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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전 밖 마당… (계 11:1-4)

첨부 1


성전 밖 마당… (계 11:1-4)

 
또 내게 지팡이 같은 갈대를 주며 말하기를 일어나서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측량하되 (1)
성전 바깥 마당은 측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이것은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그들이 거룩한 성을 마흔두 달 동안 짓밟으리라 (2)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그들이 굵은 베옷을 입고 천이백육십 일을 예언하리라 (3)
그들은 이 땅의 주 앞에 서 있는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니 (4)
<요한계시록 11장 1~4절>

할렐루야! 
평안하십니까?

여러분은 자신의 감정을 잘 드러내십니까?
아니면 잘 감추는 편이십니까?
어떤 분은 감정을 잘 드러냅니다.
작은 일에도 삐죽거리고 표정이 달라집니다.
그런가하면 어떤 분은 깔깔거리고 천지가 뒤집어지게 웃습니다.
그런데 어떤 이는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속을 알 수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미국 갤럽이 전 세계 151개 나라 사람들을 대상으로
얼마나 감정을 드러내며 사는지 조사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무뚝뚝한’ 국민은 싱가포르 사람들이었습니다.
다른 사람 앞에서 철저하게 감정을 숨긴다는 일본 사람들은
의외로 무뚝뚝한 순위로는 80위였고,
중국인도 60위로 웬만큼 감정을 드러내는 편이었습니다.
한국인은 20위에 올라 일본인, 중국인보다 
훨씬 더 감정을 감추는 것으로 조사되었습니다.

서울대 심리학과에서 
감정을 드러내는 우리말 430개를 추려보았답니다.
그랬더니 ‘기쁘다’, ‘반갑다’처럼
좋은 감정을 나타내는 말이 전체의 30%,
‘역겹다’, ‘억울하다’ 같은 불쾌함을 표현한 말이 전체의 70%였습니다.
가뜩이나 무뚝뚝한 우리나라 사람들이 그나마 감정을 표현할 때
부정적인 표현을 더 많이 사용한다는 증거입니다.
<2012년 11월 24일, 조선일보, A34면, 참조.>

그래서인지 우리나라사람들에게 여론조사를 하면 
말과 결과가 잘 맞지 않습니다.
여러분, 속을 정확히 드러내시기 바랍니다.
긍정적인 말, 긍정적인 표현을 많이 하도록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오늘부터 우리는 예수님의 탄생과 재림을 준비하는 
강림절(降臨節-Advent, 대강절, 대림절)을 보내게 됩니다.
강림절에는 헌신과 희생, 고난을 상징하는 보라색을 사용합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감사하며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대하고 기다리는 절기가 강림절입니다.
그래서 미국에서는 11월 말까지 
모든 크리스마스 장식을 다 하고 12월을 맞습니다.
예수님을 맞이하려는 마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어린아이같이 성탄절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옆에 계신 분과 미리 인사합니다.
“메리 크리스마스(Merry Christmas)”

성경을 높이 들고 우리의 믿음을 표현합니다.

저는 예수 믿어 구원받았습니다(요3:16).
저는 예수 믿어 하나님 자녀 되었습니다(요1:12).
저는 예수 믿어 천국 백성 되었습니다(빌3:20).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오늘(시118:24),
하나님 말씀으로 가르침을 받습니다(딤후3:14~17).
눈을 열어 주의 법 안에 있는 
놀라운 진리를 보고 깨닫게 하소서(시119:18).
"아멘"으로 순종하여(고후1:20)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 되게 하소서(마5:16).
아멘.

그런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성전 안과 바깥마당

출애굽 이후 광야 생활을 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곳에서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 장소가 필요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예배 장소를 짓도록
자세한 방법을 알려주셨고 (출 25:1~27:21)
모세는 그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출 36:8~39:43)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거룩한 천막’이라는 뜻의
성막(tabernacle, 聖幕 - 회막, 증거막, 장막)입니다.

이것은 성경에 나오는 성막에 대한 말씀을 참조하여 그린 것입니다.
<창원 세광교회 홈페이지에서 인용>

보고 계시는 그림 성막은 
광야에서 이동하기 편한 텐트 모양이라고 생각하면 쉽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성막은 솔로몬이 성전을 지을 때까지
하나님께 예배하는 장소였습니다.

성막의 구조는 천막 안에 있는 성소와 지성소
그리고 천막 바깥의 바깥뜰 …
이렇게 셋으로 나눌 수 있었습니다.
솔로몬이 지은 하나님의 성전도 구조는 성막과 비슷했습니다.
성전 건물 안쪽으로는
언약궤를 두는 ‘내소’와 성소에 해당하는 ‘외소’가 있었고
성전 건물 바깥으로는 
울타리가 있는 곳까지 넓은 뜰이 있었습니다. (왕상 6:1~7:51)

본문 말씀이 기록된 요한계시록은
성경 전체에 흐르고 있는 계시와 예언들에 대한 
결론 같은 말씀입니다.
신약성경의 맨 첫 부분인 복음서가
이 땅에 오신 아기 예수의 탄생으로 시작한다면
요한계시록으로 끝나는 신약성경의 마지막은
다시 오실 예수님과 그에 앞서 이루어질 몇 년 간의 일들을
풀어가고 있습니다.
<『비전 성경 사전』 (서울: 두란노, 2006). p.1006, 참조.>

사도 요한에게 나타난 천사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 일어나서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측량하되”(계 11:1)

성전 안에 머물면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의 수를
세어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천사는 성전에 있는 예배자 모두를 
세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2절 말씀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전 바깥 마당은 측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이것은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그들이 거룩한 성을 마흔두 달 동안 짓밟으리라”(계 11:2)

성전 바깥마당에 머물고는 있으나 
예배하러 성전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바깥마당/뜰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은 수를 세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천사는 그들이 거룩한 성을 
짓밟을 것이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성전에 머물고 있는 사람들이 두 부류로 나뉘었습니다.
성소와 지성소가 있는 … 성전 안에 들어온 사람들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들로서
하나님께서 그 수를 세기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성전 바깥마당에 머물고 있는 사람들은
비록 성전에 와 있었지만
거룩한 성을 짓밟을 것이라 예언되었습니다.

안티 크리스천 (Anti-Christian)

죄로 인해 멸망할 수밖에 없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됨을 우리는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유일한 구원자이십니다.
그래서 세상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를 
‘그리스도인’, 즉 ‘크리스천(Christian)’이라고 부릅니다.(행 11:26)
비하하는 의미에서 ‘예수쟁이’라고도 말합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유일한 진리인 예수 그리스도를
부정하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우리는 ‘반(反) 그리스도인’, 
‘안티 크리스천(Anti-Christian)’이라고 부릅니다.

기독교 역사를 보면 교회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비난하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조롱하는 사람들은 
늘 ~ 있어 왔습니다.
심지어 예수님 시대에도 
예수님을 미워하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향해
-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마 11:19)
- 당시 하찮은 사람으로 평가되었던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하며 무시했습니다. (눅 7:34)
- 겉으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속으로 신성 모독의 죄를 범한다고 
비난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마 9:3)
- 심지어는 예수님을 향해
‘귀신의 왕을 의지한다’고 의심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마 9:34, 막 3:22)

문제는 예수님을 좋지 않은 눈길로 바라보고 
함부로 말했던 사람들이 누구였나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 사람들이 그랬습니까? 아닙니다.
주로 하나님을 믿고 율법을 지키며 산다는 
당시 유대교의 지도자들 … 바리새인들,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비난하고 비판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비난했던 사람들은
하나님을 제일 믿는다고 자랑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본문 말씀에도 <거룩한 성>을 짓밟는 것은
하나님과 상관없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거룩한 곳에 들어와 바깥뜰에 머물고 있는 사람들이라 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를 ‘개독교’라고 ‘목사’를 ‘먹사’라고 비하합니다.
교회의 이런 저런 부분을 들춰내고 비판합니다.
세상 법에 의지한 고발과 고소가 끊이지 않습니다.
누가 그렇게 합니까?
무당이, 점쟁이가 … 아닙니다.
불교의 승려들이 그럽니까? 아닙니다.
예수 믿었던 사람, 심지어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사람들이
헐뜯고, 비난하고, 깎아 내립니다.

칭찬과 격려

성경에 나오는 교회 중에 문제가 많기로 따지면 
고린도교회만한 교회가 없을 것입니다.
- 누구한테 세례를 받았느냐에 따라 파가 나뉘었습니다. 
(고전 1:11~12) - 바울, 게바, 아볼로, 그리스도

그런데 오늘날 교회에도 이런 모습들이 많습니다.
저는 늘 기도합니다. 평안해야 하고 은혜로워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평안을 깨는 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제가 오래 전에 인천 석바위 근처에 있는 
어느 교회에 부흥회를 인도하기 위해 갔습니다.
저녁식사를 하고 교회 본당에 올라가고 있는데
지하실 쪽에서 찬송 소리가 들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지하에서 예배드리는 것 아니냐고 했더니
우리는 위에서 예배드린다고 합니다.
무슨 말인가 했더니 교회가 둘로 나뉘어져서 
우리가 부흥회한다고 했더니 
그쪽에서도 부흥회를 한다는 것입니다.

말이나 됩니까? 하나님이 그 교회에 계시기는 할까요?
1층, 2층에 있는 모든 문에 못질이 되어 있었습니다.
위에 있는 성도들도, 지하에 있는 성도들도 
아무도 쓸 수 없도록 해놓았다는 것입니다.
그런 교회에 가서 무슨 말씀을 전해야 하는지 ...
그래도 열심히 말씀을 전했습니다.
이틀 지나자 제 신변의 위협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우리교회 청년들에게 
검정양복을 입고 오라고 연락해서
교회 입구부터 설교단까지 줄지어 서도록 했습니다.
그만큼 그 당시에는 무섭기까지 했습니다.

고린도교회가 이렇게 4개의 파로 나뉘어졌던 교회입니다.
- 교회 안에 음행을 범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고전 5:1)
- 우상에게 제물로 바쳐졌던 음식을 먹어도 되느냐 / 
먹지 말아야 하느냐를 놓고 논쟁이 있었습니다. (고전 8:1~4)
- 성찬식 한다거든 집에서 먹고 오라고 했습니다. (고전 11:17~34)
- 성령의 은사를 받았으면서도 누구의 은사가 더 큰지를 놓고
다툼이 있었습니다. (고전 12:1~11)

그러나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향해 편지를 쓰면서
그들을 무조건 비판하지만은 않았습니다.
꾸짖기만 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장 2절에 보면
‘거룩해지고 성도라 부르심 받았다’고 격찬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하게 하시리라”(고전 1:4, 7~8)

바울은 
- 고린도 교회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부족함이 없다’고 칭찬했습니다.
- 하나님께서 ‘책망할 것이 없도록 견고하게 하실’것이라고 격려했습니다.
학교 선생님들, 교회학교 선생님들은 
아이들에게 칭찬과 격려를 해주어야 합니다.

선생님으로부터 저능아라는 소릴 듣던 여학생이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그 학생을 볼 때마다
“너는 똑똑하지가 못해서 공부로는 성공할 수가 없단다.
그러니 일찍 기술을 배워서 미래를 대비하렴.” 
학생은 그 말을 들으며 자신을 저능아로 생각했습니다.
그로부터 17년이 지난 후 
성인이 된 여학생은 우연히 받게 된 지능테스트를 통해
자신의 지능지수(IQ)가 160이란 걸 알았습니다. 
어렸을 때 자신을 저능아라고 했던 선생님은
당시 학생의 IQ 173을 73으로 잘못 보고
저능아라고 단정 지었던 것입니다.
17년 동안 스스로를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라 여겼지만
저능아가 아닌 천재라는 걸 알게 된 이 여성은 
이 후 명석함을 살려 많은 책들을 썼고 
발명을 해 특허를 내기도 했으며 
나중엔 기업까지 직접 운영했습니다. 

머리가 좋은 상위 2%의 사람들만 들어갈 수 있는 
멘사클럽의 전(前) 회장 
빅터 세리브리아코프(Victor Serebriakoff, 1912~2000)였습니다.
<양보석, 『고슴도치 성공전략』 
(서울: 랜덤하우스코리아, 2008). pp.116~117. 참조.>

실력있는 피아니스트 출신으로 폴란드 대통령까지 역임했던
파데레프스키(Ignacy Paderewski, 1860~1941) 는 
어릴 때 레슨을 맡았던 교사들로부터
“너는 손가락이 짧고 굵어 피아노는 맞지 않는다.”라는 말을 
자주 들어서 절망한 적이 많았습니다. 
어느 날 소년은 유명 인사들이 모이는 만찬장에서
피아노 연주를 하게 되었습니다.

연주가 끝난 후 한 남성이 소년에게 다가와
“탁월한 재능이 있으니 조금만 더 연습하고 다듬으면 
연주자로 성공할 것이다.”고 격려해 주었습니다.
소년을 칭찬했던 사람은 러시아의 피아니스트 
안톤 루빈스타인(Anton G. Rubinshtein, 1829 ~1894)이었습니다.
거장이 해 주었던 단 한 번의 칭찬과 격려가
또 다른 거장을 낳았던 것입니다.

칭찬에는 삶의 방향을 바꾸어 놓는 힘이 있습니다. 
바울의 칭찬과 격려를 입었던 고린도 교회가 어땠습니까?
고린도 교회에 보낸 두 번째 편지인 고린도후서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지금 기뻐함은 … 너희가 근심함으로 
회개함에 이른 까닭이라” (고후 7:9)

꾸짖었을 때가 아닙니다. 비판하고 훈계했을 때가 아닙니다.
고린도 교회를 칭찬하고 격려하며 위해서 기도했을 때
고린도 교회는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변화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들로 하여금
서로 비판하고 훈계하라고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대신에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히 10:24)
라고 하셨습니다.

문제없는 사람 없습니다. 죄 없는 사람도 없습니다.
교회는 문제있는 사람, 죄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당연히 문제가 있습니다.
교회 안에 문제가 있어도, 잘못된 점이 눈에 띄어도
잘할 때까지 칭찬해주고 격려해 주고, 위해서 기도해 주면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안에서 회복될 줄 믿습니다.

비전과 희망

사울이 이스라엘 최초의 왕으로 세워진 이후
구약성경은 왕들을 중심으로 흘러갑니다.
그러나 시대를 이끄는 사람이 왕 한 사람만은 아니었습니다.
왕은 백성을 다스리는 통치자였지만
통치가 하나님의 방법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어김없이 나타나는 예언자(선지자, prophet)가 있었습니다.

사울의 시대에는 사무엘
다윗의 시대에는 나단
여로보암의 시대에는 아히야가 있었습니다.

예언자에게는 두 가지 역할이 있었습니다. 
현실의 문제(부조리)를 꿰뚫어보고 비판하고,
그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은 심판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희망과 비전을 담고 있어야 했습니다.
<2008년 12월 16일, 국민일보, 25면, 참조.>

본문 말씀에서도 성전 바깥마당에 머물던 사람들이
마흔 두 달 동안 거룩한 곳을 짓밟고 난 후에 일어날 일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
그들은 이 땅의 주 앞에 서 있는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니”(계 11:3~4)

하나님께 권세를 받은 두 감람나무는
기름 부음 받은 하나님의 사람을 상징합니다. (슥 4:11~14)
두 촛대는 하나님의 성전, 곧 교회를 의미합니다. (계 1:20)
즉 잠깐 동안 거룩한 성을 짓밟는 사람들이 나타나지만
성령의 권능을 받아 사명을 감당하는 하나님의 교회가
이 땅에 나타날 것임을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 
(서울: 두란노, 2009), p.342. 참조.>

지금은 지난 어느 때보다 교회에 대한 비판이 많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자성의 목소리가 높습니다.
그러나 비판과 반성으로만 끝나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과의 행복한 동행을 기대할 수 있게 
희망과 비전을 제시해야 합니다.
그래서 새롭게 변화하고 용기를 가지고 도전하며
천국을 향해 가는 발걸음을 더욱 힘차게 내딛어야 합니다.

반대의견은 항상 있습니다.
신기하게 비판하는 사람들도 늘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와 비판의 목소리가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살아있고, 움직이고, 일한다는 뜻입니다.
거기에 희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기대가 없으면 비판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건강함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윈스턴 처칠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비판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있다.
그것은 아무 말도 안 하고 아무 것도 행하지 않으며
아무 것도 아닌 인물이 되는 것이다.”- 윈스턴 처칠
<2006년 10월 23일, 국민일보, 29면, 참조.>

비판하는 목소리가 없을 때, 반성하는 고개 숙임이 없을 때 
교회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죽은 교회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유럽의 교회들은 비판받지 않습니다.
교회가 죽었고, 죽어가고 있습니다. 건물만 남았습니다.

살아 역사하는 교회는 
비판이 있고, 판단, 핍박, 환란,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판을 통해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이루기 위해
끊임없이 움직여가고 있는 조직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비판이 목적인 꾸짖음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누구보다 목회자가 먼저 비전을 주어야 합니다.
장로님이 먼저 용기를 주어야 합니다.
권사님들이 성도들에게 희망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신앙의 모범이 되며
교사는 학생들에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꿀 꿈을 심어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교회는 여전히 이 땅에, 세상에 소망입니다.

미국 프로 미식축구(NFL-National Football League) 팀 중
샌프란시스코에 연고를 둔 팀의 이름은
‘샌프란시스코 포티나이너스(San Francisco 49ers)’입니다.
미국 서부 해안가에 위치한 도시 샌프란시스코는
미국 동부에 살던 사람들이 금을 찾으러 서부로 서부로 오면서
발전하기 시작한 도시입니다.
사람들이 금을 찾으러 몰려들기 시작한
‘골드러시’가 절정을 이루던 때가 1849년인데
샌프란시스코는 바로 그 1849년을 기념해서
‘1849년의 사람들’이라는 뜻의‘포티나이너스(49ers)’를
미식축구 팀 이름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금을 찾겠다고 많은 사람들이 황량한 서부를 찾았지만
그들 모두가 금을 발견해 부자가 되지는 않았습니다.
어쩌다 금맥을 발견해도 
그 매장량이 맞지 않으면 사람들은 채굴을 하지 않습니다.
금맥을 발견하여 그것을 캐면 돌이 많이 나옵니까, 
금이 많이 나옵니까?
찾고자 하는 금보다 필요 없는 돌이 훨씬 더 많이 나옵니다.

엄청난 양의 돌중에서 금을 조금이라도 얻어낼 수 있다면
그 소량의 금이 귀하고 값진 것입니다.

쓸데없는 돌이 많다고 금 찾기를 포기하면 
그 사람은 결국 아무 것도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요즘 교회를 향한 쓴 소리가 많이 들립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향해 손가락질을 많이 하는 시기입니다.
물론 교회가 책망 받게 하는 이름뿐인 그리스도인이 많기 때문입니다.
다 거룩해보이고 … 다 신실해 보이지만, 
교회 안에 있는 것 같지만 
마당만 밟고 가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문제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빛 되고 소금되게 살려고 애쓰는 
금 같은 신앙인들이 많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교회는 여전히 세상의 소망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금보다 귀한 믿음의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가 서로 격려하고 칭찬하며 
힘 있게 신앙생활 할 수 있도록 
서로 희망을 주고 비전을 주고 용기를 주는 
하나님의 일을 감당해야 합니다.

저는 요즘 가는 곳마다 설교할 일이 많습니다.
강대상에 설 때마다 제가 하는 말이 있습니다.
“용기를 가지십시오. 힘을 내십시오. 
우리가 빛이고 소망입니다.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있음으로 이 땅이 변화될 것입니다.
내가 다니기 때문에 좋은 교회여야 하고, 
내가 나온 학교이기 때문에 좋은 학교여야 하고,
내가 사는 대한민국이기 때문에 좋은 나라여야 합니다.”

정치하는 사람들은 한결 같이 대한민국에 희망이 없다고 말합니다.
긍정적으로 보고, 긍정적으로 말해야 합니다.

가정에서도 … 일터에서도 … 하나님 말씀대로 살려고 애쓰며, 
힘이 들고 어려워도 찬송하며 가는 …
교회가 세상의 희망임을 증거하는 증인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이해하고 … 용서하고 … 섬기고 … 베풀면서/나누면서
하나님의 자랑이 되고, 교회의 자랑이 되며
세상의 빛 되고 소금된 하늘 백성으로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전능하신 하나님!
은혜와 사랑을 감사합니다.
이 거룩한 주일에 복된 자리의 주인공 되게 하셨으니 감사합니다.
마당만 밟고 가는 어리석은 자가 아니라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림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자신은 한없는 은혜의 충만함으로 
돌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우리가 있음으로
세상에 여전히 소망이 있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우리의 작은 빛이, 우리의 작은 소금 맛이 
세상을 빛나게 하고, 맛깔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 일을 위하여 하나님 써주시옵소서.
이 귀한 시간 세상에서 땀 흘리고 애써 모은 물질을 구별합니다.
성령께서 인도하시고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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