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다시 종이 된 자유인 (몬 8-22)

첨부 1


다시 종이 된 자유인 (몬 8-22)

철학자 헤겔은 인류의 역사가 자유를 향하여 나아가는 행진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예로 옛날에는 임금 한 사람만 자유했지만 점점 더 자유를 얻는 사람들 수가 많아져서 궁극적으로는 모든 사람이 자유함을 얻는 쪽으로 역사가 나아갈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일리가 있는 지적이라고 봅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사람이 한번 자유를 맛본 다음에는 다시 부자유한 상황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여권운동이든 인권운동이든 민주화운동이든 한번 사람이 자유를 경험한 다음에 과거로 돌아갈 수 있겠습니까. 그게 상상이 됩니까. 만일 여성들이 투표도 할 수 없고 남편의 소유물로 되돌아가는 것을 상상할 수 있습니까. 사람들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만일 미국의 흑인들이 다시 백인의 노예가 되는 것을 상상할 수 있습니까. 그게 가능하고 말이 되겠습니까. 만일 대한민국이 다시 왕조국가가 되는 것을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왕이 있고 왕족이 있고 양반과 상민으로 나누게 된다면 그게 말이 됩니까. 난리가 날 것입니다. 사람이 부자유한 상태에서 자유함으로 나아갈 수는 있지만 자유한 상태에서 다시 부자유한 상태로 옮길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퇴보요 역행이요 비극이 될 것입니다. 신학적으로 마찬가지에요. 

구약성경이 있은 후에 신약 성경이 있을 수 있는 것이지, 신약성경에서 구약으로 넘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모세의 율법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예수님의 은혜로 넘어가는 것이지 은혜가 있고 그 다음에 율법으로 옮겨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역행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슬람종교는 기독교 정신을 정면으로 위배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모세의 율법에서 예수님의 은혜로 옮겨오게 하셨는데 이제 모하멧에 의하여 다시 율법으로 돌아가게 하셨다는 얘깁니까. 그게 말이 됩니까. 하나님이 당신의 일을 되돌리시고 취소하셨다는 얘깁니까. 조금만 생각해 보아도 이치에 닿지 않는 것입니다. 

인류의 역사는 자유를 향하여 행진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세속철학과 기독교신앙이 생각을 달리합니다. 기독교인에게는 자유가 끝이 아니에요. 자유하지만 자유 자체가 목표가 아닙니다. 

갈라디아서 5장 13절이 그것을 잘 보여줍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아주 핵심적인 성경구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는 율법의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행위에 대한 대가가 아니고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무엇이라고 부릅니까. 은혜라고 부릅니다. 선물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우리를 자유하게 만드는데 무엇으로부터 자유하게 만드느냐. 행위에 대한 집착과 염려로부터 자유하게 만듭니다. 우리가 구원을 얻기 위하여 공로를 세워야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선행이든 구제든 헌금이든 경건이든 성지순례든 어떤 행위도 우리 구원의 조건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은 예수님이에요.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도록 우리 자신을 그분에게 맡겨드리는 것, 그것을 믿음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믿음은 주님이 나를 의롭게 하시도록 맡겨드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엄청난 자유를 선사합니다. 우선적으로 율법으로부터 자유를 허락합니다. 정죄함으로부터 자유를 선사하고 종교의 횡포로부터, 성직자들의 횡포로부터 자유함을 선사하고 두려움으로부터 자유함을 허락하고 비교로부터 자유함을 허락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누구는 나보다 더 착하다, 누구는 나보다 더 의롭다, 아니면 나는 너보다 더 착하다, 이런 비유가 불필요해진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이 성전에서 말한 것처럼 ‘나는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감사하나이다’하고 자랑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얘기에요. 

그런데 이 부분에서 중요한 윤리적인 문제가 발생합니다. 행함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것이 아니라면 사람이 구원받은 후에 제멋대로 살아도 된다는 게 아니냐. 그리스도인의 자유가 방종을 낳게 되는 것이 아니냐. 이것은 중요한 질문입니다. 이슬람이 기독교에 대하여 제기하는 문제가 바로 이것입니다. 

기독교는 죄를 방조한다, 이슬람이 이런 주장을 하는 데에는 이해가 됩니다. 외부인이 볼 때는 그렇게 보일 수 있습니다. 자유가 그리스도인의 최종 목표라면 이슬람의 지적이 옳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는 자유가 최종목표가 아니에요.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자유함을 얻은 후에 그 자유함으로 죄를 지을 기회를 만들지 말고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다시 말하면 다시 종이 되라는 말입니다. 그 말은 율법으로 되돌아간다는 얘기가 아니냐. 아닙니다. 거기에는 두 가지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이것이 구원의 조건이 되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구원은 이미 은혜로 받았고 구원을 취소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내게로 오는 자를 내가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 하셨고 ‘우리 안에 시작하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이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리라’ 말씀하셨어요. 우리의 구원을 취소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둘째로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는 것은 의무적인 것이 아니고 사랑으로서 하는 것입니다. 자원해서 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원해서 자발적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것이지 의무적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율법적으로 해야 되는 것도 아니고 강요에 의해서 하는 것도 아닙니다. 부득이 억지로 종이 되는 것이 아니고 사랑으로 섬기는 것은 다릅니다. 우리가 매일 그것을 경험하지만 실감하지 못할 때가 많아요. 

어느 엄마가 냉장고에 자식을 위해서 스티커로 메모를 붙여놨어요. ‘고기를 재워서 냉장고에 넣어 놨다. 네 성적표를 봐서는 굶어죽이고 싶지만….’ 어머니가 가족들을 위해서 밥을 해 먹이는 이유는 가정부이기 때문이 아니에요. 가정주부이지 가정부가 아닙니다. 엄마가 밥을 안 해도 그만입니다. 그러면 남편과 자녀들은 비상체제에 돌입할 것입니다. 가끔은 군기를 잡기 위해서 엄마가 파업을 할 필요도 있습니다. 어머니가 하루도 쉬지 않고 가족을 위해서 밥을 해주는 이유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이건 강제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사랑하기 때문에 자원해서 하는 것입니다. 

남편이 직장에 가서 열심히 일해서 번 돈을 아내에게 갖다 바치고 자기는 용돈을 받아서 생활하는, 종도 이렇게 충실한 종이 없습니다. 이건 앵벌이 수준 이상입니다. 밖에 나가 열심히 일해서 처자식에게 갖다 바치고 아까워하지 않습니다. 만약 아까워하는 남편이 있다면 그 사람은 수상한 것입니다. 남편이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벌어서 처자식에게 갖다 바치고 아까워하지 않아요. 

그러나 어느 누구도 그 남편을 종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자원하는 마음으로 사랑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종과 자유인의 차이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자유는 그릇과 같아요. 자유가 존재하는 이유는 그 그릇에 무엇을 담기 위한 것입니다. 빈 그릇만 있는 자유는 공허합니다. 무인도에 사는 로빈슨 크루소는 절대적으로 자유하지만 그것은 공허한 자유함입니다. 이 자유라는 그릇에 사랑을 담고 의리를 담고 충성을 담고 희생을 담고 섬김을 담을 때 그때 비로소 우리의 삶이 복되고 보람이 있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빌레몬서는 신약성경에서 제일 짧은 책 중의 하나입니다. 제일 짧은 책은 요한3서에요. 빌레몬서가 몇 구절이 더 많기는 하지만 한 장으로 돼 있기 때문에 만약 빌레몬서를 찾을 때 몇 장이요? 라고 묻는 사람은 무식한 사람이에요. 몇 장이 아니에요. 한 장밖에 없기 때문에 빌레몬서 몇 절, 그걸로 끝납니다. 

이 빌레몬서의 줄거리는 단순합니다. 빌레몬이라는 사람이 소유한 노예 중에 오네시모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빌레몬의 물건을 훔쳐서 달아났어요. 도망간 노예는 그 당시에 잡히면 사형을 당할 수도 있는 상황이에요. 그런데 오네시모가 도망 중에 사도바울을 만나게 되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기 주인에게 돌아가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오네시모를 빌레몬에게 돌려보내면서 그에게 편지를 써서 같이 돌려보내는 그 편지가 바로 빌레몬서입니다. 그가 빌레몬에게 부탁하기를 ‘나를 봐서라도 오네시모를 잘 받아 달라. 그가 당신에게 빚진 것이 있으면 내가 그것을 대신 갚겠다.’ 이런 내용의 편지를 써서 오네시모를 빌레몬에게 돌려보내는 그런 내용의 글입니다. 

주목할 것은 오네시모가 한번 자유함을 얻었는데 왜 다시 주인에게 돌아가서 종의 위치로 돌아가려고 하느냐는 겁니다. 자유함을 어렵게 얻었으면 그것을 지키려고 해야지 왜 다시 종의 신분으로 돌아가려고 하느냐. 자유함이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라면 그렇게 해야지요. 

그러나 자유함보다 더 귀한 것이 있는데 그게 바로 사랑 · 의리 · 섬김 · 충성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삶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서로 사랑하라’ 왜 사랑이 가장 큰 계명입니까. 자유가 가장 큰 덕목이 아니고 사랑이 가장 큰 덕목이에요. ‘서로 사랑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그러므로 민주주의도 없고 인권도 없는 이천년 전의 기독교인이나, 민주주의가 극도로 발달한 21세기의 그리스도인이나 예수 안에서 누릴 수 있는 자유와 신앙으로 말미암아 누릴 수 있는 축복은 마찬가지에요. 21세기의 자유로운 사회에서 산다고 더 신앙의 자유를 많이 누리는 게 아니고 이천년 전 로마의 식민지에서 산다고 예수 안의 자유를 덜 누리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목표는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누구든지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종이든 자유인이든, 남자든 여자든,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누구든지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 안에, 우리 안에 주신 이 축복은 누구든지 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걸 알아야 오네시모가 자기 주인에게 돌아가는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탕자가 왜 아버지 집으로 돌아옵니까. 독립하기 위해서 떠나갔는데 왜 다시 아버지 밑으로 돌아옵니까. 물론 배가 고픈 것도 있지만 그러면 와서 배가 부르면 다시 떠나갈 것입니까. 그게 아니지요. 

가나안농군학교를 세운 김용기 장로님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그 아버지는 두 아들을 농군학교에 입소한 학생들과 똑같이 대우했습니다. 새벽같이 아버지와 함께 일어나서 일을 해야 했습니다. 이게 아들들은 너무 싫었어요. 그래서 큰아들은 군대에 갔다가 제대를 거부했어요. 왜냐하면 집에 돌아와야 되기 때문에 집에 돌아와서 힘들게 일하느니 차라리 군대에 있겠다고 제대를 하지 않았어요. 

둘째 아들은 아버지가 시키는 일이 너무 싫어서 가출을 했어요. 그 어머님이 평소에는 말씀이 없는 분인데 아들이 가출하니까 남편에게 뭐라고 말씀을 하더랍니다. 그 아버지는 굉장히 강한 분이었지만 가슴이 아팠어요. 그래서 하루는 새벽에 일어나서 기도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맡기신 일을 제 자식들에게도 시키려고 하는데 아무도 이 일을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저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간절히 기도하는데 뒤에서 누가 같이 기도하는 소리가 들려서 뒤돌아봤더니 집을 나갔던 둘째 아들이 돌아와서 아버지와 같이 기도를 하고 있더라고 합니다. 고생스러운 길인데 왜 돌아왔느냐. 누가 억지로 데려온 게 아닌데 왜 돌아왔느냐. 아버지를 사랑하기 때문이고 아버지가 하는 일을 믿기 때문이고 그것이 자신의 자유보다 귀중하다고 믿기 때문에 돌아온 것입니다. 사랑이 자유보다 위대하다는 것을 깨달았고 거기에 본인의 사명이 있다는 것을 안 거에요. 이것이 우리 모두의 사명이요 부르심입니다. 

우리가 때로는 내 소원대로 내 성질대로 살아봤으면 좋겠다, 사실 우리가 우리 소원대로, 내 생각대로 살 수 있는 기간은 우리 생애에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거의 대부분의 시간은 의무를 좇아서 삽니다. 결혼을 하던, 부모 밑에 자녀가 같이 있든, 직장생활을 하든, 우리의 삶의 대부분은 뭔가 해야 되는 것을 좇아 하는 것이지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좇아서 살 수 있는 기간은 길지 않고 또 그런 기회를 갖고 있는 사람도 많지 않습니다. 

그러면 이 사람들이 다 불행한 것이냐. 다 부자유한 삶을 사는 것이냐. 전부다 자기 자유를 얻기 위하여 떠나가야 되느냐. 그게 아니에요. 그게 아닙니다. 자유가 귀중한 것이지만 자유가 귀중한 것은 인생의 정말로 값진 것이 무엇인가를 깨달을 수 있도록 도와준다는 데에 있습니다. 내 자유함을 통하여 내 삶에 귀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을 수가 있고 때로는 자유를 반납하고 내 자유를 당연한 것으로 주장하지 않고 더 큰 목적을 위하여 희생하고 내 자신을 부인하고 또 내 성질을 참고 내 욕망을 뒤에 내려놓고 그것이 예수님의 삶이요, 신앙인의 삶이요, 그것이 우리의 사명이요, 특권이요, 이것이 바로 사랑을 실천하는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김영준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