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무엇을 믿고 떠나는가 (히 6:13-20)

첨부 1


본문/히브리서 6장 13-20절                       
제목/무엇을 믿고 떠나는가                       

세상을 살아가려면 반드시 신념이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등교하는 학생은 당연히 학교가 문을 열고, 수업을 할 것을 믿고 갑니다. 매일 아침 <과연 학교 문이 열렸을까, 오늘 수업을 하기는 하는 것일까, 선생님은 오실까>를 의심한다면 학교생활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할 것입니다. 출근하는 회사원들은 <회사가 오늘 업무를 볼 것인가, 그리고 내게 월급을 줄 것인가, 동료들은 출근할 것인가>를 매일 아침 의심한다면 직장생활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학생은 학교를 믿고, 직장인은 당연히 회사를 믿기 때문에 살아갑니다. 이처럼 우리 삶은 다른 사람, 제도, 혹은 공동체에 대한 신념을 근거로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세상의 모든 것이 다 믿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부터 이십여 년 전에 <동화은행, 同和銀行>이 설립되었습니다. 동화은행은 이북 5도 출신의 실향민이 중심이 되어 설립했던 은행인데, 실향민 중 117만여 명과 1,500여개 단체가 망라된 거대한 조직을 갖춘 은행이었습니다. 이북에서 월남한 이들과 가족들에게 주식을 살 기회를 주었습니다. 저희 가족은 그 때까지 주식이란 것이 뭔지 알지도 못했는데, 그 일로 인해 주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동화은행은 설립 후 불과 9년이 지난 1998년에 신한은행에 넘어갔습니다. 주식은 휴지조각이 되었습니다. 그 이전까지는 이 세상에서 가장 확실하고 믿을 만 한 것이 은행이라고 여겼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여러분, 뭘 믿고 사십니까?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 경험은 없으십니까? 히브리서 6장의 본문에는 한 인물이 등장하는데, 그 분은 <아브라함>입니다. 성경에서 아브라함의 중요성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사람의 조상입니다. 심지어 모든 아랍 사람들의 조상이기도 합니다. 현재 중동의 정세를 좌우하는 모든 세력이 아브라함의 후손들입니다. 게다가 아브라함은 우리에게도 너무도 중요한 인물입니다. 신약성경은 그의 이름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그렇다면 성경에서 아브라함은 어떤 인물로 묘사되고 있습니까? 얼핏 보면 그는 매우 현실성이 없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더 나아가 인생을 도박처럼 산 사람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소위 <아브라함의 도박>이라고 불리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어느 날 아브라함은 고향을 떠났습니다. 그가 고향을 등지고 떠나기 위해 짐을 쌀 때 이웃 사람들은 의아한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도대체 왜 떠나는 것인가? 뭘 믿고 떠나는 것인가? 어떻게 살 것인지 대책은 세워져 있는가?> 

이웃들의 질문에 대한 그의 대답은 너무도 간단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가라고 하신다>는 것이었습니다. 도대체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무슨 말씀을 하신 것일까요? 

창세기 12장 1절을 봅시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라고 하셨다>, 이게 그의 대답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또 물었을 것입니다. <그래 가면 하나님이 무얼 주신다고 했는가?> 14절에 그 내용이 나오지요?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에게 복 주고 복 주며 너를 번성하게 하고 번성하게 하리라 하셨더니> 아멘. 

이 말씀은 창세기 12장 2-3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거기 보면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복을 주고, 큰 민족이 되게 하겠다>, 이게 하나님의 약속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복을 받기 위해 떠나고자 했습니다. 

여러분,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이 말씀을 받았다면 어떻게 했을까요? 모두 그 복을 받고 싶어 마음이 끌렸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고자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렇게 하는 사람은 아주 적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한 마디만 믿고 떠나는 것이 결코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망설이다가 포기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달랐습니다. 그에게는 다른 것은 필요 없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고, 그거면 충분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믿음>이란 문제가 등장할 때마다 문제가 되는 것은 <그는 과연 믿을 만한가>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믿을만한 분입니까?>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어떤 분이었을까요? 그에게 하나님은 <가장 크신 분>이었습니다. 그 분보다 더 큰 존재를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일에 최종 권위이십니다. 그 분께서 말씀하시는 것이 곧 결론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중요한 말을 확실하게 할 때, 다른 사람의 권위를 빌립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한 아이가 친구에게 말합니다. <우리 집에 멋진 차가 생긴다> 그러면 친구가 <거짓말 하지 마. 그럴 리가 없어. 너희 집이 무슨 돈으로 차를 사니?>라고 반박합니다. 

그 때 아이가 뭐라고 말합니까?  <우리 아빠에게 물어 봐.>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아이 아버지가 <맞다. 내일 우리 집에 새 차가 온다.>고 하면 친구 녀석은 안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 녀석은 나가서 다른 아이들에게 말합니다. <쟤네 집에 새 차 생긴대. 쟤네 아버지께서 말씀 하는 것 내가 들었어.> 이렇게 되면 아이들의 세계에서 더 이상의 논쟁은 필요 없습니다. 이 때 그 아이 아버지는 새 차를 사는 문제에 있어서 최종 권위입니다. 이게 사람들이 말하는 방식입니다. 

16절을 보세요. <사람들은 자기보다 더 큰 자를 가리켜 맹세하나니 맹세는 그들이 다투는 모든 일의 최후 확정이니라>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다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보다 더 큰 이가 없는, 가장 큰 분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이름을 빌릴 수도 없고, 빌리실 필요도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당신 자신의 이름으로 맹세하셨습니다. 

본문 13-14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가리켜 맹세할 자가 자기보다 더 큰 이가 없으므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여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에게 복 주고 복 주며 너를 번성하게 하고 번성하게 하리라 하셨더니> 아브라함은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고, 그 분께 인생을 걸었습니다. 

여기서 사람은 하나님께 대한 태도에 따라 몇 가지로 나뉩니다. 한 부류는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두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들은 말씀을 무시합니다. 말씀 때문에 고민하지 않습니다. 말씀대로 따르지 않는 것을 당연히 여깁니다. 오늘날 이런 사람들은 어디 있을까요? 교회 밖에 있을까요? 물론 그렇습니다. 그러나 <교회 밖의 불신자>보다 <교회 안의 불신자>가 더 문제입니다. 이들은 말씀에 의해 찔림을 받지도 않고, 응답하려고 시도하지도 않습니다. 

또 한 부류는 <단 한 번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끝까지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15절을 보십시오. <그가 이같이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느니라> 우리는 여기서 <과연 아브라함이구나>라고 감탄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나도 흔들리지 말고, 아브라함처럼 끝까지 말씀을 믿어야지.>라고 다짐합니다. 

그러나 이렇게만 말씀드리면 많은 분들이 마음이 불편하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중에 그 누구도 한 번의 흔들림도 없이 믿음을 지키는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난 포기한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염려 마십시오. 사실은 단 한 번의 흔들림도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는 사람은 없습니다. 누구나 흔들립니다. 사실은 아브라함도 많이 흔들렸습니다. 아까 읽었던 15절을 다시 보세요. <그가 이같이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느니라> 이 말씀은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오히려 <만이 흔들렸고, 위기도 있었지만, 잘 참았다>는 말씀입니다. <참는다>는 말은 그가 매우 어려운 위기를 넘겨가면서 믿음을 지켰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어떤 위기가 있었습니까? 사실 오늘 본문에는 생략된 위기가 있었습니다. 그 단적인 예는 이스마엘을 낳은 일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후손을 번성하게 하시겠다는 말씀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무려 14년을 기다려도 응답이 없었을 때, 그는 흔들렸습니다. 그는 결국 몸종인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이건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믿음보다는 인간적인 방법으로 삽니다. 

그리고 한걸음 더 나아가 그 열매에 도취됩니다. 사람마다 자기 방법으로 나은 이스마엘이 주는 기쁨에 빠져서 하나님을 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관심이 없고, 그 때부터 자기 방식으로 삽니다. <하나님을 믿어 보았지만, 소용 없었다. 내 식대로 사는 게 최고야.>라고 말합니다. 그는 하나님을 마음에 두고는 있지만, 더 이상 하나님의 사람이 아닙니다. 교회는 오지만 이들 역시 형식만 남아 교회 안의 불신자가 됩니다. 

김남준목사님은 이럴 때의 성도의 마음상태를 <영적 싫증>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날마다 같은 일만 반복되고 새로운 일이 생기지 않을 때, 기다리는 일이 성취되지 않을 때 사람들은 지칩니다. 눈을 다른 데로 돌립니다. 하나님보다 더 멋진 존재가 많은 것처럼 여겨집니다. 

아브라함도 흔들렸던 것을 보면 <단 한 번도 흔들리지 않고 믿음을 붙잡는 사람>은 없다고 말하는 게 맞습니다. 그렇게 완벽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흔히 믿음의 사람이라고 말하는 이들은 어떤 분들일까요? 그들은 <많이 흔들리면서도 다시 믿음으로 돌아온 사람들>입니다. 위기가 있었습니다. 때로는 궤도에서 이탈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치열하게 영적 전쟁을 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본 궤도로 돌아옵니다. 다시 믿음이 회복됩니다. 

야곱이 그런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형 에서의 복을 가로채고 형에게 미움을 받아 외삼촌의 집으로 도망했습니다. 그 어려운 때에 벧엘의 들판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 때 그는 하나님만 붙잡고 살 것을 맹세했습니다. 그러나 외삼촌의 집에 가서 결혼도 하고, 자식도 태어나고, 재산도 늘자 마음이 변했습니다. 하나님께 했던 약속도 잊었고, 하나님의 말씀도 잊었습니다. 그리고 자기 삶에 도취되어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세겜에서 위기를 맞이했습니다. 딸이 세겜 추장에게 겁탈을 당하고, 아들들은 살인자가 되었을 때, 비로소 그는 자신이 얼마나 믿음의 삶을 벗어나 있었는가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했나요? 그는 다시 벧엘로 돌아갔습니다. 벧엘에서 만났던 그 하나님, 평생 믿고 섬기겠다고 맹세한 하나님께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제단을 쌓았고, 다시 회복되었습니다. 그는 <흔들리다가 믿음으로 돌아온 사람>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 자리에는 지금 믿음의 불이 활활 타올라 무엇이든 하나님의 말씀대로 할 수 있는 열정을 가진 분이 있을 것입니다. 어떤 헌신이라도 할 수 있는 이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믿음에서 벗어난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말씀을 잊었습니다. 말씀을 들어도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과거에 뜨거웠던 순간이 이상하게 여겨집니다. 그러면서 긍정적인 사고보다 부정적 안목으로 주변을 봅니다. 

교회를 볼 때도 부정적인 것만 눈에 들어옵니다. 주변의 성도를 보아도 모두 못마땅합니다. 가족을 보아도 감사가 없습니다. 짜증만 늘었습니다. 웃음이 사라졌습니다. 모든 게 시들해졌습니다. 아마 <지금 내 이야기를 하는구나>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이런 경우는 목회자도, 장로님, 권사님, 집사님도 예외가 아닙니다. 이런 경우가 다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런 생각을 하실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왜 예배 자리에는 와 있는가? 예배에 나온 것을 보면 믿음이 있는 게 아닌가?>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예배에 나온 것은 영적 습관의 관성 때문인 경우가 많습니다. 이미 믿음에서 벗어났지만, 새벽이 되면 눈이 떠집니다. 기계적으로 새벽기도에 옵니다. 당연히 예배에 참석하고 봉사도 잘 합니다. 몇 달이나, 몇 년 동안은 이렇게 합니다. 이것은 관성이 붙은 영적 습관 때문입니다. 

여러분, 믿음에서 많이 벗어났는데도 여전히 교회에 나오고 있는 상태에 계시지는 않습니까? 이런 상태에 있다면 이런 영적 관성이 남아 있는 것에 대해 감사하십시오. 이건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그렇게 형식적으로라도 예배에 참석하다가, 어느 순간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채워집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언제, 어떻게 임할지 모릅니다. 

어떤 사람은 놀러 가려고 준비했는데, 차가 고장 나는 바람에 교회에 왔다가 은혜를 받은 사람도 있습니다. 오랫동안 교회에 발길이 끊어졌던 사람이 동생 찾으러 오랜만에 왔다가 다시 변화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이 놀라운 은총입니다. 반드시 성령님께서 우리 마음을 어루만져 주실 줄 믿습니다. 다시 믿음 위에 서게 하실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당장 내 가슴이 뜨겁지 않아도, 꾸준히 예배의 자리에 나오셔야 합니다. 억지로라도 말씀을 읽고 기도하셔야 합니다. 다시 불붙여 주실 때가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이 말씀만 믿고 가나안에 간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는 대박을 터뜨렸습니다. 그가 백 살이 되었을 때 아들 이삭이 태어났고, 그의 후손은 번성하여 이스라엘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그는 오고 오는 세대로부터 믿음의 조상이라 불리고 있습니다. 그는 엄청난 복을 받았습니다. 

여러분, 이제 믿음으로 행동하십시오. 믿는다고 하면서 가만히 있지 말고 행동하시기 바랍니다. 어두운 곳을 무서워하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밤 엄마가 아이에게 뒷마당에 있는 빗자루를 가지고 오라고 시켰습니다. <엄마, 바깥은 지금 캄캄해서 무서워요.> <얘야, 밖에는 예수님이 계신데 뭐가 무섭니?  널 지켜주실 거야.> <정말 밖에 예수님이 계세요?> <그럼, 그분은 어디에든 계신단다. 네가 힘들 때 널 도와주신단다.> 그러자 아이가 뒷문을 살짝 열고 틈새로 말했습니다. <예수님, 거기 계시면 빗자루 좀 갖다 주실래요?> 
 
성도 여러분, 믿고 구체적으로 행동하십시오. 믿음이란 생각만 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믿음은 마음에만 국한되면 안 됩니다. 믿음은 생활에서 실천되어 나타나야 합니다. 내일부터 믿고 부지런히 일하십시오. 믿음으로 사업을 하시고, 믿음으로 공부하십시오. 믿음으로고 헌신하십시오. 믿음으로 어려운 이를 도우십시오. 하나님을 믿고 드릴 것을 드리십시오. 믿고 전도하십시오. 아브라함처럼 짐을 싸서 축복의 땅으로 떠나는 결단을 하시기 바랍니다. 

지금 믿음에서 벗어났더라도 억지로라도 그렇게 하십시오. 다시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18절은 <하나님은 거짓말을 하실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 말씀을 붙잡고 하나님 앞에 서시길 기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는 믿음은 우리에게 확실한 소망이 되어 우리를 붙들어 줄 것입니다. 19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이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가나니>라고 했습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우리는 떠내려가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를 붙들어주는 <영혼의 닻>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나를 붙드실 줄 믿습니다!>, 이런 믿음이 우리를 붙잡아주는 닻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을 때 <우리는 믿는 구석이 있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붙드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이 세상에서의 삶에만 적용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한 구원으로 이어집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죄를 씻기 위해 대제사장이 되셨습니다. 그리하여 본문 19절에 있는 말씀처럼 <휘장 안에> 들어가셨습니다. 여기서 휘장 안이란 성전의 지성소를 말합니다. 구약 시대에 휘장 안에는 대제사장만 들어갈 수 있었고, 그것도 대속죄일에만 죄를 속하는 제물의 피를 가지고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당신의 십자가 보혈을 가지고 휘장 안에 들어가신 우리의 구원자입니다. 누구든지 믿음으로 그 분께 나가면 우리의 모든 죄는 용서받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 예수님께서 세상에 탄생하셨습니다. 믿음으로 그 분을 영접하시길 바랍니다. 

미국의 부흥 사였던 <무디 Dwight L.Moody>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대 자신을 믿어 보라! 그대는 실망할 때가 있을 것이다. 친구를 믿어 보라! 어느 날 그들은 죽거나 그렇지 않으면 그대와 해어질 것이다. 그대의 명성을 믿어 보라! 어느 때 훼방하는 혀가 그것을 뒤집어엎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믿어 보라! 그대는 현세와 내세에 후회함이 없을 것이다.>  이 성탄의 계절에 믿음으로 주님께 나아가시길 기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추천인 1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