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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께 묻고 그분의 음성을 들으라 (대상 10: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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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 묻고 그분의 음성을 들으라 (대상 10:13-14)

여러분!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선악과의 미혹을 받을 때 하나님께 “하나님, 어떻게 할까요?”라고 물었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제 생각에는 선악과를 따먹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의 유혹을 받을 때에도 “하나님, 어떻게 할까요?”라고 물었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면 다윗은 간음죄와 살인죄를 범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늘 설교는 하나님의 음성 듣기에 관한 설교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늘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 음성에 순종하는 신앙생활을 하기를 바랍니다.

1.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분의 뜻대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잘하려면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모르면 인간적인 판단으로 모든 일을 결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경우는 하나님의 뜻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행하지만 하나님의 뜻과는 반대되는 일을 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대로 살아야 성공적인 신앙생활, 승리하는 신앙생활이 가능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대로 순종하는 생활을 하는 사람을 기뻐하십니다.

사도행전 13장에 보면 다윗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내용으로 보면 다윗은 성공적인 신앙생활을 했고, 그런 신앙생활을 하는 다윗을 하나님은 기뻐하셨습니다. 다윗이 어떠한 사람인가를 보여주는 두 구절이 있습니다.

먼저 행 13:22입니다.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 하시더니” 

하나님께서 다윗을 보시니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을 기뻐하신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리라고 약속하시고 그 약속을 이루셨습니다.

또 한 구절은 행 13:36입니다. “다윗은 당시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섬기다가 잠들어...” 다윗의 일생을 요약한 구절입니다. 다윗은 평생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섬기다가 잠들었습니다. 다윗의 평생을 요약하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섬긴 인생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그의 신앙생활이 성공적이었고 승리하는 신앙생활이었던 것입니다.


2. 하나님의 뜻은 보편적인 뜻과 개인적인 뜻이 있습니다. 

우리는 다윗처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야 하는데 그렇다면 우리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뜻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눠볼 수 있습니다.

1) 보편적인 하나님의 뜻입니다. 
보편적인 하나님의 뜻은 언제나 어디서나 누구에게든지 적용되는 진리입니다. 보편적인 하나님의 뜻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으며 절대 불변하는 진리입니다.
성경은 이 보편적인 하나님의 뜻을 기록한 책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으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2) 개인적인 하나님의 뜻입니다. 
어떤 사람은 성경에 모든 것이 다 있다고 말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의 충족성이라는 것은 성경만을 가지고도 구원을 받기에 충분하다는 말이지 성경에 모든 것이 다 있는 것은 아닙니다.
개인적인 하나님의 뜻은 성경에 나와 있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자면 내가 서울에 살아야 하는지 하남시에 살아야 하는지는 성경에는 없습니다. 내가 목사가 되어야 하는지 장로가 되어야 하는지도 성경에 없습니다. 처녀 총각이 결혼 대상자로 A라는 사람을 선택해야 하는지 B라는 사람을 선택해야 하는지도 성경에 없습니다. 한국에 수많은 교회가 있는데 그 많은 교회 중에 내가 어느 교회를 나가야 
하는지도 성경에 없습니다. 내가 오늘 A라는 사람을 만나려고 하는데 그 사람을 만나야 하지는 만나지 말아야 하는지도 성경에 없습니다.


3. 개인적인 하나님의 뜻을 알려면 하나님께 묻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그럼 성경에 없는 하나님의 뜻을 알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나님께 묻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어떤 문제가 생기면 그 문제를 가지고 기도합니다. 기도할 때 우리가 힘써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그 문제에 관한 하나님의 뜻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 개인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말씀해주시는 하나님의 방법은 다양합니다. 설교를 통해서, 생각을 통해서, 감동을 통해서, 환경을 통해서 등등 다양한 방법으로 말씀해 주십니다.

쉽게 설명해봅시다. 제가 외국에 나가서 교회 사무원인 김현정집사에게 무엇인가를 지시하고 싶으면 어떻게 하면 될까요? 요즘은 자동로밍이 되니까 핸드폰으로 지시할 수 있습니다. 또 다른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요? 이메일, 편지, 카카오톡 등 다양한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다양한 방법으로 자신의 뜻을 우리에게 말씀하시기 때문에 우리들은 하나님의 응답에 
대해서 열린 마음을 갖고 귀를 기울이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 듣기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자신의 뜻을 말씀하실 때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는 방법으로 말씀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 수 없는 이상한 방법으로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누구든지 알아들을 수 있는 아주 쉬운 방법으로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한국 사람에게는 한국어로 말씀하시고 미국 사람에게는 영어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무식한 사람에게는 그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는 수준으로 말씀하시지 박사학위 받은 사람 정도가 이해할 수 있는 방법으로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묻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떤 방법을 통해서든지 자신의 뜻을 우리들게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4. 성도들이 하나님께 묻고 그분의 음성을 들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과 성도들의 관계 때문입니다. 

우리가 왜 하나님께 묻고 그분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까?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어떤 관계인가를 보면 
답이 나옵니다. 일반적으로 기도하는 사람들의 기도 패턴은 자신의 기도제목을 가지고 하나님께 기도제목대로 해달라고 떼를 쓰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지만 늘 그렇게 기도생활을 한다면 바람직한 기도생활은 아닙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조물주와 피조물의 관계입니다. 우리가 조물주에게 피조물인 우리의 뜻을 이루어달라고 떼를 쓰는 것은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왕이시고 우리들은 백성입니다. 사사시대의 문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왕이신 하나님을 배제시키고 자신들의 뜻을 따라 살았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왕정시대에는 왕의 뜻은 절대적이었습니다. 왕이 원한다면 백성들은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왕이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왕이신 그분의 뜻을 묻고 그분의 뜻대로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목자이시고 우리들은 양입니다. 
양이 갈 길을 정하고 목자를 이끄는 것이 아닙니다. 양은 목자가 이끄는 대로 목자의 뜻에 순종하고 목자를 따르는 것입니다. 그러면 목자는 양을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버지이시고 우리들은 자녀입니다. 자녀가 부모의 뜻을 따라가는 것은 성경적인 원리이고 또 세상이치인 것입니다. 

여러분! 제 아들이 어느 날 여자를 한명 데리고 와서 저에게 청첩장을 주면서 결혼식에 와달라고 하면 제가 얼마나 화가 나겠습니까! 아들이 여자를 사귀고 결혼할 마음이 있으면 먼저 부모님에게 선을 보이고 부모님의 뜻은 어떠한지를 물어야 정상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들은 하나님께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묻고 그분의 음성을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주인이시고 우리들은 종입니다. 종은 무엇을 하든지 주인의 결제를 받아야 합니다. 주인은 종이 오늘 논에 가서 일하기를 원하는데 종은 주인의 뜻도 모르고 밭으로 가면 그 종은 혼이 나는 것입니다. 종이 주인의 뜻을 무시하고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모든 일을 한다면 그 종은 주인에게 매를 많이 맞게 되어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주인이신 하나님께 매를 맞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주인을 무시하고 자기 뜻대로 모든 것을 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5. 신앙생활의 실패는 하나님께 묻지 않고 행하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본문에 나오는 사울입니다. 본문에서는 하나님께서 사울을 죽이셨는데 죽이신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을 죽이신 이유는 사울이 하나님께 범죄 했기 때문입니다.

사울의 범죄는 3가지입니다. 

첫째는 사울이 여호와의 말씀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불순종 때문에 하나님께서 사울을 죽이셨습니다.

둘째는 사울이 신접한 자에게 가르치기를 청했습니다. 사울이 무당을 찾아갔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기독교인이 무당을 찾아가고 점쟁이를 찾아가는 것을 굉장히 싫어하십니다. 그런 곳은 친구를 따라서도 가면 안 됩니다. 또 별자리보기, 사주팔자보기, 관상보기, 손금 보기, 날 받기, 예를 들면 점쟁이한테 결혼 날짜를 받는다든지 이사 날짜를 받는 다든지 하는 것을 하나님은 굉장히 싫어하십니다. 구약시대 같았으면 죽을 죄입니다. 사울이 그래서 죽은 것입니다.

셋째는 사울이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였으므로 죽이셨습니다. 하나님께 묻지 않는 것이 죽을 정도로 큰 죄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묻지 않는 것은 교만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께 물어야 합니다.

여호수아는 대단한 카리스마의 사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에게는 불평도 하고 원망도 하고 불순종도 했습니다. 하지만 여호수아에게는 절대복종이었습니다. 모세는 사역에 실패한 일이 없습니다. 모든 일에 성공했습니다. 반면에 여호수아는 성공한 사역도 있지만 실패한 사역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에게는 원망, 불평, 불순종했고 여호수아에게는 절대 복종했습니다. 이것이 광야 신앙과 가나안 신앙의 차이점인 것 같습니다. 불평하고 원망하고 불순종하는 사람의 신앙은 광야 수준의 신앙입니다. 이해가 안 되어도 손해가 되어도 순종하는 신앙은 가나안 수준의 신앙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가나안 수준의 신앙생활을 하기를 바랍니다.

여호수아의 사역 중에 실패한 사역 하나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수 9장에 보면 기브온 족속들이 이스라엘에 관한 소문을 듣고 두려웠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과 평화하기 위하여 꾀를 씁니다. 사신의 모양을 꾸밉니다. 해어진 전대와 해어지고 찢어져서 기운 가죽 포도주 부대를 나귀에 싣고 발에는 낡아서 기운 신을 신고 낡은 옷을 입고 다 마르고 곰팡이가 난 떡을 준비하고 여호수아를 만납니다. 그리고는 아주 먼 곳에서 오느라고 자신들의 몰골이 그렇게 되었다고 속입니다. 여호수아는 그들의 말을 믿고 그들과 평화조약을 맺게 됩니다. 그런데 사흘이 지난 후에 알고 보니 그들은 멀리서 온 사람들이 아니라 이웃에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수 9장에서는 그 사건을 다루면서 여호수아의 실패의 원인을 말씀합니다. 

수 9:14입니다. “어떻게 할지를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고” 

여호수아의 실패의 원인은 하나님께 묻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물었으면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셨을 텐데 여호수아가 하나님께 묻지 않아서 기브온 사람들에게 속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묻지 않으면 하나님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입니다. 회사에서 직원이 사장의 결제 없이 일을 추진하면 사장님의 마음이 상하게 됩니다. 하물며 우리들이 하나님의 결제 없이 마음대로 어떤 일을 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죽이시거나 매를 드시지 않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맘이 상하는 일인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실패는 하나님께 묻지 않고 행하는 것입니다.


6. 신앙생활의 성공은 하나님께 묻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분의 뜻대로 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일생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섬기며 성공적인 신앙생활이 가능했던 이유는 그가 철저히 하나님께 묻고 행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마땅히 해야 할 일도 하나님께 묻고 행했습니다. 삼상 23장에 보면 블레셋 사람들이 그일라를 쳤습니다. 
다윗은 장수이기 때문에 당연히 전쟁으로 고통 중에 있는 그일라 사람들을 구원해 줘야 합니다. 그런데도 다윗은 당연한 일도 하나님께 묻습니다. 
“내가 가서 이 블레셋 사람들을 치리이까” 하나님께서 “Yes”라고 응답하시니 다윗이 블레셋 사람들을 칩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응답대로 그일라를 점령한 블레셋 사람들을 치려하니 다윗을 따르는 사람들이 반대합니다. 하지만 다윗은 하나님께 묻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는 사람들의 말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합니다. 아마도 하나님은 그런 다윗의 모습을 기뻐하셨던 것 같습니다.

저와 여러분들도 무슨 일을 하든지 다윗처럼 물어야 합니다. 그리고 환경적으로 불리하고 사람들이 반대하는 일이 있어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다윗처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쌍문동에 가면 양문교회라고 있습니다. 그 교회를 담임하시는 강종춘 목사님의 간증입니다. 목사님이 교회를 개척하고 지하에서 목회를 할 때입니다. 예배시간에 노숙자 두 사람이 교회에 들어왔습니다. 그분들이 들어오니 이상한 냄새가 코를 지르지요. 알고 봤더니 안내서는 집사님이 그분들을 붙잡고 1시간 예배를 드리면 3천 원씩 드리겠다고 해서 3천 원을 받기 위해서 예배를 드리게 된 것입니다. 그분들이 돌아갈 때 안내집사님이 “다음 주에도 오면 3천 원씩 드릴께요”라고 말고 말했습니다. 그 다음 주일에는 
노숙자 두 분이 여러 명을 전도해서 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주일이 지날 때마다 노숙자들이 부흥하는데 교인들이 두 가지 의견으로 나뉘더랍니다. 

한쪽에서는 노숙자들이지만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은 좋은 일이니 계속해서 오라고 하자고 하고 다른 쪽에서는 예배에 지장이 있다. 교회가 노숙자교회가 되게 할 수는 없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님이 선을 그어주어야 할 상황이 되었습니다. 사실 목사님 마음에도 노숙자들이 교회에 가득한 것이 불편해서 정리를 하려고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 마음에 그래도 하나님의 뜻을 물어야 하지 않는가라고 생각하고 책상에 앉아서 하나님께 그 문제를 가지고 기도를 했습니다. 그 때 마음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더랍니다. “목사는 사람을 가려서는 안 된다. 교회는 사람을 가려서는 안 된다” 그 음성을 듣고서 목사님은 하나님께 묻기를 잘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분들이 교회에 나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데 자기 생각대로 했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목사님은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는 실수를 할 뻔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님은 주일 오후 1시 30분에 노형제 예배를 만들었습니다. 노숙자라고 부르지 않고 노형제라는 호칭을 만들어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랬더니 노형제들이 모여들기 시작하는데 
많이 모일 때는 200명이 넘게 모인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사역이 복이 되어서 지하실 교회가 지상 5층, 지하 1층짜리 건물을 사서 이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물으면 하나님은 가르쳐주십니다. 요 14:26에 보면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설교하면서 말하지 않는 내용이 많습니다. 제 개인적인 사생활에 대해서는 설교에 도움이 되는 내용은 말하지만 설교에 도움이 되지 않으면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저에게 개인적으로 묻는다면 저는 제 개인적인 것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것처럼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묻지 않으면 말씀하시지 않지만 물으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1997년은 제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입니다. 총체적인 문제로 힘들어하다가 하루는 자동차 안에서 아내와 제가 하나님께 묻는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우리가 왜 이렇게 힘들어야 합니까? 이렇게 힘든 이유를 가르쳐주세요” 아내와 제가 한참을 기도했지만 하나님의 응답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서로 응답을 받지 못했다고 말하고 있는데 뒷좌석에 앉아있던 7살짜리 아들이 말했습니다. “아빠, 하나님이 훈련하시는 중이래” 우리 부부가 물으니 하나님은 어린 아들을 통해서라도 가르쳐주셨던 것입니다.

제 아내와 제가 어느 영성 단체에서 영적인 훈련을 받을 때가 있었습니다. 그 단체에서는 개인적인 사명과 소명에 대해서 상담을 해주었습니다. 제 아내의 소명은 ‘사랑으로 섬김’이었습니다. 그 상담을 받은 후에 제 아내는 많이 실망했습니다. 그 당시에 주일 식사도 아내가 하고 교회 청소도 아내가 하고 교회 잡일이라는 것은 거의 아내 혼자서 하던 때인데, 다른 사람은 가르치고 양육이라든지, 신유, 능력행함, 
영분별이라든지 그럴듯한 것인데 자기는 평생 부엌때기나 해야 하는가 싶으니 화도 나고 답답하기도 했던 것 같습니다. 아내는 그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부르짖어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나는 평생 주방에서 일이나 해야 합니까?” 아내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 한참을 기도하다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딸아, 사모는 영부인과 같단다. 영부인은 장관은 아니어도 장관이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는 것처럼 사모도 그와 같단다. 그리고 사랑은 제조기와 같단다. 사랑 안에는 능력도 있고 사랑 안에는 신유도, 예언도 다 들어있단다. 사랑은 제조기와 같단다” 제 아내는 그 음성을 듣고 감사의 눈물을 흘리고 ‘사랑으로 섬김’ 이라는 소명을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물으니 하나님께서 답을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묻는 훈련을 통해서 많은 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저의 물질관계를 변화시키고 심고 

거두는 삶을 살게 한, 두 가지 사건이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를 간증하겠습니다.

목회초창기에 제 아내가 직장생활을 했습니다. 직장을 그만두고 1년 쯤 지났을 때 연금으로 100만 원 정도가 나오게 되었습니다. 돈을 찾으러 갔더니 138만 원이 좀 넘게 나왔습니다. 제가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여보, 100만 원 정도 나올 줄 알았는데 138만 원이 나왔으니 38만원은 주님에게 드리고 나머지 100만 원은 우리가 씁시다” 그런데 당시 저희 부부를 지도해주시던 목사님께서 돈이 생기면 돈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묻고 써야 한다고 가르쳐주셨는데 그 가르침이 생각이 났습니다. 그래서 아내와 제가 봉투를 붙잡고 “하나님, 이 돈을 어떻게 쓸까요?”라고 물으니 평상시에는 말씀도 없으시던 주님께서 그 날은 많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 부부는 십일조를 떼고 나머지 돈을 다른 사람들에 다 심었습니다. 그 당시 138만 원이면 지금 저에게 1억보다 큰돈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순종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순종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날 저녁에 2001 아울렛에 가게 되었는데 예쁜 넥타이를 보고 사려고 하다가 돈이 아까워서 사질 못했습니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오면서 저는 혼자 중얼 거렸습니다. “내도 138만 원이 생겼는데 나는 하나도 못쓰고 이게 뭐냐” 그 다음 날, 새벽에 기도를 하는데 어떤 분이 저를 부르더니 봉투를 하나 주었습니다. “목사님, 제가 쓰지 않고 모은 돈인데 목사님이 원하시는 대로 쓰세요” 열어보니 100만 원짜리 수표 5장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주일에 어느 집사님이 넥타이 2장을 선물로 주었습니다. 그 때 제가 심으면 거둔다는 것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 때 주님께 묻고 주님의 음성을 들은 것이 계기가 되어 부지런히 심다보니 하나님께서 점차 풍성하게 하셔서 지금은 그 때에 비하면 엄청난 물질의 복을 받아 누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활 속에서 묻는 기도를 하는 것은 두 가지 면에서 유익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하나님을 인정해 드리는 것이니 신앙적인 면에서 유익이고 또 하나는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도움을 받으니 생활적인 면에서 유익입니다. 

제가 과거에 봉고차를 가지고 다닐 때가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이상한 법이 있었는데 봉고차는 1차로에 들어가면 위법이었습니다. 그 법 때문에 제가 과태료를 많이 물게 되었습니다. 나는 급한데 앞 차가 천천히 가면 추월해야 하잖아요. 그런데 내가 추월만 하면 교통경찰이 있어서 과태료를 물곤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하나님께 묻는 훈련을 시작한 후에는 거의 과태료를 내는 일이 없었습니다. 아주 가끔 하나님께 묻지 않고 과속하다가 과태료를 물은 일이 있기는 하지만 그 때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제가 하나님께 묻고 하나님의 음성을 따라 사는 것을 훈련하면서 도움이 된 것 중에 하나는 사람에 대한 이해가 넓어지고 대인관계를 좀 더 사랑으로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얼마 전에 교회 앞집에서 개를 키우는 옆 교회 집사님이 우리교회 문복창집사님에게 우리교회 교인들이 시청에 민원을 넣어서 개를 치워야 한다는 말을 했다고 들었습니다. 사실 개집 때문에 우리가 피해를 많이 보고 있습니다. 특히 궂은 날에 개 냄새는 너무 심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교회 골목에 들어오기가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교회가 민원을 넣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하여 참고 있는데 그 말을 들으니 화가 나더군요. 누군가가 교회와 앞 집 집사님과 사이에 이간질을 붙이는 것이 분명합니다. 시청 공무원이 민원인이 누구인지 가르쳐 주지도 않는데 우리교회 교인 4명이라고 말한 것을 보면 분명히 이간질을 시키는 것이 맞습니다. 그래서 제가 우리는 그러지 않았다 우리교인 중에는 그럴 사람이 없다고 말을 하게 되었는데 여자 집사님은 제 말을 듣고 알았다고 하는데 남자 집사님은 제가 불러도 저를 쳐다보지도 않고 제가 말을 해도 대답도 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저도 흥분이 되어서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습니다. 계속하다가는 좋지 않을 것 같아서 말을 정리했습니다. 그런데 그 후에도 몇 번 그 남자 집사님이 생각나면서 화가 올라오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녁에 교회에 와서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속상한 이야기도 좀 하고, 그래도 성경에서 축복하라고 했으니 축복을 하다가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하나님, 그 사람이 도대체 왜 그래요?”, 제 질문이 끝나자 즉시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셨습니다. “그가 두려워서 그런다” 두렵다는 것이 아마도 일이 커져서 시청에서 또 나오게 될까봐 두려운 것을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어찌되었든 제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나니 두려움 가운데 있는 그분이 안쓰러운 생각이 들면서 제 마음에 있던 화도 풀리게 되었습니다. 만약 제가 그 때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했다면 아마 지금도 제 마음에 그 사람을 향한 앙금이 남아있을 것입니다.

신앙생활 잘하는 것은 말씀대로 하는 것입니다. 보편적인 하나님의 뜻인 성경 말씀대로 사는 것이 신앙생활 잘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개인적인 하나님의 뜻인 하나님의 음성대로 사는 것이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무슨 일을 하든지 성경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고 성경에 없는 것이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셔서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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