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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려면(5) : 평안의 복음 (엡 6: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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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려면(5) : 평안의 복음 (엡 6:10-20)

어제 인터넷 신문에서 대조되는 두 개의 기사를 보았습니다. 하나는 자녀들에게 부담될까 봐 삶 대신 죽음을 택한 시각장애인의 이야기였습니다. 시각장애 4급인 50대 남성이 딸의 결혼 상견례를 앞두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그는 유서에 "더 살아봤자 너희에게 부담만 될 것 같다"고 썼다고 합니다. 아들도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사귀던 여자 친구와 헤어졌는데 딸의 결혼 상견례를 앞두고 자신이 결혼에 장애가 될까봐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입니다. 20여 년 전 아내와 사별하고 막노동을 하면서 두 자녀를 혼자 키웠는데 자신의 장애가 사랑하는 아들딸에게 장애가 된 것을 판단한 것입니다. 

책상 서랍에 아들과 결혼을 앞둔 딸에게 1통씩 유서를 남겼는데 첫 문장은 각각 '사랑하는 아들에게'와 '사랑하는 딸에게'로 시작되어있었답니다. 그는 유서에 "더 살아봤자 너희에게 부담만 될 것 같다, 장님이 되고 뇌경색이 재발해 움직일 수 없게 되면 자살조차 할 수 없을 것 같아 이것이 최선의 선택이다...장례비도 걱정이니 시체를 못 찾도록 생을 마감하겠다, 저승에서라도 너희를 돕겠다."고 썼다고 합니다. 

이 기사를 읽으면서 자식을 사랑하는 아버지의 마음, 더불어 살기에는 너무도 야박한 사회 현실, 그런 사람을 돕지 못하는 나 자신의 한계 앞에서 마음이 답답하고 눈물이 났습니다. 제가 거의 매일 우리 성도님 가정들을 위해 기도하는 데 어느 가정을 놓고 기도할 때는 “하나님 왜 이렇게 해 주십니까?”라고 하소연 할 때가 있습니다. 

어제도 저녁 늦게 먼 곳에서 와서 식사 준비를 하고 버스를 따로 가시는 집사님의 뒷모습을 보면서 눈물이 나왔습니다. “하나님, 이렇게 신앙생활을 잘 하려고 애를 쓰는데 왜 집사님의 가정 경제가 안 풀립니까?” 우리 교인들은 어려운 가운데서도 믿음으로 문제를 풀려고 애를 쓰는데 신문에 나오신 분은 신앙이 없었기 때문에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을 죽음으로 해결한 것입니다. 

또 다른 기사를 보았습니다. 갖은 고난은 이기고 69세인데도 2,000여 평의 교회를 세워 목회하는 여성 목사님의 이야기였습니다. 한양대에서 국문학을 전공했고 비교적 평탄하고, 부유한 삶을 살았답니다. 그런데 20여 년 전 암에 걸렸고 남편은 가출해 집안을 돌보지 않아 벼랑 끝에 서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때 이분은 불확실한 미래를 스스로 목숨을 끊어 해결하지 않았습니다. 그 절망의 끝자락에서 주님을 만나 ‘죽으면 죽으리라’는 마음으로 기도에 매달렸다고 합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로 치유를 체험했고, 51세의 나이에 신학교에 입학하여 목회자의 길을 걷게 되었답니다. 

신학교를 졸업한 후 다섯 개의 교회를 세웠고, 69세의 나이에 여섯 번째 교회를 세웠답니다. 우리는 살면서 뜻하지 않게 내 스스로 어찌할 수 없는 통제 불가능한 상황을 만날 수 있고, 예측 불가능한 상황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예수 믿는다고 가난이 피해가고, 예수 믿는다고 부도가 피해가고, 예수 믿는다고 불행이 피해가고, 예수 믿는다고 질병이 피해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은 그 대처 방법이 다릅니다. 영적 전쟁터에서 대처하는 무기가 다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천국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사실을 믿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통제 가능성이 없고, 예측 가능성이 없어 우리는 늘 불안해하고 두려움 앞에 설 수밖에 없지만 주님이 주신 영적 무기로 우리는 불안과 두려움을 깨뜨리고 승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를 불행하게 만드는 강력한 영적 세력과 전쟁하면서 두려움과 불안을 극복하고 어떻게 영적 전쟁에서 이길 수 있겠습니까?

15절 말씀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라고 말씀합니다. 이미 두려움과 불안을 정복하는 평안의 복음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영적 전쟁에서 이기려면 다섯 번째로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으라고 말씀합니다.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는 방법을 다시 정리하자면 먼저 적을 알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적은 사람이 아니라 악한 영들입니다. 둘째는 우리가 내적으로 강해져야 면역력이 있다고 했습니다. 셋째는 진리의 허리띠를 띠고 각종 유혹으로부터 이기라고 했습니다. 넷째는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정죄로부터 이기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다섯 번째로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도 상징적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당시 군인들이 전쟁터에 나가려면 발을 보호하기 위해 신발을 신어야 했습니다. 허리도 중요하고 심장도 중요하지만 발도 중요합니다. 발 없이 전쟁터에 나가는 군인을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날로 말하면 군화입니다. 바울 사도가 사는 시대에는 군인들이 전쟁에 나가기 위하여 발에 튼튼히 붙들어 멜 수 있는 가죽 샌들을 신었습니다. 이 샌들은 밑바닥에 징이나 못이 박혀 있어 미끄러지거나 넘어 지지 않게 하였답니다. 

이렇게 일산생활에서 신는 신발을 신지 않고 전투화를 신게 하는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크게 세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군인들이 미끄러지지 않고 땅에 든든히 설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안전기능입니다. 그래야 자유자재로 활도 쏘고, 칼도 사용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둘째는 군인들의 발을 위험으로부터 지켜 주기 위해서입니다. 보호의 기능입니다. 전쟁터에는 지금의 지뢰 역할을 하는 올가미나 덫을 설치하였습니다. 땅 바닥에 나무 조각이나 막대기 끝을 뾰족하게 깎아서 땅에 심어 놓는 것입니다. 

이것에 발바닥이 상하면 병균이 감염되어 전사로서 전쟁에 참여할 수 없게 됩니다. 셋째는 기동성 때문입니다. 기동성 기능입니다. 전투에 적합한 신발을 신고 있어야 안전하게 빨리 움직일 수 있는 것입니다. 안전과 보호, 기동성은 궁극적으로 무엇을 위해 필요한 것입니까? 전쟁의 승리를 위해 필요한 것입니다. 결국 승리를 위해 신발을 신으라는 것입니다. 적진에 투입하여 적과의 전쟁에서 전사하지 않고 승리하려면 승리할 수밖에 없는 군화를 신으라는 것입니다.

1. 전투에서 승리할 수밖에 없는 군화는 어떤 군화입니까? 

각종 무기로 무장된 007이 신은 구두입니까? 보통 군화가 아닙니다. 수식어가 있습니다.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으라는 것입니다. 복음으로 이미 준비된 신발이라는 것입니다. 축구 선수들이 축구에서 이기기 위해 얼마나 신발에 신경을 씁니까? 보통 우리가 신는 신발이 아닙니다. 베컴은 약 2,000만 원짜리 축구화를 신는다고 합니다. 이봉주 선수가 신었던 마라톤화를 개발하는데 약 2억여 원이 넘는 돈이 들었다고 합니다. 

왜 그렇게 엄청난 돈을 투자하여 비싼 신발을 만듭니까? 경기에서 승리하기 위해 막대한 돈을 투자하는 것입니다. 로마 군인들도 전투용 샌들을 만들 때 가죽으로 징이나 못을 박아 만드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결국 승리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은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무슨 재료로 준비한 신발을 신으라고 말씀합니까? 복음입니다.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으라는 것입니다. 어떤 복음입니까? 평안의 복음입니다. 평안의 복음의 장비로 무장한 신을 신으라는 말입니다. 가죽으로 징이나 못을 박는 대신 평안의 복음으로 준비된 신발입니다. 사단은 계속해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싸우라는 것입니다. 힘 있는 자가 승리한다는 것입니다. 지배력을 확장시키라는 것입니다. 

이 사단의 유혹에 얼마나 많은 신앙의 선조들이 넘어가 실패했습니까? 우리는 무력으로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평안의 복음 위에 확고히 서야 마귀와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사탄의 전략은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평안을, 사람과 사람 사이의 평안을 깨는 것이 기본 전략입니다. 아담과 하와를 유혹할 때도 하나님과 평화를 깨지게 하고 인간과 인간 사이의 평안을 깨지게 하였습니다. 불안하여 숨고 서로 핑계를 대게 했습니다. 가인처럼 형제를 죽이게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원수되게 하고 인간과 원수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평안의 복음 안에 견고히 설 때 사탄의 어떤 전략도 이길 수 있습니다. 


2. 그러면 구체적으로 우리가 영적 전쟁터에서 어떻게 평안의 복음으로 준비된 신을 신고 참 평안을 누리며 영적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성경은 구체적인 내용을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선언적인 내용입니다. 구체적인 내용을 보려면 다른 성경을 보아야 합니다. 요14:25-31을 보십시오. 구체적으로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시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몇 시간 있으면 십자가에서 처형됩니다. 로마 군병들에게 잡히시고, 갖은 고문을 당하시고, 그 무서운 형벌인 십자가형을 당하여야만 합니다. 

이 사실을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다 알고 계셨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두려워하거나 불안해하지 않습니다. 십자가를 피하는 것도 아니고, 무력으로 로마를 무너뜨리는 것도 아닙니다. 조금도 마음의 동요가 없이 하셔야 할 일을 하시면서 제자들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에 놓고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작별하게 될 것을 말씀합니다. 

수제자 베드로도 자신을 배반하게 될 것이며(요한복음 13:38참조), 제자 중 한 사람은 자신을 팔 것이라고 말씀하였습니다.(요한복음13:21~24참조) 그리고 떠난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불안했습니다. 두려웠습니다. 산헤드린 공의회의 살기는 제자들을 공포의 분위기로 몰아넣기에 충분했을 것입니다. 이런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에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평안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적 전쟁터에서 승리하려면 평안의 복음으로 준비된 신을 신어야 하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것입니까?

1) 우리는 은혜로 주시는 평안의 복음의 신을 신고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영적 전쟁터에서 평안의 복음으로 승리해야 합니다. -죽음과 죄의 문제로부터 오는 불안

사람이 근본적으로 평안을 누리지 못하는 것은 죽음입니다. 죽음 때문에 두려워하고 불안해하는 것입니다. 죽음의 원인은 무엇입니까? 성경은 죄라고 분명하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 어떤 것도 치료약이 없습니다. 그 어떤 백신도 없습니다. 십자가만 백신이 되는 것입니다. 죄의 문제가 걸리면 그 어떤 것을 가지고 있다하여도 평안하지 못합니다. 그 죄의 문제가 해결되어야 평안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우유주사를 맞고, 마약을 퍼마시고, 아무리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추어보아도 허무만 남고 불안만 남습니다. 사단은 계속해서 죄의 문제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는 다른 방법이 있다고 우리를 유혹합니다. 죄를 즐기고 살아라고 합니다. 그것이 인생의 최종적인 승리하는 것입니다. 죄 문제,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살아도 된다고 우리를 유혹합니다. 방탕한 인생을 살다가 주님 품으로 돌아온 어거스틴은, "제가 주님 안에 안식하기 전에는 참된 평안이 없었나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정직한 고백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사 48:22)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 

죄의 문제를 해결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합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엡 2:8)"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27절을 보십시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14:27)” 

“끼친다. 주노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주셔야만 하는 것입니다. 내 의지가 아닙니다. 주님의 전적인 주권입니다. 그래서 은혜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평안과 다른 것입니다. 일시적인 것이 아닙니다. 항구적인 것입니다. 세상이 주는 평안은 무엇 때문에 존재하는 평안입니다. 이런 저런 조건이 있으므로 평안한 평안입니다. 세상이 주는 평안은 조금 고상해지면 자신을 비워서 이루어지는 평안입니다. 자신의 욕심을 버리고 자신의 마음을 비우면 평안해 질 수 있다고 말합니다. 불교의 수도나, 마음의 수양 등으로 얻는 평안입니다. 그러나 이 평안도 마음의 평정을 잃어버리면 없어지는 평안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안은 이런 평안과는 다른 것입니다.

모든 조건을 초월한 평안을 주시는 것입니다. 조건에 의해 생기는 평안이 아닙니다. 안에서 생기는 평안이 아닙니다. 이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는 다릅니다. 그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평안입니다. 빌립보 감옥에 갇혀 절망적인 상황에 있는 바울과 실라는 이 평안을 빼앗기지 않았습니다. 그 감옥의 고통에서도 찬송을 불렀습니다. 이 평안은 참 평안입니다. 모든 조건을 초월한 평안입니다. 바로 은혜로 주시는 평안입니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죄 용서로부터 오는 평안, 죽음을 정복한 평안입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이 평안을 제자들에게 약속해 주신 것입니다. 구속 사역을 완성하시고 부활하신 후 맨 처음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바로, 이 평안입니다.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요 20:19)"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요 20:21)"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요 20:26)"

이 평안은 십자가의 은혜를 받을 자가 누릴 수 있습니다. 

"(눅 1:28) 그에게 들어가 가로되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하니"

"(단 10:19) 가로되 은총을 크게 받은 사람이여 두려워하지 말라 평안하라 강건하라 강건하라 그가 이같이 내게 말하매 내가 곧 힘이 나서 가로되 내 주께서 나로 힘이 나게 하셨사오니 말씀하옵소서" 

오늘 예배에 참여한 우리는 바로 이 은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미래의 불확실과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서 불안해하고 두려워하십니까? 오늘 주시는 말씀을 나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14:27)” 

이 말씀 붙들고 모든 두려움과 근심, 불안과 공포로부터 해방되시길 바랍니다. 이미 우리는 평안의 복음의 신발을 신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영원한 천국이 보장되어 있습니다. “평안을 너에게 주노라 세상이 줄 수 없는 세상이 알 수도 없는 평안, 평안, 평안, 평안을 네게 주노라.” 이미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이 평안을 받았음을 확신해야 합니다. 이 확신을 가지고 영적 전쟁에서 승리해야 합니다. 사단은 집요하게 공로주의를 주장하며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합니다. 은혜로 구원받았다는 확신을 가지고 어떤 사단의 전략에도 넘어가지 말아야 합니다. 

2) 우리는 이미 신은 평안의 복음의 신발을 신고 일상생활에서 성령 충만으로 평안을 누리며 영전전쟁에서 승리해야 합니다. -감정의 문제로부터 오는 불안

우리는 평안의 복음의 신발을 은혜로 받아 신었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확신을 가졌다고 우리의 불안과 두려움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사탄은 끊임없이 우리의 감정을 두려움과 불안으로 끌고 갑니다. 오늘 말씀을 듣고 평안한 마음을 가져야 하겠다고 마음먹지만 저녁에 아이가 아무 이야기 없이 12시까지 들어오지 않으면 불안합니다. 평안이 없어집니다. 내일 이자를 주어야 하는데 이자 줄 돈이 없으면 불안해 집니다. 

우리의 감정은 아무리 훈련이 되어도 막상 상황을 만나면 그렇게 잘 조절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마음의 평안이란 단순이 감정 조절이나 적극적인 사고 훈련이나 명상, 마인드 컨트롤, 요가, 최면요법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의 평안은 육체의 문제나 환경의 문제가 아닙니다. 심령의 문제입니다. 아파트 문에 보조키 세 개를 단다고 찾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말씀해도 제자들은 불안하고 두려운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다고 말씀합니까? 

16절에 보십시오.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예수님은 떠나시나 보혜사를 보내 주신다는 것입니다. 성령님을 말씀합니다. 보혜사가 어떻게 하신다는 것입니까?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왜 두려워하고 불안해합니까?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분리되어 홀로 있을 때입니다. 떨어질까 봐 버려질까바 불안해하는 것입니다. 우리 전도사님 딸이 어머니가 피아노 반주를 하니까 불안해하며 웁니다. 불리불안은 느끼는 것입니다. 

저희 아이도 어릴 때 보면 아이들 잠재워 놓고 새벽에 부부가 새벽기도를 갑니다. 어느 때는 아이가 아래층 임집사님 집에 자는 것입니다. 지금도 우리 교회를 섬기시고 계시는데 임집사님이 우리 아래층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 새벽에 내려가 초인종을 누르고 집사님 집에서 잔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말씀합니다. 우리는 홀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와 영원토록 함께 하십니다. 어두운 밤에 아버지와만 함께 걸어가도 두렵지 않는데 우리 성령님과 함께하는데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26절을 읽어 보시겠습니다. 함께 할 뿐 아니라 우리들 옆에서 돕고, 말씀하심으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하나님의 뜻을 해석해 주시는 분이시라는 말씀입니다. 성령이 오시게 되면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신다는 말은 진정한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모르니까 어디까지나 불안한 것입니다. 잘 모르니까 두렵고 겁이 나는 것입니다. 

미래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에 불안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떠난다니까 그 내막을 모르고 불안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섭리를 바로 알게 되면 두려울 것도 없고 무서울 것도 없는 것입니다. 성령이 이것을 알게 하고 성령이 평안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리는 평안은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궁극적인 결과를 알게 됨으로 가지는 평안이기 때문에 세상이 주는 평안과는 다른 것입니다(28).

내가 간다는 말은, 십자가를 지고 죽은 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온다는 말은 결과적인 것으로서 부활할 것이고, 하늘에 오르셨다가 다시 심판주로 다시 오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면 아버지께로 가는 것을 오히려 기뻐하였으리라는 것입니다. 과정은 좀 복잡하고, 고난스러우나, 그 결과가 확실하기 때문에 기쁨과 평안을 가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일을 당해도 결국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롬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이 사실을 확신하십니까? 성령 충만을 받으면 확신하게 되어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불안에 떠는 제자들에게 평안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시고 바로 주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성령을 받으라"는 것입니다(요한복음 20:22). 

성령께서 내 마음을 다스려 주어야 합니다. 성령께서 내 속에 있는 불안과 공포를 쫓아내야 합니다. 우리의 내면세계의 평정은 성령님께서 하실 수 있습니다. 사울 왕을 보십시오 성령이 떠나니까 그 순간부터 얼마나 불안과 공포에 떨게 됩니까? 심리적 불안으로 미친 사람처럼 살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성령 충만한 다윗을 보십시오. 그 위기 가운데서도 시를 짓고 찬양을 드립니다. 더욱 담대해지고 평안합니다. 성령 충만하지 못한 제자들을 보십시오. 십자가 앞에서 불안과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그러나 오순절 성령 충만을 받으니까 얼마나 심령의 평안을 누리게 됩니까? 감옥에 가서도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죽음 앞에서도 천사의 얼굴처럼 평안하고 자신을 죽이는 자들의 용서를 구합니다. 

고생하고 환난을 당하여도 우리는 마지막 약속들이 있는 자들이기 때문에 세상이 주는 것같지 아니하는 평안을 가지며 사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의 말씀을 보십시오.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요 16:33)"(복음찬양 666)

환란과 고난이 면제된 평안이 아닙니다. 환난의 비바람이 몰아치고, 고난의 물결이 출렁이고, 전개될 미래는 암울한 폭풍우가 예상되는 가운데서도 가질 수 있는 평안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맑은 날이 있으면 구름 낀 날이 있어야 합니다. 구름 낀 날이 없는 세상을 상상해 보십시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결국 우리는 이깁니다. 극복합니다.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해도 성령님께서 넉넉히 그 문제에 의해 절망하지 않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우리 주님이 십자가를 눈앞에 두고 있는 평안이야말로, 모든 근심과 고난을 소화해 내는 평안이요, 모든 환란을 초월해서 절대적으로 가질 수 있는 참된 평안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제자들과 갈릴리 바다를 건너가실 때 큰 폭풍이 일었습니다. 제자들은 무서워 떨었으나, 그 가운데서 주님은 깊은 잠을 주무실 수가 있었습니다. 바로 이 평안입니다. 파도 일렁인다 해도 죽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큰 영광을 보는 것입니다. 다니엘과 다니엘의 친구들이 사자굴에 들어가고 풀무불에 들어갈지라도 불안하지 않고 평안합니다. 그들은 말합니다(단 3:17-18).

베드로가 성령 충만하기 전에는 두려워 떨었습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하지 감옥에서도 평안하게 단잠을 잘 수 있습니다. 성령 충만함을 받은 초대 교인들이 누리는 평안을 보십시오. 불안한 미래입니다. 죽음이 앞에 있는 미래입니다. 불투명한 미래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어떤 것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성령 충만하여 평안을 가집니다. 성령 충만하면 성령님이 함께 하신 것을 체험하기 때문에 참 평안을 누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영적 전쟁터에서 성령 충만함으로 이 평안을 누려야 합니다. 다윗만의 일도, 베드로만의 일도, 바울만의 일도, 다니엘만의 일도 아닙니다. 우리도 감옥에서도, 풀무불 앞에서도, 죽음 앞에서도 성령 충만하여 이 평안을 누리며 영적 전쟁에서 승리해야 합니다.

3) 우리는 영적 전쟁터에서 기도로 사탄이 주는 갖가지 문제를 해결하고 이 평안을 지켜야 합니다. -문제(일어난 문제, 일어나고 있는 문제, 일어날 문제)

우리가 성령 충만하여 감정적으로 사탄을 이기고 마음의 평안을 유지한다고 해도 인간은 연약하기 때문에 문제 앞에 또다시 불안해집니다. 문제는 예고 없이 다가오고 예의도 없이 아무 때나 노크하지 않고 다가옵니다. 언제 회사가 망할지 모릅니다. 언제 질병이 들지 모릅니다. 언제 사고가 날지 모릅니다. 언제 죽을지 모릅니다. 문제가 발생하면 사람은 두려워하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던 제자들이 예수님이 떠난다는 소리를 듣고 불안해 할 때 예수님이 무슨 처방전을 주셨습니까? 

13절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14절을 보십시오.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탄은 기도의 무용론을 주장합니다. 기도를 들어 줄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단지 기도란 마음의 위안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능력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보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미 일어난 문제로 불안할 때 아직 일어나지 않았지만 앞으로 예측되는 위협 앞에서 어떻게 평안을 유지할 수 있겠습니까? 

그 문제로부터 이미 주님께서 주신 평안을 잃지 않으려면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로 그 문제를 풀어야 합니다. 과거 일어난 문제 때문에 평안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미 끝나버린 문제입니다. 이미 내 손에서 떠나 버린 것은 깨끗이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지금 풀 수 없는 문제, 미래 일어날 문제로 인해 염려하면서 평안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때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비록 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하여도 마음의 평안은 빼앗기기 않습니다.

"(빌 4:6-7)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기도 하면 내 마음에 평안이 찾아옵니다. 

문제가 있을 때 그것 때문에 불안하고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주님 앞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 기도하면 그 문제 때문에 평안을 잃지는 않습니다. 문제는 바로 풀릴 수도 있고 풀리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결과가 어떠하든 기도하는 사람은 그 문제 때문에 불안해하지는 않습니다. 기도하면 먼저 내 마음에 평안이 찾아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질병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그 문제가 자신의 의도대로 풀리지 않았습니다. 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불안해하며 인생을 산 사람이 아닙니다. 내 은혜가 족하다고 만족했습니다. 그리고 그 문제 때문에 평안을 잃지 않았습니다. 어떤 경우든 주를 의뢰하는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평안을 주십니다. "(사 26:3)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에 평강으로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

하나님께 기도하면 문제를 풀어 주심으로 평안을 줍니다. 기도하여 응답받은 한나를 보십시오. "(삼상 1:18) 가로되 당신의 여종이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하고 가서 먹고 얼굴에 다시는 수색이 없으니라"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 감옥에 갇혔습니다. 불안합니다. 그 때 그들은 무엇을 합니까? 기도하고 찬미합니다. 기적이 일어납니다. 옥문이 열렸습니다. 간수장의 가족이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렘 33:3)"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마7:7-8)"

미국의 생명수 교회의 사모님의 간증을 읽어 보았습니다. 둘째 아이를 임신하였는데 병원에 가 검사해 보니 태아가 중증 장애아로 태어날 확률이 90% 이상이라는 것입니다. 의사는 중증 장애인을 낳고 기르겠습니까? 아니면 제하겠습니까? 자유롭게 선택하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사모님이 고민에 빠졌습니다. 불안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는 사모님이기 때문에 불안에 떠는 것이 아니라 기도로 매달렸다고 합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의 허락 없이 된 일은 아무것도 없는데 중증 장애인을 나에게 주면 그것을 하나님이 내 평생 지라는 십자가로 알고 저는 십자가를 지겠습니다. 어찌 내 생명을 내가 죽이겠습니까? 죽일 수 없습니다." 아이를 낳았는데 낳자마자 그 아이는 인큐베이터 속에 들어갔습니다. 일주일동안 그 어머니는 아이를 볼 수 없었습니다. 울면서 어머니는 기도했습니다. 그 아이를 가져와서 인큐베이터에서 나온 아이를 바라보는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답니다. 어린아이의 눈과 어머니의 눈이 딱 마주치는 순간에 어린아이의 눈에 안개처럼 희미한 것이 덮여 있는데 이 아이 눈에서 갑자기 안개 같은 것이 벗겨져 맑아지더라는 것입니다. 어머니 얼굴을 바라보면서 벙긋벙긋 두 번 웃더랍니다. 너무 기뻐서 그 아이를 가슴에 안고 울었는데 그 날 이후로 그 어린아이에게는 장애증상이 다 사라지고 중학교 2학년이 되었는데 공부도 잘하고 믿음이 좋아서 새벽마다 엄마, 아빠 따라 나가서 기도한다고 합니다. 사모님은 "가장 근심과 걱정의 대상이었던 아이가 가장 큰 기쁨을 주고 있다"고 간증을 쓰고 있습니다. 기도하면 응답되어 불안은 사라지고 평안이 찾아 올 줄 믿습니다.

열 두해 혈루증 앓은 여인을 보십시오. 의원을 찾아다니며 돈을 다 허비했습니다. 그러나 의원에게 괴로움만 당했습니다. 효험이 없습니다. 어느 날 예수님의 소문을 듣습니다. 예수님 옷에 손에 손을 댑니다. 예수님이면 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집니다. 예수님 말씀합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막5:34)" 우리 예수님께 나오면 우리가 기도하면 이런 역사가 이루어질 줄 믿습니다. 문제 앞에 불안해 할 것이 아니라 문제 앞에서 기도로 문제를 해결함으로 평안을 누리는 삶이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 이 시간도 말씀합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14:27)"
(김필곤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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