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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교회 지도자의 네 가지 자세 (딤전 5: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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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지도자의 네 가지 자세 (딤전 5:17-25)

<지도력의 위기에 빠진 에베소 교회>

디모데서의 아주 중요한 주제 중 하나는 교회 지도력의 문제였습니다. 감독과 장로와 집사의 세 직제를 맡은 지도자들이 교회를 어떻게 이끌어 가야 하는가 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였던 것입니다. 특히 에베소 교회 안의 장로회는 가장 중요한 지도부였습니다. 

장로들은 말씀을 가르치고 전파하는 일 뿐만 아니라 교회 재정을 규모 있게 집행하는 의무까지 떠맡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교회 재정을 관리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과제가 고아와 과부를 돕는 일이었습니다. 지난 주에 살펴 본 것처럼, 제한된 구제 헌금을 어떻게 하면 공평하게 배분(配分)할 수 있는가 하는 책임이 특히 장로들에게 주어졌던 것이지요. 

오늘 말씀을 종합해 보면 이들 장로회에 속한 장로들 중 일부가 심각한 지도력 문제를 보였던 것 같습니다. 본문 말씀의 전후 문맥을 보건대 이들은 과부들을 돕기 위한 구제 헌금을 올바로 쓰지 못하고 공금횡령을 했던 것 같습니다. 이것은 특히 19절 말씀을 볼 때 개연성(蓋然性)이 아주 높습니다.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장로에 대한 고발은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의 증인이 없이 받아들이지 말라고 충고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에베소 교회 안에서 장로에 대한 고발사태가 일어났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가능성은 20절에 가서도 나타나는데 죄를 짓는 사람들을 모든 사람 앞에서 꾸짖어 나머지 사람들도 두려워하게 만들라고 충고합니다. 

뿐만 아니라 24-25절 말씀을 주목해서 보세요. 표준 새번역 성경은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의 죄는 명백해서, 재판을 받기 전에 먼저 드러나고, 어떤 사람들의 죄는 나중에야 드러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착한 행실도 드러나게 마련이고, 드러나지 않은 것도, 언제까지나 감추어져 있지는 못합니다." 이게 무슨 말일까요? 어떤 죄는 너무나 명백해서 재판을 받기 이전에 이미 다 드러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는 것이 아닙니까? 지금은 좋은 것처럼 보여서 감추어져 있지만 나중에 가서야 그 죄상(罪狀)이 밝히 드러나는 경우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들은 에베소 교회 안의 장로들 중에 일부가 심각한 죄에 연루(連累)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지난 주에 살펴 본 말씀과 연결시켜 볼 때, 이것은 특히 교회 안의 홀로 된 여성들을 돕는 구제 헌금을 불공평하게 집행했을 것이라는 추측을 가능케 해줍니다. 

이제 본문 말씀을 바로 이해하기 위하여 이와 같은 배경을 먼저 파악하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아침 우리는 초점을 교회 지도자들이 갖추어야 할 자세에 대해서 집중해 봅시다. 동서고금(東西古今)을 막론하고 지도자는 공동체의 발전을 위하여 대단히 중요합니다. 특히 지도자가 어떤 자세를 갖느냐 하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습니다. 


<교회 지도자가 갖추어야 할 네 가지 자세>

그렇다면 교회 지도자는 마땅히 어떤 자세를 갖추어야 할까요?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주는 오늘 말씀에서 네 가지 교훈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① 모든 일을 공평무사(公平無私)하게 처리해야 합니다.

본문 21절 말씀을 보세요.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와 택하심을 받은 천사들 앞에서 내가 엄히 명하노니 너는 편견이 없이 이것들을 지켜 아무 일도 편벽되이 하지 말며." 편견을 버리고 매사를 공평하게 처리하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여기에 보면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와 택하심을 받은 천사들 앞에서' 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천사들 앞에서 하듯이 그만큼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한 점 의혹도 없이 공정하게 일을 처리하라는 말씀이 아닙니까? 

이것은 무엇보다도 구제 헌금을 배분하는 일에 조금도 불공평해서 안 된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또한 본문 19절 말씀을 보면 장로에 대한 고발이 있을 때 반드시 두 세 사람의 증인을 세워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신 19: 15의 말씀을 근거로 한 것인데 재판이 분명한 증거가 있는 상태에서 공정하게 진행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렇습니다. 지도자는 편견이 없어야 합니다. 개인적인 감정의 호(好), 불호(不好)에 따라 사물을 굽게 보아서는 안 됩니다. 개인적인 친밀감이나 여러 가지 연결고리 때문에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 친한 사람들에게만 특혜(特惠)를 베풀어서도 안 됩니다. 모든 사람을 공평하게 대해야 합니다. 이것은 특히 교회 지도자에게도 아주 중요한 덕목입니다. 할 수 있으면 편견 없이 모든 사람을 차별 없이 공정하게 대하는 것,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 지도자의 자세이기 때문입니다.

중세 터키의 어느 마을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아주 가난한 거지 한 사람이 배가 몹시 고파 길거리를 헤맸습니다. 겨우 빵 한 조각만 손에 쥐고 이곳저곳을 방황했습니다. 그러다가 완자 고기를 지글지글 굽고 있던 식당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고기 냄새가 너무 좋아서 고기 위에 빵을 올려놓은 채 한참 동안 냄새를 쏘였습니다. 돈이 없어 고기를 사먹을 수 없었기에 냄새나 빵에 스며들게 하겠다는 생각이었지요. 그런 다음 냄새가 듬뿍 밴 빵을 맛있게 먹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그 때 식당 주인이 이 거지 모습을 보았습니다. 화가 난 주인은 거지를 붙잡고 재판관을 찾아갔는데 나스레딘 호드자(Nasreddin Hodja, 1208-1285)였습니다. 주인이 거지를 고발했습니다. "호드자 판사님, 이 거지가 제 허락도 받지 않은 채 저희 집 고기 냄새를 훔쳐 먹었답니다. 이 거지가 냄새를 무상(無償)으로 먹은 값을 치르도록 해 주십시오." 식당 주인이 기소하는 말을 다 듣고서는 호드자가 잠시 생각했습니다. 

그런 뒤 자기 주머니에서 갑자기 자기 지갑을 꺼내어 식당 주인 앞에서 흔들었습니다. 주인이 물었습니다. "아니, 판사님, 지금 뭐 하십니까?" "내가 저 거지를 대신해서 지금 자네에게 냄새 맡은 돈을 갚고 있는 것일세. 이 지갑의 돈 소리 듣고 있지. 자네가 이 돈 소리를 듣고 있는 것이 저 거지가 자네 식당의 고기 냄새를 맡은 값에 해당될 것일세." 

여러분, 좋은 지도자는 할 수 있으면 공정해야 합니다. 편견에 사로잡혀 어느 한 쪽으로 기우는 법이 없어야 합니다. 어떤 시인의 「중심의 괴로움」이라는 유명한 시도 있지 않습니까. 중심을 잡는다는 것은 퍽 괴로운 일입니다. 그러나 공동체가 살기 위하여 지도자는 중심을 잘 잡아야 합니다. 중심을 잃고 여러 가지 편견과 불공평함에 이끌려 흔들려서는 안 됩니다. 내리 교회에 중심을 잘 잡는 지도자들이 많이 나오게 되기를 바랍니다! 


② 경솔해서 안 되고 신중해야 합니다. 

본문 22절을 보세요. 아무에게나 경솔하게 안수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안수한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교회의 지도자로서 세워주신다는 상징이지요. 장로회의 멤버가 되기 위해서는 디모데가 안수를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디모데에게 에베소 교회 안에 장로 세우는 것을 함부로 해서 안 된다고 충고하고 있습니다. 경솔하게 아무나 안수해서 지도자가 되게 해서 안 된다는 말씀이지요. 

여러분, 신중한 것은 언제나 좋습니다. 서양 사람들은 고대로부터 인간 생활에 있어서 가장 기본이 되는 네 가지 주덕(主德, Cardinal Virtues)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신중함(prudence), 정의(justice), 절제(temperance), 그리고 용기(fortitude)를 가장 기본적인 덕목들로 본 것이지요. 그런데 이 네 가지 주덕들 가운데 가장 기본이 되는 덕이 신중함입니다. 

신중하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반드시 해야 할 일과 해서 안 될 일을 정확하게 분별할 줄 아는 능력이 신중함입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신중하다고 할 때에는 크게 두 가지를 살펴봐야 합니다. 먼저 자기 자신과 이웃에게 올바른 충고를 하고 있는가를 보아야 합니다. 그 다음에 현재 주어진 여러 가지 증거들을 가지고 사태를 정확하게 판단하고 있는가를 보아야 합니다. 한 마디로 신중함은 생각이 깊고 무거워서 정확하게 사태 파악을 할 수 있는 마음의 능력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오늘 우리 교회가 건강한 교회가 되기 위하여 건강한 지도자들이 많이 나와야 합니다. 그런데 건강한 지도자는 언제나 신중해야 함을 잊지 마십시오. 바울 대신 에베소 교회를 맡고 있었던 디모데가 직면하게 된 가장 큰 위기는 지도력의 위기였습니다. 그리하여 신앙 좋고 인격적으로 훌륭해서 공동체를 바로 이끌 수 있는 지도자들을 신중하게 성별(聖別)하는 일이 아주 중요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충분한 자격이 주어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아무에게나 무분별하게 안수해서 안 된다는 충고를 주고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교회 안에 좋은 지도자가 되기를 원하십니까? 신중하십시오. 생각을 깊이 하십시오. 어떤 판단을 사실 그대로 정확하게 내릴 수 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십시오. 신중해서 손해 볼 것은 없습니다! 


③ 남의 죄에 끼어들지 말고 늘 자기를 깨끗이 지켜나가야 합니다.

본문 22절 후반부를 보세요. "다른 사람의 죄에 간섭하지 말고 네 자신을 지켜 정결케 하라." 여러분, 이게 무슨 말입니까? 영어 성경 NRSV를 보면 "and do not participate in the sins of others; keep yourself pure"로 되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죄짓는 일에 동참(同參)하지 말고 자신을 깨끗하게 지켜 나가라는 뜻이지요. 전후문맥으로 볼 때 저는 이 번역이 꼭 알맞은 번역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이 죄짓는 일에 같이 참여하지 말고 늘 자신을 깨끗하게 지켜 나가라는 말씀입니다. 에베소 교회를 맡고 있던 디모데 역시 죄짓는 사람들을 바로 치리하지 못할 경우 같은 죄에 참여하는 꼴이 되고 만다는 충고이지요. 

여러분, 우리는 죄의 공모자(共謀者)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시편 1: 1-2의 말씀처럼 악인의 꾀를 따르지 말아야 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도 말아야 합니다. 악에서부터 자기를 깨끗이 지켜 나갈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좋은 일꾼이 될 수 있습니다. 바울은 롬 12: 21에서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했습니다. 또한 살전 5: 22에서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죄악은 전염성이 있습니다. 더불어 지으려는 강력한 흡인성과 사회성이 있습니다. 교회 지도자는 무릇 죄짓는 일에 빠져서는 안 되고 여하한 종류의 죄악으로부터도 자신을 지켜 깨끗케 해야 할 것입니다! 


④ 지나쳐서 안 됩니다.

본문 23절 말씀을 보세요. "이제부터는 물만 마시지 말고 네 비위와 자주 나는 병을 인하여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옳을까요? 어떤 사람은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고 한 것을 두고서는 그리스도인도 포도주만큼은 자유롭게 마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은 여기서 말하는 포도주는 진짜 포도주가 아니라 포도 주스 정도일 뿐이라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두 해석이 다 그럴 듯 하기는 하지만 바른 해석은 아닙니다. 

먼저 여기서 말하는 포도주는 포도 주스가 아니라 진짜 포도주를 말합니다. 그런데 이 진짜 포도주를 바울이 디모데에게 왜 마시라고 권면하는지 그 이유가 중요합니다. 네 비위(脾胃), 즉 위장을 생각하고, 자주 생기는 병을 생각해서 포도주를 쓰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포도주는 즐기기 위하여 마시는 술이 아니라 약용(藥用) 포도주임에 틀림없습니다. 포도주가 도대체 어떤 약효가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물만 마셔서는 디모데가 위장병을 비롯해서 잦은 지병(持病)을 고칠 수 없다는 바울의 충고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물만 마신다는 표현은 금욕주의를 의미합니다. 이미 지난 번 설교에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에베소 교회 안에는 극단적인 금욕주의자들이 있어서 혼인을 금하고 일부 음식을 먹지 못하도록 막았습니다. 그러므로 물만 마신다는 것은 지나친 금욕주의, 혹은 극단적인 율법주의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초대 교회 안에 율법주의자, 금욕주의자들은 고기나 포도주는 일체 입에 대지도 않은 채 오로지 물과 빵, 그리고 채소만 먹고살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결코 이와 같이 도(度)에 지나친 금욕주의나 율법주의에 동의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포도주라고 할지라도 약용으로 쑬 수 있다는 열린 마음이 바울의 입장이었던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좋은 지도자는 무슨 일을 하든지 지나쳐서는 안 됩니다. 지나친 것은 모자란 것만 못합니다. 항상 중용(中庸)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 좋습니다. 매사에 적당하게 하는 것이 좋은 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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