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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대림절] 주님을 기다리는 신앙(1) (마 25: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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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을 기다리는 신앙(1)  (마 25:1-13)

오늘은 대림절 두 번째 주일입니다. 대림절이란 주님 오실 날을 기다리는 절기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러나 오늘 현대적인 대림절의 의미는 이미 2천 년 전에 오신 초림의 예수님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다시 오실 재림의 주님을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그러므로 대림절의 핵심은 재림에 초점이 맞추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수백 년을 자기 민족을 구원할 메시야를 기다렸습니다. 메시야와 관련된 예언들이 이사야에서부터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이때를 기점으로 본다면 7백여 년을 기다린 셈이 됩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미 예수님이 이 땅에 2천 년 전에 오셨지만,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여전히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아직도 초림의 예수님을 기다리지만 우리는 예수님이 이미 2천 년 전에 이 땅에 메시야로 오셨음을 믿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또한 여전히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기다리는 예수님은 영광중에 다시 오실 재림의 예수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24장을 통해 재림에 대해서 또 세상 마지막 때에 어떻게 될 것인가를 잘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세상 끝 날이 반드시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재림도 반드시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께서 초림하신다고 하는 예언이 총 456번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다시 재림하신다는 예언은 무려 1518번 기록되어 있습니다. 단 한 번만 기록되어 있어도 하나님의 말씀은 변치 않는데 1518번이나 기록되어 있다면 이것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마 24:30절에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고 하셨고, 마 24:44절에 “이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고 하시면서 재림을 약속하셨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이 약속을 믿고 “마라나타”의 신앙, 곧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는 신앙을 소유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 교회는 2천 년 동안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사실 교회뿐만 아니라 모든 인생은 기다리는 인생입니다. 인간은 희망으로 사는 존재입니다. 기다림이 없는 인생은 불행합니다. 아무 것도 기다릴 것이 없을 때 인생은 무의미해 지고 허무해집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 신앙인들은 허무와는 거리가 먼 존재들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장차 주님을 만나게 될 날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본문의 열 처녀의 비유를 통해서 재림 때에 성도들이 주님 맞을 자세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당시 결혼 풍습을 보면 유대인들은 혼인 날짜가 정해지면 먼저 신랑이 친구들과 함께 신부 집으로 가서 혼례를 치른 후 다시 신부와 신부의 친구들을 데리고 자기 집으로 가서 성대한 혼인 잔치를 벌이는 풍습이 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열 처녀는 신부의 친구들로서 신부의 집으로 오는 신랑 일행을 맞아 신랑 집에서 벌어지는 혼인 잔치에 들어가기 위해 기다리는 중입니다. 보통 신랑은 저녁에 나오지만 때로는 늦을 때도 있는데 한밤중이나 새벽녘에 오기도 합니다. 그래서 신부들의 친구들은 반드시 등을 준비하고 신랑을 기다려야 합니다. 

이 비유에서 보면 열 처녀가 등을 들고 신랑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는데, 그 중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로웠습니다. 미련한 처녀들은 등은 가지고 나갔으나 기름을 준비하지 아니했고, 슬기로운 처녀들은 등과 여분의 기름을 준비했습니다. 밤늦게 신랑이 왔을 때, 기름을 준비한 슬기로운 다섯 처녀들은 등에다 기름을 가득이 넣어 등불을 밝히고 신랑을 맞이했습니다. 

그러나 나머지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미련한 다섯 처녀들은 기름을 사러 간 동안에 신랑이 도착했고, 예비하였던 처녀들은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이 닫혔습니다. 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라고 애원했지만, 신랑은 대답하기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고 했습니다. 결국 기름을 미리 준비하지 못하였던 미련한 다섯 처녀는 혼인잔치에 참여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 비유에서 신랑을 기다리는 열 처녀는 다시 오실 재림의 주님을 기다리는 성도들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신랑은 예수 그리스도를, 신랑이 신부 집으로 오는 것은 주님의 재림을, 혼인잔치는 최종적인 구원을 의미합니다. 

본문을 자세히 보면 슬기로운 다섯 처녀와 미련한 다섯 처녀는 다같이 최선을 다해 신랑을 맞을 준비를 했습니다. 성경에는 기록되지 않았습니다만 옷도 다 잘 입었고, 얼굴과 머리단장도 곱게 했습니다. 그들은 똑같이 신랑을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똑같이 잠자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다같이 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눈에 보이는 것은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 

그러면 지혜로운 처녀들과 미련한 처녀들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기름의 준비였습니다.  

지혜로운 다섯 처녀는 기름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미련한 다섯 처녀는 준비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보이지 것은 잘 준비하였지만 보이지 않는 것에 소홀히 하였습니다. 등불을 밝힘으로 소모되는 기름, 계속 채워져야 하는 기름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 때문에 등은 들고 있었지만 그 속에 정작 필요한 기름은 준비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이 기름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전통적인 해석에 의하면 우리는 이 기름을 성령님으로 이해합니다. 성경을 읽어보면 많은 경우에 성령이 기름으로 상징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성경에서 기름만 나오면 그것을 다 성령으로 생각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기름이 성령님이라면 등불에 불을 켜면 기름이 점점 줄어드는데, 그러면 성령님이 우리 안에서 점점 없어진다는 말입니까? 기름이 있다가 시간이 지나면 없어지는 것처럼 성령이 우리에게 있다가 없어질 수 있습니까? 이것은 성령에 대한 오해입니다. 인격이신 성령님은 한번 우리 안에 오시면 우리와 함께 영원히 같이 계십니다. 

오늘 주신 말씀에서 등불의 기름은 우리 그리스도인이 마땅히 가지고 있어야 할 신앙의 내용, 또는 신앙의 본질인 믿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등만 가진 것은 형식적인 신앙생활로 만족하는 상태를 말하고, 등과 기름을 다 준비한 것은 진실한 믿음을 소유하였다는 뜻입니다. 오늘 교회에 다니는 많은 분들이 형식이 있기 때문에 내용은 당연히 있을 것으로 착각합니다. 형식이 무엇입니까? 등이라든지, 결혼잔치에 초대를 받는 것이라든지, 그 잔치 자리에 참석했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것만 가지고도, 그 형식이 있기 때문에 내용도 있을 것이라고 착각하면서, 내용에 대해서는 고민하지 않고 신앙생활을 해 나갑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이렇게 예배 시간에 참석했습니다. 그것은 형식입니다. 찬송을 부릅니다. 엄격히 말하면 그것도 형식입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 이런 형식에 참여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나도 신앙이 있는 사람이겠거니'하고 생각하게 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형식이 있으면 자연히 내용이 따르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신앙의 형식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신앙의 내용, 즉 신앙의 본질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의 문을 열고 들어오지만, 그들이 다 구원받고, 주님을 기쁨으로 만나지는 않습니다. 교회 등록이나, 세례가 구원의 티켓이 될 수 없습니다. 모태신앙이나, 목사의 자녀라 해도 그것은 등에 불과합니다. 중요한 것은 등에 불을 붙일 수 있는 기름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신앙의 행위, 혹은 믿음, 성령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각각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이 믿음을 가질 수 있고, 참된 신앙의 행위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주님을 갈망하면서도 기름을 준비하지 않는 어리석은 자들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출석하는 이 교회가 신앙의 형식인 등을 만드는 것으로 만족하지 마십시오. 신앙의 등뿐만 아니라, 이곳에서 기름을 준비하는 지혜로운 자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를 통해서 어떤 직분을 받았고, 어떤 위치에 있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그리스도인이라는 또는 목사, 장로, 집사, 권사라는 허울 좋은 직분을 가지고 있어도 믿음이 없는 사람은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기름을 준비하지 않으면 우리의 모든 신앙의 타이틀은 아무 쓸모가 없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제사만 잘 지내면 성민이 되는 줄로 알았습니다. 주일날 예배당에만 나오면 구원이 보증되는 것이 아닙니다. 헬라인들은 철학, 지식을 가지면 구원을 얻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성경 몇 토막 지식 가졌다고 해서 하나님의 자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로마인들은 법과 도덕, 질서를 지키면 구원받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종교인들이 착하게 살면 구원받는다고 생각하면 착각입니다. 오늘날도 우리 주변에는 이처럼 현대판 유대인들과 헬라인들, 그리고 로마인들이 교회 안에 많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 가운데 종교적인 형식과 겉치레는 있는데, 정작 있어야 할 기름이 없는 사람, 신앙의 본질인 믿음을 잃어버린 분은 없습니까? 형식적인 기도는 있으나 하나님과의 진정한 교통이 없는 분은 없습니까? 

형식적인 예배는 드리지만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지 못하는 분, 형식적인 봉사는 있으나 성령의 충만함과 감격과 기쁨을 잃어버린 분은 없습니까? 설교를 판단하고 평가할 줄은 알지만 말씀에 대한 진정한 순종과 실천이 없는 분은 없습니까? 바로 이런 사람이 형식적인 준비는 갖추었지만 제일 중요한 기름은 준비하지 못한 어리석은 처녀들입니다. 소위 종교인입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말세의 특징을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신앙의 껍데기는 있으나 신앙의 알맹이가 없는 사람들이 교회에 많이 몰려오는 시대가 종말의 시대라는 것입니다. 

오늘 대림절 둘째주일을 맞이하여 주신 말씀을 통하여 내 신앙에 기름, 곧 믿음이 충만하게 채워져 있는지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본문이 말하는 또 다른 핵심이 있습니다. 

밤늦게 신랑이 도착했습니다. 신랑이 도착했다는 전갈을 받자마자 미련한 다섯 처녀는 등을 보았습니다. 기름이 넉넉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지혜로운 다섯 처녀에게 기름을 좀 나눠달라고 했습니다. 이 어리석은 다섯 처녀는 기름을 빌릴 수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혜로운 다섯 처녀는 어리석은 처녀들의 부탁을 거절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을 통해 주님께서 교훈 하시고자 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신앙의 본질인 믿음은 대신하거나 빌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주거나 양도할 수 있는 것이 있는가 하면, 그것이 불가능한 것들도 있습니다. 예컨대 내가 가진 재산은 나누어 줄 수 있지만, 나에게 속한 남편이나 아내는 나누어 줄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비유는 바로 우리의 믿음과 구원이 나누어 줄 수 없음을 보여 줍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의 구원은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인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우리의 출생과 죽음을 대신할 수 없듯이 영생을 좌우할 믿음과 구원 역시 아무도 대신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나의 고백이 나를 구원 하고, 나의 회개가 나를 죄에서 건지고, 나의 충성과 봉사와 희생으로 내가 상급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흔히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부인을 둔 믿음 없는 남편들이 잘하는 말이 "아내 치맛자락 잡고 천당 가면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믿음은 각자 자기의 믿음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내 신앙은 어디까지나 내 신앙입니다. 나의 구원은 나의 구원일 뿐입니다. 이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나의 문제입니다. 

나의 영혼의 문제, 나의 생명의 문제, 나의 구원의 문제. 이 모두는 누구의 것에서도 빌려 올 수 없고 나누어 가질 수도 없는 각자의 문제요, 나만의 문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는 개인적인 만남, 개인적인 관계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나는 언제든지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 설 수 밖에 없습니다. 

시카고의 무디 신학교 총장이었던 조지 스위팅 박사가 남긴 말은 의미심장합니다. “하나님에게는 자녀만 있지 손자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인간적으로 말하면 내가 ‘하나님 아버지’하고 말하면 우리 자녀들은 ‘하나님 할아버지’하고 불러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내 자녀도 '하나님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왜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개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의 삶은 누구도 대신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자신이 하나님을 만나셔야 합니다. 네 자신이 거듭난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내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 앞에 무릎을 꿇고 예수를 나의 주로 고백하여야 합니다. 신앙의 삶, 믿음은 누구도 대신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열 처녀 비유를 말씀하신 주님의 교훈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예수님이 어느 마을에 나타나셨습니다. 맨 처음 예수님을 본 아주머니가 당황하여서 사제관으로 달려갔습니다. “신부님, 큰일 났어요. 예수님이 오셨어요. 저기 보세요. 막 교회 마당에 들어서시잖아요?” 신부는 주교에게 얼른 전화를 했습니다. “주교님, 어떡하죠? 예수님이 우리 교회에 오셨는데요.” 주교는 “잠깐 기다리세요.” 하고는 교황청에 전화를 했습니다. 그런데 교황청에서 온 대답은 이랬습니다. “바쁜 척 하시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는 지금 이 세상의 일로 너무나 바쁘고 분주하여 주님에 대한 관심이 부족하지 않습니까? 지금 너무나 육신적인 일로 바빠서 내 신앙에 기름이 떨어졌는데도 혹 모르고 있지는 않았습니까? 내 영혼의 잔이 비어 있지 않습니까? 내가 지금 영적인 슬럼프에 빠져 있지는 않습니까? 무서운 영적인 침체가 나를 찾아오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도 예수님을 기다린다고 하면서 막상 예수님께서 오시면 어쩔 줄 몰라서 당황하게 될지 모릅니다. 지금 나에게 예수님께서 오신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번 대림절 기간을 통하여 기름을 잘 준비하여 우리 모두가 다 주님을 기쁨으로 맞이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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