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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의 길을 준비하는 사람 (시 85:12-13, 눅 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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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길을 준비하는 사람 (시 85:12-13, 눅 3:1-4)

대한민국은 지금부터 50년 전만 하더라도 세계에서 가장 가난하고 고아가 많은 나라였습니다. 그 때는 다른 나라의 원조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피원조국이었는데 이제 원조국으로 바뀌었습니다. 근래에 피원조국에서 원조국으로 전환된 유일한 나라가 우리나라입니다. 우리나라는 근래 몇 십 년 동안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이룬 유일한 나라입니다. 그 만큼 우리나라는 몇 십 년  만에 엄청난 경제부흥을 이룬 나라입니다. 
  
경제발전을 위하여 필연적인 요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사회간접자본이라고 합니다. 식수나 하수 문제를 잘 다스리고, 물을 풍족하게 하는 것은 필수요소입니다. 그래서 예부터 치산치수가 굉장히 중요한 국가적 사업이었습니다. 우리나라도 잘 해보겠다고 4대강 사업을 했는데 이에 대한 평가는 훗날 나오리라 봅니다. 사회발전의 기본 조건 가운데 하나가 도로의 확충입니다. 
  
우리나라는 최근 도로가 참 잘 되어 있습니다. 전국 어느 곳에서나 10분 이내에 고속도로로 진입하게 만든다는 것이 정부의 방침이라고 합니다. 대도시의 도로율이나 전국의 도로포장율은 세계 어느 나라에도 뒤떨어지지 않을 만큼 잘 되어 있습니다. 최근의 자료는 찾지 못했지만 몇 년 전의 자료에 의하면 우리나라의 철도 총 길이는 24만 km, 도로는 624만 km, 고속도로는 84,865 km였습니다. 지금은 이보다 더 많아졌을 것입니다. 
  
요한복음 1:1에는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고 합니다. 말씀은 ‘로고스’라는 헬라어입니다. 옛날 성경에는 이 절은 “태초에 도(道)가 있으니라”고 번역하였습니다. 태초에 길이 있었습니다. 천지창조 이전의 상태는 혼돈과 공허였습니다. 길이 있을 수 없는 혼돈과 공허였지만 그 가운데 보이지 않지만 길이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14:6에서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은 길이 아닙니다. 사람은 누구도 길이 될 수 없습니다. 사람은 길을 닦는 존재이며, 길을 준비하는 존재에 불과합니다. 
  
길을 잘 닦아 놓는 것은 중요한 사회자본입니다. 길은 나를 위해 닦기도 하지만 다음 세대, 후손을 위해 닦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목적지로 인도하는 길이 되심을 증거하셨습니다. 내가 길을 닦아야 후손이 예수를 잘 믿게 됩니다. 
  
세상의 수많은 길 가운데 바른 길이 있습니다. 길을 제대로 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많은 길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유일한 길입니다. 예수님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입니다. 유일한 길인 예수님을 믿어야 하고, 예수님께 가는 길을 잘 준비해야 합니다. 
  
예레미야 2:36에는 “네가 어찌하여 네 길을 바꾸어 부지런히 돌아다니느냐?”라고 합니다. 길을 잘 못 닦아서 다른 길로 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길을 바꾸어 다른 길로 가도 된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종교다원화가 무엇입니까? 유일한 길에 엉뚱한 길을 내어 그리 가려고 애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가는 길은 여러 가지라고 합니다. 하나님께로 가는 길이 많다고 주장합니다. 
  
일전에 뉴스를 보니 경춘고속도로 동홍천에 고속도로를 건설하면서 동네 길을 막아 동네로 들어갈 길이 없어 고속도로에 경운기가 왔다 갔다 하고 있었습니다. 길을 잘못 준비한 결과가 이런 어이없는 일이 벌어지게 한 것입니다. 
  
리빙스턴은 길이 없는 정글을 헤치고 아프리카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를 파송한 런던선교회에 잘 도착했다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선교회는 오지에 도달하는 길을 개척했다면 더 많은 선교사를 보내겠다고 답장을 보냈습니다. 그 때 리빙스턴선교사는 다시 편지를 선교회에 보냈습니다. “만들어진 길이 있다고 해야만 올 사람은 필요 없고, 길이 없다고 해도 올 사람이 필요합니다”. 세상에는 길을 준비하는 용기 있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끊임없이 길을 닦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세례요한은 주님이 오실 길을 준비하고, 그 길을 평탄케 하기 위하여 예수님보다 먼저 온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입니다. 요한은 길이 아니라 길을 준비하는 사람입니다. 요한을 통하여 주님이 오실 길을 준비하는 사람의 모습을 보고 우리가 주님의 길을 준비하는 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세상 권력 있는 자로 주의 길은 준비하지 못합니다. 

누가복음 3:1-2 상반절에는 “디베료 황제가 통치한 지 열다섯 해 곧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헤롯이 갈릴리의 분봉 왕으로, 그 동생 빌립이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의 분봉 왕으로, 루사니아가 아빌레네의 분봉 왕으로,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라고 합니다. 이 구절에는 로마황제, 총독, 분봉왕, 대제사장이 등장합니다. 이들은 당시 세상의 정치적, 종교적 권력가를 총 망라한 것입니다. 당시에 이들의 권력을 다 합치면 못할 일이 없었을 것입니다. 이들이 힘을 합치면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합니다. 집을 세우기도 할 수 있고 파괴할 수도 있습니다. 사람에게 지위를 주기도 하고 뺏기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힘으로도 하지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시는 길을 준비하는 일입니다. 
  
세상 권력으로 주의 길을 준비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왕 중의 왕입니다. 그러나 세상 왕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세상의 왕이 아니기 때문에 세상의 권력을 가지고는 예수님의 길을 준비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나라, 주의 길은 힘의 나라, 힘의 길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세상의 힘으로 하나님의 나라는 건설되지 못합니다. 세상의 힘으로 주의 길은 준비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아래에서 섬김과 희생으로 결정되는 나라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나라의 위에 서는 힘과 하나님 나라의 아래에서 섬기는 힘의 차이는 마치 사자의 힘과 양의 힘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나는 칼이 아닌 수건으로써 통치하리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주후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기독교를 공인하였습니다. 기독교를 공인한지 7년 만에 로마제국의 공식종교로 공표하였습니다. 십자가를 짊어졌던 아래에서 섬기는 힘의 나라는 칼을 품은 위에 서는 힘의 나라로 변모하였습니다. 그 때부터 기독교는 쇠퇴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제임스 케네디 목사님이 말한 대로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국교화 하지 않았다면 지금쯤은 전 세계가 기독교화 했을 것입니다. 십자가의 힘이 아닌 칼의 힘으로는 주의 길을 준비하지 못합니다. 칼의 힘은 주의 길을 준비하는데 실패하였습니다. 
  
왜 서양의 선교, 영국과 미국의 선교가 비판을 받습니까? 왜 제국주의적 선교라고 평가합니까? 선교사가 군인과 함께 들어갔습니다. 성경이 칼과 총과 함께 들어갔습니다. 선교사들이 대포를 앞세운 군함을 타고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제국주의적 선교라고 합니다. 리빙스턴이 아프리카에 길을 낸 것은 총이 없이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황제, 총독, 분봉왕, 종교권력자, 이들은 주의 길을 준비하지 못합니다. 이들은 주의 길을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이들 때문에 주의 길이 방해를 받습니다. 헤롯, 안나스, 가야바 이들은 예수님의 길을 방해만 했지 준비하지 못합니다. 이들은 가만히 있는 것이 도와주는 격입니다. 이들로 주의 길을 준비한다는 것은 절대 불가능한 일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은 약 3만 명입니다. 지금까지 출판된 모든 책 가운데 등장인물이 가장 많은 책입니다. 두 번째로 등장인물이 많은 책은 삼국지인데 약 6천 명입니다. 성경에 아무리 많은 인물이 등장한다고 하더라도 그 3만 명이 모두 엑스트라입니다. 성경의 초점은  예수님입니다. 구약의 모든 인물, 모든 선지자들은 예수님의 길을 준비하는 사람들에 불과했습니다. 구약의 3만 명은 모두 길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오시는 길을 준비하는 사람들입니다. 
  
근대 올림픽은 쿠베르탕 백작에 의해 부활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래 전 주후 378년에 데오도시우스 황제는 그리스에서 열리던 올림픽을 취소시켰습니다. 기독교로 개종한 데오도시우스 황제가 올림픽이 이방신에 대한 경배라고 하여 올림픽을 하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이렇게 취소된 올림픽을 다시 부활한 것입니다. 로마황제의 힘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막강했습니다. 로마 황제들의 가장 빼어난 치적은 길을 닦은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황제의 이 엄청난 권력으로도 주의 길은 준비하지 못합니다. 
 
“돈으로도 못 가요 하나님 나라 힘으로도 못 가요 하나님 나라 거듭나면 가는 나라 하나님 나라 믿음으로 가는 나라 하나님 나라. 벼슬로도 못가요 하나님 나라 지식 갖고 못 가요 하나님 나라 거듭나면 가는 나라 하나님 나라 믿음으로 가는 나라 하나님 나라”라는 복음성가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돈이나, 힘이나, 벼슬이나, 지식으로는 못 갑니다. 세상의 권력으로는 주의 길을 준비하지도, 하늘나라로 가는 길을 닦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둘째, 가장 작고 소박한 자가 주의 길을 준비합니다. 

누가복음 3:2 하반절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빈 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빈들에 나타났습니다. 왕궁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나타난 사람은 당시의 위대한 권력가가 아닙니다. 낙타털옷을 입고,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던 요한이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가난한 자였습니다. 빈들에서 살던 고행자였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자연주의자였습니다. 주의 길을 준비하는 자는 주님을 닮은 자입니다. 주님처럼 낮은 자입니다. 주님처럼 겸손하고 작은 자입니다. 
  
누가복음 7:28에는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자가 없도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하시니”고 합니다. 주의 길을 준비하는 자는 한 결 같이 작은 자들입니다. 
  
예수님이 작은 자에 관심을 가지시고 작은 자를 사랑하신 것은 예수님께서 작은 자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실 때에 작은 자인 어린이로 오셨습니다. 당시에 천한 목수 집안의 아들로 오셨습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올 수 있느냐?”라고 할 만큼 작고 천한 시골 사람이었습니다. 어중이떠중이 제자들을 데리고 다니시고 가르치신 랍비였습니다. 돌아가셨을 때에 무덤 하나 없어서 아리마대요셉의 무덤에 장사지내셨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서 사신 모습이 작은 자이므로 작은 자를 사랑하셨고 작은 자가 돼야 예수님을 위한 길을 준비하고 예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린이들이 가까이 오는 것을 막지 말고 용납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린이들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소박하고 겸손한 어린이를 유난히 사랑하셨습니다. 이런 어린이들이 예수님의 길을 준비할 만큼 작고 소박하기 때문입니다. 
  
지난 11월 4일 이집트 콥트교회 교황 선출식을 통하여 타와드로스 주교가 교황으로 선출되어 ‘타와드로스 2세’가 되었습니다. 콥트교회는 신의 뜻에 맡긴다는 의미로 눈을 가린 어린이가 유리 성배 안에 있는 주교의 이름을 제비 뽑아 교황으로 삼는 전통이 있습니다. 세 사람의 후보 가운데 타와드로스가 뽑혀 교황이 되어 지난 18일 즉위식을 가져 지난 3월에 세상을 떠난 ‘세누다 3세’에 이어 교황이 되었습니다. 작은 자의 가치를 말해줍니다. 어린이는 주님의 길을 준비하기에 충분한 순수함이 있고 가치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작은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길을 준비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당시에 가장 비난 받던 세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마태가 세리였으며, 삭개오가 세리였습니다. 예수님은 당시에 죄인이라고 하던 창녀의 정성을 거절하지 않으셨습니다. 한 죄인인 여인이 예수님의 발에 기름을 붓고 눈물로 닦는 일을 기꺼이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병든 자와 맹인의 간절한 소리를 외면하지 않고 들으셨습니다. 이런 자가 길을 준비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자가 주님의 친구들입니다. 
  
주님의 길을 준비하는 자,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자는 늘 작은 자들이었습니다. 마음이 소박한 자들이었습니다. 주님의 마음을 닮은 자들이었습니다. 이런 자들이 주님의 길을 준비할 수 있습니다. 너무 높은 사람들은 주님의 길을 준비하지 못합니다. 
  
마태복음 23:12에는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고 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가장 작은 자가 가장 크고, 가장 큰 자가 가장 작은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작은 자의 나라입니다. 

누가복음 18장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재판장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재판장에게 어떤 과부가 찾아와 자기의 원한을 풀어달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에서 가난한 과부의 청을 재판장이 들어주었다고 하십니다. 기도를 들으시는 것은 가난한 자이기 때문입니다. 외로운 자이기 때문입니다. 강청하는 기도를 들어주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자가 주님의 길을 준비하는 자입니다. 
  
예수님 탄생의 첫 목격자는 목자였습니다. 목자는 당시에 가장 소외된 자입니다. 목자라는 직업은 가장 천한 직업이었습니다. 가인이 하나님께서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라고 물으셨을 때에 가인은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입니까?”라고 항변합니다. 

이 말은 “내가 내 아우처럼 천한 목자란 말입니까?”라는 뜻이었다고 해석하는 학자도 있습니다. 야곱이 70명의 식구들을 데리고 애급에 갔을 때에 바로는 야곱의 가족들을 위하여 애급사람들과 떨어진 고센 지방에 살도록 해주었습니다. 왜냐하면 야곱의 가족들은 목축하는 자였기 때문입니다. 목자가 이렇게 천한 직업이었는데 하필 예수님은 “나는 선한 목자”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을 바꾸어보면 “나는 천한 목자”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천한 목자로 오셨고, 지금도 천한 자가 예수님의 길을 준비합니다. 
  
또 예수님을 만났던 동방박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예물을 드린 사람은 유대인 박사들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이스라엘 민족의 자존심이 어떤 것인지 잘 아시지요? 이스라엘 민족의 자존심은 이방인을 사람으로 취급도 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의 기록에 의하면 이방 사람이 먼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이방 박사들이 이스라엘의 왕이 태어나심을 알고 와서 왕으로 경배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경배한 사람은 헤롯왕도 대제사장도 아니었습니다. 이런 권력가들은 주님의 길을 준비하지도 못하고 경배하지도 못합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신 곳도 하필이면 베들레헴이었습니다. 베들레헴은 천한 직업인 목자의 들이 있는 곳입니다. 구약에서 예언한 대로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서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라고 하였지만 베들레헴은 왕이 태어날만한 곳이 못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대도시 예루살렘이 아니고, 시골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시고, 작은 갈릴리 마을 나사렛에서 성장하신 시골뜨기이십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며 오신 방법이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27에는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세상에서 미련하고 약한 자를 택하여 주님의 길을 준비하시게 하고 하나님이 스스로 영광을 거두실 사람으로 세우십니다. 
  
주님의 길은 누가 준비합니까? 주님을 사랑하는 자가 준비합니다. 주님을 닮은 자가 준비합니다. 주님처럼 작은 자가 준비합니다. 주님처럼 소박한 자가 준비합니다. 지금도 우리들과 같이 권력가가 아니라 소박하고 작은 자를 통하여 주님의 길을 준비하게 하십니다. 
  
마가복음 1:2에는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준비하리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300년 전 이사야는 주의 길을 준비하리라고 합니다. 권력자나 교권자가 아니라 천한 광야 사람 세례요한을 통하여 주의 길을 준비하라고 합니다. 우리가 소박하고 작은 자가 되어 주의 길을 준비하는 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결론 

신세대의 속담 유머를 보면 기성세대와 생각의 차이를 알 수 있습니다. 

“첫째, 예술은 지루하고 인생은 아쉽다. 
둘째, 버스 지나가면 택시 타고 가라. 
셋째, 길고 짧은 것은 대봐도 모른다. 
넷째, 젊어서 고생 늙어서 신경통이다. 
다섯째, 호랑이한테 물려가도 죽지만 않으면 산다. 

여섯째, 윗물이 맑으면 세수하기 좋다. 
일곱째, 고생 끝에 병이 든다. 
여덟째, 아는 길은 곧장 가라. 
아홉째, 못 올라갈 나무는 사다리 놓고 오르라. 
열째, 서당 개 삼년이면 보신탕감이다” 등입니다. 

“아는 길은 곧장 가라”고 하는데 길을 압니까? 젊었을 때는 길을 안다고 생각하지만 나이가 들면 젊었을 때는 길을 아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더 중요한 것은 길을 아는 것이 아니라 길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유일한 길 되시게 길을 닦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길을 알게 되고 길을 가게 되는 것입니다. 
  
아프리카 밀림에 가서 개척을 하면서 길을 닦을 때에 집에서 밀림 쪽으로 길을 닦으면 항상 더디다고 합니다. 반대로 밀림에서 집 쪽으로 길을 닦으면 속도가 빨라진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집으로 간다는 기대감이 있어 속도가 더 빨라지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향하여 길을 잘 준비합시다. 그 길이 예수 그리스도인 줄 압시다. 그리고 그 길을 잘 가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권력이나 교권은 없지만 주의 길을 준비한 요한처럼 소박하고 작은 자로 길을 준비하여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는 대림절 첫 주일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런 마음으로 주님을 간절히 사모하고 기다려 성탄절을 기쁘게 맞이할 수 있는 요한의 심정을 가진 자들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성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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