몸살임을 알았습니다. 제가 주인이 된 삶, 은근 슬쩍 육신의 욕망대로 살아왔는데, 24 시간 예수님을 바라보며 살려니 힘든 것입니다. 예수님이 주인이신 삶을 사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영적인 몸살을 앓은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항상 주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이 힘들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도 이렇게 힘든데 교인들에게 24 시간 예수님을 바라보라고 하는 것이 너무 무리인가?’하는 갈등도 왔습니다. 
그런데 지난 주간, 주님께서 목사님 한 분을 통하여 제게 답을 주셨습니다. 이웃 교회 김환수 목사님께서 제 이야기를 듣더니“목사님, 예수님 안에 굳게 뿌리가 박히려고 터가 굳어지는 기간입니다.”하시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3장 17절 말씀이었습니다. 

엡 3:17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터가 굳어지려면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것은 힘들기도 한 일지만 그 다음의 약속이 너무나 놀라운 것입니다. 

엡 3:18-19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성도 여러분, 항상 주 예수님을 바라보고, 주 예수님과 동행하며, 옛 생활을 버리고 새 삶을 사는 것은 “죽고 다시 사는” 것입니다. 몸살을 앓는 과정도 겪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축복은 말할 수 없이 크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발견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이렇게 믿는 자는 어떤 고난이 와도 이길 수 있습니다.
32-34 여러분은 빛을 받은 뒤에, 고난의 싸움을 많이 견디어 낸 그 처음 시절을 되새기십시오. 여러분은 때로는 모욕과 환난을 당하여, 구경거리가 되기도 하고, 그런 처지에 놓인 사람들의 친구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여러분은 감옥에 갇힌 사람들과 고통을 함께 나누었고, 또한 자기 소유를 빼앗기는 일이 있어도, 그보다 더 좋고 더 영구한 재산이 있다는 것을 알고서, 그런 일을 기쁘게 당하였습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38절에서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살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믿음은 살아지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의롭게 살아진다는 것입니다. 살아지지 않는다면 믿음이 아닌 것입니다.

만약 말씀을 듣고 은혜는 되는데 살아지지 않는다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기도를 통하여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야 합니다.

설교는 듣기만 해서는 안됩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설교를 듣고 만난 예수님과 기도 중에 만난 예수님이 같은 예수님이지만 체험으로 누려지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진정한 능력과 생명 역사는 반드시 기도로 일어납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사랑한다는 말도 거짓이고 믿는다는 말도 거짓입니다. 생명의 역사도 능력도 체험도 없게 됩니다.
마귀는 예수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은 어떻게 해서든지 막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이상하게 기도가 안되는 것입니다. 30분 기도는 못하면서 2시간 봉사는 합니다. 
기도하지 못한다면 이미 영적으로는 마귀에게 눌려있는 것입니다. 

어제 제 페이스북에 남자들이여 먼저 기도합시다 하는 글을 올렸더니 아주 기분 나쁘게 댓글을 다신 분이 있었습니다. 

물질이나 소원을 위해 기도하지 말고 가치와 공의를 위해 기도해야하는 걸 가르쳤다면 한국의 교회들이 지금처럼 되지는 않았겟죠. 이 정도쯤 왔으면 세계사에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한국 기독교 대부흥은 큰 착각입니다. 많이들 평양 대부흥을 울거먹는데 역시나 팽창주의 선교 개념에 익숙한 현대 교회가 부흥의 목적으로 도용하는 역사적 근거이자 먹거리입니다. 하나님에겐 폐허속 아이티의 영적 부흥도, 남아공, 인도의 부흥도 중요합니다. 즉 우주를 아우르는 초월자에게 국가의 경계는 없습니다. 

그런 초월자의 존재를 믿는 우리의 신앙은 역시 초월적 성질이어야 합니다. 남자가 지도자라는 생각은 이스라엘 선민사상과 구약 신앙의 잔재입니다. 영적인 의미에서 성 구분은 없습니다. 남자든 여자든 누구든 지도자, 영적 리더가 될 수 있습나다. 단지 사회와 관습이 그것을 제한하고 있기 때문에 극복할 수 없는 관례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진리는 알수록 개별적이고 상대적이어서 사심없는 진리 추구자의 마음을 유연하게 합니다. 

유한한 인간이 같은 인간에게 초월을 가르칠 수 없습니다. 이미 정치색과 절대가치를 흉내내는 배타성이 무의식중에 유도되는 인간은 영적인 어떤 것도 추측, 예상할 수 없습니다. 기도가 권고되는 것은 좋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지난 세월의 샤머니즘과 기복사상의 잔재인 새벽기도를 권하지는 않았으면 합니다. 새벽 제단이나 기도회수, 정성보다는 그 사람의 정작한 혼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아는 것이 중요한 듯 합니다. 각종 기도회를 교회 부흥을 위한 떡밥으로 생각하는 목회자가 각성하기를 기도합니다. 

기도회, 부흥회보다 실제 삶으로 신앙을 실천하는 육신 전체로 삶을 산제사로 드리는 기독교인이 되기를 가르쳐야 하지 않겟습나까? 왜 교회에만 바글바글 모여 앗어야 하는지. 직장. 학업. 생계의 전선에서 당신이 만나는 사람을 사랑하고 양심과 잔심으로 대하고 사랑하면 교회에 1주일 내내 가서 살 필요 없습니다. 교회가 존쟈해야 할 이유가 있다면 세상 속에서 신앙을 가지고 사람들을 품는 것을 가르치고 양성하는 역할 뿐이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겟지요. 목사님의 리더쉽과 바른 길로 이끄시려는 의지를 존경합니다. 지나는 과객이 부족하나마 의견을 놓고 갑니다. 건강하세요.

중세 어느 수도원에 입문한 젊은 수도사가 온갖 잡념에 시달리다가 수도원장을 찾아가 고민을 털어놓았습니다. "원장님, 온갖 생각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는 것입니까?" 수도원장이 다음과 같이 답합니다. "솥에 파리나 짐승이 몰리는 것은 솥이 차갑기 때문이지요. 솥이 뜨거워지면 파리 뿐만 아니라 그 어떤 짐승도 가까이 다가서기 못하는 법이오." 젊은 수도자는 기도실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손을 들고 큰 

소리로 “예수님! 예수님!”하며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마음이 뜨거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날 그 수도자는 처음 맛보는 기도의 깊은 경지를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남자 성도들이 먼저 기도에 앞장서 주시기 바랍니다!

오늘도 성찬을 통하여 주 예수님과 온전히 하나되는 은혜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유기성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