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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려면(6) : 믿음의 방패 (엡 6: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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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려면(6) : 믿음의 방패 (엡 6:10-20)

우리는 영적 전쟁에 대하여 계속 주일마다 말씀을 묵상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여섯 번째로 “믿음의 방패”입니다. 이 성경이 기록될 당시 로마 군인의 방패는 두 종류가 있었다고 합니다. 하나는 실전에서 쓰이는 방패였고, 다른 하나는 축제 때나 군사들이 행렬할 때 쓰이는 전시용 방패였답니다. 전시용 방패는 “아스피스” 라고 하고 실전용 방패는 “뒤레오스”라고 하였답니다. 

전시용 방패는 그 크기가 손과 그 주변을 덮는 정도였지만 실전용 방패는 문처럼 네모로 생긴 방패였습니다. '뒤라' 즉 문짝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은 이름인데 이 방패의 높이는 약 1.2미터이고 폭은 70센티미터가 다 되었다고 합니다. 한 사람의 몸을 완전하게 다 막는 방패입니다. 두 겹의 나무를 함께 붙여서 처음에는 천으로 감고 그 다음에는 가죽으로 덮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테두리는 금속 테를 둘렀다고 합니다.

왜 그런 무기가 필요했겠습니까? 찌르는 칼과 던지는 창, 쏘는 화살로부터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서입니다. 지금은 전쟁이 일어나면 미사일을 쏘고, 전투기로 폭격을 하지만 고대 전쟁에서는 화살을 쏘고 창을 던졌습니다. 특히 불화살을 쏘았습니다. 서로 군인들이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멀리에서 적을 죽이고, 적진을 불태우기 위해 불화살을 쏘았습니다. 바울 당시의 로마 군사에게는 세 가지 종류의 화살이 있었다고 합니다. 첫째는 일반 화살, 둘째는 타르를 화살촉에 붙여서 불을 붙여 쏘는 불화살, 셋째는 그냥 일반 화살 같으나 그 화살촉에 화약이 있어서 화살촉이 목표물에 맞는 순간에 터지면서 불이 붙는 화살이 있었다고 합니다. 불화살은 단지 인명만 살상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전진을 완전히 불태우기 위한 무기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 당신 전쟁에 사용되었던 이 방패와 불화살을 통해 영적 전쟁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1. 악한 자의 불화살은 무엇이겠습니까?

단순한 불화살이 아닙니다. 악한 자가 가지고 있고 악한 자가 사용하는 불화살입니다. 
이 불화살을 핸드릭슨은 "고난, 고뇌. 박해, 기근, 의심, 욕정, 탐욕, 허영, 시기" 등이라고 주석했습니다.
존 스톳트는 "우리의 양심에 불을 붙이는 참소, 의심, 낙담, 불순종, 배반, 탐욕, 악의, 두려움"등이라 했습니다.

로이드 존즈는 "예배 드릴 때 성경을 읽을 때 집중하지 못하게 하는 산란한 마음, 불경견한 생각, 그리스도에 대하여 모독적인 생각을 가지게 하는 것, 그릇된 상상력을 갖게 하는 것, 정욕과 욕망을 거대한 열기로 불태우고 흥분시키는 것, 선량한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가혹한 시련을 당하게 하는 것" 등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물론 사탄이 우리 믿음의 사람들을 넘어뜨리는 불화살들입니다. 
그러나 나누어 설명하면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영적으로 죽이기 위해 사탄이 사용하는 불화살입니다. 

화살을 본질적으로 생명을 해치기 위해 쏘는 것처럼 사탄이 쏘는 불화살은 첫째가 우리의 영적 생명을 해치기 위한 것입니다. 단순한 육신적 죽음이 아닙니다. 영적으로 죽이기 위해서입니다. 성경에서 죽음은 세가지 의미로 쓰여집니다. 첫째는 육적 죽음입니다. 둘째는 영적 죽음입니다. 셋째는 영원적 죽음입니다. 육적 죽음은 사람의 육체와 영혼이 분리되는 것입니다. 영적 죽음은 하나님과 사람의 영이 분리되는 것입니다. 영원적 죽음은 사람이 하나님과 영원히 분리되어 지옥에 가는 것입니다. 사단은 사람을 영적으로 죽이기 위해 불화살을 쏘는 것입니다. 예수는 인간의 아들이라고 불화살을 쏩니다. “예수는 사생자, 예수는 없다. 예수는 결혼했다. 예수는 신화다” 

"아마도 신은 없을 것이다. 이제 걱정을 멈추고 인생을 즐겨라”라고 말합니다. "나쁜 소식은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며, 좋은 소식은 우리가 신을 원치 않는다는 것"라고 말합니다. 신은 인간의 산물이니 자유롭게 살려면 신을 믿지 말라고 외칩니다. '신은 죽었다'고 선포한 니체가, 데이비드 흄, 버트런드 러셀, 장-폴 사르트르, 알베르 카뮈, 아르투르 쇼펜하우어, 볼테르, 루드비히 포이에르바하,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이 화살을 맞고 쓰러졌습니다. 5살 따 떠난 아버지가 목사였던 니체가 이 불화살을 맞고 쓰러졌습니다. 

흄은 두 살때,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를 쓴 러셀은 네 살때, 사르트르는 15개월에 각각 아버지를 떠나보냈고, 쇼펜하우어의 아버지는 그가 17세 때 자살했습니다. 20세기 말 저널리스트인 러셀 베이커는 자서전에서 5살 때 아버지가 숨을 거두자, "하나님이 저를 정말 사랑하신다면 왜 아버지를 죽게 하셨나요?"라고 물으며 이 불화살을 맞고 쓰러졌습니다. 

오늘날도 삶의 현장에서 이해할 수 없는 수많은 사건 속에서 불화살을 맞고 쓰러지고 있습니다. 영화 한편 보고, 책 한권 읽고, 사건 하나 보고 쓰러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를 믿지 못하게 만들고, 예수를 믿고 구원받았을 지라도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가지지 못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은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요 6:47)”라고 말씀하시는데 사단은 “너희 모습을 보라 네가 믿는다면 그 모양 그 꼴로 사느냐?” 불화살을 던져 회의를 가지게 합니다. “믿는 사람들을 보아라 하나님이 살아계시면 그 모양 그 꼴로 살겠느냐 다 사기야.” 불화살을 던집니다. 기도응답에 대한 확신을 가지지 못하도록 불화살을 던집니다. 승리의 확신을 가지지 못하게 합니다. 사죄의 확신을 갖지 못하도록 만듭니다. 인도의 확신을 가지지 못하도록 불화살을 던집니다. 

하나님은 의지할 존재가 못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기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너 스스로 결단하고 너 스스로 책임지며 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어 버리기 위해 이런 불화살이 마음에 떨어지면 걷잡을 수 없이 활활 타오릅니다. 

둘째는 복된 삶을 살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사탄이 사용하는 불화살입니다. 
엡2장 1-3절에서 이미 사탄이 사용하는 불화살의 도구를 두 가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공중권세 잡은 자가 사용하는 도구는 외적으로는 세상 풍속이고 내적으로는 육체의 욕심입니다. 이것을 따르게 하는 것입니다.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유혹과 핍박입니다. 때로는 광명의 천사로 나타나 유혹을 하고 때로는 우는 사자로 나타나 핍박을 합니다. 

이 불화살이 마음에 떨어지면 회의가 생깁니다. 기쁨을 잃어버립니다. 낙심합니다. 절망합니다. 우울증에 빠집니다. 삶의 의욕을 상실합니다. 자살 충동이 생깁니다. 행복을 잃어 버립니다. 감정이 폭발합니다. 제 정신이 아닙니다. 이성을 잃게 됩니다. 이 불화살을 가정에 떨어뜨려 폭탄 같은 사건을 일으킵니다. 아버지가 비정상이 되어 폭력의 폭탄을 휘두르고, 아내가 비정상이 되어 정욕의 노예가 되어 버립니다. 교회에 떨어 뜨려 교회가 소란해지고 온갖 종류의 악한 일들이 발생합니다. 정상적인 예배가 불가능하여 지고 정치꾼과 이단들이 판치는 교회가 되어 버립니다. 마치 불의 혀같이 비방의 불화살, 거짓의 불화살이 난무하여 교회가 싸움판으로 변해 버립니다. 

사탄은 신앙인의 삶을 행복하게 하지 못하게 하는 불화살을 오늘날도 계속 쏘고 있습니다. 그것은 욥과 같은 불치의 병이 불화살일 수도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와 같이 말씀에 대한 의심이 불화살일 수도 있습니다. 밧세바를 범한 다윗과 같이 정욕이 불화살일 수도 있습니다. 아브라함같이 자신만 살기 위해서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는 것이 불화살일 수도 있습니다. 게하시나 아간 같이 물질적인 욕심이 불화살일 수도 있습니다. 다윗의 인기를 시기하는 사울같이 자존심. 시기. 질투가 불화살일 수도 있습니다. 소돔땅을 바라보는 롯의 아내처럼 호기심이 불화살일 수도 있습니다. 민족을 이끌어 갈 것을 생각하고 있는 여호수아에게 다가오는 두려움이 불화살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탄은 순식간에 어디서 날아올지 모르게 우리에게 불화살을 던집니다. 고난. 박해, 고통, 고뇌, 기근, 의심, 욕정, 탐욕, 허영, 시기, 참소, 배반, 낙담, 불순종, 악의, 두려움, 불경건, 불필요한 잡념, 그릇된 상상력, 등 각가지 불화살을 사람과 때와, 연령 상황에 적합하게 던집니다. 그런데 이런 불화살에는 공통적인 것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거짓이다”는 것입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내가 진리를 말하므로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는도다(요8:44)

마귀는 거짓의 아비입니다. 보십시오. 처음부터 아담을 유혹할 때부터 거짓을 이용합니다.(창3장 참고) 예수님을 유혹할 때는 어떻습니까? 거짓을 이용합니다.(마4장 참고) 거짓 지식을 넣어 줍니다. 거짓 감정을 넣어 줍니다. 거짓 의지를 넣어 줍니다. 아담과 하와를 보십시오.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사울을 보십시오. 그리스도를 보십시오.


2. 이 불화살을 격퇴시킬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오늘 말씀을 보십시오.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움켜잡아야 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믿음의 방패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것 위에”라고 수식어를 붙이고 있습니다. 앞에 나온 세 가지 방어 장비는 진리의 허리띠, 의의 호심경,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신은 띠고, 붙이고, 신는 것입니다. 유동적인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전쟁하는데 고정적인 것으로 필수적인 것입니다. 꼭 착용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만으로 전쟁에 승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 위에'는 '중요성에 있어서 모든 것 위에'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군사 용어, 위치적인 용어인데, 이 말씀을 믿음의 방패는 언제나 너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맨 앞에 두라는 의미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다른 모든 영적 무기가 제대로 사용되려면 믿음의 방패가 언제나 든든히 맨 앞에 서 있어야 한다는 말씀으로 해석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실제로 '모든 것 위에 또' 다시 말하면 '이미 언급한 갑주의 세 부분 위에 또'라는 말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제까지는 고정된 무기를 말씀했는데 방패와 같은 유동적인 무기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고정된 무기를 말씀하시면서 사도 바울은 가진다(having)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움직일 수 있는 무기를 말씀하시면서는 취하라(taking)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방패를 취하고"(taking), "구원의 투구를 취하고"(taking),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취하라"(taking)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꽉 쥐어야 합니다. 다른 무기가 없습니다. 믿음의 방패로 거짓된 사탄의 불화살을 소멸시켜 버려야 합니다. 믿음의 방패는 방패인데 모든 불화살을 소멸시킬 만한 믿음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불량 믿음이면 불화살을 소멸할 수 없습니다. 그 불화살을 맡고 산산 조각이 나 버립니다. 

성경에 보면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나옵니다. 이런 사람들은 이런 믿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은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그 가운데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있으니 내가 사탄에게 내준 것은 그들로 훈계를 받아 신성을 모독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딤전 1:19-20). 사단이 쏘는 불화살을 맡고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있는 듯이 보였는데 그 불화살로 완전히 산산 조각이 되고 먼지 가루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이 믿음은 참된 믿음이 아닙니다. 영적 전쟁터에서 불화살을 이기지 못하는 가짜 믿음의 방패를 성경은 세 가지 말씀합니다. 

첫째는 역사적 믿음입니다. 성경의 말씀이나 구원의 진리를 받아들일 때 자기와는 직접 관련이 없는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도 없고 사탄과의 영적 전쟁터에서 승리할 수도 없습니다. 듣고도 행지 않는 믿음(마7:26) 귀신도 믿고 떠는 것과 같은 믿음(약2:19) 바로 이런 믿음입니다. 이론적으로만 아는 믿음은 실제 영적 전쟁터에서 아무런 힘이 없습니다. 영적 전쟁터에서 파선되어 버리는 불량 믿음입니다.

둘째는 이적적인 믿음입니다. 이것 역시 참된 믿음이 아닙니다. 이적이 일어 날것을 믿는 믿음입니다. 자기를 통하여 이적이 일어날 것을 믿는 믿음(마17:20,막16:17,18)이나 자기에게 이적이 일어날 것을 믿는 믿음입니다.(마8:5-13,요11:22) 

이런 믿음은 참된 구원을 받은 신앙일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경우도 있습니다.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였지만 구원을 못 받은 사람이 있습니다.(마7:22-23)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참된 믿음은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마7:24)”라고 말씀하십니다. 가롯 유다 이적을 행하였을 것입니다(마10:1-8). 그러나 제갈 길로 갔습니다(행1:25)

셋째는 일시적인 믿음입니다. 일시적인 믿음도 참된 믿음이 아닙니다. 이 믿음은 예수님이 씨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말씀한 것과 같이(마13:20-22) 말씀을 곧 받되 염려와 근심으로 결실치 못한 자입니다. 히 6:4-6에서는 "성경은 한 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타락하여 다시 회개케 할 수없는 자들이 있다"고 했습니다. 딤전1:19은 "어떤 이들이 오히려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고"라고 했고, 딤후4:10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사도 바울 버리고 떠나 버렸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영적 전쟁에서 백전백승할 수 있는 참된 믿음이란 무엇이겠습니까?
역사적인 믿음은 지성에 자리를 두나 주님께로 향한 회개의 눈물이나 사랑과 감사와 같은 감정이 결여 되어있고, 그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의지가 결여된 믿음입니다. 일시적인 신앙은 단순이 감정에만 자리잡은 신앙으로 지적 의지적 결단력이 부족한 믿음입니다. 참된 믿음이란 성령임의 중생시키는 역사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통하여 영적 진리들을 깨닫고 거기에서 부터 주님께로 향한 뜨거운 회개의 눈물과 구원의 은혜에 대한 감사와 주님께 대한 사랑이 용솟음치게 되게 되며 한 걸음 더나아가 이제는 자기의 육체를 따라 살지 않고 주님의 거룩하신 뜻을 따라 살고자 하는 의지적 결단이 이루어진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믿음은 전인격의 근본적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갈2:20) 지식에 가지 새로워지는 것입니다.(골3:9-10) 믿음의 대상을 분명하게 앎입니다.(딤후1:12,욥19:25) 

성경에 대한 지식이 깊어지면 질수록 그만큼 신앙도 확고해 집니다. 그리고 알게된 복음이 얼마나 타락한 우리에게 적합한가를 깨닫고 기쁨과 감사와 감격으로 복음의 진리에 찬동합니다. 감정적 찬동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이제 과거에 자신의 모든 수단 방법을 의지하고 살던 것을 던져버리고 그리스도만을 의지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 믿음으로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받습니다. 

“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벧전 1:5).

 이 믿음을 통해 우리가 어떤 경우도 보호를 받습니다. 예수님께서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할 일이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처럼 “능치 못할 일이 없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바울처럼 부요함에도 처하고 가난함에도 처할 수 있지만 어떤 환경에도 일체의 만족한 삶의 비결을 깨닫고 사는 것입니다. 지금 보이지않고 지금 잡히는 것이 없지만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히11:1)”라는 사실을 확실히 믿고 믿음으로 모든 난관을 해쳐나가면 하나님의 주신 사명을 이루어 드리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요일 5:4)”라는 말을 확신하고 모든 사탄의 전략과 전술을 오직 믿음으로 이기고 나가는 것입니다. 

성경은 노아(히11:7)도, 아브라함(롬4:16-20)도, 모세(히11:23-29)도, 갈렙(수14:6,12)도,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단:16,17)도, 백부장(마8:5-10)도, 혈루증 앓는 여인(막5:25-34)도, 바디매오(막10:46-52)도, 빌립보의 감옥의 바울도(행16:25-34) 이 믿음을 통해 승리했다는 것을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3. 사단의 불화살을 믿음의 방패로 소멸하기 위해 군사된 우리가 평소 믿음의 방패를 어떻게 준비하여야 합니까?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평소 로마 군인들은 이 방패를 잘 관리한다고 합니다. 오늘날도 군대에 가면 매일 무기를 잘 관리해 놓고 있습니다. 총포를 전쟁이 일어날 시 최상급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는 것이 군인들의 할 일 중의 하나입니다. 당시 방패는 나무 위에 가죽으로 덮은 것인데 보통 여섯 겹의 짐승 가죽으로 만든 후 열처리를 적당히 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가볍고 철판처럼 단단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가죽으로 만들어져 있었기 때문에 방패를 제대로 관리하지 않으면 곧바로 문제가 생겼답니다. 우리의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로마 병사들은 언제나 저녁 잠들기 전에 방패를 관리하는 습관을 갖고 있었습니다. 먼저 방패에 올리브 오일을 바른 후 헝겊으로 방패를 문질러 주었답니다. 

그러면 먼지가 닦여 나가고 방패에 오일이 스며들게 된다는 것입니다. 헝겊으로 문지르면 방패가 오일을 골고루 빨아 담게 되고 반들반들해지고 탄력성이 뛰어나게 된다고 합니다. 만일 이처럼 관리하지 않으면 방패는 곧 말라비틀어져 창이나 칼, 방망이나 불화살의 공격을 받으면 그 충격으로 가루처럼 부서져 버린다고 합니다. 평상시에는 괜찮게 보이는데 실전에서는 불량 방패가 되는 것입니다. 

특히 전쟁에 나가기 직전에 꼭 하는 일이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물에다가 방패를 흠뻑 적셔두는 일이었답니다. 약 10시간 이상 물에다 방패를 담가 놓았다고 합니다. 전장에서 적이 쏘는 불화살을 방패로 막기 위해서입니다. 그렇게 해 놓으면 방패에 떨어진 불화살은 물기 때문에 곧 꺼지고 화살의 불은 더 이상 다른 곳으로 퍼지 않는다고 합니다. 아마 바울은 당시 방패의 이런 기능을 알고 이 말씀을 기록했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바울이 믿음을 방패로 비유한 의미를 좀 더 유추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실전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믿음도 준비되어야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방패만 있다고 저절로 승리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 믿음도 전쟁에서 이길 만한 믿음으로 준비되어 있어야 영적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영적 전쟁터에서 승리할 수 밖에 없는 준비된 믿음을 가지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수적입니다. 전장에서 불량하지 않고 적의 공격으로부터 효과적으로 방어하는 방패를 통해 보여주는 것입니다. 

첫째는 전쟁의 승리를 위해 기름으로 닦아 놓는 방패처럼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믿음의 방패는 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성경에는 종종 성령은 기름으로 비유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믿음을 주어 거듭나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와서 어떻게 하면 거듭날 수 있느냐고 물어 보았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3: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12:3)”라고 말씀합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오실 때 우리는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게 되고 진정한 믿음, 참된 믿음,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는 믿음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은혜로 믿음을 받았다면 실제 삶의 전쟁에서 백전백승하는 믿음을 가지려면 성령 충만을 해야 합니다. 내 안에 계시는 성령님께서 내 생각을 지배하고, 내 감정을 지배하고, 내 의지를 지배하고, 내 삶 전체를 지배하게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단의 불화살이 떨어진다고 해도 성령 충만하면 성령님이 내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지배하기 때문에 넘어지지 않았습니다. 성령 충만하면 성령의 열매가 맺히게 됩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 5:22-23)” 

영적 전쟁터에서 인격적으로 성숙하여 승리하게 됩니다. 성령 충만하면 성령의 은사가 나타납니다. 사람은 누구나 태어날 때 달란트를 가지고 태어납니다. 이것은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동시에 주는 것입니다. 그 달란트를 잘 개발하면 경쟁 사회에서 승리하여 무엇인가를 성취하면서 살게 됩니다. 그러나 은사는 믿은 사람에게만 주시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사람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 사람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고전12:8-10)”라고 말씀합니다. 

내 달란트로 하지 못하는 일이 성령의 은사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성령의 사역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하십니다.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슥4:6)” 믿음의 방패로 승리하기 위해서는 평소 성령 충만해야 합니다. 그런데 사단은 계속해서 성령 충만하지 못하도로 방해합니다. 돈 충만, 욕심 충만, 쾌락 충만, 자아 충만, 물질 충만하도록 유혹을 합니다. 


둘째는 전쟁에서 불화살을 소멸하기 위해 물에 잠가 놓는 방패처럼 우리가 영적 전쟁터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말씀으로 무장한 믿음의 방패를 가져야 합니다. 

로마 군인들이 불화살을 소멸시키기 위해 가죽 방패를 물 속에 담가 놓았다가 그것을 가지고 나갑니다. 그런 것처럼 우리도 영적 전쟁터에서 승리하려면 말씀에 충만히 잠겨야 합니다. 니고데모가 예수님께 거듭나는 방법을 질문했을 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물은 세례라고 주장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 전반적인 진리를 보면 그것은 타당성이 없습니다. 우리가 물세례를 받는다고 반드시 거듭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기 때문에 물은 성령세례라고 해석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면 뒤에 나오는 성령도 같은 내용인데 예수님이 한 가지 요소를 반복해서 설명하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물이라는 것은 거듭남의 요소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에 보면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엡5:26)”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물과 말씀을 동일하게 사용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거듭나 믿음을 가지게 되는가를 성경은 명쾌하게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10:17)” 믿음의 객관적 요인이 말씀이고 주관적인 요인이 성령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영적 전쟁에서 백전백승하려면 말씀 충만해야 합니다. 물에 푹 졌어야 불화살을 소멸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푹 졌어야 영적 전쟁에서 불화살을 소멸할 수 있습니다. 말씀으로 사탄의 불화살을 소멸시킬 수 있습니다. 내 마음에 세상의 갖가지 사상으로 사탄이 불화살을 던져도 말씀을 꺼버려야 합니다. 

내 감정에 사탄이 어떤 불화살을 쏜다하여도 말씀으로 이 불화살을 잠재워 버려야 합니다. 사단이 내 의지에 어떤 불화살을 던져 유혹한다해도 말씀이 가라는 곳에 가고 멈추라는 곳에 멈춰버리는 것입니다. 사단은 계속해서 말씀 충만하지 못하도록 방해합니다. 성경을 읽는 것이 얼마나 힘이 듭니까? 10년을 교호에 다녀도 성경 1독을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신문 읽을 때는 달고 오묘한 그 말씀이 되는 데 성경을 읽으면 달고 오묘한 수면제가 됩니다. 연속극은 그렇게 재미가 있고 지루한 지 모르고 안 보면 견딜 수가 없는데 성경을 보면 지루하고 머리에 쥐가 납니다. 사단이 쏘는 모든 불화살을 소멸시키기 위해서는 말씀 충만해야 합니다. 말씀에 근거한 인생관, 말씀에 근거한 세계관, 말씀에 근거한 경제관, 말씀에 근거한 가정관, 말씀에 근거한 결혼관, 말씀에 근거한 자녀관, 말씀에 근거한 내세관을 가져야 합니다. 

무엇보다 방패를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이 방패는 나 홀로만 방어하는 것이 아닙니다. 연합하여야 합니다. 영화에서 고대 전쟁을 할 때 보면 방패로 서로 연결하여 어마어마한 큰 방패를 형성하는 것을 봅니다. 큰 방패로 탱크의 장갑판처럼 만들어 방진(方陣)대열을 이루어 진군하는 군인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위로 내려오는 것도 앞에서 뒤에서 옆에서 오는 적들을 엄청난 힘을 발휘하여 물리치는 것을 봅니다. 연합된 믿음의 방패는 방어용 정도가 아니라 적군을 밀어내는데 최고의 공격용 무기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로마 군사의 가장 큰 힘은 언제나 연합된 방패 작전이었습니다. 믿음의 방패를 함께 세우기 위한 구체적인 제안으로 히브리서 기자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 10:24-25). 교회는 전투적인 교회입니다. 사단은 교회를 무너뜨리기 위해 쉬지 않고 불화살을 던지도 있습니다. 우리가 말씀 충만, 성령 충만으로 믿음의 방패를 함께 세워 믿음의 공동체를 지키고 승리해야 합니다. (김필곤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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