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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대림절] 우리 주님이 오십니다 (사 40:3-11, 살전 4:13-18, 막 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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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주님이 오십니다 (사 40:3-11, 살전 4:13-18, 막 13:24-27 ) 

1. 나라마다 인사말이 다릅니다. 옛날 우리 조상들은 만나면 “식사했느냐?”고 부터 물었습니다. 그것도 구체적으로 아침에는 “아침 식사했느냐?” 점심때는 “점심식사는 어떻게 했느냐?” 그리고 저녁이 되면 “저녁 식사했느냐?”고 묻습니다. 어떤 분이 말하기를 우리는 옛날부터 늘 가난하게 살아와서 하루 세끼 식사만 제대로 해결해도 상당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일리 있는 이야기입니다. 아무래도 만나서 주고받는 인사말은 가장 중요하고 급한 것부터 물어야하기 때문입니다. 

그럼 우리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어떻게 인사합니까? 대개 일반적인 인사말을 그대로 따라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할렐루야!”라고 한다든지, “샬롬”이라고 인사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서  예배 다 마치면서 그달 인사말로 인사하는 것은 어떤 사안에 대하여 좀 더 강조하면서 서로에게 다짐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면 초대 교회 성도들은 어떻게 인사했겠습니까? 그것이 고전16:22 마지막에 있습니다.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 예수님 당시 일반 서민들이 사용했던 아람어로 “마라나타”입니다. 서로 만나면 반갑게 손을 붙잡고 중동 사람들의 인사법대로 서로 볼을 부비면서 “마라나타!”라고 인사했을 것입니다. 

우리 성경에는 “주여, 오시옵소서!”라고 되어 있으나 이 말은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마란-아타”라고 하면 “우리 주님이 이미 오셨습니다”라는 뜻입니다. 말구유에 태어나셔서 마지막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 승천하신 주님께 대한 신앙을 확인 격려하는 인사입니다. “오신 그분이 다름 아닌 메시아이십니다. 나의 주님이시오 당신의 주님이십니다. 우리의 구원은 이미 성취돠었습니다”라고 서로 다짐하고 어려운 때 용기를 북돋우어주는 인사입니다.  

그런가 하면 “마라나-타”라고 “마라나”를 붙이고 “타”를 떼어서 인사하면 그 내용이 다소 달라집니다. 이 말은 “주님이 다시오십니다”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시는 주님께서 반드시 다시 오셔서 이 땅을 심판하시고 우리 구원을 완성시켜 주십니다. 어렵고 힘들더라도 소망을 가지고 참고 기다립시다”라고 격려하는 인사가 됩니다. 

그럼 어느 것이 처음 그리스도인들의 인사말이냐라고 물으면 둘 다라고 대답하는 것이 옳습니다. 교회는 주님이 오신 것을 기점으로 출발하여 주님이 다시 오실 때 그 긴 여행을 마치게 됩니다. “마란-아타”에서 시작하여 “마라나-타”로 완성하시는 것이 우리 주님의 역사계획입니다. 

성탄절을 나타내는 말로서는 아무래도 “임마누엘”이 적절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다”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부활 절기에는 “할렐루야!” 즉 “여호와를 찬양하라!”는 뜻으로 이보다 나은 말이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죽음에서 살리셔서 우리의 주와 구주가 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할 때 대림절기에 가장 적합한 말은 “마라나타”입니다. 주님은 이미 오셨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다시 오실 주님에 대한 소망을 일깨우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로 우리 서로 옆 사람과 “마라나타!”라고 한번 인사하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교회력으로 대립 첫 주일입니다. 

(1) 대림절은 성탄절을 기다리면서 이미 오신 주님을 믿는 믿음을 확인하는 절기입니다. 바울은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자신을 시험해 보라”고 했습니다. 소란하고 분주하고 복잡한 세상을 살면서 우리는 마치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을 잃어버린 마리아와 요셉처럼 어처구니없게도 예수님을 잃고 정신없이 살아왔는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어서 말하기를 “만약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지 아니하면 너희는 버림받은 자니라”고 했습니다. 바라기는 이 시간 여러분의 믿음을 재확인하시기를 바랍니다. 대림절의 과거적 의미입니다. 

(2) 대림절은 지금 오시는 주님을 모시도록 권하고 촉구하는 절기입니다.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를 통하여 구속의 큰일을 다 이루시고 하늘로 가셨습니다. 그리고 성령님을 보내주셨습니다.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들에게 성령께서 임하십니다. 그리하여 세상사는 동안 성령 하나님께서 언제 어디서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인도하시고, 보호하시고, 공급해 주시고, 가르쳐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이 성령님을 모시고 사는 살아 움직이는 성전이 된 것은 너무도 놀랍고 감격스런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기 대림절의 또 현제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3)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제 3일에 무덤 문을 열고 부활하신 우리 주님은 40일 동안 세상에 계시다가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저 감람산에서 제자들이 보는 가운데서 천사들의 옹위를 받으며 구름타고 하늘로 가셨습니다. 갈릴리 사람들은 손에 잡았다가 놓친 사람들처럼 황당하여 멍하니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그때 천사가 말했습니다.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그리고 요한 계시록 마지막 부분에도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고 하셨습니다. 소망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립니다. 여기 대림절의 미래적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알파와 오메가이십니다. 우리의 믿음과 사랑과 소망은 이와 같이 그 근거가 너무나도 확실합니다. 

2. 그러면 주님은 어떻게 오십니까? 

(1)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고 했습니다. 우리 주님은 길로 오십니다. 

당시 이스라엘에는 “King's High Way”라는 요새 말로 하면 고속도로가 있었습니다. “왕의  대로”라 그 말입니다. 애굽에서 올라와서 지중해 연안을 거쳐 시리아로 올라가는 길입니다. 옛날에는 길가다 도둑을 만나는 일이 많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상인들이나 이동하는 사람들이 가급적 대로를 찾아서 갔습니다. 

특히 왕이 움직일 때는 철통같은 경비와 함께 그 “왕의 대로” 마져도 통행에 아무런 장애가 없도록 철저하게 평탄작업을 합니다. 오늘 이사야서 본문에 보면 “골짜기 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언덕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않은 곳이 평탄하게 되며 험한 곳은 평지가 되게하라” 그리하면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이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오십니다. 그 길에 장애물은 없습니까? 걸림돌은 없습니까? 주님 오시기에 아무런 어려움이 없습니까? 세례 요한은 평탄하게 하여 대로를 예비하는 방법으로 “회개하라!”고 했습니다. 주님과 상관없이 살던 이제까지의 삶을 돌아보고 여러분의 마음과 생활을 주님께로 향하고 주님을 여러분의 마음과 삶의 중심에 모실 것을 촉구합니다. 

(2) 주님은 선한 목자로 오십니다. 

이사야서 40:11을 보십시오. “그는 목자같이 양떼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 예수님은 목자로 오십니다. 

우리 예배당 북편 전면에 타일로 된 선한 목자 그림이 있습니다. 양떼들 앞서서 인도하시며 푸른 초장 쉴만한 물가를 찾으십니다. 사나운 짐승들로부터 양떼를 보호하십니다. 그리고 그 품에는 어린 양 한 마리가 안겨 있습니다. 목자는 그 양떼를 먹이다 저녁이 되면 우리로 데려가게 됩니다. 그리고 양 우리의 문에서 양들을 확인하고, 그리고는 밤 세워 양들을 지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나는 선한 목자라”고 하셨습니다. 눅15:에 나오는 잃은 양 비유를 보면 지금 목자가 하는 일은 “잃은 한 마리 양”을 찾는 일입니다. 우리가 복음성가에서 그렇게 부르듯이 “돌부리에 채이고 가시에 찔리면서” 잃은 양을 찾으십니다. 그리고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았을 때 기뻐서 어깨에 메고 돌아와서 온 동네 사람들을 모아 잔치를 벌였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 일을 우리와 우리 교회에 맡기셨습니다. 이 일에 예외적인 사람은 없습니다. 남이 어떻게 하나 살피고 감독할 권리가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제각각 주님이 맡겨주신 사명에 충성할 일만 부여되어 있습니다.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 칭찬 하실 이도 주님이시오,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 책망하실 이도 주님이십니다. 

주님은 지금 목자로 우리를 향하여 오십니다. 그 선한 목자이신 주님 품에 안기고 주님과 함께 잃은 양을 찾는데 최선을 다하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반드시 오십니다. 그 때 그 양손에는 상급이 있습니다. 주의 일에 순종하므로 충성하는 여러분을 위한 상급이 있습니다. 

(3) 우리 주님은 하나님으로 오십니다. 

이사야 40장의 역사적 배경은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시대였습니다. 당시 바벨론은 철권으로 온 세계를 다스리던 군사정권이었습니다. 그 막강한 정권이 무너지리라고 예상한 사람은 그 당시로서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지자들은 세상에 절대자는 없다는 것을 알았고 또 증거했습니다. 그것은 지금 포로생활에서 소망도 선민으로서의 정체성도 잃을 위기에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용기와 위로가 되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사40:은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영원한 것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뿐이신 것을 선포했습니다. 그리고 이 소식을 목소리를 높여서 힘써 증거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소식을 가지고 산을 넘는 자의 발이 그렇게 아름답다고 했습니다. 

오늘 성경 말씀 보십시오.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이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그렇다면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이여! 여러분은 여러분의 인생을 일시적인 것을 위하여 소비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영원한 것에 투자하시겠습니까?  “보라 주 여호와께서 장차 강한 자로 임하실 것이요 친히 그의 팔로 다스리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주님이 만 왕의 왕으로 오십니다. 주니 만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옛날 베들레헴에 오실 때 주님은 아기로 오셨고 극소수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는 가운데 강림하셨습니다. 또 나중에 아주 무력한 자처럼 체포당하시고, 재판받으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다시 오실 주님은 만 왕의 왕으로 오십니다. “강한 자로 임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만인 주시리에 오십니다. 심지어 그를 찌른 자도 보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때는 주님을 심판했던 그들이 이제는 주님 앞에 소환당하여 심판을 받게 됩니다. 

오늘 여기서 주님을 영접하지 아니하고 박대하면 그날 거기서 주님께로부터 “내가 너를 도무지 알지 못하노라” 고 거부당하시게 됩니다. 그리고 바깥 어두운 곳에 쫓겨나 이를 갈게 될 것입니다. 오늘, 바로 오늘 우리에게 오시는 주님을 영접하기 위하여 여러분의 마음 문을 활짝 여시기 바랍니다. 주님 임하셔서 여러분에게 큰 은혜와 복을 주실 줄 믿습니다. (김오동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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