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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대림절] 또 하나의 귀환 (슥 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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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스가랴 1장 1-6절       
제목/또 하나의 귀환     

여러분, <내 고향으로 날 보내주....>라는 노래를 잘 아시지요? 아프리카 흑인들은 잡혀와 노예로 살면서 학대당하고, 물건처럼 거래되었습니다. 그 고통 중에서 그들은 아프리카의 정든 산천을 그리워하며, 돌아가길 갈망했습니다. 그 때 불렀던 노래 중 하나가 <내 고향으로 날 보내주>입니다. 링컨 대통령이 주도한 남북 전쟁이 끝난 후 그들의 소원이 이루어져서 많은 노예들이 아프리카로 돌아갈 길이 생겼습니다. 뜻있는 교회와 성도들은 헌금을 모아 그들을 아프리카로 돌아가게 했고, 땅을 사서 나라를 세우게 해 준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들을 태운 배가 아프리카로 방향을 잡고 대서양을 건널 때 그들은 갑판에서 울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후에 어떻게 되었습니까? 돌아온 후 행복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아시는 것처럼 아프리카는 아직도 극심한 고통의 대륙으로 남아 있습니다. 사막은 넓어지고, 기근에 허덕이며, 에이즈가 창궐하고, 독재 정권 아래서 신음하고, 유랑민이 넘쳐나고 난민촌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그들은 <돌아왔지만, 여전히 불행한 사람들>로 살고 있습니다. 

스가랴서와 학개서를 통해 만나게 되는 유다 백성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도 돌아온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 수십 년 동안을 바벨론에서 살았습니다. 그 동안 유다 산천을, 그들의 정신적, 종교적 중심지이던 예루살렘을 그리워하여 눈물로 살았습니다. 시편 137편은 그들이 얼마나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을 그리워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그 중의 버드나무에 우리가 우리의 수금을 걸었나니  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우리를 황폐하게 한 자가 기쁨을 청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의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 함이로다  우리가 이방 땅에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까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을진대 내 오른손이 그의 재주를 잊을지로다  내가 예루살렘을 기억하지 아니하거나 내가 가장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즐거워하지 아니할진대 내 혀가 내 입천장에 붙을지로다>  

그런데 고레스가 바사의 왕이 된 후 꿈이 이루어져 예루살렘에 돌아왔습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백성들이 맛보았을 그 기쁨과 흥분을 상상해 보십시오. <이제 됐어. 예루살렘에만 돌아가면 우리는 행복하게 살 거야!>라고 기대에 부풀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돌아온 후 그들의 삶은 어떠했습니까? 흑인 노예들의 경우와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그들은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경제적으로 그들은 여전히 어려웠습니다. 그 내용을 학개서 1장 6절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너희가 많이 뿌릴지라도 수확이 적으며 먹을지라도 배부르지 못하며 마실지라도 흡족하지 못하며 입어도 따뜻하지 못하며 일꾼이 삯을 받아도 그것을 구멍 뚫어진 전대에 넣음이 되느니라>  뿐만이 아닙니다. 그들의 삶을 위협하고 방해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바벨론에 가서 지내는 동안 예루살렘과 그 주변을 차지하고 살던 많은 사람들은 성전 공사도 방해했고, 늘 괴롭혔습니다. 

이처럼 그렇게 사모하던 예루살렘에 왔건만 행복하지 않았을 때, 마음에 의심이 생겼습니다. <과연 예루살렘은 행복의 성인가?  우리는 여기서 평안할 수 있는가? 예루살렘에 돌아온 것은 잘 한 것인가?> 
오늘 말씀은 이런 상황에서 주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스가랴를 통해 이 말씀이 임한 것은 다리오왕 제2년 여덟 째 달, 즉 주전 520년 10-11월경입니다. 학개 선지자에게는 이보다 두 달 전에 먼저 말씀이 임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두 달 간격으로 두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하실 정도로 뭔가 반드시 전하고자 하시는 말씀이 있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들을 통해 전해주신 말씀의 핵심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예루살렘은 결코 행복의 보증수표가 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증거를 보여 주셨습니다. 그 증거란 다름 아닌 그들의 부모, 조상들이었습니다. 그들의 부모들도 예루살렘에 살았습니다. 예루살렘은 본래 그들의 부모들의 땅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조상들은 예루살렘에서 행복하고 번성하기는커녕 유다라는 나라조차 보존하지 못하고 완전히 멸망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예루살렘에서 멸망한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예루살렘이 결코 행복을 가져오지 못한다는 것이 증명된 셈입니다. 이게 바로 예루살렘의 한계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는 어떻습니까?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의 신기루를 꿈꾸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도착하기만 하면......>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게 문제입니다. 

요즘 사람들이 도착하길 꿈꾸는 예루살렘은 무엇일까요? 우리 사회에서는 많은 사람들에게 학벌이 예루살렘이 되고 있습니다. <명문 대학을 졸업하기만 하면! 학위만 받으면 난 행복할 거야!>라고 꿈을 꿉니다. 또 권력도 그 중 하나입니다. <당선만 된다면......>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이들에게는 돈이 예루살렘이기도 합니다. 언젠가 노후에 남부럽지 않게 살려면 최소 10억은 있어야 한다는 말이 유행하면서 10억 모으기를 주제로 한 책들이 출판되기도 했습니다. 혹은 어떤 사람과의 관계가 성사되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 남자와, 저 여자와 결혼하기만 한다면.......>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과연 이런 예루살렘이 진정한 축복을 가져다주고 있습니까? 

현실을 보면 많은 사람들이 각고의 노력 끝에 자신들이 꿈꾸던 이러한 예루살렘에 도착합니다. 그러나 성공한 것처럼 보이는 그 후에 오히려 예루살렘에서 더 크게 좌절하고 불행해지고 있습니다. 

2003년 2월 26일 세계적인 프랑스 요리사 <베르나르 르와조>가 엽총으로 자살했습니다. 그의 자살 소식은 정규 뉴스 시간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었고, 며칠 후 특집 다큐멘터리가 방송될 정도로 그는 명성이 있었습니다. 이런 그가 왜 자살했을까요? 그의 식당은 세계적인 식당 안내서인 <기드 미슐랭, Guide Michelin>에서 27년 동안 최고 등급인 별 세 개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2003년 초 그의 식당이 별 한 개로 강등되었습니다. 그는 이를 수치스럽게 생각하여 자살한 것입니다. 그는 인간의 미각은 나이와 함께 퇴조한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그가 그 동안 얼마나 노심초사하면서 살아왔는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명예는 그를 자유롭게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목을 조이는 족쇄였습니다. 

또 재산은 어떻습니까? 재산도 허망한 예루살렘일 때가 많은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만 해도 재벌 총수가 자살하고, 재벌의 자녀들이 자살했습니다. 권력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역대 대통령들의 불행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번에 선출되는 대통령은 그 마지막이 아름답길 바라는 마음이 간절합니다. 여러분, 이분들이 그러한 명성, 권력, 재물을 얻기까지 얼마나 열심히 달려왔을까요? 그러나 그들이 도착한 예루살렘은 그들을 구원하지 못했습니다. 기쁨을 주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회복 불가능한 수렁으로 끌고 들어갔습니다. 

여러분, 2012년도가 마무리되는 12월 첫 주일 예배를 드리면서 우리가 도착하려고 애썼던 예루살렘은 어떤 것이었는가를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지난 열  한 달 동안 어떠셨습니까? 성공적으로 예루살렘에 도착하셨습니까? 그래서 많이 행복하셨습니까? 

그렇다면 예루살렘에 도착했지만 여전히 불행한 유다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행복 방정식은 무엇이었습니까? 그게 3절에 언급되고 있습니다. 

본문 3절을 다시 한 번 읽어 봅시다. <그러므로 너는 그들에게 말하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처럼 이르시되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아멘!  하나님께서는 <내게로 돌아오라>고 하셨습니다. 

무슨 뜻일까요? <예루살렘이 행복을 가져다주는 게 아니다. 예루살렘에 대한 환상을 버려라. 그건 신기루와 같은 것이다. 진정한 행복은 나 여호와가 준다. 그러니 내게로 오라. 너희들은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하다. 이제 또 하나의 귀환이 필요하다. 내게로 귀환하라!> 이게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참된 축복의 삶은 하나님의 품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품에 있으면 어디에 있든지 행복합니다. 다니엘을 보세요. 다니엘도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더구나 그는 예루살렘으로 돌아오지도 못했고, 계속 바벨론 땅에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거기서 축복을 받았고, 행복했고, 번성했고, 이름을 천하에 떨쳤습니다. 에스더와 모르드개도 그러했습니다. 그들도 예루살렘이 아닌 바벨론 땅에 살았지만 행복했습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바벨론인가 예루살렘인가 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로 돌아가 하나님의 품에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면 예루살렘 한 복판에서도 불행합니다. 유다 백성들의 조상이 예루살렘에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멸망한 이유는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4절을 보실까요? <너희 조상들을 본받지 말라 옛적 선지자들이 그들에게 외쳐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악한 길, 악한 행위를 떠나서 돌아오라 하셨다 하나 그들이 듣지 아니하고 내게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였느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였고,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예루살렘 한 복판에서 멸망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의 불행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명예로 말한다면 노벨상의 명예를 능가하는 것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1961년, 한 노벨상 수상자가 자살했습니다. 그는 1954년에 노벨 문학상을 받은 유명한 소설가 <어네스트 헤밍웨이>입니다. 그는 유서에 이렇게 썼습니다. <나는 전류가 그치고 필라멘트가 끊어진 전구처럼 고독하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그는 본래 독실한 신앙인의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조부는 세계적인 부흥사였던 무디 선생과 아주 가까웠고, 그의 아버지는 의료선교사의 꿈을 평생 버리지 못했던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헤밍웨이도 주일학교 때 성가대로 찬양을 부르는 소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신앙에서 이탈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그의 삶은 망가져갔습니다. 제멋대로 사는 사람이 되었고, 자살로 인생을 끝내고 만 것입니다. 

반면에 또 한 사람의 노벨상 수상자가 있습니다. 그는 1970년에 노벨 문학상을 받았고, 지난 2008년에 세상을 떠난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입니다. 그는 스탈린 치하에서 철저한 공산주의자로 살았습니다. 공산주의는 그에게 예루살렘이었습니다. 공산주의가 세상에 행복을 가져올 것이라고 확고하게 믿었고, 장교로 전쟁에 나가 공산주의를 위해 싸우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수용소에서 고통을 받으면서 그는 공산주의라는 예루살렘이 결코 행복을 가져올 수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결국 그는 또 하나의 귀환을 시도하여 하나님께로 돌아갔고, 그 품에 안겼습니다. 후에 그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마르크스주의자요, 레닌주의자로서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수용소에서 신념은 견고한 토대를 잃었고, 논쟁을 견디어 낼만한 힘을 잃어갔다...>  그는 하나님의 품에서 비로소 안식을 누렸습니다. 1983년 소련에서 종교를 부활시킨 개척자로 인정되어 그는 종교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템플턴상을 수상하였습니다. 

그는 템플턴상 수상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민족 6천만을 삼켜 버렸던 파괴적인 혁명의 주원인을 가능한 대로 간략하게 설명해 달라고 내개 요청한다면, 이 말을 반복하는 것보다 더 정확한 설명은 없을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잊어버렸습니다. 이것이 이 모든 일이 일어나게 된 이유입니다”>  

여러분, 헤밍웨이는 하나님을 떠남으로 불행해졌고 자살했습니다. 반면에 솔제니친은 하나님의 품으로 귀환함으로 평안을 맛보았습니다. 두 사람이 얼마나 대조적입니까? 기억하십시오. 참 행복은 예루살렘이 보장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십니다. 

오늘 우리는 어디쯤 있습니까? 스가랴와 학개가 말씀을 전할 당시의 유다 백성들은 우리들과 비슷했다고 생각됩니다. 그들은 성전을 건축하려 했습니다. 이를 볼 때 하나님을 완전히 떠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조금 힘들어지자 성전 공사를 중단하여 방치했습니다. 이로 볼 때 하나님의 품에 깊이 안기지도 못했습니다. 그들은 어중간한 입장에 있었습니다. 하나님께로 달려가다가 웬일인지 중간에 멈추어서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다가 중단한 사람, 하나님을 사랑하다가 떠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도 어중간한 입장에 서 있을 때가 얼마나 많습니다. 이처럼 예배하러 나온 것을 보면 하나님을 아주 떠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평소 우리의 마음과 삶을 보면 하나님의 품에 깊이 안기지도 못한 경우가 많은 게 아닐까요? 여러분, 하나님을 먼 곳에서 바라만 보시면 안 됩니다. 가까이 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따스하고 넓은 가슴에 안겨야 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예루살렘을 찾지 말고, 진정한 또 하나의 예루살렘으로 나가야 합니다. 그 진정한 또 하나의 예루살렘을 성경은 <새 예루살렘>이라고 부릅니다. 예루살렘과 새 예루살렘의 차이점이 무엇일까요? 예루살렘은 하나님 없이 인간적인 행복을 추구하는 곳이라면, 새 예루살렘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곳을 말합니다. 

요한계시록 21장 2절 이하는 장차 우리가 들어가게 될 천국, 하나님의 나라를 <새 예루살렘>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 곳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곳입니다.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할렐루야!  

우리를 억압하던 바벨론에서 벗어나 지금 예루살렘으로 가고 계시다면, 어서 다시 하나님께로 나아가시길 바랍니다. 그 때 우리는 아우구스티누스처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아버지의 품에 있기까지는 참 평안을 몰랐나이다> 이렇게 고백하는 우리 모두가 되길 원합니다. 

하나님께로 귀환하는 사람은 어떤 모습으로 살아야 할까요? 두 가지만 말씀드리지요. 
첫째, 모든 일을 하나님을 기준으로 판단하여 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옳다고 하시면 옳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면 열심히 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면 버리십시오. 
둘째, 모든 다른 일보다 하나님을 최우선으로 사십시오. 하나님을 위한 일보다 더 바쁜 일은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위한 일이 곧 우리 자신을 복되게 하는 최고의 일임을 기억하십시오. 

열한 달 동안 우리를 사로잡았던 예루살렘을 떠나 이제 하나님께로 귀환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12월을 살길 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로 마주 나아오십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벌써 와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벌써 이천여 년 전에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세상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당신께로 부르셨습니다.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가까이 오라고 하셨습니다. 탄생하신 예수님을 맞이하는 마음은 그 분께로 가까이 가는 마음입니다. 이 마지막 달 12월, 성탄의 달을 주님께로 나아가는 마음으로 살길 원합니다. 그리하여 그 분만이 주실 수 있는 안식, 평안, 기쁨, 축복이 충만하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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