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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다 (시 13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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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다 (시 137:1-9)

주후 73년 로마제국이 이스라엘을 멸망시키고 이를 축하하는 의미에서 금화金貨를 발행했습니다. 
그 금화에는 로마병사의 발아래 짓밟히는 애잔한 이스라엘 여인의 모습이 조각되어 있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 중에 600만 유대인의 학살현장을 지휘했던 한 독일장교의 기록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가스실에 들어가기 직전 유대인들의 마지막 소원이 로마시대의 모의금화를 손에 쥐고 죽는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나라를 잃고 방랑의 생활 2,000년 동안 유대인들은 조국 멸망의 원한을 잊지 않고자 그 굴욕의 모의금화를 손에 쥐고 살아왔던 것입니다. 
그것은 로마병사에게 짓밟히는 이스라엘 여인의 모습이 또 다시 재현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굴욕적인 로마금화에서 얻은 이스라엘의 재건정신이 곧 시오니즘(zionism)으로 성화된 것입니다. 
그들은 수많은 패배와 굴욕을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았던 것입니다. 마침내 그들은 세계의 경제계, 정치계, 교육계, 문화계, 예술계를 선도하는 인재들을 배출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오늘의 세계열강의 무대에서 무시해서는 안될 존재들로 살아남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유일신 하나님을 섬기는 가운데 그 어떤 신도 여호와 하나님을 대신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의 절대 유일신 사상은 그들 스스로를 지배하는 강력한 지배 이데올로기가 되어서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조차 유일신 사상의 종속물이 되게 하는 과오를 범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메시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신성모독죄로 십자가에 못 박는 데까지 왔던 것입니다. 
성경에서 시온이란 말은 하나님의 도성을 가리키는 명칭으로 특별히 종교적 의미에서 사용되었습니다. 
그들이 시온을 기억했다는 말은 유대민족주의적인 고토古土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구약시대 성도들의 이스라엘, 시온, 유다 등의 표현은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의미에서 한 것입니다. 

구약 성도들이 한 말은 일반적인 육체적 민족주의가 아닌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유대인들이 잃어버린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생각하고 그들의 불신앙한 죄를 자복하면서 약속의 땅 예루살렘으로 몰려드는 것이 시오니즘입니다.
여기 유대인들이 바벨론의 포로민의 처지가 되어 고향을 그리워하면서 버드나무에 수금을 걸고 망향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Ⅰ. 시온을 그리워하는 회개의 울음입니다. 

본문 137편 1-2절에 『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그 중의 버드나무에 우리가 우리의 수금을 걸었나니 』라고 했습니다. 

1) 양극화된 과거 때문에 우는 기도입니다. 
여기 『 수금 』은 성전에서 찬양할 때 사용하는 악기입니다. 유대 백성들은 이 수금으로 포로생활의 한恨을 달래 가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 수금을 버드나무에 걸었다는 것은 연주하기를 중단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연주하기를 중단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저들은 찬란한 신정국가라는 무대에서 살아왔습니다. 저들은 왕조시대의 영화 속에서 참으로 아쉬울 것이 없었던 과거를 생각할 때 그때 저들이 누렸던 하나님의 축복 때문에 울었습니다. 

또 하나의 이유는 저들이 죄를 지었을 때 하나님의 진노를 받던 때를 생각하며 흘리는 참회의 눈물이었습니다. 저들은 여호야긴 왕 제 4년에 바벨론 느부갓네살에게 포로가 되었습니다. 그 후 시드기야에 이르기까지 계속된 망국의 쓰라린 한을 생각하며 하나님의 진노 때문에 울어야만 했습니다. 

2) 거부할 수 없는 비참한 현실 앞에 우는 기도입니다. 
바벨론에 포로가 된 저들은 이제 자유하는 백성이 아니었습니다. 바벨론의 압제 아래 식민통치가 자행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선민으로서의 민족적인 수치는 말할 것도 없고 인권이 유린당하고 재물이 송두리째 수탈 당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저들의 포로가 되어 바벨론 땅에 강제 이주 당했습니다. 

3) 장차 돌아갈 시온에 대한 소망에 우는 기도입니다. 
저들에게는 조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어진 변함없는 하나님의 언약이 있었습니다. 
이 세상은 다 변한다 해도 하나님께서 인간과 맺은 약속은 변함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언약의 주체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인간과 인간과의 약속에는 분쟁과 파기가 항상 존재합니다. 약속이행에 앞서 서로를 믿어달라고 장담하는 문서와 날인들이 쌍방 간의 모든 의심을 잠재우기에 충분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의 약속 뒤에는 불신의 그림자가 상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에는 그러한 복잡한 절차가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 약속의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Ⅱ. 신앙 순결을 위한 충절의 울음입니다. 

본문 137편 3절에 『 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우리를 황폐케 한 자가 기쁨을 청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 함이로다 』라고 했습니다. 
바벨론 사람들이 조국을 잃어버린 히브리 청년들의 비통함은 아랑곳없이 노래를 요구해 왔습니다. 
히브리 청년들이 부르는 노래의 주제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를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뻔히 알면서 이들에게 이러한 요구를 하는 것은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무례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바벨론 사람들은 불멸의 예루살렘 성과 너희들이 믿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노래해 보라고 조롱했습니다.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의 조국에 대한 애국심과 선민의 자긍심을 볼 수 있습니다. 

바벨론 사람들이 우리를 황폐케 했다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저들이 먹는 음식까지도 불결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호세아 9장 3절에 『 저희가 여호와의 땅에 거하지 못하며 에브라임이 애굽으로 다시 가고 앗수르에서 더러운 것을 먹을 것이니라 』고 했습니다.
낯선 땅은 불결한 땅으로 보았습니다. 
아모스 7장 17절에 『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네 아내는 성읍 중에서 창기가 될 것이요 네 자녀들은 칼에 엎드러지며 네 땅은 줄띄워 나누일 것이며 너는 더러운 땅에서 죽을 것이요 이스라엘은 정녕 사로잡혀 그 본토에서 떠나리라 하셨느니라 』고 했습니다. 

사사 시대 사람들은 눈물의 사람이었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책망할 때 울었습니다. 
사사기 2장 4-5절에 『 여호와의 사자가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 이 말씀을 이르매 백성이 소리를 높여 운지라 그러므로 그 곳을 이름하여 보김이라 하니라 무리가 거기서 여호와께 제사를 드렸더라 』고 했습니다. 

에스라도, 느헤미야도 백성의 죄를 자복하며 울었습니다. 
느헤미야 1장 4-5절에 『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 가로되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이여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언약을 지키시며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간구하나이다 』라고 했습니다. 

다윗도 자기 아이가 병들었을 때 금식하고 울며 기도했습니다. 
사무엘하 12장 16절에 『 다윗이 그 아이를 위하여 하나님께 간구하되 금식하고 안에 들어가서 밤새도록 땅에 엎드렸으니 』라고 했습니다. 
히스기야도 이사야 선지자로부터 사망선고를 고지 받고 통곡하며 기도했습니다. 

이사야 38장 1-3절에 『 그 즈음에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니 아모스의 아들 선지자 이사야가 나아와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는 네 집에 유언하라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 하셨나이다 히스기야가 얼굴을 벽으로 향하고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가 주의 앞에서 진실과 전심으로 행하며 주의 목전에서 선하게 행한 것을 추억하옵소서 하고 심히 통곡하니 』라고 했습니다. 
참된 성도는 그 심령이 민감하기 때문에 자기 죄는 물론이고 남의 죄를 위해서도 우는 것입니다. 

에스겔 36장 26절에 『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라고 했습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이들의 간악함을 알고 노래 부르기를 중단했습니다(137:4). 왜냐하면 불결한 민족 앞에서, 불결한 땅에서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비록 나라는 빼앗겼지만 히브리 청년들은 그들의 신앙만은 빼앗기지 아니했습니다. 
히브리 청년들의 입의 찬송은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는 의의 도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벨론 사람들에게 저들의 노래를 제공할 수 없었습니다. 저들의 찬송과 감사는 바벨론 사람들과는 무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벨론 사람들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노래를 부르는 것은 반애국적 매국행위로 간주한 것입니다. 

본문 137편 6절에 『 내가 예루살렘을 기억지 아니하거나 내가 너를 나의 제일 즐거워하는 것보다 지나치게 아니할찐대 내 혀가 내 입 천장에 붙을찌로다 』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만일 내가 나의 기쁨의 머리에 예루살렘을 놓지 않는다면"이라고 직역할 수 있습니다. "내 혀가 입 천장에 붙을찌로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자신의 고향을 기억하는 일을 중단하게 만드는 무익한 목적에 혀를 사용할 경우 그 혀는 무가치하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이 해 받던 날을 기억하시고 에돔 자손을 치소서라고 했습니다(시 137:7).
이 말은 "예루살렘의 날에 에돔 자녀들을 기억하소서"라는 말로 직역할 수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한 형제로서 에돔과 유다는 서로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창 25:25). 
에돔 자손들이 방어력이 둔한 틈을 타서 예루살렘 성을 농락하고 도망하는 자들을 무참히 학살했습니다. 
이 같은 에돔과의 불행한 날을 기억해 달라고 애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복수가 아니라 거룩한 예루살렘의 회복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Ⅲ. 절망 가운데도 승리를 대망하는 확신에 찬 고백의 울음입니다. 

본문 137편 8-9절에 『 여자 같은 멸망할 바벨론아 네가 우리에게 행한 대로 네게 갚는 자가 유복하리로다 네 어린것들을 반석에 메어치는 자는 유복하리로다 』라고 했습니다. 
본문의 말씀을 직역하면 "네가 우리에게 복수한 그대로 복수하는 자에게 복이 있을찌어다"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시편 기자는 복수의 주체를 궁극적으로 하나님으로 보았습니다. 반드시 하나님께서 바벨론에게 복수하시고 자신들을 본국으로 귀향케 하실 것을 대망하고 있습니다. 

『 네 어린것들을 반석에 메어치는 자는 유복하리로다 』라고 한 것은 하나님의 심판이 이를 것을 알려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도구로 선용되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심판은 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원수 바벨론이 망한다는 확신의 고백입니다. 따라서 자신들은 반드시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서 영원히 살겠다는 의지를 천명하는 고백입니다. 
신앙은 낙심치 아니합니다. 기독신자들에게 절망은 소망을 기원하는 출발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인간은 누구나 고향을 그리워하는 피조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인은 고향을 노래하고 예술가는 고향을 그린다고 했습니다. 
성경은 『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히 11:16)고 했습니다. 이것은 인간에게 돌아갈 나의 영원한 조국이 있다는 것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요 14:3)고 하셨습니다.
이 땅에 사는 저와 여러분은 나그네의 신분에 지나지 않고 있습니다. 
창세기 47장 9절에 『 야곱이 바로에게 고하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일백 삼십년이니이다 나의 연세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세월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하고 』라고 했습니다.

레위기 25장 23절에 『 토지를 영영히 팔지 말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라 너희는 나그네요 우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 』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13절에 『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라고 했습니다.

베드로전서 1장 17절에 『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자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의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고 했습니다.
나그네에게 주어지는 모든 부귀와 영화는 일시적인 것이요, 가변적인 것입니다. 언제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는 일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크리스찬에게 본향을 그리는 시적 감성이 무디어져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연말연시가 되면 자기가 태어난 땅에 고향과 부모형제들에 대한 그리움이 쌓입니다. 그러나 정작 영원한 하늘나라 본향을 동경하는 데는 소극적입니다. 
2012년 한 해도 저물어 가고 있습니다. 이 세상은 모두 하나님의 통치 영역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모두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역은 약탈당하고 점령당했습니다. 이리저리 끌려 다니면서 조롱거리가 되었습니다. 

정치·경제·문화·예술·교육·학문 등등이 세상의 가치관에 모두 점령당해 버렸습니다. 우리의 모든 것이 하나님을 위해 존재하지 못하고 세상을 위해 존재하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세상 사람들이 주는 삯으로 전전긍긍하며 살아가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러나 이 비극적 현실 앞에 분노하는 자들은 많지 않습니다. 
빼앗긴 우리의 영역을 애통해 하는 회개의 눈물이 있어야 할 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신앙순결을 위해 피 흘리기까지 싸우겠다는 비장의 결의를 할 때입니다. 
비극적인 현실 가운데서도 궁극적 승리를 대망하는 굳건한 믿음을 가져야 할 때 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최후의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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