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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죄의식은 하나님의 가장 큰 선물이다 (요 8: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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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의식은 하나님의 가장 큰 선물이다 (요 8:1-11)


두 가지 이야기로 말씀을 열겠습니다.
신문에 광고가 났습니다. 수 천만원짜리 자동차를 1000원에 판다는 광고였습니다. 모두가 웃으면서 읽기만 하였습니다.
"거짓말이다."
"장난이다."
"가짜 자동차일 것이다." 그러나 한 사람이 광고낸 사람을 찾아가 보았습니다. 차는 이상이 없었습니다. 어떤 여인이 판다고 광고한 것인데 그 사람도 정상이었습니다. 이상하여 물었습니다.

"왜 이런 좋은 자동차를 1000원에 파나요?" 그는 며칠 전에 죽은 남편 유서를 보여 주었습니다.
"내가 죽은 후 내 자동차를 팔아서 내 애인에게 줄 것." 알고보니 남편은 이중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배신감을 느꼈습니다. 오랫동안 이중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이 밝혀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000원에 파는 것이라는 사연이였습니다. 죄의식이 전혀 없이 오랫 동안 살아 왔습니다. 배신감을 느낀 아내가 그렇게 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신 가장 큰 선물은 죄의식인 데 죄의식이 사라진 시대속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한 가지 이야기 더 드리려고 합니다.
성경 이야기입니다. 헤롯 왕과 다윗 왕을 비교하려고 합니다. 헤롯은 동생을 죽이고 동생 아내와 같이 살았습니다. 세례 요한이 신랄하게 비판하였습니다. 헤롯은 세례 요한이 아무리 잘못을 지적하여도 죄의식이 전혀 없었습니다. 세례 요한의 목을 잘랐습니다.
그러나 다윗왕은 달랐습니다. 
신하 우리아 장군을 죽이고 그의 아내와 살았습니다. 나단이 와서 죄를 지적하였습니다. 죄의식이 그를 괴롭혔습니다. 침상에 앉아서 눈물로 침상이 둥둥 뜰 정도로 회개하였습니다. 
죄의식이 없는 헤롯은 폭군으로 남고, 죄의식이 살아 있는 다윗은 역사상 가장 놀라운 성군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엄청난 선물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산소입니다.
매일 한 사람이 마시는 산소값이 40만원 정도입니다. 진해에 가서 나는 잠수함에 들어가 본적이 있습니다. 15명 타는 잠수함입니다. 물속에서 15명이 하루 숨쉬기 위하여 산소를 계속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하루 비용이 600만원이라는 것입니다, 한 명이 하루 40만원 상당의 산소를 마셔야 산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산소보다 더 큰 선물이 있습니다.
죄의식입니다. 죄의식은 하나님이 주신 가장 큰 선물입니다.

나는 최근에 미국에서 베스트 셀러 <양심 실종>이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저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죄의식은 하나님의 가장 큰 선물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들에게 주신 가장 선물은 양심입니다. 그런데 양심이 마비되어 가고 있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것을 예리하게 분석한 책입니다. 죄의식이 사라지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음을 개탄한 책입니다.

오늘 본문으로 들어갑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아침이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예수님 앞에 앉았습니다. 그 때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간음하다가 현장에 잡힌 여인을 끌고 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에게 물었습니다.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 잡혔습니다. 모세 율법은 이런 여자는 돌로 치라고 명하였습니다. 어떻게 할가요?"

예수님은 몸을 굽히셨습니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땅에 무슨 글씨를 쓰셨습니다. 그리고 몸을 일으키시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주에 죄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그리고 다시 몸을 굽히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무엇이라 땅에 쓰셨습니다. 사람들은 양심에 가책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어른부터 돌을 버리고 하나 둘 사라졌습니다. 예수님이 몸을 일으키고 보니 여인외에는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여인에게 물으셨습니다.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사람들이 어기 있느냐?"
"주여! 없나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본문 이야기입니다.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양심에 가책을 느껴"라고 한 말씀이 눈을 뜨게 하였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은 모두 양심의 가책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고 살고 있습니다. 

지난 주간 나는 <롬멜>이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460 페이지나 되는 두꺼운 책이었습니다. 지루하였지만 끝까지 읽었습니다. 히틀러 밑에서 충성스럽게 오른팔로 일하던 장군이 롬멜입니다.

그러나 1944년 7월 20일 히틀러가 너무나 폭정을 하니까 8명이 결사대가 조직되어 암살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실패하였습니다. 그 조직이 탈로되었습니다. 8명이 체포되었습니다. 8월 8일 교수형에 처하여졌습니다. 잔인하게 죽였습니다. 카메라 맨들이 죽어가는 마지막 모습을 사진으로 남겼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죽을 때 비명 소리, 통곡소리를 그대로 생생하게 녹음하였습니다. 히틀러는 그 날 밤에 그 테이프를 가지고 오라고 하여 지휘본부에서 틀었습니다. 자기를 암살하려던 사람들이 죽어가는 비명소리를 들으면서 미소를 지었습니다. 롬멜 장군은 히틀러 암살 계획에 동참하지는 않았지만 사전에 이 계획을 알았다고 하여서 히틀러의 미움을 받았습니다.

히틀러의 양심은 마비된 양심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을 600만이나 죽였습니다. 그리고 조금도 양심에 가책이 없었습니다.
도리어 사람들은 말하고 있습니다.
"히틀러의 가장 큰 실수는 유대인들을 다 죽이지 않은 것이다."
죄의식이 사라진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복음은 더욱 빛이 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성전에서 이른 아침에 죄의식을 선물로 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1. 죄의식을 느껴야 합니다.

양심의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1984년 스페인 아비앙카 항공사 제트기 추락사건이 있었습니다. 사고 원인을 조사하던 조사원들은 등골이 오싹한 원인을 불랙 박스를 통하여 알아냈습니다. 충돌 몇 분 전에 비행기 경고장치가 요란하게 울렸습니다.
“고도를 높이라. 고도를 높이라.”
짙은 안개속에서 계속 경고 방송이 울렸습니다. 그러나 조정사는 안전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혼자 중얼거렸습니다.
“시끄러워! 조용해!.”
그래도 고도를 높이라는 경고 방송이 계속 울렸습니다. 조정사는 짜증을 내며 경고 장치를 아예 꺼버렸습니다.
몇 분후 비행기는 산에 부딪쳤습니다. 비행기는 산산조각났습니다. 비행기에 탄 전원이 죽었습니다.

양심의 소리의 소리는 죄의식의 소리입니다.
양심의 소리는 계속 우리 마음에서 경고하고 있습니다.

“주일 성수하여야 한다.”
“거기 가지 말아야 한다.”
“그 사람 만나지 말아야 한다.”
“십일조를 잊지 말아야 한다.”
“음란하지 말라.”
“기도하기를 쉬지 말라.”

양심이나 죄의식은 동물과 구별되는 뚜렷한 요소입니다. 동물들에게는 죄의식이 없습니다. 동물들에게는 양심이 없습니다. 그야말로 동물적인 인식을 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양심이라는 말은 라틴어로 <알다>(scire)와 <함께>(cor)이라는 두 단어가 합하여 만들어졌습니다. 그래서 쉬네이데시스라는 단어가 생겼습니다. 양심이라는 말입니다. 신약성경에 양심이라는 말이 30번 이상 나오고 있습니다.

양심은 함께 안다는 의미입니다. 
자기와 함께 압니다.
친구들과 함께 압니다.
하나님과 함께 압니다.
우리는 양심과 함께 바른 진리를 압니다.

양심이라는 히브리어 단어는 <레브>입니다. 이는 <마음>이라는 뜻입니다. 양심은 마음입니다.
양심은 손가락 끝의 말초신경과 같습니다. 무디어지면 감각을 모릅니다. 양심이 무디어지면 죄의식 소리를 들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세 가지 양심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1) 무감각하여진 양심이 있습니다.

“지식있는 네가 우상의 집에 앉아 먹는 것을 누구든지 보면 그 믿음이 약한 자들의 양심이 담력을 얻어 우상의 재물을 먹게 되지 않겠느냐?”(고전 8;10)

(2) 상한 양심이 있습니다.

“이같이 너희가 형제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라”(고전 8;12)

(3) 화인맞은 양심이 있습니다.

“자기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의식함으로 거짓말을 하는 자들이라”(딤전 4;2)

어떤 양심이 화인맞은 양심인가요? 죄의식의 경고를 듣지 못 하여는 양심이 화인맞은 양심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었습니다. 그래서 아담의 후손인 모든 사람 속에는 선악이 들어 있습니다. 선만 들어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악만 들어 있는 사람도 없습니다. 같이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누구에게나 선의 소리가 들리고, 악의 음성이 들리게 되어 있습니다. 악의 음성은 유혹이지만 선의 음성이 양심의 소리요 죄의식의 채찍입니다.

간음한 여인들을 둘러 싸고 있는 사람들속에 악의 음성이 있었습니다. 율법의 음성이기도 하였습니다.
"저 여자는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자니까 돌로 쳐 죽여라. 당연하다. 모세 율법이다. 지금까지 그렇게 해왔다. 던져라." 그러나 예수님의 음성은 죄의식을 살려주었습니다.
"너희중에 누구든지 죄가 없는 사람은 돌러 쳐라."

예수님을 말씀을 듣고 모두가 자기를 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두 번 땅에 손가락으로 글을 쓰셨습니다. 사람들은 한 명도 보지 않고 아예 엎드려서 땅만 보고 쓰셨습니다. 고개를 들어 보았을 때 한 명도 없다는 것을 비로서 알았습니다.

무슨 글씨를 쓰셨을 가요? 아직도 풀지 못 한 문제입니다. 짐작할 뿐입니다. 내 생각에는 이렇게 쓰셨을 것같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며 그 글씨를 보면서 사람들은 죄의식이 살아나고 양심의 소리를 들었습니다. 증거가 분명합니다. 돌을 버리고 다 떠났습니다. 노인부터 떠났습니다. 노인일 수록 죄가 많아서 였을 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나이가 들 수록 죄에 민감하고 죄의식이 살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센 머리앞에는 고개를 숙이라고 하였습니다. 죄의식이 살아 있는 사람, 양심의 소리를 듣는 사람이 하나님의 창조 본질입니다. 

2. 돌을 버려야 합니다.

사람들은 모두 돌을 버리고 현장을 떠났습니다. 돌은 여인을 죽이려던 무기였습니다. 상대방 죄를 공격하려던 공격용이었습니다.
자기 죄는 보지 못 하고 다른 사람의 죄만 보고 던지려던 살인 도구였습니다. 사람들은 그 돌을 버렸습니다. 
사람들은 남의 눈에 티는 보고 자기 눈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 한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남에게는 조그만 것도 공격적이며 자기에게는 큰 것도 수비적이기 쉽습니다.
남은 공격하며 자기는 자기 스스로 용서하기 쉽습니다.
한 손가락으로 남을 가르키면 자기에게는 세 손가락이 손가락질하고 있다는 것을 모릅니다.

죄의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 양심의 소리를 듣는 사람은 남을 공격하려던 돌을 버리게 됩니다.
지혜로운 스승이 있었습니다. 학생들에게 물었습니다.
“죄인 줄 알고서 죄를 짓는 사람과 죄인 줄 모르고 죄를 짓는 사람이 있다. 어느 죄가 더 큰 죄이겠느냐?”
학생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했습니다.
“알면서도 지은 죄가 더 심각한 죄입니다.”
스승이 웃으며 말했습니다.
“알고 지은 죄는 죄인 줄 알기에 고칠 수가 있지만 죄인 줄 모르고 지은 죄는 죄인 줄 모르기에 고칠 수가 없다. 더 심각한 죄다.”

그렇습니다.
나는 이리안쟈안 식인종 마을에도 가본 적이 있습니다. 그들은 사람을 잡아 먹는 것이 죄인 줄 모르기에 계속 사람을 잡아 먹습니다. 아직도 그렇습니다.
죄인 줄 모르고 자꾸만 죄를 짓는 것이 더 심각한 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의식을 선물로 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이 죄의식을 선물로 주시면 남을 공격하는 돌을 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3. 떠나야 합니다.

죄의식을 느끼고, 돌을 버린 사람들은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복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도 않는다고 시편을 열자 말자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람들에게 죄의식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양심의 소리를 듣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죄의식의 소리, 양심의 소리를 들으면 죄의 자리를 떠나게 됩니다.
죄의식은 회개를 선물로 줍니다. 하나님은 회개에 민감한 사람을 쓰십니다. 하나님이 제일 미워하시는 것이 죄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 하더니."(롬 3;23)

우리는 죄의 정체를 알아야 합니다.
죄란 불과 같습니다. 그 사람의 인생을 태우고 망치게 됩니다.
죄란 녹과 같습니다. 그 사람을 아무런 쓸모없는 사람으로 부폐시킵니다.
죄란 마취제같습니다. 그 사람의 양심을 마취시켜 버립니다.
죄란 독과 같습니다. 그 사람을 병들어 죽게 합니다.
죄란 검은 구름과 같습니다. 지금은 아니지만 곧 비를 내리게 합니다. 
죄란 썩은 사과같 습니다. 겉으로는 먹음직하나 깨물면 씁니다.
죄란 함정과 같습니다. 한번 밟으면 떨어져 갇히게 됩니다.

죄란 화산과 같습니다. 언제 폭팔할지 모릅니다.
죄란 필림과 같습니다.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현상하게 되면 다 나타납니다.
죄란 마약과 같습니다. 한번 습관에 들면 고치기 어렵습니다.
죄란 빙산 일각과 같습니다. 드러난 부분보다 숨기고 있는 부분이 더 많습니다.

죄의식은 하나님이 주시는 최고의 선물입니다.
죄는 양심을 침묵하게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최고의 선물은 죄의식입니다. 왜냐하면 죄의식은 생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생명만큼 큰 선물은 없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죽이려던 자리를 떠났습니다. 모두 집으로 돌아가 자기 죄를 점검하였을 것입니다.
여인은 생명을 얻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여인에게 물으셨습니다.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사람들이 어기 있느냐?"
"주여! 없나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그렇습니다.
죄의식은 하나님이 주신 가장 큰 선물입니다.
죄의식은 생명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주일 설교에 죄에 대하여 강하게 설교를 하였습니다. 오후에 여 집사 한 분이 찾아와서 말했습니다.
“목사님. 오전 설교에서는 죄에 대하여 너무 솔직하게 말씀하셨어요. 우리 애들이 그 말씀을 듣고 교회 나오지 않겠다고 그러네요. 앞으로는 너무 그렇게 솔직하게 죄에 대해서는 말씀 안 하시면 좋겠어요.”
이런 충고를 듣고 있던 목사가 일어나더니 약들이 있는 곳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극약이라고 쓴 약병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집사님께서 저에게 말씀하시는 뜻을 잘 알겠습니다. 이 약병에서 ‘극약'이라고 쓴 딱지를 바꾸라는 말씀이지요. 제가 이 독약이 든 병에서 '극약'이라고 쓴 딱지를 떼버리고 '꿀'이라고 써 붙이면 좋을까요? 그리고 집사님 아들에게 주면 좋겠어요? 사람이 듣기 좋은 소리만 하는 것이 설교가 아닙니다. 영혼을 죽이는 설교는 설교가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죄의식은 하나님이 주신 최고의 선물입니다.

이런 이야기 하나 드리고 마치려고 합니다.
AP 연합통신은 40년간 죄책감으로 시달려온 어느 노인의 이야기를 보도한 적이 있습니다. 그 노인은 자기 죄를 고백하지 않으면 가슴이 터져 죽을 것만 같다고 하면서 자기 죄를 털어 놓았습니다.
그는 은행에서 평생을 근무하였습니다. 그리고 교묘한 방법으로 40년 동안 수 억을 몰래 빼돌려 왔습니다. 정말 교묘한 방법이었습니다. 자수하고 나서 그는 구속되었습니다.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재판할 때 판사 앞에서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제가 40년 동안 수없이 돈을 빼돌렸습니다. 그러나 40년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압박을 받았고 고통을 받았고 양심에 찔려 얼굴을 피지 못 하고 살아 왔습니다. 그러나 이제 고백하고 나니 평안하여졌습니다. 어떤 벌이든지 달게 받겠습니다. 이제 시원합니다.”

노인의 고백을 듣고 재판장은 무죄를 선포하였습니다.
“당신은 이미 벌을 받았습니다. 죄를 숨긴 댓가로 40년 동안 깊은 시름과 압박에 시달려 왔습니다. 그만한 죄의 댓가를 이미 받았기에 오늘은 무죄입니다.”
그렇습니다.
죄의식은 하나님이 주신 최고의 선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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