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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교회창립] 이런 교회 되게 하소서 (마 16: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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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교회 되게 하소서 (마태복음 16:13-20)

지난 주일에 읽었던 본문을 다시 읽었습니다.   오늘로 스믈 여섯살 된 우리교회가  조금 전에 불렀던 찬송 ‘이런 교회 되게 하소서’의 내용처럼 되어지길 소원합니다.  이런 교회가 실제로 있었으니 사도행전의 처음 교회들, 특히 예루살렘 교회의 모습입니다. 

그 교회는 지금처럼 조직이 탄탄하고 시설 좋은 예배당에서 드리는 예배가 아니었지만 모일 때마다 기쁨이 넘치는 교회, 말씀과 기도와 사랑이 뜨거웠던 교회였습니다.  비록 핍박과 고난이 있었지만 그 냉혹한 환난의 비바람을 넉넉히 이기고도 남는 위로와 평화가 있던 교회였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으심, 부활과 승천을 목격한 증인들이었으니 분명한 믿음과 소망을 가지고 살던 성도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예루살렘 초대교회가 흠없이 완벽한 교회였다는 말은 아닙니다.   워낙 급하고 강하게 몰아치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미처 감당치 못한 성도들에게서 미숙한 점들도 보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회개하며 예수를 구주로 믿고 영접한 성도들의 수는 날마다 더해졌고 교회는 급속도로 확장되었습니다.   은혜가 충만하여 내 마음이 평안하니 이웃을 이해하고 용서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하나님 나라가 그들 가운데 있으니 세상 욕심과 미련이 사라지고 날마다 기쁜 천국의 생활이었습니다.

이런 은혜를 체험하기 전에는 내 앞가림에 바빠 다른 사람 돌아볼 여유가 없었고 용서와 이해가 부족하며 내것 먼저 챙기느라 각박하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강하게 움직이시니 사람들이 변하고 사회가 새롭게 바뀌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즐거움으로 내놓은 물질은 가난한 이웃들에게 나누어져 예루살렘교회 성도들 중에 생활이 어려워 고통 당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교회는 이웃들에게 칭찬을 들었고 주님은 믿는 사람들을 날마다 더하게 하셨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특징은 한 마음으로 모여 예배하고 교제하며 나누고 섬김 그리고 성도의 수가 날마다 늘어나는 것 등입니다.  그런데 교회의 평화와 행복은 그렇게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나사렛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면 그를 따르던 무리들도 자동적으로 흩어지리라 기대했던  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오순절 이후 폭발적으로 확장되는 교회를 보고 긴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의 제자들을 그대로 두면 전에 나사렛 예수를 따르던 것보다 그의 제자들을 따르는 군중이 더 많아져 세력이 강해지면 폭동이 일어날 위험이 있다 판단했습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했던 과거의 책임을 추궁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도 있었습니다.  그러다 군중들이 데모를 일으키면 로마 당국이 군대를 파견하게 되고 로마군대가 간섭하기 시작하면 그동안 누려왔던 성전 자치권도 빼앗기고 어쩌면 성전이 문을 닫을 수도 있다는 위기의식입니다.   

그래서 주동자로 보이는 베드로와 사도들을 잡아 가두고 매를 때리며 다시는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말하지도 말고 아무 것도 가르치지 말라 협박하였습니다.   사도들이 체포되고 심문을 당하면서 축제 분위기에 젖었던 예루살렘 교회에 환난의 그림자가 덮쳐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들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계속 증거하였고 교회는 갈수록 더 성장하였으며 심지어 제사장들 중에도 십자가의 복음에 굴복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결국 스데반 집사의 순교사건을 시점으로 대대적인 핍박이 일어났고 사도들 외에 성도들이 예루살렘을 떠나 유대와 사마리아와 모든 땅으로 흩어졌습니다.   이것이 사도행전 2장부터8장에 걸쳐 기록된 예루살렘 초대교회의 태동과 성장 그리고 핍박과 흩어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예루살렘교회는 사도들을 통해 세우신 주님의 첫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왜 그 교회가 꽃이 다 피기도 전에 핍박으로 흩어짐을 당했을까요?   이왕 교회를 세우셨으면 계속 승리하는 교회로 보존하시고 성도들을 편안하게 지켜주지 않고 핍박자들의 손에 무참히 깨져 흩어지도록 방치하셨을까요?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하셨는데 주님의 교회가 일 년도 버티지 못하고 흩어지도록 그냥 두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사도행전을 읽는 독자들에게 아쉬움과 의문이 드는 부분입니다.   

마태복음 28장을 보면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하셨고,  사도행전 1장에는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교회를 세우신 목적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고백하는 믿음을 세상의 모든 사람들과 함께 나누며 그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제자로 삼고 이 세상에 대하여 주님의 증인으로 살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이것이 교회가 맡은 가장 기본적인 사명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 교회는 열심히 모이고 세상으로 흩어져 주의 증인으로 살아야 하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교회와 사도들은 예수님의 간절한 당부 가운데 첫 단계에 머물러 거기 안주하려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예루살렘에만 모여 왕성한 교회를 이루고 아직 더 큰 세상을 향한 흩어짐을 시도하지 않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베드로와 요한 그리고 다른 사도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전도하여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제자로 삼아 세례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주의 이름으로 날마다 모여 예배하며 사랑의 떡을 나누었습니다.   음식만 나눈 것이 아니라 재산도 팔아 가난한 사람들을 도우며 정말 재미있고 따뜻한 교인들끼리의 모임이 되었습니다.   거기에 가면 천국 복음이 있고 은혜로운 찬송이 있습니다.   뜨거운 기도와 기적 체험이 있고 따뜻한 교제가 있으며 생활고로 고민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성도들의 모임에 가면 모든 피로와 고민과 걱정을 다 떨쳐버릴 수 있으니 삶의 위로가 됩니다.   그래서 더 잘 모이고 교인들끼리 똘똘 뭉쳤습니다.

교회란 본래 이런 모임이어야 합니다.   거기서 나의 존재감을 발견합니다.  내가 여기 모여 있는 사람들과 하나이구나.  나와 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나와 같은 신앙을 고백하며 같은 소망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 여기가 내가 있을 곳이구나!   교회는 이런 감동을 주고 받는 모임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마음이 끌려 또 가고 싶고 보고 싶어 다음 주일이 빨리 왔으면 하고 기다리는 성도들의 모임이어야 합니다.

지난 주일에 말씀을 드린 것처럼 우리 교회만 주님의 교회가 아니라 주의 이름으로 모이는 세상의 모든 교회가 주님의 교회입니다.   한 주인을 모시고 같은 마음으로 예배하며 섬기고 교제하는 교회라면 우리 교회를 떠나 어느 다른 지역의 교회에 가더라도 거기서 내 집과 같은 따뜻한 환영과 소속감 그리고 책임감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윈리상으로는  이해가 되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어쩌다 다른 교회를 방문하면 보통은 예배만 드리고 도망치듯 자리를 뜨게 됩니다.   처음 방문한 교회에서 누군가 친절하게 말을 걸어주면 기분이 좋은 사람도 있지만 왠지 부담스러워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아무도 아는 척을 하지 않고 자기들끼리 하하호호 재밌게 교제하고 있으면 외돌톨이가 된 나는 못올 곳에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한쪽 구석에 홀로  머물렀다가 뻘쭘하여 쓸쓸한 마음으로 교회 문을 나서기도 합니다.  목사인 저도 다른 교회를 방문했을 때 그런 느낌을 받는데 교우 여러분은 저보다 훨씬 더 힘들 때가 많을 겁니다.

그러고 보면 이런 썰렁한 분위기는 누구의 탓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부족함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가족이 된 성도들은 교회를 찾아온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표현할 특권과 책임이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는 처음 보는 사람끼리도 금방 하나가 될 수 있는 연결고리가 있습니다.  그분이 교회의 주인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주 안에서 모든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는 그것이 잘 안됩니다.  개인의 성격이나 그 교회의 분위기, 문화와 풍습 등 많은 이유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모이는 교회, 흩어지는 교회라는 관점에서 생각하면 교회의 본질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우리 모두에게 어색함의 원인이 있습니다.   모이는 것은 그런대로 잘 하는데 흩어짐의 원리가 잘 실천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맘이 통하는 우리끼리만, 우리 교인들끼리만 우리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편안하고 안전한 우리의 모임에 누군가 새 얼굴이 들어오면 일단 마음이 움추러 들고 방어막을 쌓습니다.   우리 모임의 평안이 낯선 사람 때문에 흩어질까 염려되어 거리를 두고 경계합니다.   

그래서 교회에 처음 방문한 사람이 먼저 나서서 누구를 찾아가 말을 걸기도 힘들고 기존 멤버들 역시 선뜻 낯선 사람들에게 다가가지 않으려 합니다.  교역자들은 직분을 앞세우고 처음 방문한 사람에게 교제의 악수를 먼저 청할 수 있지만 일반 성도들에게는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래서 새가족반 일군들을 훈련시켜 그분들로 하여금 의무적으로라도 다가가 환영하고 교제의 악수를 청하게 합니다.   

이것이 현대 교회에만 있는 현상일까요?   예루살렘 초대교회에도 이런 모습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가장 먼저 세움을 받고 보냄을 받은 사도들도 그랬습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28:19 20) 하셨는데 사도들은 아직 ‘가서’라는 말씀을 시행하지 못하고 예루살렘에 ‘모여’ 자기들끼리만 성령충만하였습니다.   자기들과 비슷한 사람들, 동족 유대인들에게는 열심으로 복음을 전하고 친절했지만 그 울타리를 벗어나 이방인에게는 마음이 굳어졌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언제쯤 예루살렘을 벗어나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으로 나가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아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우선 예루살렘을 복음으로 완전히 정복하고 그 다음에 밖으로 나가야지 하는 전략을 가지고 있었을까요?   그런데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면 사도들이 꼭 그 때와 시기를 알지 못하여 예루살렘에만 머물러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베드로의 태도입니다.  

베드로가 이방인 군대 장교 고넬료의 집에 가서 복음을 전할 때 일어난 성령의 역사를 목격하고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가로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가운데 하나님을 경외하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행10:34, 35)   그리고 말씀을 전할 때에 말씀 듣는 모든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을 보고 놀랐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베드로가 모든 민족을 위해 보냄을 받은 사도였지만 아직까지 유대인이라는 혈통과 선민의식, 전통에 묶여 이방인들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없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고넬료의 가정이 성령충만함을 받는 광경을 목격한 후 비로소 주님의 뜻을 깨달았고 베드로의 고정관념이 깨진 것입니다.  주님의 교회는 예루살렘에만 세워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더 큰 세상, 모든 민족에게 전해질 만민을 위한 복음이었으니 교회는 처음부터 이 복음을 들고 흩어져야 할 사명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교회는 이 사명을 시작하지 못하고 모이는 일에만 힘썼습니다.   

베드로만 그랬습니까?   베드로가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 말씀을 전하고 교제했다는 말을 들은 다른 사도들과 예루살렘의 교인들이 베드로를 책망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고넬료 가정에서 경험한 일을 자세히 보고하자 처음에는 싸늘하게 반응했던 사람들이 ‘하나님께서는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인정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가로 막혔던 담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무너지고 하나가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교회의 주인께서 이런 일을 하라고 사도들에게 사명을 주시고 보내셨음을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예루살렘에 큰 핍박이 일어났을 때 성도들이 사마리아와 각 나라로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핍박이 무서워 무작정 도망쳤다는 말이 아닙니다.   흩어져 가는 곳마다 복음을 전했습니다.   빌립 집사는 사마리아 성으로 내려가 복음을 전파했는데 빌립의 설교를 듣고 그가 행하는 기적을 본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는 말을 들은 예루살렘교회 지도자들이 이것이 과연 사실인가 확인하기 위해 베드로와 요한을 파견하였습니다.   두 사도가 사마리아인들을 위해 기도할 때 고넬료의 집에서 있었던 것처럼 그들도 성령을 받기 시작합니다.  사마리아를 향한 복음의 문이 이렇게 열린 것입니다.

그뿐입니까?   하나님은 빌립 집사를 광야로 보내어 예루살렘에 예배하러 왔다가 본국으로 돌아가는 이디오피아의 여왕 신하 간다게를 길에서 만나 복음을 전하게 하심으로 아프리카를 향한 복음의 문을 여셨습니다.  자발적으로 흩어지지 않고 열심히 모이기만 할 때 하나님은 이런 방식으로 교회를 흩어지게 하셨습니다.  흩어지는 교회의 사명을 더 확실하고 빠르게 이루시려고 예수님이 하신 또 한 가지 큰 일이 있습니다.   예루살렘교회를 무너뜨리고 성도들을 흩어놓는데 최고의 악역을 맡았던 사울을 불러 변하여 새사람이 되게 하신 주님은 그를 이방인의 사도로 임명하여 아시아와 유럽으로 보내셨습니다.이것이 예루살렘교회를 흩으신 주님의 뜻입니다.

교회는 이름 그대로 부름 받은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런데 그 모임은 흩어지기 위한 모임입니다.   흩어짐을 잘하기 위해 먼저 잘 모여야 합니다.   모임을 통해 위로와 힘을 얻고 사명을 새롭게 하며 주인의 뜻이 무엇인지 분명한 지도를 받아 세상으로 흩어집니다.   모임이 없이 교회라는 이름이 어울리지 않습니다.   어떤 이들은 교회의 제도와 조직이 타락하는 것을 반대하여 무교회주의를 선언하고 교회를 해체해야 한다 주장합니다.  죄성을 가진 사람들이 모이면 타락하고 조직과 제도가 썩어 문드러져 냄새가 나며 지탄을 받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그 교회의 머리가 되어주시고 나를 따르라 하십니다.  예수님이 교회를 세우신 이후 오늘까지 이땅에 교회가 없었던 적은 없습니다.   사람들이 의도적으로 파괴하고 말살하며 부정하려 했지만 그럴수록 주님의 교회는 더욱 강해졌고 번성했으며 세계를 향해 퍼져가고 있습니다.   그것이 교회의 운명이며 본질입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생명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며 생명은 살아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존재하는 한 교회도 함께 합니다.   

우리 교회가 지난 26년 동안 그렇게 존재해 왔으며 주님이 허락하시는 한 주님 다시 오시는 날까지 계속 모이고 흩어짐의 사명을 다할 것입니다. 저 사람이 목사, 장로, 집사라는구만… 저 사람이 우리교회 교인이라며?  하고 우리를 주목하는 이웃들과  함께 직장과 학교와 동네에서 지내며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우리는 주님의 교회를 세워가는 사람들입니다.

한국 교회보다 모이기를 잘하는 교회가 지구상에 또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 교우들에게 한국에서 모이는 집회의 절반만이라도 모여봅시다 한다면 과연 몇 분이나 따라올 수 있을까요? 그런데 이렇게 잘 모이는 것처럼 교회는 잘 흩어져야 함도 잊어서는 안됩니다.   한국 교회가 모이는 열심 만큼 흩어지는 교회의 사명을 제대로 수행한다면 장담하건대 얼마 가지 않아 대한민국 전체가 뒤집어져도 몇 번 뒤집어질 것이며 지금처럼 불신자들로부터 따가운 눈총을 받지도 않을 겁니다.   

   그런데 교인들이 혹시라도 세상에 물들고 실패할까 두려워 교회에 붙잡아 놓으려는 것처럼  일주일 내내 예배와 모임에 나오라고 바쁘게 불러냅니다.   세상은 더럽고 타락했으니 물들지 말고 코드가 통하고 말이 통하는 천국 백성끼리 뭉치자는 겁니다.  그래서 세상 곳곳으로 흩어져 전도자의 삶을 살아야 할 사명을 약화시킵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원하시는 교회의 모습일까요?   흩어져야 합니다.  자발적으로 흩어지지 않고 우리끼리만 뭉치고 즐거워하며 편안함을 누리다 보면 고인 물에 벌레가 생기고 구르지 않는 돌에 이끼가 낍니다.  

교회의 주인은 그런 모습을 원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때로는 핍박이라는 채찍을 들어 강제로 흩으시기도 합니다.   모여 힘을 얻었으면 빨리 흩어져 나가야 하는데 그냥 눌러앉아 ‘아멘 할렐루야’하고 안주하려고 하면 여러 방식으로 교회를 흩어놓으십니다.  교인들끼리 다투며 갈라지기도 합니다.  참 가슴 아픈 모습입니다.  그러나 때로는 그래야 서로 건강한 신앙을 지킬 수 있기 때문에 갈라놓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나누려고 자발적으로 나가면 그보다 더 행복할 수 없지만 마음을 닫고 멈춰 있으면 모진 아픔을 주면서라도 흩어져 나가게 하십니다.   

우리 교회는 예배당이 없어 주일예배 한 번 드리고 일주일 내내 흩어져 지내야 하는  이민교회입니다.  뭉쳐있고 싶어도 있을 곳이 없어 흩어져야 하는 교회입니다.   흩어져 있을 때 여러분의 가정에서, 학교에서, 연구실과 직장에서 만나는 이웃들에게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이곳에 오래 머물고 싶어도 귀국해야 하며 다른 나라로 떠나야 할 때가 옵니다.   우리 교회는 사람들을 많이 모으는 교회라기 보다는 많이 흩어보내는 사명을 가졌습니다.  그렇다면 흩어질 바에야 잘 흩어지고 흩어져 사는 현장에서 주님의 사람들로 잘 살아야 하지 않을까요?   

저도 우리 교회 식구들이 지금보다 더 많이 늘어나면 좋겠습니다.  많이 모이면 힘이 납니다.  찬양도 힘차고 기도도 뜨거우며 말씀을 들을 때 아멘으로 화답하면 더 힘이 납니다.  교회가 무슨 일을 할 때 으샤으샤 힘을 모아 신나게 일했으면 참 좋겠습니다.이곳에 있는 모든  한인들이 예수를 믿고 교회로 모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일단 열심히 모여야 교회의 일차적인 사명을 잘하는 것입니다.   숫자도 얼마 되지 않는 우리 교회 가족들이 주 안에서 서로 아끼고 사랑하며 한 마음으로 모이기에 힘쓰는 교회가 되기 바랍니다.  그리고 흩어져 살 때 부름 받은 성도답게 삽시다.

저는 목사로서, 여러분은 이 교회의 성도로서 나를 당당하게 소개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으로 삽시다.  나 때문에 교회에 누를 끼칠까 조심스럽고 예수님 이름에 먹칠할까 부끄럽다 여기는 분이 있다면 누가 되고 먹칠 할 일 하지 않으면 됩니다.  말은 참 쉽지요?   잘 아는 것을 실천하면 되는데 무엇이 아쉽고 아까운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버리지 못하기 때문에 어렵게 여겨집니다.  주님은 나같은 사람 위해 그 귀한 생명도 버리셨는데 나도 주님을 위해 뭔가 버려야 하지 않을까요?  용기있게 버리고 포기해 봅시다.  그러면 달라진 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나 때문에 주님을 만나고 믿는 사람이 생기는 기적도 일어납니다.   얼마나 보람있고 행복한 일입니까?

오늘 성찬식에 참여하는 세례교인 여러분, 주님이 나를 위해 몸을 찢어 피흘려 생명을 나눠주신 것처럼 여러분도 주님을 위해 그리고 남을 위해 그렇게 사십시다.   나를 찢어주고 나눠주며 다른 사람의 영혼을 살리는 그 귀한 일에 지금보다 더 분발하고 자발적으로 동참합시다.   우리가 한 자리에 모여 주의 성찬을 나누며 하나가 됨처럼 흩어져서는 이 세상을 밝히고 섬기는 주의 지체들로 힘써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때로는 주님의 이름을 위해 자발적으로 손해도 보시고 욕도 드시며 아픔을 겪어보기도 합시다.   그래서 한 영혼이 주님 앞으로 돌아와 우리와 함께 주님의 교회를 이룰 수만 있다면 우리는 꼭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주님의 은혜에 참으로 감사하는 성도가 해야 할 일입니다.   그것이 저와 여러분이 따라야 할 주인의 뜻이며 교회를 세우신 주님의 소원입니다.  우리 교회가 이런 교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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