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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공의로운 세상을 만드실 이 (사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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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로운 세상을 만드실 이 (사 11:1-9)


이사야서 1장 1절에 보면 “유다 왕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하여 본 계시라.” 합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2-9절은 이사야 시대의 유다 백성이 처한 상황이 어떠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 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패역을 거듭하느냐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이거늘 그것을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부드럽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 

너희의 땅은 황폐하였고 너희의 성읍들은 불에 탔고 너희의 토지는 너희 목전에서 이방인에게 삼켜졌으며 이방인에게 파괴됨 같이 황폐하였고 딸 시온은 포도원의 망대 같이, 참외밭의 원두막 같이, 에워싸인 성읍 같이 겨우 남았도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생존자를 조금 남겨 두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 같고 고모라 같았으리로다.” 이것이 이사야 시대의 유다 백성의 현실적, 영적 상태였습니다. 이미 유다 왕조는 시들어 곧 베어질 나무처럼 기울어져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시대상황 속에서 이사야는 언젠가 유다 민족의 구원자가 나타나 공의로 다스리는 평화로운 세상을 이루게 될 날에 대한 예언을 받은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그것입니다. 본문 1절에서 이사야는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새는 다윗의 아버지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줄기”라 한 것은 베임을 당한 나무의 그루터기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새의 줄기”란 다윗 가문의 왕조가 문을 닫은 상태나 남왕국 유다의 멸망 상태를 가리키는 말일 것입니다. “한 싹”이란 유다 민족에게 희망을 주고 유다 왕국을 되살릴 구원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리라는 것은 유다 왕조가 쇠망한 상태에 놓일지라도 그 구원자가 다윗의 자손 가운데서 나오리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성전을 짓기 원했던 다윗에게 하나님께서 성전건축은 허락하지 않으시면서 하신 약속 즉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삼하7:16) 하신 약속이 실현되리라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스라엘 왕국의 역사에서 가장 훌륭한 왕이었고, 왕이 아니었던 그의 아버지 이새보다 비교도 할 수 없이 더 위대한 인물이었으며, 하나님의 마음에 가장 합한 사람이었을 뿐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삼하7:16)는 약속을 받은 사람입니다. 유다 왕조의 원조이고 누구보다도 유다지파를 대표할 만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런데 왜 “다윗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리라고 하지 않고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리라고 했을까 하는 의문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나라와 민족을 구한 걸출한 군왕이었던 다윗만큼이나 아니면 그보다 더 큰 인물로서 앞으로 나타날 구원자를 부각시키고 강조하기 위해 이새의 아들들 중에서 다윗이 나온 것처럼 다시 이새의 자손 중에서 다윗같은 나라와 민족의 구원자가 나오리라고 말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사야는 이어서 그 구원자가 어떤 사람일 것인지를 집중적으로 예언합니다. 본문 2-5절을 다시 봅니다: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그의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하지 아니하며 그의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하지 아니하며 공의로 가난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그의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그의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공의로 그의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그의 몸의 띠를 삼으리라.” 그 구원자는 지혜롭고 총명하며 지략과 능력과 지식이 풍부하리라는 것입니다. 

게다가 그의 지혜와 총명과 지략과 능력과 지식은 사람의 것이 아니고 성령의 충만함으로 인한 것입니다.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심으로써 그가 뛰어난 통티자가 되리라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진정 경외하는 사람일 것이고 백성을 다스리며 재판함에 있어 공평무사하게 할 것이고 언제나 공의와 정직과 성실함으로 하리라는 것입니다. 4절에서 “그의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리라 했는데 “그의 입의 막대기”란 공의와 정직과 성실로 백성을 다스릴 왕이 질서를 세우기 위해서 내리는 여러 가지 명령을 뜻합니다. 

공정한 법집행으로 세상을 다스리리라는 것입니다. 또 “그의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라” 했는데 “입술의 기운”은 범죄자들에 대한 판결을 가리킵니다. 권위 있는 판결로 악인들을 엄벌하리라는 것입니다. 5절에서는 “공의로 그의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그의 몸의 띠를 삼으리라.” 합니다. 두 번 반복된 “띠”라는 말은 어떤 행동을 하기 위한 능력과 준비태세를 상징하는 말입니다. 무슨 일이든 언제나 공의와 성실로 행할 수 있고 행할 준비가 되어있는 것은 왕의 탁월한 덕목이고 통치력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본문 2절과 3절 상반절에서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라” 한 것은 하나님과 그 구원자 사이의 완전하게 바른 관계가 설 것임을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서면 사람들과의 관계도 바로 서게 됩니다. 3절 하반절부터 5절까지에서 “그의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하지 아니하며 그의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하지 아니하며 공의로 가난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그의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그의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공의로 그의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그의 몸의 띠를 삼으리라” 한 것은 그 구원자와 백성 사이의 완벽하게 바른 관계가 이루어질 것임을 말한 것입니다. 정직하고 공의로우며 성실한 통치자에 의해 바르게 다스려짐으로써 백성간의 불신과 불만과 갈등이 사라지고 편안하고 평화로운 세상이 될 것임을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서고 사람들과의 관계도 바로 서면 나머지 관계 즉 사람과 하나님의 다른 모든 피조물과의 관계도 바로 서게 됩니다. 본문 6-8절은 사람을 비롯한 하나님의 창조세계 안에 실현될 조화롭고 평화로운 모습을 그림처럼 아름답게 묘사한 것입니다: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여기에 묘사된 광경은 불가능한 것 같이 보이던 세상이 이루어지는 것을 말하고, 화해할 수 없을 것 같던 세상이 화해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상상도 할 수 없던 공존과 상생과 평화가 실현되는 것을 뜻합니다. 모든 갈등과 적대심과 다툼이 사라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지막으로 본문 9절을 봅니다: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내 거룩한 산”이라 한 것은 시온 산을 가리키며 시온은 예루살렘을, 더 크게는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가리킵니다. “내 거룩한 산”은 더 나아가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하나님 앞에서 모두 모이는 곳이며 그들이 사는 온 세상을 의미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모두 모인 곳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바닷물처럼 충만해질 것이며 그로 인해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는 세상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그 말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충만하지 않은 세상에서는 하나님의 백성이 많은 해를 당하고 상함을 받을 수밖에 없음을 간접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일체의 해 됨이나 상함이 없다는 것은 아픔과 고통과 불안과 공포가 제거됨을 뜻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는 곳에서는 그런 것들이 일상적인 일이 될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단지 하나님에 대한 지적 인식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지식과 행동과 삶으로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바른 믿음의 삶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사야가 이러한 예언을 한 후 유다 왕국의 역사에서 그러한 구원자가 나왔습니까? 그가 예언한 그 완벽하게 공의롭고 평화로운 세상이 이루어졌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유다 왕국은 아주 망해버렸고 다시 회복되지 않았습니까? 그러면 이사야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계시와 예언의 말씀이 틀린 것입니까? 그 기대가 헛된 것입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이사야가 예언한 그 구원자는 다른 차원의 구원자였습니다. 그리고 그 구원자는 오셨으며 또 다시 오실 것입니다. 

이새의 아들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또 그가 만드실 세상은 이 세상과는 다른 세상입니다. 그가 구현할 세상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이미 왔으며 동시에 아직 오지 않은 세상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미 왔고 또 지금 오고 있으며 반드시 완성될 나라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가 왕이신 나라 곧 하나님의 나라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믿고 그를 통해 하나님을 바로 알고 섬기는 백성이 많아질수록 세상은 평화롭고 살기 좋은 세상이 될 것입니다.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때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라”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이 세상을 진정 공의롭고 평화로운 세상으로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의 오심을 고대하는 것이고 고대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지금으로부터 이천여 년 전에 이미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 사람과 모든 피조물이 화해와 조화와 평화 속에 사는 세상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통해 그 세상은 확실히 선포되었고, 이미 오기 시작했으며, 그를 믿는 모든 사람은 벌써 그런 세상을 소망 가운데 살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세상은 주님 다시 오시는 그날 완성될 것입니다. 그러한 믿음을 재확인하며 주님 다시 오실 그날을 기다리는 것이 대림절신앙인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대통령 선거를 사흘 앞두고 있습니다. 대통령 후보들의 공약을 들어보면 그들이야말로 이사야가 예언한 구원자 같고 그들이 만들겠다고 하는 나라는 바로 이사야를 통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세상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한편으로는 대통합을 외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같은 입으로 온갖 네거티브 전에 열을 올리는 것 보면 결코 믿을 수 없는 자들이라고 생각됩니다. 물론 국민으로서 조금이라도 더 정직하고 조금이라도 덜 비열한 사람을 대통령으로 뽑기는 해야 하겠지만 그들을 믿을 수는 없습니다. 정치인들이 내건 선거공약은 대부분 빌 공(空) 자 공약으로 그치고 만 것이 역사의 경험입니다. 우리가 믿을 이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만이 온 세상을 진정 공의롭고 평화로운 세상으로 만드실 수 있습니다. 그를 믿으며 그를 전하며 그 안에 소망을 두며 그의 오심을 기다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이수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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