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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무엇을 은혜라고 하는가? (마 2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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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은혜라고 하는가? (마 20:1-16)

오늘도 주님의 놀라운 은혜가 여러분과 함께 하기를 축원합니다. 

교회를 처음 나오신 분들은 세상에서 듣지 못한 단어들을 듣게 됩니다. 그래서 처음에 많이 어색하기도 합니다. 교회에서 일반적으로 많이 쓰는 단어들이 있습니다. 할렐루야, 아멘, 믿음, 은혜, 구원, 구속, 은총, 영광 등..... 

이런 단어들이 무슨 뜻인지 정확히는 모르지만 대충 감을 잡고 지냅니다. 할렐루야가 뭔가요? 처음 나온 분들은 몰라요.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아멘은? “나도 그렇습니다.” 뜻을 모르는 것이 많아요. 그러다가 서서히 하나하나 배우게 됩니다. 그중에 가장 많이 듣게 되는 단어가 ‘은혜’입니다.   

여러분! 이 “은혜”라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한국어 사전에 보면 은혜(恩惠)란 “사랑으로 베풀어 주는 신세나 혜택”이라고 정의했습니다. 헬라어 원어로 ‘카리스’라고 합니다. 이 ‘카리스’라는 말은 ‘값없이 주시는 선물’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조건이 없는 것입니다. 무조건적인 선물입니다. 그래서 좋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이 시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는 어떤 것일까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것을 은혜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것을 은혜라고 할까요? 오늘 본문에서 세 가지를 살펴보려 합니다. 
  

1. 이해되지 않는 질문의 답이 은혜입니다. 

본문을 보면 왜? 라고 하는 질문의 강하게 품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11~12절을 보세요. 

11 받은 후 집 주인을 원망하여 이르되 
12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을 종일 수고하며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먼저 온 일꾼들이 불만이 가득합니다. 왜 품삯을 이렇게 주느냐는 것입니다. 

왜 우리는 종일 뙤약볕에서 일했는데 오후 늦게 데려온 인부나 우리나 왜 똑같이 한 데나리온씩 주느냐는 것입니다. 불공평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침 일찍 들어온 일꾼이라면 불만을 터트리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엄격히 말하면 주인은 잘못한 것은 없습니다. 주인은 그들과 약속한대로 품삯을 주었을 뿐입니다. 나중 온 사람에게 후하게 준 것은 다 주인 맘입니다. 
그러기에 자기들이 왈가왈부할 사항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불평불만이 많은 것입니다.   

오늘 우리 시대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옛날 보다는 더 살 살고 있습니다. 더 좋은 집, 더 좋은 환경에서 살고 있습니다. 옛날 이맘때 연탄 때던 시절을 생각해 보세요. 밤마다 연탄 갈아야 하는데 얼마나 힘들었습니까? 빨래를 하려면 찬물에 손이 시럽고 그것을 짜서 널어야 하는데 실외에 두면 꽁꽁 어니 방안에 빨래줄 걸고 말릴 때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얼마나 좋습니까? 스위치 하나만 누르면 됩니다. 그래서 감사한데 그런데 남들이 누리는 것을 보니 나는 속상하고 억울하다는 것입니다. 

나도 죽으라고 노력했는데 왜 남들은 별로 노력도 안했는데 더 누리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속상하고 배가 아프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모습이 아닌가요?   

그런데 반대로 생각해 보세요. 늦게 와서 한시간 일하고 한 데나리온 받은 품꾼은 얼마나 기쁠까요? 그는 주인에게 얼마나 감사할까요? 
하루도 굶는 줄 알았는데 좋은 농장 주인을 만나서 횡재를 한 것입니다. 

그러니 이 사람들은 오히려 “왜 나에게는 이렇게 후하게 줄까? 하루벌어 하루먹는 이 사람 버리지 않고 한 시간 만이라도 써 주신 것도 감사한데 한 데나리온을 주다니, 왜 이런 은혜를 주셨을까?”그저 감사하지요. 그렇습니다. 이처럼 왜? 라는 의문이 자꾸만 생겨나는데 그 해답이 은혜입니다. 

미국 대학에서 교수로 일하는 김춘근 박사라고 있습니다. 
그가 쓴 책 중에 Why me? 라는 책이 있습니다. “왜 나입니까?”라는 것입니다. 

저자는 그 책에서 두 번의 Why me?라는 질문을 합니다. 그가 미국의 대학에 교수가 되겠다는 단돈 200불과 가방 셋을 갖고 미국에 왔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공부하여 동양인 최초로 미국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108:1의 경쟁을 물리치고 LA패퍼나인 대학교 교수가 되었습니다. 정말 대단한 사람입니다.

뿐만 아니라 2,000여명이 되는 교수 가운데 최우수 교수상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총장선출에 마지막 2인까지 후보의 물망에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갑작스레 간암선고를 받게 됩니다. 피를 토합니다. 그 때 김교수는 너무나 비통해서 “와이 미? 왜 하필이면 나입니까?”라는 질문을 합니다.

그런데 그 후에 하나님의 은혜로 기적적으로 완치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미국 알래스카 주립대학 교수로 스카웃되었습니다. 그리고 개교 이래 또 최우수 교수상을 또 수상합니다. 뿐만 아니라 10년 동안 주지사의 경제 특별고문으로 일하였습니다. 그 때문에 알레스카에 300%수출 증가를 이루도록 도와 주었습니다. 그래서 주정부로부터 “경제개발 특별공로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미주 한인 크리스천들과 함께 신앙을 다시 회복함으로 미국을 더 위대하게 만들라는 비전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JAMA라는 단체를 만듭니다. (Jesus Awakening Movement for America의 약자입니다. 그는 이 단체를 통해 예수 대각성 운동을 일으켜 많은 사람들이 신앙을 회복토록 합니다. 

이때 그는 또 한 번의 질문을 합니다. 수많은 사람 놔두고 하나님께서 왜 나를 쓰십니까? “와이 미?(Why me?), 왜 나입니까?” 묻습니다. 그런데 그 책에 결론은 바로 그것이 은혜라는 것입니다. 

왜? 라고 물을 수 있는 질문의 해답이 바로 은혜라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처럼 우리는 행위로는 영원히 버림받을 수밖에 없는 죄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택하여 주셨습니다. 왜죠? 

그뿐 아니라 성령으로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 얻게 해 주셨습니다. 왜죠? 
그래서 우리가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영생을 얻었습니다. 왜냐고요? 

답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성도 여러분! 
왜 우리가 이런 복을 누리지요? 그래서 필요한 말이 은혜입니다. 
다른 말을 할 수 없습니다. 사람의 공로가 아닙니다. 그러기에 은혜란 왜?라는 질문의 해답인 것입니다. 

성경을 읽다보면 수많은 질문들이 모두 은혜라는 말로 밖에 다른 말로 대답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하나님은 이삭의 아들 ‘에서’를 선택하지 않고 교활한 ‘야곱’을 선택하셨을까요? 은혜, 

왜 하나님은 소돔과 고모라에는 선지자 한 명 보내시지 않고 멸망시키시고, 니느웨 성은 요나를 보내어 모두 구원하셨을까요? 하나님의 은혜. 

왜 하나님은 불륜 관계에서 태어난 솔로몬에게 그렇게 탁월한 지혜를 허락하셨을까요? 그것도 하나님의 은혜. 

왜 하나님은 수많은 어부들 가운데 베드로를 선택하셔서 수제자로 삼으셨을까요? 이것도 은혜. 

왜 하나님은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한 사울을 택하셔서 최고의 선교사로 삼으셨을까? 왜 그랬을까요? 이것도 은혜입니다.   

사람의 논리로는 해답을 알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오로지 정답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기에 오늘의 우리도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많이 있는데 그 대답은 하나님의 은혜란 말 이외에는 설명할 수 없는 것입니다.   

타종교는 수고의 대가로 뭔가를 얻습니다. 
불교는 득도와 고행과 선행으로 열반에 들어간다 합니다. 

힌두교도 전생의 업보가 있기에 이 세상에 순응하고 착하게 살면 다음 세상에서 좋은 모습으로 태어난다 합니다. 대부분의 종교가 자기 노력만큼 대가를 받습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는 다릅니다. 모든 것이 은혜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은혜의 종교입니다. 우리를 창조하심도 은혜고 구속해 주신 것도 은혜고 태어나게 하신 것도 은혜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사는 것도 은혜고 물 한 방울, 공기 한 모금, 모든 것이 은혜 아닌 것이 어디 있습니까?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전15:10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했습니다. 

따라서 합시다. /나의 나됨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2. 자격 없음에도 누리는 것이 은혜입니다. 

우리는 구원받을 자격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원을 얻었습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세요. 우리 시간으로 새벽 6시에 와서 12시간 일한 사람, 아침 9시에 와서 9시간 일한 사람, 낮 12시에 와서 6시간 일한 사람, 오후 3시에 와서 3시간 일한 사람. 그리고 오후 5시에 와서 1시간만 일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일한 양이 차이가 남에도 불구하고 받은 품삯은 똑같습니다. 그러니 여러 사람이 자격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누렸습니다. 심지어 하루 종일 놀고, 겨우 한 시간 일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루 임금을 받았습니다. 

그러기에 여기 한시간 일한 일군은 품삯을 받은 것이 아니라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결국 자격이 모자람에도 불구하고 받은 것이 은혜입니다.  

요즘도 새벽에 인력시장이 섭니다. 그런데 일꾼으로 데려가는 사람은 몇 명안 됩니다. 체격이 좋지 않거나 기술이 없으면 아무도 안 데려 갑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하루를 공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쓰임을 받으면 이것이 은혜입니다. 그 은혜를 저와 여러분이 누리고 있습니다.   

어떤 선교사가 들려준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프리카에 어느 나라에 외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서 소를 키우며 목장 일을 하는 젊은 청년이 있었습니다. 아프리카 가난한 나라에서 해외 유학을 했다면 대단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최고의 신랑감입니다. 그런데 이 총각이 결혼을 하는데 그야말로 보잘 것 없고 천한 어느 시골 여인을 암소 아홉 마리를 주고 데려왔습니다. 그 나라에서는 청혼을 할 때 남자가 암소를 끌고 처녀의 집으로 가서 청혼하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일등 신붓감에게는 암소 세 마리, 괜찮은 신붓감에게는 암소 두 마리, 그리고 보통 신붓감이라면 암소 한 마리로도 결혼을 승낙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청년은 너무도 마르고 약해 보이고 초라한 여자에게 암소 아홉 마리를 가지고 청혼하였습니다. 사람들이 다들 미쳤다고 손가락질합니다. 
그런데 그 청년은 왜 그랬을까요? 그 여자를 어렸을 때부터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암소 아홉도 아깝지 않았습니다. 
놀라운 것은 그 여자가 결혼한 후 귀부인으로 변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녀는 그 남편의 은혜를 잊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나는 가치 있는 여자”라는 의식을 갖고 살았습니다. 그러다보니 언어도 행동도 변하여 나중에 그 나라에 귀부인이 되었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얼마의 가치가 있나요?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실 때 암소 아홉 마리가 아니라 천하를 주고 얻을 수 없는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요3:16절을 다 아시지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 보잘 것 없는 죄인들을 위해서 독생자까지 내어주셨습니다. 
그런데 그때가 어느 때입니까? 롬5:8절을 보세요.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아직 죄인 되었을 때입니다. 아무런 자격이 없었을 때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독생자를 믿게 하시고 그리고 하늘에 속한 은사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자녀로 삼아주셨습니다. 

참으로 과분하고 송구한 일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누린 구원이 은혜요. 우리가 받고 있는 사랑이 은혜입니다. 
  

3. 주님의 헤아리심이 은혜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세요. 13절을 보세요. 

13 주인이 그 중의 한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14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15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주인이 뭐라 하지요?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한마디로 내 것을 가지고 내 맘대로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의 마음, 주님의 뜻이 은혜란 말입니다.   

왜 포도원 주인은 한 시간 밖에 일하지 못한 사람에게 하루 종일 일한 사람과 동일하게 대우하셨을까요? 그것은 긍휼의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긍휼인가요? 당대에 한 데나리온은 한가정의 생활비였습니다. 

그런데 6시간 일했다고 반 데나리온을 준다거나 1시간 일했다고 1/12 데나리온을 준다면 그 가족은 굶어야 합니다. 그러기에 이것은 그가 한 일의 품삯을 준 것이 아니고 그의 가정의 삶을 보고 생활비를 준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을 은혜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대할 때 우리가 행한 대로만 대해 주신다면 그것은 은혜라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우리가 자격 없음에도 우리의 삶을 헤아리고, 우리의 형편을 헤아리고 베푸십니다. 그러기에 그것이 은혜입니다.  

제가 결혼 30주년이 되었습니다. 지난 30년을 돌아보면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졸은 아들 딸 그리고 막둥이까지 삼남매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좋은 교회, 좋은 성도를 주셨습니다. 그 어느 하나라도 은혜가 아닌 것이 없었습니다.  

아브라함도 보세요.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내셨습니다. 
그러면서 약속을 하십니다.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네 자손이 하늘의 별과 해변의 모래 같이 되게 하리라.”하셨습니다. 그가 주님께 뭔가를 해서가 아닙니다. 창세기를 자세히 보면 그는 처음부터 믿음이 좋은 사람이 아닙니다. 그가 애굽에 내려가 한짓을 보면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를 택하시고 언약을 맺으시고 일방적인 은혜를 주십니다. 

이렇게 주님이 주시는 은혜는 대체로 일방적인 은혜입니다. 
그런데 그 은혜는 헤아림의 은혜입니다. 이 헤아림의 은혜는 오늘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것입니다. 아멘?  

옛날 미국으로 끌려온 흑인 노예들이 부른 노래를 흑인영가라 합니다. 
그중에 이런 노래가사가 있습니다. “나는 신발을 신었네. 너도 신발을 신었네.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은 신발을 신었네.” 

이 노래는 그들이 신발을 선물 받아 신게 된 기쁨을 노래한 것이 아닙니다. 

원래 노예들은 신발을 신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그렇게 노래한 것은 예수 안에서 참된 자유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육신은 노예라 신발을 신지 못하나 성령의 은혜를 받고 보니 참으로 자유롭고 행복한 자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노래로 찬양을 한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구원받은 백성을 헤아리십니다. 그들의 삶을 헤아리십니다. 그들의 고통을 헤아리십니다. 

그래서 마11:28절 이하에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주님은 우리의 수고를 아십니다. 우리가 진 무거운 짐을 아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초청하십니다. “다 내게로 오라” 하십니다. 그리고는 쉬게 한다고 하시고 주님의 마음을 배우라 하십니다.   

문제는 그 은혜를 잊지 말고 감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미국의 한 심리학자가 특이한 실험을 했습니다. 어느 동네의 한구역을 택해서 집집마다 매일 100달러씩 갖다놓은 후 그 결과를 관찰하기로 한 것입니다. 

실험 첫날 사람들은 그가 미친 사람이 아닌가? 의아해하면서도 슬그머니 돈을 집어갔습니다. 사흘이 지나자 100달러씩 집 앞에 놓고 가는 사람 이야기로 동네가 떠들썩했습니다. 한주가 지나고 둘째 주 쯤 되자 현관 앞에 나와 돈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셋째 주 쯤 되자 돈을 받는 것을 아무도 이상해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넷째주가 되었을 때는 아주 당연한 것처럼 돈을 집어갔습니다. 

실험기간인 한 달이 지났습니다. 그때부터 학자는 돈을 집 앞에 놓지 않고 그냥 동네를 지나갔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매우 불쾌해 했습니다. “왜 오늘은 안 주고 가느냐?” 하며 뒤에 대고 불평까지 했답니다. 

실험의 결론은 사람들은 받은 은혜를 은혜로 알지 못하고 금방 잊는다는 것입니다. 이유 없이 베풀었던 은혜를 당연한 것처럼 생각하게 되고 고마워하기는커녕 오히려 주지 않는 것을 서운해 하고 불쾌해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바로 그런 모습을 보여주잖습니까? 애굽에서 해방되어 홍해를 건넜습니다. 얼마나 기뻐했겠습니까? 그런데 그들은 기뻐하지 않고 불평하고 원망합니다. 마실 물이 없다. 고기가 먹고 싶다.. 이런 저런 불평을 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그래서는 안됩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에게 있습니다. 이미 주어졌습니다. 그러기에 그 은혜를 헤아려야 합니다. 그러면 그 하나님의 헤아림의 은혜가 여러분에게 임하게 됩니다. 이 헤아림의 은혜가 깨달아지면 우리는 기쁨과 감사의 삶을 살게 됩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은혜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 은혜를 받으라 하십니다.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하셨습니다. (고후6:2) 

그렇습니다.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입니다. 

그런데 그 은혜가 뭔지를 몰라 은혜를 은혜로 여기지 못한 경우는 없었습니까? 
하나님의 주신 은혜를 경홀히 하거나 헛되이 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그 은혜는 왜라는 질문의 해답입니다. 그 은혜는 자격이 없음에도 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은혜는 한량없는 사랑에 기초한 헤아림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날마다 은혜를 주시고 있습니다. 
(최일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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