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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대림절] 기다림의 신학 (사 64:1-4,8-9, 벧후 3:8-10) - 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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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의 신학 (사 64:1-4,8-9, 벧후 3:8-10)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대림절 첫째주일입니다. 교회력은 지난 주일로 끝나고 오늘 주일부터 새로 시작됩니다. 새로 시작되는 교회력은 대림절부터 시작됩니다. 대림절은 오시리라고 예언된 메시아 즉 예수의 오시기를 기다리며 준비하는 기간을 말합니다. 

이 말은 원래 “옴” “도착”이라는 뜻을 가진 라틴어 Adventus에서 유래된 즉 예수의 오심을 뜻하는 말입니다. 성탄절 전 4주간이 여기에 해당 합니다. 그래서 이 기간을 대림절 혹은 대강절 강림절(Advent)라고도 부립니다. 

구약성경의 주제는 장차 세상에 예수가 태어나리라는 예언입니다. 구약성경에서 가장 큰 사건은 “장차 예수가 태어나는 것”입니다. 왜 이것이 큰 사건이냐 하면 하나님이 세상에 인간의 몸을 입고 태어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이 보다 더 큰 사건이 어디 있습니까. 예수가 세상에 태어나야 한다는 말은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셔야 한다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이사야를 통해서 세상에 알리셨습니다. 당시는 나라가 바벨론에 의해 망해가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눌려 살고 압제 당하고 살고 그 고난 받던 백성들이 세상으로 흩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을 지배하던 바벨론은 너무 강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절망하고 애통하고 호소하고 구원을 절절이 요청하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먼저 죄부터 고백하였습니다. 오늘의 이 현실은 우리들이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 우리의 죄가 우리를 몰아가나이다(사 64:6)”하고 울부짖었습니다. 그래서 회개부터 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탄원의 기도를 하였습니다. “주께서 하늘을 가르고 강림하시고 주 앞에서 산들이 진동하기를 불이 섶을 사르며 … 이방 나라들이 주 앞에서 떨게 하소서(1-2절).” 

이 말은 주께서 빨리 오셔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저 나라를 떨게 하여 달라는 말입니다. 여기 주는 메시야이고 주님은 오시리라고 예고된 예수를 말합니다. 얼마나 간절하였겠습니까. 그 시대 사람들의 메시야 대망사상은 하늘을 찔렀을 것입니다. 

이사야서 등 예언서를 보면 메시아 대망 신앙이 절절이 표현되고 있습니다. 그 대망이 언제까지 계속되었는가 하면 예수 탄생 때까지 입니다. 누가복음 2장 25절을 보면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는 노인이 살고 있습니다. 그는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고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 시므온이 밤낮 기도실을 떠나지 않고 기도를 합니다. 그의 기도는 “오시리라는 메시야께서 빨리 오셔서 이 땅을 해방시켜 달라”는 기도입니다. 그러니까 이사야서가 쓰인 것이 BC 550년경이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사야 때부터 예수 탄생 시까지 5~600여 년 동안 그 기도를 한 것입니다. 얼마나 기다리고 기다렸겠습니까. 그래서 이 기다림에 신학이 들어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예언된 메시야가 조금 기다렸더니 금방 오셨다고 한다면 그것은 기다림이 아닙니다. 지금 로마가 핍박을 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 핍박을 피하여 도망 다니고 있습니다. 산속으로 굴속으로 무덤 속으로 피신을 합니다. 얼마 동안이었나 하면 400년 동안입니다. 그 400년 동안 그들은 이 재림신앙 때문에 기다리며 고난의 삶을 이어갔습니다. 

오늘 기독교는 그냥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고난 받으면서도 인내하고 기다림의 믿음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서 오늘 기독교가 세상에 자리 잡게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몇 일 기도하고 기다려 보고 곧 지쳐버립니다. 그러니까 오늘 이 시대에는 그런 고난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 고난이 오늘 이 시대에 주어져도 오늘 우리들은 감당을 못합니다. 

누가복음 2장 36절을 보면 ‘안나’라는 할머니가 나옵니다. 그는 결혼에 실패하고 20여세부터 80여 년 동안 골방에서 기도생활을 합니다. 그의 기도는 메시아 탄생을 기다리는 기도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기도와 기다림 속에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이 기다림에 신학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일신상을 위해서 기다린 기다림이 아닙니다. 그들의 기다림은 적어도 하나님의 의와 뜻이 이 세상에 펼쳐지기를 위해서 기다리며 기도한 것입니다. 그러니 그 기도가 얼마나 깊고 무게가 있으며 간절하였고 뜨거웠겠습니까. 이 기도가 진정한 기도인 것입니다.   



기다림이 있다는 것은 축복입니다. 어느 부인은 남편이 매일같이 술에 취해 늦게 들어오는 것을 기다리는 삶을 살아갑니다. 남편은 집에 들어올 때 만신창이가 되어서 들어옵니다. 어느 날 탄식합니다. “나는 저 영감 때문에 속상해 죽겠다.” 어느 과부가 그 탄식을 듣고 “그래도 들어와 주는 남편이 있지 않느냐 기다리는 사람이 있으니 얼마나 감사하냐!”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진실입니다. 술에 취해서도 들어올 남편이 없다면 기다림도 없는 것입니다. 고향을 버리고 월남한 분들은 언젠가 통일될 날을 기다립니다. 그 기다림이 있으니까 오늘 그리움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봄에 씨를 뿌린 농부는 기다림이 있습니다. 그 기다림이 축복입니다. 유복자를 잉태한 어머니는 소망이 있습니다. “이 아이가 장성하기만 하면…” 그 기다림이 삶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은 장차 오실 메시야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 메시야를 기다렸습니다. 신약성경은 다시 오실 예수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약시대의 성도들은 다시 재림하실 주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베드로후서 3장은 이 예수재림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재림은 부활하여 승천하였던 예수께서 세상에 다시 오신다는 약속입니다. 이 기다림이 신앙인들을 성숙하게 만들고 더 간절하게 만듭니다. 
  

II

예수님은 부활하여 승천하실 때 제자들이 보는 가운데 올리어 가셨습니다. 그 모습은 자연적인 모습입니다. 왔던 자리로 다시 돌아가는 것입니다. 가시면서 한마디 메시지를 남기셨습니다. “너희가 보는 그대로 나는 다시 오리라.”(행 1:11) 

이 약속이 재림의 약속입니다. 그래서 예수 사후 가장 큰 화두가 예수님의 재림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곧 오시리라”고 약속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모두 얼마 후에 곧 오실 줄로 알았습니다. 이것이 사람의 시간과 하나님의 시간의 차이입니다. 사람의 시간은 내일 모래입니다. 좀 늦으면 한두 해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도 “나와 같이 혼자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언제 혼인하고 아이 낳고 그럴 시간이 있느냐(고전 7:26)”고 했습니다. “주님은 곧 오실 것인데 지금 그럴 정신이 있느냐”는 말입니다. 그 때는 그만큼 절박하게 기다렸습니다. “그가 오시면 로마로부터 해방되고 이 세상에서 모두 왕 노릇하리라”고 모두 기대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때 문제가 하나 대두되었습니다. 
 

재림 지연  

그것이 예수 재림이 늦어지는 사태였습니다. 사람들에게는 기다리는 한계의 시간이 있습니다. 지금쯤이면 와야 한다는 공감의 시간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 시간을 스스로 설정해 놓고 지금쯤은 올 때가 되었다고 기다립니다. 그런데 그 설정된 시간이 지나면 사람들은 의심하기 시작하고 회의하기 시작합니다. 바로 그때 이단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나타나서 유혹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말세에 조롱하는 자들이 와서 … 조롱하여 이르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벧후 3:4).” 

그 말은 조롱하는 사람들이 나타나서 “재림은 무슨 재림이냐 어떻게 그런 약속을 다 믿느냐”고 조롱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즉 “예수가 재림하려면 벌써 왔을 것”이라고 조롱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 거짓선지자들의 유혹은 그 시대 대단한 유혹거리였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말에 현혹되는 성도들을 보고 위기의식을 느낀 베드로가 이 글을 쓰게 된 것입니다. 

오늘도 이런 현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교회 밖의 사람들이 “재림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말합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것을 다 믿느냐”고 비웃습니다. 그 말에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도 유혹을 받습니다. “설마 재림은 그냥 말뿐이지 실제로 일어나겠는가?” 이것이 불신의 영향입니다. 불신은 이렇게 소리 없이 세상으로 펴져가는 것입니다. 

진실에는 반드시 두 가지 반응이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진실을 믿는 편이 있고 또 하나는 진실을 왜곡하며 불신하는 편이 있습니다. 그때 마다 항상 우리는 질문을 받게 됩니다. “나는 어느 편에 속하는가?” “나는 어느 편인가?” 그 결정은 그 사람의 믿음의 척도에 달려 있습니다. 

여러분은 오늘 신앙생활을 왜 하십니까. 복을 받기 위해서 입니까. 형통하기 위해서 입니까. 그것은 아닙니다. 초대교회 시대 때 교인들은 형통 때문에 그런 핍박을 다 견딘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수하고 예수 믿지 않겠다고 하면 그 날로 자유인이 되는데 그것이 더 형통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초대교회 시대의 성도들이 오늘의 평안함을 포기하고 신앙신조를 지켰던 것은 바로 이 재림신앙 때문입니다. 

장차 오실 재림하시는 예수님 때문입니다. 신앙생활 하다보면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것이 한 가지 있는데 그것이 불신의 유혹입니다. 이 불신의 유혹은 우리 주변에서 따라 옵니다. 내 친구들로부터 다가옵니다. 그리고 또 내 안에서부터도 옵니다. 밖에서 또 내 안에서 내 마음에 이 유혹의 소리를 들려줍니다. 그래서 신앙인은 이 불신요소들과 늘 싸워야 합니다.
 

재림 지연 이유

그러면 예수님의 재림이 늦어지고 지연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거기에 이유가 있습니다. 한 가지는 하나님의 시간과 인간의 시간 개념이 다르다(8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시간은 하루가 천 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심판하실 때는 천년이 하루같이 빨라집니다. 그 좋은 사례가 소돔의 심판모습 입니다. 하늘에서 순식간에 유황비가 쏟아집니다. 순식간에 소돔성에 불바다를 이루게 합니다. 도망가고 숨고 피신할 상황이 아닙니다. 순식간에 심판이 이루어집니다. 천년이 하루처럼 압축되어 세상에 나타난 것입니다. 

또 노아의 홍수를 보십시오. 시간당 100mm 비가 오는 차원이 아닙니다. 심판이 시작되자마자 비가 하늘에서 쏟아졌습니다. 하늘 보자기가 찢어졌습니다. 물이 그냥 쏟아졌습니다. 바닷물이 육지로 넘쳐 올라왔습니다. 땅속에서 물이 솟구쳐 올라왔습니다. 입체적으로 아래 위 옆에서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물을 피하여 도망가고 도피하고 산으로 올라가 피신하는 그런 상황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이 땅에 쏟아지는데 천년이 하루처럼 신속하게 쏟아져 내린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시간은 때로는 하루가 천년과도 같습니다. 예수님은 곧 오신다고 했는데 아직까지도 재림하시지 않습니다. 그 해답이 9절에 나와 있습니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요 오직 주께서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 3:9).” 

하나님의 염원은 누구 하나도 멸망당하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두가 다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하루를 천년같이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재림이 벌써 몇 십 년 전에 이루어졌다고 하면 어떤 현상이 벌어 졌겠습니까. 벌써 오셨으면 아직 믿지 않는 우리 부모님들과 내 형제들은 어떻게 됩니까. 아직 예수를 모르는 우리 민족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그래서 하나님이 인내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한 가지 알 것이 있습니다. 그러면 언제까지 기다리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있습니다. 언젠가는 말씀하신 그대로 오신다는 사실과 또 하나는 오실 때를 암시하신 말씀대로 “도적같이(10절)” 

그 날이 임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예수께서 다시 오시는 재림에 대해서 표현하기를 “도적같이 오신다”고 하였습니다. 도적은 예고하지 않고 옵니다. 세상에 예고하고 오는 도둑은 없습니다. 전쟁도 예고하지 않고 기습적으로 시작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재림 사건을 사람들이 잘 믿으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왜 믿지 않으려 하는가 하면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재림이 “영적인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재림을 이성적으로 이해하도록 설명하고 분석하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영적인 문제는 영적인 논리로 풀어야 합니다. 영적인 계시를 인간적인 견해로는 풀어지지 않습니다. 

  
재림을 맞는 자세

그러면 오실 주님의 재림을 맞을 우리 신앙인들의 자세는 무엇입니까. 그것이 두 가지 입니다. 하나는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14절)” 

“너희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그날을 사모하라(11절).” 예수 재림을 무시하고 불신하게 되면 두 가지를 상실하게 됩니다. 현재적으로는 삶의 질서를 잃게 됩니다. 거룩한 행실과 경건을 유지하기가 힘들어집니다. 재림을 믿어야 오늘 이 시대 거룩함과 행실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오늘 사람들이 방종하며 살아가는 것은 그들의 마음속에 이 재림신앙이 전무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재림신앙이 없거나 재림을 부정하는 사람들은 삶이 부도덕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삶의 목표를 잃었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는 장래를 잃게 되고 내세를 잃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언제나 현재도 중요시 하지만 미래를 더 소중하게 여깁니다. 재림, 천국, 영생 모두 미래적인 것들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재림신앙을 잃으면 이 미래를 잃는 것입니다. 목적이 없는 신앙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목적이 분명해야 오늘의 삶에서 나의 행실, 경건함, 거룩함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또 하나는 기다림과 사모함입니다.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12절)”고 말씀합니다. 재림 신앙은 오늘을 넘어 다음의 시간을 바라보는 신앙입니다. 사람이 오늘만을 살아가고자 하면 내일은 보이지 않습니다. 신앙인의 삶은 내일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결론입니다. 구약성경의 중심은 장차 이 세상에 메시야가 탄생하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약성경의 줄거리이고 핵심이고 중심 메시지이고 중심신학입니다. 그런데 신약성경의 중심은 두 가지 입니다. 하나는 오시리라고 예언된 예수께서 오셨다는 사실이고 또 하나는 재림하시리라고 예언된 예수께서 반드시 재림하시리라는 것입니다. 

성경의 예언은 일점일획도 빠짐없이 다 이루시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언젠가 재림하시리라고 예언된 예수께서 재림하실 것입니다. 성경은 “그날이 언제일는지 아무도 모른다”고 말씀합니다. “낮일는지 밤일는지 새벽일는지 아버지만 아신다(마 24:36)”고 하였습니다. 

저는 이렇게 여러분들에게 분명히 증거 하였습니다. 이것을 받아들이고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전적으로 여러분들 자신에게 달려있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어느 날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언제일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다만 오신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때 여러분 모두 기다림의 신앙으로 주님을 영접하는 은혜를 입으시기 소망합니다. (이정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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